☞산행일자: 2023년 02월 05일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미세먼지 심함
☞산행거리: 도상거리17.2km / 8시간 55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봉두마을 버스정류장-봉두고개(실로암 요양원)-144.7m봉-김해김공 가족묘
142.4m봉-임도 삼거리-안부-조망바위-무명봉-292.9m봉-안부-국사봉
다시 292.9m봉-폐헬기장-창원정공&밀양박씨 묘-비포장 도로-갈림길
무명봉-도로-채석장 입구-수암 수양관-조망바위1-조망바위2-NO42 송전탑
조망바위3-수암산-거북바위 갈림길-안부-무명봉-나주임공 묘-도로-묘지
무명봉-297.3m봉-묘지-여수시립공원묘원-211.3m봉-연화고개-갈림길
안부-암봉-황새봉 갈림길-너럭바위-안부-황새봉-다시 황새봉 갈림길-묘지
봉두리 임도-306.3m봉-암봉-임도-민가-당집-276.2m봉-폐헬기장-293.8m봉
경주정씨 묘비-운암재-248.5m봉-안부-무명봉-갈림길-안부-278.5m봉
안부-안부-무명봉-전주이공 묘-안부-암봉-198.4m봉-안부-183.8m봉
NO43 송전탑-장골재
☞소 재 지: 전남 여수시 율촌면 / 소라면
지난번 1월말에 백두대간 길에 나섰다가 너무 추워서 고생을 많이하여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이번주에는 남아있는 지맥길 중에서 가장 기럭지가 긴 남도지방
여수지맥 4번째 구간을 나서기로 한다...그런데 당일 산행을 나설 경우에 날머리가
애매하고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이번 구간에는 무박 산행을 나서야 할 듯 싶다.
토요일날 저녁에 순천으로 가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순천역 버스터미널에서
봉두마을까지 가는 95번 첫 차를 타면 07시쯤이면 산행을 시작할 것 같다.
2월 4일이 봄이 시작된다는 立春이고, 일요일이 정월 대보름인데, 해마다 가는
정월 대보름에 절에가서 부모님의 위패를 예를 갖춰야 하는데 맘이 안 편하다
하는 수 없이 토요일에 절에 갔다가 순천으로 가기로 하는데 “사니조은”이라는
닉을 가진 후배 산꾼한테 전화가 온다.
산악회 카페에서 우연히 알게된 후배산꾼인데 산과 야생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신 산꾼으로 난 한번도 같이 산행을 해보지도 않았고 만난적도 없다.
순천에 오시면 들. 날머리까지 픽업을 해주겠단다...이 후배 산꾼은 수헌,
현오님과는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처음에는 조금 망설였으나, 후배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것 같아서 OK하고 고속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순천행 버스표
조금 일찍 사무실 문을 닫고 대충 베낭을 챙겨서 터미널에 도착하니 1시간정도
여유가 있어서 대합실 내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나니 30분정도
대합실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순천가는 버스에 오른다
19시 10분발 순천행 버스
늦은 시간에 버스를 타고 그냥 버스에 누워서 잠자리에 든다
차창밖을 보고 싶지만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어 무의미하다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밤 11시가 다 되어 순천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순천종합버스터미널(22:58)
순천버스터미널 앞에는 여관은 있지만 일찍 아침을 해결할 식당이
없어서 순천역을 가기로 하고 터미널앞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잠시후에 버스가 도착하고...
버스 탑승 후 서너 정류장을 지나서 순천역 서광장옆에서 내려 근처 여관으로 향한다.
여관으로 가니 숙박비를 40,000원이나 달라고 하는데 지금 이 시간에는
손님은 없을테고 난 내일 새벽 5시에 나갈 것이고, 현금으로 결재를 할테니
깍아 달라고 하니까 35,000원을 달라고 한다.
아침 5시반에 일어나서 순천역 앞의 식당에서 국밥 한그릇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있는데 사니조은 후배가 여수에서 출발을 한다고 톡이 온다.
식사를 끝내고 식당에 앉아 있으려니 눈치가 보여서 순천역 대합실로
가서 앉아 있으니 후배가 찾아와서 순천역에서 7시경에 출발하여 날머리인
봉두마을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순천역을 출발한 지 30여분만에 봉두마을 삼거리에 도착한다.
삼거리 맞은편에는 시골 교회치고는 꽤나 큰 규모의 충만한 교회
예배당이 보이는데 커다랗게 써있는 ‘오직 예수’라는 문구가 눈에 거슬린다
나처럼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어케 되는거야...다름을 인정합시다.
이 나라의 5000만 인구중에 기독교인은 15%도 안되는데...말입니다
봉두마을 버스 정류장(07:35)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에 있는 봉두마을은 앵무산의 열 두 산하를 거느린다는
새머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원래 새가 많이 날아들어 조촌(鳥村)이라 불리다가
마을 뒤 앵무산 봉우리가 마치 새머리 모양과 같다 하여 봉두(鳳頭)라 칭하였다고
하며 장흥위씨(長興 魏氏)가 입향조(入鄕祖: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각 성씨의 조상)로
장흥위씨가 봉황새 한마리가 푸드득하고 날아가는 것을 보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 집터는 아무리 눈이 많이와도 쌓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봉황이 알을 품고있어 따듯한
기운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흥위씨 영장공파 세좌비
고려 초에 대각관(大覺官) 위창주(魏菖珠)를 중조로 15세손 위덕룡(魏悳龍) 이래
능주파(綾州派)·관산파(冠山派)·행원파(杏園派)·여천파(麗川派)로 분파하게 된다.
여수의 장흥위씨는 행원파에 속한다
이 마을에 장흥위씨 입향조 위효징(魏孝徵)이 터를 잡아 현재의 종손까지 누대(屢代)로
살아온 ‘봉황포란지혈(鳳凰抱卵之血)’이라는 명당에 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중 상주영장(尙州營將) 위대경(魏大經)이 이순신 막하에서 순절하자 위대경의 부인인
전주최씨(全州崔氏)가 아들 위효징과 함께 고향 장흥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마을 옆을
지나가는데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어 알을 품고 있는 봉황을 발견하고 그곳에 집을 지어
살면서부터 장흥위씨가 번성했다는 것이다.
원래 이 마을은 1582년경 광산김씨(光山金氏) 김명운(金命韻)이 충청남도 연산에서
이곳으로 입향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봉두마을 옆 산수리에 중종 때
사화를 피해 17세손 위종로(魏宗魯)의 아들인 위용이 먼저 입향한 것으로 보아 위효징의
어머니 최씨는 친척인 이들을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위효징은 율촌면 산수리 봉두마을 광산김씨 입향조 김명운의 딸과 혼인하여 봉두마을에
정착했으며 봉두마을 위씨들은 17세손 위종복(魏宗復)의 차남인 위유정(魏由貞)의 후손이 된다.
산행을 시작하다(07:35)
순천역에서 이곳까지 태워준 후배산꾼과 유쾌한 이별을 한다.
산행이 끝나기 30분전에 전화를 주시면 날머리로 태워 오겠다고 하면서
후배는 여수로 향하고 난 산행을 시작한다.
비닐하우스 뒷쪽 능선이 지맥길이나 그냥 마을 도로를 따라서 간다
봉두고개(07:32)
산꾼들은 버스 정류장이 있는 삼거리를 봉두고개라 부르지만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이곳이 봉두고개라 표시되어 있고
고갯마루에는 실로암요양원이라는 건물이 자리를 잡고있는 곳이다
마루금에 복귀하여 앞에 보이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생전에 처음 와보는 이 곳의 산길이지만 그리 어색하다는 느낌은 들지않고,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설레임으로 인해 가슴이 쿵쾅거린다
논두렁을 지나서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올라서니 선답자인 무영객님의 시그널이 보인다.
시그널이 깨끗한 걸로봐서는 이곳을 지난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모양이다
송전탑을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드니 남녁지방이긴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추운 느낌이고 뚜꺼운 장갑을 끼었는데도 손이 상당히 시렵다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서니 넓은 개활지 공터에 잡풀만 무성하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가는데 이른 아침이라 상당히 춥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바닷가 근처인데도 바람이 불지 않아서 나름대로 걸을만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해는 뜨고... 조금만 견디면 기온이 오르고 산행을 할만하겠지
초반부터 만나는 희미한 등로는 오늘 산행이 쉽지 않음을 예고한다
144.7m봉(07:55)
내리막길 등로는 전혀 보이지 않고...우측으로 내려간다
제선충의 폐해가 심한 모양이다...소나무 무덤이 많이 보인다
등로가 보이지 않는 곳을 무대포로 잡목을 헤치면서 내려간다
갑자기 나타난 넓은 임도를 만났다가...
희미한 능선으로 치고 올라선 다음에 맥길을 이어간다
김해김공 가족묘(08:10)
김해김씨 가족묘를 지난 다음에...
또다시 능선으로 치고 오르는데 등로라곤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142.4m봉(08:13)
142.4m봉 좌측으로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나 맥길은 등로가 전혀없는 직진으로 향한다.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소나무 무덤 사이로 맥길을 더듬어서 내려간다
내리막길에는 후손들이 돌보지 않았는지 봉분이 훼손된 묘지를 만난다
임도 삼거리(08:18)
맥길을 좌측으로 이어지는데 앞으로 걸어야할 산길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산에 들어오면 늘 새로운 길이 궁금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안부(08:23)
좌측으로 이어지는 맥길
조금씩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뚜렸한 임도를 따라서 가다가...
뚜렸한 직진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오르막길을 따라서 올라간다
난생 처음 걸어보는 여수의 산길...여태껏 살아오면서 내 삶의
빈 공간을 나홀로 걸어면서 조금씩 채워가는 이 맛도 쏠쏠하다
흐릿한 등로를 따라서 고도를 높히는데...이경일님의 빛바랜 응원 메시지가 산꾼을 격려한다
다시 등로는 희미하지만 묵묵히 걷고, 또 걸으면서 오르막으로 향한다
본격적인 苦行길이 시작될 모양이다...등로도 잘 안보이고 잡목의 저항도
거칠어지면서 등로에 있는 잡목들이 베낭을 잡아 당기는 바람에 산행 속도가 지연된다
빡세게 한달음 치고 오른 다음에 능선에서 숨을 한번 고르고...
잠시 편안길을 걸어가다가...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조망바위(08:47)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순천시 해룡면 가장리의 모습
무명봉(08:50)
갈수록 등로는 거칠어지기 시작하는구나.
그래!...내가 좋아서 시작한 지맥길...길이 험하다고 불평하고
힘들다고 못가겠다면 맥꾼이 아니제...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지 우짜겠노.
머리좋은 좋은 자가 노력하는 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가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즐기면서 걷자구나
292.9m봉(08:58)
이곳에서 지맥길은 우측으로 확 꺽어져 내리막길로 향하고
좌측으로 살짝 방향을 틀어서 조그만 가면 족보가 있는 국사봉이
있어서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국사봉으로 향한다
맞은편 나뭇가지 사이로 국사봉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국사봉 가는 길
안부(09:01)
국사봉( 國師峰:290.0m:09:04)
여수시 율촌면 취적리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 3등 삼각점과 준.희 선생의
산패가 있으나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산인지 원시림을 방불케하는 산이다.
지명 유래에 대한 자료는 없으나, 전국에 수도 없이 많은 국사봉의 유래와
같이 않을까하는 것이 산꾼 범여의 생각이다.
여수시 율촌면 중앙부에 우뚝 솟아 있으며, 북동쪽 사면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남동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화성암인 중성화산암류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부에는 기반암이 노출되어 있다.
국사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산 동쪽에 있는 취적저수지로 유입되어 율촌면 취적리
일대의 농업용수로 이용되며, 조선 후기에는 이곳 국사봉과 근처 수암산(水岩山)
언저리에 백자 도요지들이 있었다고 한다.
인증샷
국사봉 정상 3등 삼각점(△광양307 / 1996복구)
국사봉에서 만난 선답자들의 흔적
다시 292.9m봉(09:12)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등로의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남녘지방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동백나무를 많이 만난다.
내리막 등로는 지나온 길과는 달리 생각보다 뚜렸하다
폐헬기장(09:19)
선답자의 시그널을 바라보면서 내려서는데...오늘 걸어야 할 여수지맥의
未知가 궁금하기도 하고 약간의 두려움이 있긴 하지만, 산이란 곳은
變數가 많이 수반되는 곳이지만 그래도 묵묵히 걸어가야지...
갑자기 등로는 사라지고 잡목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하고 한동안 버벅 거린다
트랙상으로는 분명히 지맥길이건만 등로는 보이지 않고...
무대포로 내려오니 백두사랑 이대장의 흔적이 보이며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너럭바위가 나오고...
창원정공&밀양박씨 묘(09:27)
또다른 묘지가 나오고 곧이어 채석장으로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도로가 나온다
비포장 도로(09:28)
여수시 율촌면 취적리에서 가장리 중산마을로 이어지는 비포장
도로로 중산마을 방향으로는 골재를 채취하는 채석장이 있다.
비포장 도로에서 바라본 여수시 율촌면 취적리(吹笛里)의 모습
취적리(吹笛里)는 취적1구와 취적2구로 나뉜는데 취적1구는 상취적과 하취적 마을로
나뉘어져 있으며, 취적리의 마을 이름은 마을 뒷산인 대통산에서 유래하는데, ‘대통’은
‘대나무 통’을 뜻하는 말로 이를 한자로 ‘적대산’이라 기록하였다.
적대는 피리를 뜻하는 말이어서, 피리를 분다는 뜻의 ‘취적’이 마을 이름이 되었는데
1789년의 『호구총수』 기록에도 ‘취적산’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산 이름에서 유래된 것을 알 수가 있다.
취적2구 마을 중 하나인 봉정마을은 ‘불무골’로 불리던 곳이었으나, 1897년 여수군이
신설되면서 봉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봉정이란 이름은 가느다란 목을 뜻하는
말인 ‘쇠징’이라는 땅이름을 ‘새 봉(鳳)’ 자와 ‘머무를 정(停)’자로 표기하여 ‘봉정(鳳停)’이란
이름이 된 것이라고 한다.
도로를 가로 질러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초반의 오름길에는 뚜렸한 임도가 보이고...
오름길에서 만난 백두사랑산악회 이 대장의 흔적.
이 친구가 지나갔으면 확실한 지맥길이 맞을 것이다
워낙 완벽한 친구인지라...절대적인 믿음이 간다
암릉 지대를 지나고...
갈림길(09:40)
좌측의 뚜렸한 임도로 가면 채석장 윗쪽에 있는 371.7m봉으로
가는 길이고 맥길은 이곳에서 직진의 등로가 없는 곳으로 이어진다
무명봉(09:43)
대부분의 맥꾼들은 이곳으로 오질 않았는지 빨간 리본만 하나 걸려있고
아무런 표식이 없는 무명봉이다
우측으로 꺽어져서 내려 가는데...
등로는 아예없고 내가 길을 만들어서 가는데 나무가지에 얻어 맞아
얼굴에 피가 나는데... 내가 뭔 지랄인지 모르겠다
트랙상의 지도만 쳐다보면서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졌던 도로로 내려선다
도로(09:53)
바로앞에 보이는 취적리 쪽의 저 도로에서 이곳까지 20여m밖에 안되는 거리이다.
그냥 무시하고 도로로 왔으면 개고생도 안하고 1분이만 올 길을
괜스레 올라가서 개고생을 하면서 피만 보고 25분이란 시간을 허비했다.
채석장 입구(09:54)
채석장 입구에서 맥길은 우측으로 꺽어진다
잠시후에 오를 수암산을 바라보면서 도로를 따라서 간다
수암 수양관(09:55)
수암수양관은 망해버렸는지 廢家처럼 보인다
수암 수양관에서 도로를 따라서 조금을 가니 트랙상 우측으로
지맥길 표시를 하고, 선답자들의 띠지 서너개가 걸려 있다
원칙대로 걷고 싶어서 무작정 능선으로 올라서니...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고 잡목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다
이리저리 헤매면서 올라서니 너럭바위처럼 생긴 조망바위가 나온다
조망바위1(10:10)
조망바위 옆에 韓蜂 벌통이 하나 있는데 겨울이라서 그런지 벌은 안 보인다
조금전에 지나온 국사봉쪽 능선의 모습
집에와서 다른 산꾼들의 산행기를 보니 저 봉우리를 올라간
산꾼들이 全無하더라...이곳을 오면서 공부를 안하고 온
댓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근데 이게 뭐여!...조망바위 옆으로 나오니 수암산으로 올라가는 고속도로가 있네그려
한전에서 송전탑을 설치하면서 만든 임도인지 수암산 오르는 길은 좋아도 너무 좋다
조망바위에 올라서면서 아침에 지나온 국사봉 능선을 뒤돌아 본다
조망바위2(10:15)
저 멀리 오늘 걸어야 할 황새봉이 까칠하게 보인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채석장 윗쪽에 있는 371.1m봉...맥길에서 벗어나 있는 봉우리다
수암산 아래에 있는 송전탑을 바라보면서 고도를 높혀간다
NO42 송전탑(10:19)
수암산 오름길은 아기자기한 암릉들이 많이 보인다
코로나로 인한 pandemic 영향 탓인지 꽤나 알려진 수암산으로
오르는 길에 등산객은 고사하고 개미새끼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구나.
흔히 산은 자기 자신을 뒤돌아 보면서 반성하는 거울과 같은 곳으로
우리가 죽어서 사후세계에서 염라대왕 앞에서 심판을 받을때
염라대왕 앞에서 서야하는 죄인의 업을 비쳐 나타낸다고 하는
거울이라는 업경대(業鏡臺)라고나 할까
조망바위3(10:22)
묘지를 지나서 수암산 정상으로 올라서니...
뚜렸이 보여야 할 광양만은 미세먼지로 인하여 마치 사진을
찍을 때 아웃포커싱을 처리한 느낌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수암산 정상으로 올라서니 산불감시CCTV가 산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느낌이다
멋진 암릉이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가니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근무자는 핸드폰의
유투브에 푹 빠졌는지 내가 초소문을 두둘길 때 까지 스마트폰을 보느라고 정신이 없다.
커피 한잔이 먹고 싶어서 따뜻한 물이 있으면 좀 달라고하니 일언지하에 없다고 거절한다
수암산(水岩山-壽岩山:371.5m:10:25)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멋진 암릉과 CCTV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정상에는 넓은 공터로 조성되어 있고, 온 사방을 다 조망할 수 있는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나 오늘은 미세먼지 탓인지 모든게 흐릿하게만 보인다
율촌면의 중앙에 있는 산으로, 자세한 명칭유래는 알 수 없으나, 산정상부에 있는 투구봉
바위와 관계된 지명으로 추정되는데, 산의 정상인 투구봉은 임진왜란 당시 죽암산성(투구성터)에서
왜군과 전투가 있었는데, 이 바위의 모양이 장수들이 쓰는 투구와 비슷하게 보인다.
왜군은 저렇게 큰 투구를 쓰는 장수가 있다면 큰 거인으로 힘이 장사일 것이라고 생각해 모든
전투력을 투구봉으로 집중시킴으로써 전력이 소모되었고, 아군의 반격에 크게 패해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투구봉 아래에는 죽암산성이 있는데,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길이는 약 250m이고,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약 1.5m, 폭 2m 정도이고, 연화천이 이 산에서 발원하며, 주변에는 특별한
오염원이 없어 수암산에서 연화천으로 유입되는 지류의 수질은 1급수에 가까우며, 산 전체의
경사가 가파르며,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화성암인 산성화산암류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요 식생은
소나무를 비롯하여 떡갈나무 등 참나무과 나무들이 주로 자라고 있다
지난달인 1월 15일에 걸었던 곡고산과 앵무산이 약간 흐릿하게 보인다
조금전에 지나온 국사봉 너머로 광양만도 흐릿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수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순천시의 모습
다시 왔던길을 되돌아 간다
수암산의 유래가 되었다는 투구바위의 모습
이 바위가 장수들이 쓰는 투구와 비슷하다 하여 수암산을 투구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는 바위이다
수암산 아래로 내려서는데 족보가 있는 산에 비해서
등산객들이 그리 많지 않은지 내려가는 길은 흐릿하다
무성한 잡풀이 등로를 덮어버려 길이 보이질 않는다.
이곳 수암산(水岩山/壽岩山)에 있는 돌로 쌓은 죽암산성(竹岩山城)이 있었다는데
내가 보질 못했는지 잡풀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죽암산성은 문헌상의 기록이 없어 축조연대를 알 수 없으나 산 정상부에 투구봉과
거북바위가 있는데 이 두 바위를 중심으로 성의 동벽·서벽·북벽이 붕괴한 채로 남아 있다.
총 길이 약 250m이고,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 약 1.5m, 폭 약 2m로 임진왜란 당시 산성에서
왜군과 전투를 하였는데 산 정상에 있는 바위의 모양이 장수들이 쓰는 투구와 비슷하다
하여 투구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거북바위 갈림길(10:32)
지맥길의 우측에 멋진 거북바위가 있으나 귀경시간이 우찌될 지
몰라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좌측의 사면길로 향한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371.7m봉 아래에 있는 채석장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율촌면 상봉리에 있는 채양산이 멋진 모습으로 다가오다
사면길로 내려가는데 망개나무(청미래 )군락지가 보인다.
여름철 이곳 지맥길은 상당히 힘이들 것 같은 느낌이다
하산길에서 바라본 거북바위의 모습
사면길에서 급하게 내려서니...
묘터같은 흔적이 보이고...
내려왔던 길을 뒤돌아보니 거북바위가 멋진 모습으로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여인과 산은 멀리서 봐야 이쁜 모양이다...저길 가봐야 했었는데 약간은 후회스럽다.
안부(10:38)
수암산에서 시작된 급경사의 내리막길은 다 내려온 느낌이다
무명봉(10:40)
무명봉에서 더 내려서니 묘지가 나온다
나주임공 묘(10:42)
묘지를 지나서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수암수양관에서 오는 도로를 다시 만난다
도로(10:45)
도로 우측 아래로는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 중산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중산마을에는 청동기시대 무덤군이 있는 마을인데 중산마을에 있는 이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돌무덤으로 고인돌 상석은 대부분 무덤의 봉분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으나, 어떤 집단의 공동 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또는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 또는 기념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며, 여수 지역의 고인돌은 남방식
고인돌이 변화된 것으로, 넓고 판판한 1매의 상석을 지석이 받치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도로를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가는데 지독한 잡목의 저항이 시작되는
곳에 반가운 선답자들의 시그널을 만난다
지독한 잡목의 저항을 헤치고 올라서니...
좌측에서 올라오는 좋은 길이 나오는데 아마도 묘지로 올라오는 길인듯 하다
묘지(10:50)
묘지 뒷쪽으로 올라서면서 또 다시 등로는 사라지고 지독한 잡목의 저항이 시작된다
여수지맥이 부리는 꼬라지는 아마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타의 추정을 불허하는 느낌이다
대단하십니다!...존경합니다
가도가도 끝이없는 지독한 잡목들의 강력한 태클
10년을 넘게 지맥길을 걸었지만 이런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몸서리치게 진절머리 났던 고흥지맥 못지않은 힘든 길이다
망개나무(청미래)에다 키작은 진달래 등...태클을 거는 넘도 가지가지다
무명봉(11:02)
트랙상으로는 분명히 지맥길인데 등로는 보이지 않고 미칠것만 같구나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니...
잠시후에 오를 297.3m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또다시 등로는 사라지고...
고생끝에 낙이라 했던가?...조금씩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우측에 보이는 봉우리는 지맥길과는 관련없는 씨잘데없는 봉우리다.
희미한 등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송전탑이 있는지
한전에서 걸어논 산불조심이란 빨간 리본이 많이 걸려있다
이런 등로는 이곳에서는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다
아니 이게 누구여!...297.3m봉에서 빛바랜 권작가(현오)님의 흔적을 만나는데
무지 반갑구먼...잘살고 있는지 안부가 궁금하다
297.3m봉(11:17)
동백나무 한그루를 지나면서 등로가 조금씩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또다시 강력한 잡목의 저항을 이겨낸 다음에 한전에서 관리하는(?)
뚜렸한 직진의 임도를 버리고 등로가 전혀 안 보이는 좌측으로 꺽어진다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은 곳에 간간히 만나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을 그저 고맙기만 하다
꽃이 피지않은 동백나무를 헤치고 내려서니 묘지가 나온다.
묘지(11:22)
묘지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
희미한 등로로 내려서니...
갑자기 나타나는 여수시립공원묘원...망자들의 천년주택단지(묘지)의 규모가 엄청나다
저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잠시후에 빡세게 올라가야 할 황새봉이 기를 죽인다
공원묘지 아래로 내려서지 않고 공원묘지 윗쪽의 우측 능선을 따라서 간다
묘지로 내려서면서 만난 예수상
예수는 나의 교주가 아니고, 내 전공이 아니라 두 손을 들고있는
저 모습은 뭔 뜻인지 알 길이 없다.
여수시립공원묘원(11:32~50)
산에서 묘지로 내려선 다음에 이곳에서 망자의 밥상을 빌려서 우유와 빵 하나로
점심을 대신하고 양지 바른곳 잔디에서 베낭을 베개삼아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묘지에서 일어나 몸을 추수린 다음에 묘지 옆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다시 길을 나서는데, 이곳은 천주교인들의 묘지인지 묘비에는 대부분의 카톨릭
세례명이 적혀있는데 죽은 자들은 말이 없구나.
한 세상와서 살다가는건 잠깐이고 아무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왜 그리도
아둥바둥 모질게 살아가는지...나도 그런 삶을 살지 않나하는 뒤돌아 보는
계기가 된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 김소엽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쉼표
남은 자들에겐
끝없는 물음표
그리고 의미하나
땅 위에 떨어집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따옴표 하나
이제 내게 남겨진 일이란
부끄러움 없이
당신을 해후할
느낌표만 남았습니다
마지막 묘비를 지나고...
뒤돌아 본 여수공원묘원
맨 뒷쪽에는 수암산이고, 바로 뒷쪽이 개고생을 하면서 오른 292.7m봉이다
다시 산으로 들어선다
묘지를 벗어나자 말자 211.3m봉이 나온다
211.3m봉(11:56)
내리막길 등로에는 남도지방 산길에서 자주 만나는 마삭줄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서 계속되는 내리막길
무명 묘지를 지나...
뚜렸한 등로로 내려서니 연화고개가 나온다
연화고개(蓮花峴:189m:12:02)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와 소라면 봉두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여수공설묘지로
들어가는 삼거리에 있는 고개로 지명은 가장리에 있는 연화마을 위에 있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인 모양인데 가장리(佳長里)의 지명은 ‘임시 매장(埋葬)을 한
지역’이란 뜻으로 풍장(風葬)의 관습이 있던 지역에서 임시 매장을 한 지역을 뜻하는데
가장리에는 고려장 풍습이 행해지던 터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걸로 봐서
공동묘지가 들어설 자리인 듯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佛家에서의 연화(蓮花)는 지저분한 연못에서도 청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모습이
사바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다 하여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며, 무명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성취되는 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부처님이 탄생하여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을 때 땅에서 연꽃이 솟아올라 태자를 받들었기
때문에 부처의 탄생을 상징하기도 하고, 혹은 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을 상징하기도 한다.
불교공예품이나 조각품의 장엄장식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길상문양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는데, 연뿌리와 연꽃 줄기가 서로 얽혀있는 것은 형제애를, 열매와 씨앗은 자식을 많이
갖기를 희망하는 유교적인 관념과 관련이 있기 때문인데 이 고개의 지명이 불가에서의 연화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 풍장(風葬)은 시체를 지상에 노출시켜 자연히 소멸시키는 장례법 또는 사체의 처리방법을
지칭하는 용어인데, 장법(葬法)으로 세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것은 토장(土葬)·화장(火葬)·
수장(水葬)·수상장(樹上葬)·조장(鳥葬) 등이 있는데, 풍장도 옛날부터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사체처리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풍장은 사체를 지상이나 나무 위,
암반 등과 같은 자연상태에 유기하여 비바람을 맞아 부패되게 하여 자연적으로 소멸시킨다는 데
특징이 있다.
연화고개 삼거리에서 여수 덕암방향으로 간 다음에...
우측의 시멘트 도로로 올라간다
갈림길(12:04)
연화고개에서 올라서자 마자 S자로 굽어지는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직진의 비포장 도로 방향으로 향한다
비포장 도로를 따라서 100여m 정도 가다가 뚜렸한 직진 임도를 버리고 직진으로 올라간다
급경사의 빡센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등로 좌측으로는 편백나무 조림지가 보인다.
연화고개에서 황새봉까지 아주 짧은 급경사의 구간인 곳에서 200m 이상을
빡세게 치고 올라가야 하는 구간이라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이럴때에
내 몸뚱아리에서 어김없이 수반되는수술 부위의 통증은 매주 산을 걸어야 하는
산꾼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갈림길이 나오고 지맥길은 좌측의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빡센 오름길을 오르는데 조금전 묘지에서 차가운 빵쪼가리에다 우유 하나로
점심을 해결했는데 아마 그것이 문제가 됐는지 배가 아프면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면서 식은 땀이 흐르고 발걸음이 자꾸만 느려지기 시작한다
편백나무 조림지가 있는 빡센 오르막을 힘들게 올라와서 능선에서 숨한번 들이키고 황새봉으로 향한다
잠깐이지만 여유로운 길을 걷다가...
다시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오르막 능선의 등로 우측의 나무가지 사이로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 연화저수지가 보인다
가장리(佳長里)의 동쪽은 국사봉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 난화천이 흘러가며,
자연마을로는 가장, 송정, 중산 등이 있는데, 가장은 오곡이 풍부하고 수목이 좋아 아름답고,
봉두재를 넘어 상봉재 밑까지 길게 뻗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가장이라 불린다.
송정마을은 뒷산에 소나무가 많고 마을 앞 나무 밑에 샘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식수로 사용되고
빨래도 했다 하여 송정이라고 하며, 중산은 산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산이라 불린다.
가장리는 문화유씨 사당인 송산사가 1964년에 건립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백자를
구웠던 도요지가 전해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진 않았다고 한다.
안부(12:50)
우측 사면으로는 가장리로 이어지는 흐릿한 사면 등로가 보이나 맥길은 직진으로 향한다
이곳의 맥길도 예외없이 지독한 잡목들이 꼬라지를 부리기 시작한다
암봉(12:52)
암봉을 올라서니 등로가 거의 보이지 않은 황새봉 갈림길이 나온다
황새봉 갈림길(12:55)
황새봉에서 지맥길은 우측 아래로 꺽어져 내려가지만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스틱만 가지고 황새봉으로 향한다
너럭바위(12:56)
안부(12:57)
황새봉으로 오르는 등로에도 잡목의 저항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는구나.
황새봉 오르는 능선에서 뒤돌아보니 지난 1월에 3구간에 걸었던 곡고산과 앵무산이 보이고
우측의 나뭇가지 뒷쪽으로는 아침에 걸었던 국사봉과 수암산, 여수공원묘지도 보이는구나
황새봉(鸚鳥山:393.6m:13:02)
여수시 소라면 봉두리와 율촌면 가장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행 지도에는 황새봉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자세한 명칭유래는 알 수 없으나, 산의 모양이 황새와 비슷하다 하여
황새봉이라고도 하는데, 두산백과사전과 항토문화대전에는 황새봉이 아닌 앵조산(鸚鳥山)
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황새봉은 대포천과 연화천의 발원지이며, 산 중턱에는 임진왜란 때 피난했던 곳이라 전해지는
금대굴이 있고 산의 북쪽에는 여수시립공원묘지와 연화저수지가 있으며, 교통은 남해고속도로
순천나들목에서 여수방면 국도 17호선이 소라면 대포리에서 지방도 11호선과 산 아래까지 이어져
있으며, 이 외에도 산의 오른쪽으로는 대포리 삼거리~여수시립공원묘지 간의 시도(市道)가 지나고 있고,
정상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산에 1등 삼각점이 있는게 특이하다
황새봉 정상에 있는 1등 삼각점(△광양11 / 1991복구)
인증샷
황새봉 갈림길가는 길에서 바라본 여수시 율촌면 반월리(半月里 )와 반월 저수지의 모습
반월리는 남쪽으로 바다에 접해 있으며 동쪽은 황새봉으로부터 이어진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대부분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고, 반월저수지가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반월, 내리 등이 있다.
반월은 반월리의 본 마을로 마을 뒤에 안개가 낄 때 앞바다에서 보면 반달같이 보인다 하여
운중반월(雲中半月)이라고도 하였으며 바닷물이 만수가 되었을 때 지형이 반달모양 같다 하여
반월이라 불리며, 내리는 원래는 마을 형세가 고동같이 생겼다 하여 나리(螺里)라 하였으나 마을
남쪽에는 반월이 있고 서쪽에는 봉전이 있어 골 깊숙히 안에 있다 하여 내리(內里)라 불리게 되었다.
아무래도 몸뚱아리의 이상 신호가 생기기 시작하는지 자꾸만 식은 땀이 나기 시작한다
다시 황새봉 갈림길(13:06~08)
베낭을 벗어놓은 갈림길에 도착하여 베낭속에서 소화재 한 알과
물 한모금을 마시면서 몸을 추스린다
잘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에서 만나는 선답자의 흔적이 그저 반갑기만 하다
희미한 내리막길을 내려섰다가 사면길 등로를 따라서 좌측으로 향한다.
맥길을 걸으면서 산길을 豫斷한다는 건 절대 禁物이라는 걸 터득했다.
댐이나 도로등이 개발된 곳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변경된 곳을 빼놓고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칙을 절대로 벗어나는 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산을 걸으면서 늘 느끼는 감정은 山經表를 저술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1712~1782)을 비롯한 우리 선조들의 慧眼에 탄복이 절로 나온다.
* 산경표(山經表)는 1책, 필사본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이 저자로 알려져 있다.
1개의 대간과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 등으로 조선의 산줄기를 분류했는데, 지금의 분류 체계와는
다르며 15개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장백정간·낙남정맥·청북정맥·청남정맥·해서정맥·임진북예성남정맥·
한북정맥·낙동정맥·한남금북정맥·한남정맥·금북정맥·금남호남정맥·금남정맥·호남정맥 등이다.
산지 분류가 강의 수계를 기준으로 되어 있고 국토 전체가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백두산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점 등 선조들의 자연에 대한 인식 체계를 보여준다. 도리표 등을 함께
수록한 본도 있으며, 제목이 <산리고>·<여지편람>·<기봉방역지> 등 다르게 된 것도 있으며,
1913년 조선광문회에서 간행하여 널리 알려졌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13:14)
묘지를 지나서 완만한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갑자기 사라진 지맥길 능선...나무가지 사이로 306.3m봉이 보인다
잡목구간을 헤치면서 내려서니...
전주이공 묘지가 나온다
봉두리 임도(13:20)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여수시 소라면 봉두리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오고 지맥길은 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가야 한다.
여수시 소라면에 속하는 법정리인 봉두리(鳳頭里)는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이
길지(吉地)로 알려진 황새봉과 연결되어 있고, 황새봉의 머리에 해당되어 봉두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본래 여천군 구산면 지역으로서 비봉산 머리쪽이 되므로 봉두 또는
봉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백수·당촌·풍곡리와 덕안면의 의곡·
금대·운암리를 병합하여 봉두리라 하여 소라면에 편입되었고, 1998년 4월 1일 여천군·
여천시·여수시의 통합으로 새로운 여수시 소라면이 되었다.
봉두리 중서부에 황새봉이 있으며, 갑의산·옥녀봉 사이에 형성된 들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북쪽 상의곡마을로부터 이어지는 봉두천은 대포리에서 대포저수지로 흐른 뒤 소라천이 되어
화치동 사이의 바다로 흘러든다.
봉두리 임도옆에 있는 전주이공 묘지
임도를 가로질러 능선을 치고 오른다
보이지 않는 등로를 따라서 잡목을 헤치면서 묵묵히 땅만 쳐다보고 오르고 또 오른다.
佛家에서는 이런걸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조고(照顧)’는 제대로 보는 것이나 반성하는 것을, ‘각하(脚下)’는 발밑, 자기 자신을 뜻한다.
따라서 조고각하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의 과거 언행을 돌이켜 봐야 함. 또는 가깝고 친한
사람일수록 보다 신경을 쓰고 조심해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각하조고(脚下照顧)’라고도 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의미로, 밖에서 깨달음을 구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구하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또한 각자 자기 발밑을 살펴보아 신발 벗은 자리를 정갈히 하라는 뜻으로 신발을
신고 벗는 곳에 조고각하를 써두기도 한다.
조고각하는 ‘삼불야화(三佛夜話)’란 불교 선종(禪宗)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송나라 때 선사(禪師, 선종의 법리에 통달한 승려)였던 오조법연(五祖法演)에게는 뛰어난
제자 셋이 있었는데, 불감혜근(佛鑑慧懃), 불안청원(佛眼淸遠), 불과원오(佛果圓悟) 이 세 제자를
사람들은 ‘삼불(三佛)’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오조법연 선사는 세 명의 제자와 밤길을 걷고 있었다. 들고 있던 등불이 갑자기 꺼지자
선사는 제자들에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불감혜근은 ‘채색 바람이 붉게
물든 노을에 춤춘다(彩風舞丹霄).’라고, 불안청원(佛眼淸遠)은 ‘쇠 뱀이 옛길을 건너가네(鐵蛇橫古路).’라고
답했고, 마지막으로 불과원오는 ‘발밑을 보라(照顧脚下).’라고 대답했다.
이후 불과원오가 답했던 조고각하는 불가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살펴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는
수행 규칙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아직 피지도 않은 진달래꽃 나무들이 베낭을 잡아 당기면서 태클을 걸어되지만
그렇다고 안 갈 내가 아니다...힘들게 능선으로 오르다보니 306.3m봉에 도착한다
306.3m봉(13:35)
직진 능선을 따라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대단하십니다!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암봉(13:40)
늘 나홀로 걷는 지맥길...집에 가족들은 걱정이 태산같지만 나는 너무 즐겁다.
한번도 와보지 않고, 이후에 내 생애에 다시 못올 이 호젓한 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喜悅...물론 산길을 걷다보면 어떠한 변수가 일어날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좋은 걸 어떡하냐...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가는데...
오르막길이 아닌 내리막길에 이경일님의 격려문구가 나홀로 걷는 산꾼을 반긴다.
조금을 더 내려서니 얼마전에 헤어진 봉두리 임도로 내려선다
임도(13:50)
시멘트 도로가 지맥길이다
지맥길을 따라서 가다가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걸려있는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송전탑이 나오고 송전탑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송전탑 아래로 내려서니 감나무밭이 나오고...
정리가 안되어 있는 民家가 지맥길을 가로막고 개쉬키 몇마리가 지랄발광을 한다
다행히 쥔장은 인기척이 없어 다행이다...민가를 지나 시멘트 도로로 나온다
민가(14:05)
우측 아래로는 조금전에 헤어진 시멘트 임도가 보이는데
여수시 소라면(召羅面) 반월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소라면(召羅面)의 지명 유래는 주삼천과 율촌면 신풍리의 신풍천이 봉두와 대포 지역을 지나
소라천에 유입되어 비단을 짜듯이 교차하면서 바다로 흘러가는 교류지 역할을 하는 포구였다고
하여 부를 소(召)자와 비단 라(羅)자를 따서 부른 소라포구(召羅浦口)가 면의 동북쪽 지역에 있어
유래하였으며, 또한 조선시대에 소라포면(召羅浦面)이라 부른 데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한자 소(召)는 조라고 읽기도 하여 일제강점기까지도 현재의 소라면과 화양면 지역을 합쳐서
조라포면이라고 하였으며, 1789년(정조 13)의 『호구총수』를 살펴보면 조라포면은 상도와 하도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지금의 소라면 대부분 지역이 조라포면 하도였고 화양면 지역은 조라포면
상도에 속해 있었다.
소라의 본래 발음은 조라포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조라를 소라로 읽기 시작한 것은 근대식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던 1914년 이후이며, 일부 노인들은 1950년대 이후에도 조라포면이라고 불렀다
지맥길은 시멘트 임도를 따라서 올라가다가 우측의 숲 속으로 이어진다
당집(14:07)
민가에서 2분정도 올라서니 좌측으로는 굿을 하는 당집이 보인다
좌측의 당집을 바라보면서 직진의 숲 속으로 올라간다
오르막길로 올라서니 등로 바닥에는 겨울철에도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는
마삭줄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조금씩 졸음이 쏟아지면서 발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한다
빡세게 능선을 치고 올라서니...276.2m봉이 나온다
276.2m봉(14:25)
276.2m봉을 지나면서 다시 등로는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우측으로는 소라면 반월리로 내려가는 흐릿한 등로가 보인다
바람에 흩날리는 선답자들의 흔적
지독한 잡목의 태클은 언제쯤 끝나려나...
내가 항복 문서라도 쓰야 끝내려나...아! 미치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간간히 이런 편안한 길이 나온다는게 어디여...
매주 이렇게 산에 오르는 것도 범여에겐 일종의 수행 방법일까?
수행이란 달마조사가 9년동안 벽만 바라보았다는 면벽수행(面壁修行)도
있을 것이고, 한가지 화두(話頭)를 가지고 치열하게 정진하는 선수행(禪修行)도
있을 것이고, 원효성사가 행했던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행했던 염불수행도
있지만 범여는 이 험한 길을 걸으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것도 어쩌면 수행의
한 방편인지도 모르겠지...이제는 산이 험하면 한대로, 힘들면 힘든데로 걸어가는
이 지맥길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면서 걸으련다
예전에 폐헬기장이 있었던 무너진 돌담 위로 오른다.
폐헬기장(14:40)
293.8m봉(14:45)
부뜰이님의 산패가 걸려있는 293.8m봉 옆에는 서래야 박건석님은 이 곳을 금대봉이라
해놓고 높이도 276.2m이라 표기해놨다...조금전에 지나온 276.2m봉을 이곳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하옇던 이 양반의 극성과 열정을 알아줄만 하나, 산꾼들에겐 별로 인정을 못 받는것 같다.
지명이란 국토정보지리원의 심의를 거친 다음에 결정해야 하는데 이 양반은 전국의
지맥길 산에다가 엿장수(?) 맘대로 이름을 붙이는게 주특기(?)인 모양이다.
여수시 소라면 봉두리에 있는 금대마을의 지명을 따와서 금대봉이라 붙인
모양인데 금대마을과 이곳은 멀어도 한참 먼 곳에 있는데 이곳이 금대봉이라니...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좌측으로 갔다가...
우측으로 내려서니 풀섶에 묻혀버린 경주정씨 묘비가 보인다
경주정씨 묘비(14:54)
운암재(14:56)
여수시 소라면 봉두리 운암마을에서 바나개발이라는 채석장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지 고개의 흔적조차 잘 보이지도 않고 선답자들의 띠지 한장도
붙어있지 않은 곳이다...운암마을에서 지명을 따온 모양인데 지금은 묵은 임도가 보이지만
잊혀진 고개로 남아있다
잡목을 헤치면서 오르막으로 올라선다
248.5m봉(15:07)
시간이 지날수록 등로는 거칠어진다...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가 대신 걸어줄 길도 아니고, 걸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그러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겠지
안부(15:15)
248.5m봉에서 7~8분 정도 내려오니 안부가 나오고 오르막길에서
뒤돌아보니 지나온 등로가 열리면서 지나온 293.8m봉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주위에는 고사리들이 많이 보이는데 봄철에 오면 제법 고사리 수확을 할 수 있겠다
무명봉(15:18)
무명봉을 지나니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15:21)
직진으로 소라면 사곡리 상사마을로 내려가는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져 등로가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로 가야 하는데 독도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잡목의 강력한 태클에 저항하면서 내려서니...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은 곳에 있는 선답자의 시그널이 반갑기만 하다
지나온 293.8m봉의 절반은 이곳에서 채석장을 운영하는 바나개발이라는
곳에서 절반을 파먹고도 양이 안 차는지 계속 산을 깔아 뭉개고 있고 나뭇가지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안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안부(15:30)
등로는 뚜렸해보이나 주위의 잡목들이 엄청나게 성가시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간다
278.5m봉이 있는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우측 아래로는 사곡저수지와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에 있는 상사, 하사마을이 흐릿하게 보인다.
278.5m봉(15:45)
278.5m봉에 있는 선답자들의 흔적들
나름대로 잠깐이지만 비교적 등로가 뚜렸하다
안부(15:55)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겨울억새 / 조남명
잎사귀 서슬 퍼렇던
그 기세는 오간데 없이
삭풍을 거역 못하고
다소곳 누웠다
찬바람에 시달려
늘어트린 풀죽은 이파리
들릴락 말락 서걱거리는 소리
언덕에 기대 누워
빛바랜 허연 머리칼
고개 숙이는 초라한 풀
솜털 씨앗 흩어져 나가고
빗살만 하늘을 쓸고 있다
안부(15:57)
다시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동북쪽의 채석장 너머로는 가마봉과 대포리에 있는 대포저수지가 살짝 보인다.
여수시 소라면에 있는 대포리(大浦里)는 여수반도에 위치하며 서쪽으로 가마봉이 있어
산지를 이루고 있고 동쪽으로 바다와 접해 있으며, 소라천이 흐르고 대포저수지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구족도, 남해촌, 장전 등이 있는데, 구족도는 대포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화치제방을 막기 전에는 이곳까지 물이 들어와 밀물 때는 섬이 되었는데 그 때 지형이
개발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개발섬, 한자어로 구족도라 불린다.
남해촌은 구족도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대포간척지를 만들때 경남 남해에서 20여호가
옮겨 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장전은 밭이 길게 형성되어 있다고 하여 장전이라 불린다.
고도차이가 별로없는 능선을 따라서 걸어간다
무명봉(16:01)
무명봉에 올라서서 내리막을 바라보니 묘지를 이장한 듯한
넓은 공터가 보이고 지맥길은 우측으로 붙어서 내려가야 한다
가야할 198.4m봉을 바라보면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전주이공 묘(16:03)
안부(16:06)
암봉에서 오르막을 오르다가 뒤돌아 보니 지나온 278.5m봉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다시 오르막길
암봉(16:17)
누군가가 자기의 띠지에다 이곳을 198.4m봉이라 표기를 해놨다
그나마 이런 등로가 보이는 지체만으로도 그저 고맙기만 하다
198.4m봉(16:19)
198.4m봉에서 바라본 사곡리
여수시 소라면에 있는 사곡리(沙谷里 )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소라포면
사기마을[沙器閭]로 기록되어 있으며, 사기를 굽는 곳이란 뜻의 사구실이란 마을
이름을 사기(沙器)라 하다가 여수군 신설시 사곡(沙谷)으로 개칭하였다.
전라북도 옥구에 살던 진주강씨가 1690년경 정착했다고 전하는데,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고, 도자기 가마터가 많아 오랫동안 사구실마을이라 하였는데, 고려시대 청자를 비롯하여
분청과 백자가 함께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여러 시대를 거쳐 사람이 거주하던 마을이다.
본래 여수군 덕안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곡, 궁항, 장척, 진목, 복촌을
병합하여 소라면 사곡리가 되었으며. 1949년 여수읍이 시로 승격되고, 여천군이 설치됨에 따라
여천군 소라면 사곡리가 되었다. 1998년 삼여통합에 따라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가 되었다
북쪽은 황새봉이 자리하고 있고, 서쪽은 순천만과 접하고 있는 평지로, 인근에는 복개도, 장구도,
모개도 등의 무인도가 있는 곳이다.
안부(16:20)
198.4m봉과 안부를 지나오니 묘지가 나오고 묘지 윗쪽에 삼각점과 함께
족보있는 183.8m봉이 나온다
183.8m봉(16:22)
183.8m봉 아래에 있는 묘지
183.8m봉 삼각점(△광양441 / 1986복구)
183.8m봉을 내려서니 묘지들이 보이고 지맥길은 우측의 능선으로
내려가야 하나 그냥 넓은 임도를 따라서 내려갔다가 우측으로 향한다
우측으로 내려가면서...
송전탑 너머로 192.8m봉이 보이고 원래 계획은 저 봉우리를 넘어서 소라면 복산리
마산마을까지 가려고 했는데, 아직까지 체기가 남아있어 아무것도 먹지 못한데다
오후부터 바닷가 근처라서 바람이 불어대는 바람에 추워서 장골재에서 산행을
종료하기로 하고, 아침에 픽업해주신 사니조은 후배님에게 전화를 하니 시간이
조금 걸리겠다고 한다
넓은 임도로 내려서니 등로 좌측 아래에는 전원주택 단지인지 공장부지인지
모를 택지 조성작업중인 곳의 너머로 소라면 봉두리 백수동 보인다
NO43 송전탑(16:33)
송전탑을 지나서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장골재가 나온다
장골재(16:35)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와 봉두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2차선의 도로가 통과하는데
생각보다 오지(奧地)라 그런지 차량통행이 별로 없는 편이고 고개 우측에 ‘鳳沙峰’이란
표시석이 있으나 여수시의 어느 자료에도 장골재란 지명 유래는 알 길이 없어서 아쉽다
장골재에 있는 ‘鳳沙峰’의 표시석
이 표시석의 사연인 즉...예전에 소라면이 고향인 어느 분이 짧은 기간동안
소라면장으로 재임하면서 그 당시에 희망근로일손을 빌려 면내 여러 숲길을 다듬었는데
그중 한곳이 바로 이곳 봉두에서 사곡으로 넘어가는 이곳에 사곡과 봉두마을의 화합을 위해
마을 이름의 첫 글자를 따 봉사봉(鳳沙峰)이란 이름을 차용하여 표시석을 세웠다고 한다
다음 구간의 산행 들머리를 확인하고 아쉽지만 오늘의 산행을 종료한다.
사니조은 후배님이 금오도를 갔다오는 길이라고 하면서 시간이 조금 걸릴거라고 한다.
산행을 종료하고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수통에 남은 물에다 타올을 적셔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바람의 영향 탓인지 상당한 추위가 엄습하여 온다.
1시간 가까이를 기다렸을까...더 이상 추워서 있을수가 없어서 백수동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후배님이 와서 차량을 타고 여천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여천시외버스 정류장(18:08)
후배님의 차량을 타고 내가 표를 예매한 여수터미널보다는 여천시외버스 터미널이 훨씬 가깝다
여수에서 서울 강남센트럴시티 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여수터미널에서 출발하여
20분후인 18시 30분에 이곳 여천시외버스정류장을 들려서 가는 똑같은 버스인데
여수발 버스표로는 이곳에서 탑승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이런 뭔 개뼈다귀 같은 소리여!
하는 수 없이 여수터미널 표를 취소하고, 여천표를 예매하는데 페널티로 10%의 수수료를
달라고 하는데 갑자기 사기를 당한 기분이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우짜겠노...
여수시외버스 터미널 버스 시간표
여천발 → 서울행 버스표
후배가 저녁 대접을 하겠다는데 시간적으로 맞질않고, 미안하기도 하여
정중히 사양하고, 20여분을 기다렸다가 18시 40여분에 버스로 올라
서울로 향한다...사니조은 후배님 고마웠습니다...世世生生 福받을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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