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3년 04월 09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약간의 미세먼지
☞ 산행거리: 도상거리 27.6km+알바 1.3km / 7간 1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구암마을 버스 정류장-전주최씨 가족묘-동둔마을 버스 정류장-둔산마을 입구
에스페란사 CC 앞-미래병원 입구-신흥리 버스 정류장-전주MBC 이서AM송신소
갈림길-애통리 사거리-동김제농협 로컬푸드 정문-볼보트럭 전주 사업소
경농 미래농업센터-낙성리 버스 정류장-GS칼텍스 전주물류센터
불노사거리-사동마을 버스 정류장-30.4m봉-상리 버스 정류장
무수마을 버스 정류장-효정 버스정류장-점촌삼거리-포내.선인 버스 정류장
한국폴리텍V대학 김제캠퍼스-폴리텍 버스 정류장-순동사거리-농원육교
순동산업단지-김제온천 사거리-무명봉-농로-갈림길-안부-60.2m봉
승방마을-흥복사 갈림길-승반산23번 국도 암거-은빛가든-갈림길
두악산-세계난초연구소-복지교차로-43.9m봉-지평선마을 버스정류장
지평선산업단지 다목적 복합센터-공단사거리-32.4m봉-로얄캐닌
호남권종자종합처리센터-대동농공단지 버스정류장-대동농공단지
소동교차로-대동1육교-대동2육교-전주세관성덕냉장보세창고
대석리 사거리-대석리 버스 정류장-두무동버스 정류장
묘라버스정류장-27.5m봉-만경삼거리
☞ 소 재 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 금구면, 백산면,백학동, 황산면,
흥사동, 성덕면, 만경읍 / 완주군 이서면, 용지면
지난주에 기기로 한 만경 남(신산경표상:모악)지맥은 알람을 맞춰 놓지않고 잠을
자다가 늦잠을 한 바람에 꿩 대신에 닭이라고 백두대간을 같었는데 오늘은
바짝 정신을 차리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샤워를 끝내고
간단하게 베낭을 챙긴 다음에 집 앞에서 첫 차를 타고 열차를 타기위해 용산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용산역(04:55)
용산발 → 전주행 열차표
전주로 가는 첫 열차 시간이 3월달부터 05시 10분에서 05시 07분으로 3분이 단축되는
바람에 집 앞에서 첫차를 타고 삼각지역에서 내려 다시 신용산역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부지런히 오더라도 바쁘다...매표소에서 와서 예매한 열차표를 찾아서
플랫홈에 오르자마자 열차는 출발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가 잠에서 깨어나니 익산역이다
잠시후에 정신을 차린 다음에 전주역에 내린다
전주역(06:45)
전주역 앞에는 아침을 해결할 식당이라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아서
07시 10분에 출발하는 79번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김밥집에
들려서 아침을 해결할 요량으로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전주시외버스 공용터미널(07:20)
전주역에서 출발한 지 10분만에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과거에 몇번 이용했던
김밥천국이라는 집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매표소에 가서 금구가는 버스가 있는가
알아보니 금구가는 버스가 없기에 택시 승차장으로 나와서 택시를 타고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 구암마을’로 가자고 하니까...알았다고 하면서 가기에 별 생각없이 뒷좌석에
앉아 있는데 한참을 가다가 젊은 택시가 네비에 산동리 구암마을이 안 나타난다고 하면서
투덜대기 시작한다...그러면 미래병원이 산동리와 가까우니 미래병원을 한번 쳐보라고 하니까
가는데 번지수를 모른다고 투덜댄다...그러면서 하는말이 이곳에서 미래병원을 가려면 10km는
전주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투덜대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뚜껑이 열리면서 화가 치솟지만
꾹 참고 있는데 한참을 가다가 ‘어르신이 가자는 구암마을을 못 찾겠다고 하면서 택시비를
포기할테니 내리라고 한다’...그러지 하고 택시에서 내리니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이곳에서 전봇대에 있는 도로명 주소를 확인하고 김제시 금구면 택시를 부르려고 하는데
도로옆 목장에서 장화를 신고 내려오는 농부를 만난다...이 농부에게 산동리 구암마을이
어디냐고 물으니 차로가면 금방인데 걸어가면 4km정도라고 하는게 아닌가.
그러면서 ‘이곳에서 모악산까지 먼 뒤 뭔 베낭을 메고 헤면다요’ 하는게 아닌가.
이 농부는 모악산밖에 모른갑다...그러면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하니까.
내가 태워주겠소 하면서 바로옆 집에가서 트럭을 가지고 오더니 타라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냉탕, 온탕을 갔다온 느낌이다...그 바람에 차비를 벌긴 했지만
맘은 편치 않다...택시비를 주고 내릴걸...젊은 택시기사에게 충고하고 싶다.
이보시게 젊은이 살아보니 성질 급한 넘이 늘 손해라는걸 깨닫는데 50년이 걸렸다오
농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차에서 구암버스 정류장이 있는 구암마을 입구에
내리니 3주전과는 달리 도로가에 피어있는 벚꽃이 이별을 준비하는지 落花가 시작된다
구암마을 표시석이 2개나 있는데 이 마을이 콩쥐의 빨래터가 있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옛날에는 구암마을이 마을 터로‘대섶들’ 또는 ‘묵은들’로 불렸으며, 둔산 마을
동남쪽 입구에 조그마한 산이 있는데 바위로 둘러싸여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어 항아리 밑을
막아주던 거북이가 돌로 변하여 지금까지 거북바위로 내려오고 있으며, 원래는 이곳이 콩쥐가
살았던 최 만춘의 본가이고 이 부근에 주민들이 살았으나 상류 지역의 많은 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제방을 쌓으며 둔산 마을과 구암 마을등으로 이주하였으며 거북바위 옆 마을이
현재의 구암(龜岩) 마을이었다고 한다
구암마을 버스 정류장(08:35)
구암은 1635년경 전주이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마을의 팽나무 아래서 들녘 가운데를 바라보면
거북을 닮은 큰 바위가 있어 거북 구(龜)자를 써서 구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아홉 구(九)로 바뀌었다가 1995년 김제군을 김제시에 통합하면서 ‘거북 구(龜)자’로 환원되었다고 한다.
콩쥐의 빨래터가 있었다는 구암마을 표시석 옆에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산행을 준비한다...콩쥐의 빨래터라...그러고 보니 전라도 지역에는 우리나라 고전소설들의
흔적들이 참으로 많이 보이는 곳이다...춘향전은 성이성 암행어사와 기녀가 사랑했다는
설화들이 있고, 신임부사 생일잔치에서 지은 7언시 설화인 암행어사설화, 남원지방의
추녀기생 춘향과 이도령의 이야기 등 5종이 전해오고 있다.
춘향전 외에도 남원군 인월면 성산리와 아영면 성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판소리계
소설 〈흥부전〉과 전북 완주군 이서면을 배경으로 한 〈콩쥐팥쥐전〉 등의 한글소설이
이 고장을 배경으로 하여 창작되었으며, 이외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고전소설 〈홍길동전〉도
전북 부안과 위도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홍길동이 이상국으로 건설한 율도국이 부안
위도라는 사실이 민간 전승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상당한 근거를 갖고 논의되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인근인 영광에는 홍길동 마을에 관한 전설이 전해 오고 있고,
장성군은 홍길동의 고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구암마을을 지나는 버스 노선과 시간표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목장으로 가서 3주전에 신세를 진 네팔 노동자가
있으면 내 손목에 차고있는 염주(念珠)라도 주려고 목장으로 가니 출타하고
없다고 한다
* 염주(念珠)는 불보살에게 예배할 때 손목에 걸거나 손으로 돌리는 불구(佛具)의 하나로
범어로 'mālā'라고 하며, 수주(數珠)·송주(誦珠)·주주(呪珠)라고도 하며, 염불의 횟수를
기억하는 구슬이라는 뜻으로, 염불할 때나 다라니를 외울 때 일정한 수의 구슬을 끼워
연결한 염주를 가지고 그 수를 기억하도록 하는 도구이다. 보통 108주(珠)를 사용하는데,
이를 108염주라고 한다.
≪목환자경 木槵子經≫에 의하면 번뇌 업보를 없애고자 하면 목환자 108개를 끼워 항상
지니고서 가거나 앉거나 눕거나를 막론하고 언제나 불법승(佛法僧)의 명칭을 외우며,
외울 때마다 목환자 하나씩을 넘겨 그 수가 많아지면 업을 소멸하고 안락하여 위 없는
과보를 얻는다고 하였다.
또 그 염주의 수에 대하여 ≪다라니집경≫에 의하면 108주·54주·42주·21주 등 4종을
말하였고, ≪수주공덕경 數珠功德經≫에는 108과(顆)·54과·27과·14과의 4종을 들고 있다.
산행을 시작하다(08:45)
3주만에 만경 남(모악)지맥 4구간을 시작한다
저 도로위로 올라가서 좌측으로 꺽어져 도로를 따라가면 편하겠지만
가급적 원칙적으로 가고 싶다
자동차가 서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좌측 아래에는 3주전에 신세를 졌던 내팔인이 근무하는 목장이고 황토밭
뒷쪽으로는 묘지에 객토 작업을 하는 포크레인이 보이는 쪽으로 올라간다.
목장 너머 금구면소재지 뒷쪽으로 매봉, 상목산(459.7m), 구성산(489,7m)이 보인다.
3구간 시작점에 가까운 상목산이 저기 보이다니...참으로 빙빙 많이 돌아온 느낌이다
전주최씨 가족묘(08:48)
묘지 뒷쪽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5월에나 보여야 할 애기똥풀이 활짝 꽃을 피운채 군락을 이루고 있고...
내려가는 농로에는 외래종인 서양민들레도 많이 보인다
묘지에서 도로로 내려서면서 바라본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 서둔마을의 모습
서둔(西屯)마을은 원래 둔산(屯山)이었는데 8·15광복 뒤 마을이 커지자 둘로 나누어
동쪽은 동둔, 서쪽은 서둔이라 하였으며 마을을 휘감고 병풍처럼 빙 둘러 있는 산자락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혈(臥牛穴) 형국인데, 지금의 서둔 쪽이 소의 머리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마을 이름을 두른산이라 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둔산으로 발음이 변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군사들이 주둔했기 때문에 둔산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효자 최식 정려(孝子崔湜旌閭), 효자 최응삼 정려(孝子崔應三旌閭), 효자 최화 정려(孝子崔和旌閭)가
있는 마을이다
황토밭 너머로 한가로이 보이는 서둔마을을 바라보면서 농로로 내려서니
동둔 버스정류장이 나오고,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쓰레기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동둔마을 버스 정류장(08:50)
이곳 동둔마을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김제온천 사거리까지 약 11km의 거리가
도로를 따라서 마루금을 이어가야 하는 지루한 길의 시작점이기도 한 곳이다.
도로 우측의 동둔마을 황토밭 너머로 전주, 완주의 혁신도시에 조성된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도로를 따라서 걸어간다...도로가 만경 남(모악)지맥 마루금이다
둔산(屯山)마을 입구(08:56)
엄격히 말하면서 서둔마을 입구가 맞는듯 하다...원래는 둔산(屯山)마을이었는데
8·15광복 뒤 마을이 커지자 둘로 나누어 동쪽은 동둔으로 서쪽은 서둔이라 하였다.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에 속해있느 둔산 마을의 형상이 소가 누워있는 와우혈(臥牛穴)
형상으로 지금의 서둔쪽이 소의 머리부분에 해당되며, 둔산 마을의 최씨 여인들은
암소와 같이 온화한 심성으로 다른 마을 주민보다 묵묵히 쉬지 않고 순종하며 열심히
일을 잘해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모든 일을 주도해 나가고 있으며 이 마을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남쪽으로 향하여 해가 뜰 때부터 서산에 질 때까지 그늘진 곳이 없이 온종일
해를 맞이하는 특성이 있다.
또한 와우혈(臥牛穴) 머리부분 지형에 500여 년 된 소나무 암수 두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나 숫소나무가 죽었다... 둔산 최씨들은 숫 소나무가 죽으면 남자들이
단명 한다 하여 1995년도에 숫 소나무를 다시 심어 현재 암수 소나무가 둔산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역할을 하고 있으며 마치 소가 엎드려 거북바위에 있는 콩쥐의 옛집을 지켜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둔산마을 입구를 지나는데 도로 좌측에 효자 정려비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 마을은 효자를 많이 배출한 곳인가 보다...그래! 내가 부모에게 효도해야
자식도 나한테 잘하는 것이지...교육은 학교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밥상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제.
도로가에 잡초처럼 보이는 광대나물들이 지천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벌써 우리곁에는 봄을 패스하고 여름이 온 것처럼 느껴진다
2차선 도로 좌측에는 숯불구이 삼겹살이 써놓은 식당 주차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9홀짜리 에스페란사 CC 그물망이 보이고 도로 우측의 숲속에
삼각점이 있는 44.2m봉이 있었는데 무심코 걷다보니 그냥 지나치는 憂를 범하는데
한참을 지나고 난 다음에 그걸 알았지만 되돌아 가기에는 너무 많이 와 버렸다
전라도길을 걷다보면 맥길에 유난히도 많이 만나는게 교회이다
에스페란사 CC 앞(09:02)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주차장에 골퍼들이 몰고온 자동차가 많다.
나도 4월에는 매주 한번씩 라운딩을 나가야 하는데 연습은 안하고
맨날 산에만 다니니...내 지갑 먼저보는 넘이 임자이지.
이제는 예전의 싸움닭의 전투 모드는 사라지고 명랑골프로 바뀐지 오래됐다.
그래도 매주마다 푸른 잔디를 밟으면서 필드를 걷는데에 의의를 두고 있다.
도로옆 전봇대에 달팽이 모양을 디자인한 순례길 표지판이 보인다
전라북도에는 서로 이념과 사상이 달라 등을 돌리고 적대시하는 풍토를 벗어나 상생과 화합을
꿈꾸며 전라북도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가치가 있는 종교 명소들을 하나의 길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데 순례길의 지명이 “느바기”이다.. 마스코트인 달팽이처럼 ‘느바기’처럼 느리게 바르게
기쁘게 걸어보라는 뜻으로 김제,전주, 익산, 완주에 걸쳐 240km가 연결되어 있는 전라북도를
여행하는 또 하나의 방법인데, 김제에는 총 9코스 중에 6,7,8 코스가 지나간다고 한다
아침에 택시기사가 찾아 헤맨 미래병원이 보이는데 구암마을에서 2km정도 떨어져 있다.
예전같으면 벚꽃이 절정에 달할 싯점인데 계절의 변화 탓인지 도로가의 벚꽃은 끝물이다
미래병원 입구(09:05)
오늘의 유일한 인증샷
신흥리 버스 정류장(09:06)
김제시 금구면 낙성리에 있는 신흥(新興) 마을은 분토와 금구면 산동리 둔산 가운데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대제학 최양(崔瀁)의 증손자 최식이 맨 처음
금구면 산동리 둔산에 터를 잡은 뒤, 자손이 번성하여 이웃에 새로이 터를 잡고 살게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문화재로는 절부 문화유씨 정려(節婦 文化柳氏 旌閭), 효자 허극·허권 정려,
송윤의 도승지 벼슬 추서 사실을 기록한 도승지 유허비(都承旨 遺墟碑)가 있는 마을이다.
이 지역은 평야지대라서 일조량이 많은지 유난히 태양광 단지들이 많이 보인다
전주MBC 이서AM송신소(09:07)
생각보다 차량통행이 많지 않아서 도로를 걷는데 큰 무리는 없다
갈림길(09:15)
뒤돌아보니 금구면소재지와 금산사로 가는 갈림길이다.
배꽃이 만발한 과수원 너머로 완주군 이서면 농공단지가 보인다
梨花가 만발한 배밭...부디 올해도 쥔장에게 대박을 안겨주시길...
동김제농협 로컬푸드 후문을 지나서 애통리 사거리로 향한다
흐미 이쁜 넘...사람이 그리운지 짖지도 않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애교를 부린다
애통리 사거리(09:20)
김제시 금구면 낙성리(洛城里)에 속해있는 애통이[일명 왜총이]는 김제와 전주를 잇는
국도 1호선 도로변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때 마을 북쪽 2㎞ 지점 왜돌이란 곳에 왜구의
시체를 묻은 무덤이 있어 왜총리(倭塚里)로 불렀는데, 발음이 변하여 애통이가 되었다.
장흥[일명 장평(長坪)]은 분토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에 시장이 있어 마당 ‘장(場)’자를
쓰다가 긴 ‘장(長)’자로 고쳤다. 시산허씨(時山許氏) 집성촌으로 시산(時山)은 태인(泰仁)의
옛이름으로 태인은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에 속해있는 지명이다
일일상회 골목앞에는 4차선 716번 도로가 보이나 지맥길의
마루금은 일일상회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구 도로로 가야한다
일일상회 앞에는 김제에서 서울가는 버스가 서는 곳이다
지난번 3구간에 이곳까지 왔더라면 전주까지 가지않고 이곳에서
서울로 막바로 갈 수가 있어서 좋았을뻔 했고, 부지런히 걸었으면
4구간으로 지맥길을 마무리할 수가 있을뻔 했는데 공부를 하지않고
온 것이 두고두고 아쉽고 후회스럽다...그래봐야 죽은 자식 불알잡기 식이지만...
716번 구도를 따라서 간다
동김제농협 로컬푸드 정문(09:22)
도로를 따라서 가는데 지맥길이 아닌 마치 서울시의 둘레길을 걷는 기분이다
난 둘레길을 걸어보지는 않았지만...오늘의 들머리에서 이곳까지 4여km를 도로를
따라서 걸어 왔는데 편하다는 느낌보다는 힘들다는 느낌이 정확한 표현인 듯 하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 하듯이 맥꾼은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산길을 걸어야
편한 느낌이다
아침에 산행을 시작한 들머리가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였지만 잠깐 완주군 이서면에
잠깐 들렸다가 다시 김제시 금구면 낙성리로 접어들면서 합수점까지 김제시이다
볼보트럭 전주 사업소(09:24)
716번 구도로를 따라서 가는데 맞은편의 716번 신도로에는 모다아울렛이 보인다
다행히 구도로에는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서 편하게 길을 걸을수가 있다.
도로 좌측에는 경농 마래농업센터가 보인다
경농 미래농업센터(09:29)
도로가 벚꽃나무의 가지치기 한 곳에서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벚꽃.
꽃도 저럴진데...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귀한
생명을 포기하고 자살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오늘은 산행보다는
둘레길을 걷는 것같은 산행에서 또 한가지를 배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걸...”
애통리 사거리에서 구도로를 따라서 10분을 넘게 걸어니 716번 신.구 도로가
만나는 합수점이 나오고 전주에서 김제로 향하는 도로에는 차량들이 많다
’오늘 여기’라는 카페 입구에 도착하고 CU편의점도 보인다
낙성리 버스 정류장(09:32)
김제시 금구면에 속해있는 낙성리(洛城里)는 북으로 완주군과 경계를 이루고
남으로 두월천이 흐르는 중산간지역으로 신흥, 분토, 하사, 상사, 사방등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상사는 마을을 둘러싼 산세가 소가 여물을 먹는 모습이라 하여 식동리라고 불렸던
마을인데 행정구역 통폐합 때 하사 윗마을이라 하여 상사로 부르게 되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심순덕
하루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떼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
엄마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GS칼텍스 전주물류센터(09:34)
GS칼텍스 전주물류센터옆 담벼락에는 소프라 승마클럽이 있다.
금산사와 벽골제 표지판을 보면서 716번 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벽골제(碧骨堤)는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저수지로
경남 밀양 수산제, 충북 제천 의림제와 함께 삼한시대 3대 저수지중 하나로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다.
역사적 연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흘해왕 21년조에 ‘시개벽골지안장
일천팔백보(始開碧骨池岸長一千八百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으므로 후세 사가들이 신라기년(新羅紀年)으로 고쳐 신라기(新羅紀) 속에 삽
입한 것으로 본다면 백제의 11대 비류왕 27년(330)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 뒤 790년(원성왕 6)에 증축한 사실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현종 때와 인종 21년(1143)에
수축하였으며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에 의하면 인종 24년(1146)에 왕의 건강이 위중해지자
무당의 말을 따라 내시(內侍)를 김제로 보내 벽골제의 제방을 트게 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 1415년(태종 15)에 다시 축조하였으나, 이익이 적고 폐단이 많았기 때문에
폐지하고 말았다.
불노(不老)사거리(09:40)
김제시 금구면 청운리에 있는 불노마을의 사거리로 전주와 김제를 연결하는
716번 도로로 지나가는데 교통량이 상당히 많다...불로는 형설당이란 서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로, 1455년 조선 세조 때 송윤(宋倫)이 낙향하여 정착하였다.
불로는 힘이 세고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 또는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공부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에는 ‘용지면 용암리 모산마을에서 태어나
용지면 부교리에서 성장하고, 말년에 불로리에서 지내자’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마을에 효자 송정기 정려(孝子宋廷耆旌閭)가 있다.
도로가에 두릅들이 보이기 시작한다...오늘은 손맛을 좀 볼 수 있으려나...
불노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불노 버스정류장을 만난다.
김제시 금구면 청운리에 있는 불노 사거리....청운리(靑雲里 )는 조선 말기 금구군
낙양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불로리·중평리, 서도면 상리,
이북면 용은리·옥성리 일부를 병합하여 청운리라 하고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금구면 청운리가 되었으며
북쪽으로 김제시 용지면 부교리와 이웃하고, 남쪽으로 두월천(斗月川)이 흐르는 충적
평야 지역이다.
도로 주위에는 편의점과 간식거리인 호두과자 파는 점빵들이 보이나
아직까지 허기를 느끼지 못한 탓에 부지런히 도로를 따라서 걷는데
오늘은 생각보다 미세먼지도 덜하고 하여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전라도 지역은 기독교가 상당히 강한 곳이라 그런지 교회를 자주 만난다
주유소를 지나니 사동마을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사동(砂洞)마을 버스 정류장(09:48)
사동마을(砂洞) 입구의 모습
사동은 불로와 상리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로, 여산송씨가 터를 잡아 살면서
형성된 마을로, 금구면 청운리에 있는 사동마을은 모래땅에서 샘물이 솟아난다
하여 모래샘골 또는 사천동(砂泉洞)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사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716번 도로의 교통 흐름을 확인하고 무단횡단을 하여 좌측 숲으로 올라간다
30.4m봉(09:56)
30.4m봉 정상의 삼각점(△이리 310 / 1996재설)
오늘 처음으로 만나는 족보있는 봉우리인 30.4m봉을 만난 다음에
옹벽 아래로 내려와서 다시 716번 도로를 따라서 한없이 걸어간다
만남주유소(10:00)
주유소 텃밭에서 만난 수선화...너의 꽃말은 늘 가슴설레는 “첫사랑”이라지
도로가에서 바라본 김제시 금구면 청운리 상리(象里)마을의 모습
상리는 불로와 사동, 김제시 황산면 홍정리 신흥 가운데 있는 마을로, 김제·전주간
도로변에 있는 마을로 탁씨가 터를 잡은 뒤 나주에서 배흥기라는 사람이 이주해 오면서
큰 마을이 되었으며, 용안(龍眼)과 재앙골을 합하여 붙인 이름으로, 마을 뒷산이 코끼리를
닮아 상리(象里)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뜻이 전혀 다른 상리(上里)로 바뀌었다.
용안은 원래 이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상리에서 남쪽으로 0.5㎞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김제시 황산면 용기(龍起)에서 일어난 용을 이 마을에서 품에 안는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상리 버스 정류장(10:02)
상리 버스정류장을 지나면서 건널목이 없는 716번 도로를 무단횡단한다
도로를 건너서 맞은편을 청운리 마을 표시석과 신흥콘크리트 담벼락이 보이고...
직진으로 이어지는 4차선의 716번 신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구도로로 향한다
아마도 신 716번 도로를 개설하면서 직선화 공사로 잊혀져 버린 도로인듯 싶다.
샛별농원이란 간판이 붙어있는 곳을 지난다
바람둥이(민들레)들의 축제
도로를 따라서 가니...
순흥안씨송암공묘소 입구 표시석이 있는 김제시 용지면 효정리 내효(內孝)마을 입구를 지난다
도로에서 바라본 내효마을의 모습
김제시 용지면 효정리에는 서두, 무수, 내효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효정리(孝亭里)의 지명유래는 예전에 효자가 불구가 된 어머니를 위하여 정자를 짓고 편히
모셨다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효정(孝亭) 또는 소정으로 혼동되어 불리다가 행정구역 통폐합 때
효정이란 이름으로 고정되었고, 무수(無愁)는 약 100여 년 전 완주군 구이면 양생동이라는 마을에서,
광산 김씨 일가족 75명이 무려 10여년에 걸쳐 이주하여 광산 김씨 마을을 이루고 아무런 근심
걱정없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 산행이라기라기보다는 도보순례라는 느낌이 든다.
길을 걸으면서 유난히 많이 만나는게 황토밭과, 호화로운 묘지, 세천비(世阡碑)를 많이
만나는데 김제란 곳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들을가진 곡창지대라 여유로운지, 아니면
조상에 대한 예경심이 강한 고장인 듯 하다
* 세천비(世阡碑)는 선산입구, 선산근처에 세워 그 문중의 선산임을 알리고,
문중(門中)이나 문중 선조들의 치적을 기록해 후세에 남기는 비석을 말한다
무수마을 버스 정류장(10:10)
용지면 효정리에 있는 무수(無愁)마을은 약 100여 년 전 완주군 구이면 양생동이라는
마을에서, 광산 김씨 일가족 75명이 무려 10여년에 걸쳐 이주하여 광산 김씨 마을을
이루고 아무런 근심 걱정없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수마을 버스정류장 시간표
처음 716번 도로(도로명 주소:콩쥐팥지로)를 만난 애통리쪽과는 달리
전주가 멀어지고 김제가 가까워질수록 도로의 교통량은 현저히 줄어든다
계속되는 도보순례(?)
716번 도로를 가운데 두고 좌측은 김제시 금구면, 우측은 용지면을 경계로 하염없이 걷는다
도로에서 바라본 효정마을의 모습
효정 버스정류장(10:18)
서글픈 우리네 농촌의 현실을 대변하는 느낌이다
도로를 따라서 걷는데 곰소식자재 마트가 보인다.
선답자의 산행기에서는 ‘앞집보다 쌉니다’라는 문구가 보였는데 지금은
‘앞집으로 가세요’라는 문구가 바뀌었다...아마도 맞은편에 있었던 경쟁업체를
인수한 모양이다...치열한 인생살이의 서글픈 현실을 보는듯 하다
도로가에는 귀한 토종민들레인 하얀민들레가 보인다
이팝나무에도 하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도로가에서 만난 통합기준점
통합기준점(U익산79)
계속되는 도보순례...점촌삼거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점촌삼거리(10:27)
김제시 황산면 홍정리에 속해 있는데 홍정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홍천리의
‘홍(鴻)’자와 쇠정이의 ‘정(亭)’자를 따서 홍정리라 불렀으며, 남쪽으로 두월천(斗月川)이
흐르는 충적 평야 지역으로, 신흥, 효원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홍정은 풍수지리적으로 동쪽이 사두형, 그 앞이 개구리형, 마을 뒷산이 날으는
기러기형이라 하여 개구리를 쫓아가던 뱀이 기러기를 보고 멈추었다는 뜻에서
기러기 홍(鴻)자와 멈출 정(停)자를 써 홍정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뜻이 다른
홍정(鴻亭)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도로의 안내판에는 점촌삼거리라 해놓고, 버스 정류장 표식은 점촌사거리라...
어느것이 맞는지는 모르겠고....외지인은 엄청 헷갈린다...좀 제대로 합시다
풍차뜰 밥집은 망해버렸는지 주택으로 변해버렸고, 건너편에 있는
조선콘크리트 공업(주)라는 레미콘 공장을 지나니. 포내, 선인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포내.선인 버스 정류장(10:32)
도로옆의 지저분한 水路에서도 유채꽃들이 많이 피어 있는데
일부러 재배한 것은 아닌것 같은데, 貴賤을 가리지 않고 잘 자라는
저 꽃들에게 인간들은 배울게 많다.
한국폴리텍V대학 김제캠퍼스(10:37)
한국폴리텍V대학 김제캠퍼스는 전라북도 김제시 백학동에 있는 국립 종합기술전문대학으로
기존에 있던 기능대학과 기술전문학교를 통합하여 2006년 출범한 것으로 2년제 학사 과정
대학(권역별 11개)과 1년제 기능사 양성 과정(지역별 29개)을 7개 권역으로 묶어 한국폴리텍
1대학~7대학과 특성화 대학 4개로 운영하고 있다.
한국폴리텍 1대학은 서울과 수도권 및 제주권역이며 2대학은 인천과 경기권역, 3대학은
강원권역, 4대학은 충청권역, 5대학은 호남권역, 6대학은 대구와 경북권역, 7대학은
부산과 경남 및 울산권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중 호남권역인 한국폴리텍 5대학
광주캠퍼스는 광주광역시와 전라북도 및 전라남도를 관할하는 지역 거점 폴리텍대학
중의 하나이며 김제캠퍼스는 목포와 고창, 익산, 순천, 남원 등 지역 캠퍼스 중의 하나이다.
아직도 정원이 미달된 모양이다...신입생 모집중이라는 커다란 플랑카드가
인구 감소의 현실에 직면에 있는 이 나라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씁쓰름하다
폴리텍 대학의 원조는 용산구 보광동에 있는 1973년 10월에 설립된 정수직업훈련원이
모태로 1983년 3월 18일에 한국직업훈련관리공단 정수직업훈련원으로, 1994년 7월 15일에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정수직업전문학교로 개칭되었고, 1996년에 정수기능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 당시 경제적인 사정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중학교 졸업 또는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청소년을 정예 기능인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故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인 육영수여사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설립한 정수직업훈련원이 모태이다.
전원 기숙사 생활에 입학금·수업료·실습비·기숙비 등이 일체 무료였으며, 실기 위주의
단기교육으로 2급 기능사를 양성했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분명히 功過는 있을 것이다...우리나라 역사의 功過 중심에 있는 분이
아마도 故 박정희 대통령이 아닐까...독재자라는 過의 汚名이 쓰신 분이 분명히 맞지만
그 분의 과감한 결단 덕분에 헐벗고 굶주렸던 민초들이 이 만큼 잘사는 功도
분명히 있으리라...
근데 지금의 정치하는 자들은 어떤가...여.야 가릴것 없이 국민의 대통령이 아닌
자기 진영을 위한 패거리의 대통령이 아닌가 하는 씁쓰럼한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民草들의 安危는 眼中에도 없고, 맨날 치고 박고 싸우면서 자기 이익을 위해
몰두하는 무리들로만 보이는 것 이 범여만의 생각일까
도로를 무단횡단하여 한국폴리텍V대학 김제캠퍼스 정문으로 향한다
한국폴리텍V대학 김제캠퍼스 정문을 지나자 통일기원 국조단군상이 있다.
예전에 한동안 한기총이라는 기독교단체에서 國祖인 檀君을 우상숭배라면서
철거운동을 벌이면서 전국의 학교와 공공기간에 설치한 단군상을 훼손했는데
이곳은 용케도 보전되어 있구나
폴리텍 버스 정류장( 10:40~50)
오늘의 산행 들머리인 구암마을을 지나 동둔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이곳까지
지맥 마루금인 도로를 따라서 10여km를 걸어왔더니만 지루하고 목이 마르다.
이곳 버스 정류장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과 쥬스와 초콜렛 하나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한국폴리텍V대학 김제캠퍼스 버스 정류장을 지나자마자
좌측 골목에 있는 김제북초등학교 안내판이 보인다
김제북초등학교 초입에는 로타리클럽에서 세운 ‘草芽의 奉仕’ 표시석이 있다.
초야(草芽)란 풀의 씨앗이나 줄기에서 새로 나오는 어린싹을 말하는데
초야의 봉사라는 구호는 로타리 클럽의 모토인 모양이다.
라이온스클럽, J.C와 함께 전 세계적인 봉사단체인데 나 역시 1994년부터
라이온스 클럽에서 활동중이다...아프고 나서부터 예전에 비해 열정은 많이
식었지만...
순동(蓴洞)사거리(10:52)
순동사거리에서 직진의 부안, 김제방향이 아닌 우측으로 꺽어져
스파힐스C.C와 순동산업단지 방향으로 향한다
김제시에 속해있는 순동(蓴洞)은 마을의 방죽인 소못[소매방죽, 금이제]에
순채가 많이 있어 순동이라 하였으며, 중심 마을은 원순동(元蓴洞)·대리(大里)·
농원(農園) 3개 마을로 상동동·백학동·검산동·흥사동과 이웃하고 있다.
전형적인 농촌 지역으로 주민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호남선이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고, 전주시와 김제시를 연결하는 지방도 716호선이 동서로 이어지면서
순동에서 교차하며, 소못 북쪽에는 순동지방산업단지와 김제북초등학교[1966년]가 있고,
도로변 올림픽공원에 의견비(義犬碑)가 있다. 한우물, 참샘골, 복해동, 맹무덤, 만경거리,
점터, 소못, 한우물방죽, 서낭댕이 등의 옛 지명이 남아 있다.
스파힐스C,C방향의 도로는 2차선 도로로 차량 통행이 적고 도로도 협소하다
도로가에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벚꽃은 끝물이라 볼 품이 별로없다
삼수동 이정표를 지나니 호남선 철도가 지나가는 농원육교가 나온다
농원육교(10:55)
농원육교 아래로 통과하는 호남선 철길
농원육교를 지나자마자 1995년 지방공업단지지구로 조성되었다는
순동일반산업단지로 들어서는데 공단지역이라 그런지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매케하고 고약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순동산업단지(11:00)
도로가 지맥길이다...도로(도로명 주소:아리랑로)에서 바라본 순동산업단지
곳곳에 편의점이 있어서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먹거리를 안가져와도 될뻔 했다
선화식당 입간판도 보이고...
도로 맞은편에는 파프리카를 전문으로 하는 농업회사 법인 농산이라는 회사가 보인다
도로를 따라서 가도가도 산이라곤 보이지가 않는구나.
김제온천 사거리(11:12)
12여km를 걸은 다음에 김제온천 사거리에서 도로를 벗어나 산으로 향하는데
사거리 우측에는 스파힐스 골프장이 있고, 신설도로인 온천길과 아리랑로가
교차하는 곳이 김제온천 사거리이다
김제온천 사거리를 무단횡단하여...
순동모란공원 표시비 뒷쪽으로 올라간다
갑자기 나타나는 황토밭...새로운 작물을 심으려는 모양이다
문둥이 시인으로 잘 알려진 한아운(大安스님)도 소록도가는 길에
이런 황톳길을 걸었겠지
소록도로 가는 길 /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 한아운(韓何雲:1919~1975)은 시인이자 大安이라는 법명을 가진 승려였다
1943년 중국의 베이징대학[北京大學] 농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하여 함경남도 도청에서
근무하다가 1945년 나병(문둥병)이 악화되어 그만두었다... 1946년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반동분자로 투옥된 바 있고, 1948년 공산치하를 피해 월남하여 한동안 유랑생활을 했다.
1950년에 성혜원, 1952년에 신명보육원을 설립·운영하는 한편, 1953년 대한 한센 연맹위원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나병 환자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고, 1960년 무하문화사, 1966년 신안농업기술학교
교장 및 한국사회복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49년 이병철(李秉哲)의 소개로 〈신천지〉에 시 〈전라도 길〉 외 12편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나병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노래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1949년 첫 시집 〈한하운시초〉를
펴낸 후 문둥병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1955)와 제3시집
〈한하운시전집〉(1956)을 펴냈는데, 여기에 실린 시들은 민요 가락에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으며,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1957)와 자작시 해설집
〈황톳길〉(1960)·〈정본 한하운시집〉(1960)을 펴냈다.
밭 끝자락에서 산으로 올라서니...
흐미!...아까운거...두릅이 엄청 많은데 다 피어버려 먹을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무명봉(11:17)
다 피어버린 두릅나무 위로 올라서니 무명봉 나오고 오늘 처음으로 만난 봉우리다
곧바로 내려서니 대체작물을 심기위해 베어버린 포도나무가
쌓인곳을 지나 밭으로 내려선다
밭을 내려서면서 잠시후에 오를 60.2m봉을 바라본다
동쪽으로는 스파힐스 골프장과 그 너머로 아파트 단지들이 보인다
지도상에도 없는 신설된 농로로 내려선다
농로에서 바라본 스파힐스C.C의 모습
농로(11:20)
밭을 내려서니 순흥안씨안원군파 종가묘소가 좌측에 있고 농로를 지나 숲으로 올라간다
완만한 숲으로 올라간다
오늘 산행을 시작한 후 13km만에 준.희 선생의 반가운 흔적을 만난다
완만한 오름길에 딱 먹기좋은 엄나물순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아무리 갈 길이 바빠도 이런걸 두고 그냥 지나가는 건 예의가 아니제.
베낭을 내려놓고 꽤많은 엄나물순을 수확한다
갈림길(11:30)
녹슨 철조망이 나오고 ...
맥길은 우측으로 향한다
숲으로 들어서니 선답자들의 흔적들이 보인다
안부(11:32)
60.2m봉(11:32)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선답자의 시그널 몇개만 보인다
60.2m봉에서 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90도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60.2m봉에서 내려서니 복숭아가 피기 시작하는 밭이 보이고 밭에는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와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드는 젊은 친구들이
틀어놓은 내가 알 수 없는 음악소리가 요란하다...건너편에 야트막하게
보이는 저 곳이 흥복사를 품고있는 승반산이다
차양막으로 막아놓은 울타리를 넘어서 밭 가장자리가 맥길이다
굳게 막혀있는 지맥길
예전 같으면 당연히 넘어서서 가겠지만 지금은 엄연히 밭의 쥔장이
농사일을 하는데 무단으로 침입한다는 건 예의가 아닐것 같아 좌측으로 내려간다
대밭으로 들어가서 맥길을 이어보려 했지만 빈틈이 전혀 안 보인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고 했던가...좌측의 승방마을로 내려간다
김제시 흥사동(興寺洞)에 있는 승방마을(11:40)
흥사동(興寺洞)의 지명 유래는 승가산(승방산)에 있는 흥복사(興福寺)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원래 김제군 백석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백석면[상동리, 상리,
상정리, 흥사리, 하리, 하정리, 하서리]과 연산면을 백산면으로 통합할 때 백석면의
흥사리[상두악, 흥복, 내리, 승방, 옥정]와 입천면의 순동 일부를 병합하여 백석면
흥사리(흥사동)가 되었다고 하며, 승방마을의 원래 지명은 심뱅이 마을이란다
승방마을에는 1856년(철종 7) 동래정씨 가문에서 세운 승방서원이 있었으나
세운지 10여년만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고 한다
승방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한참을 돌아서 승(반)방산으로 향한다
승방마을은 복숭아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인지 복숭아밭에 桃花가 만개했다
승방마을 한참 돌아서 마루금에 복귀한 다음에 60.2m봉을 뒤돌아 본다
300여m면 도착할 곳을 1km 가까이를 돌아서 왔다.
농로를 따라서 흥복사 방향으로 가다가...
승반산 등산로 표지판이 있는 우측의 나무 계단으로 올라간다
기분같아서는 흥복사에 들렸다가 갔으면 좋으련만 귀경하는
교통편이 어쩔지 몰라 그냥 승반산 방향으로 올라가는데 지도상에는
승반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마을과 이정표에는 승방산으로 표기가
되어있어 처음오는 외지인들은 상당히 헷갈린다
나무 계단으로 올라서니 승반산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완전히 고속도로이다
선답자의 시그널들이 바람에 펄럭인다
흥복사 갈림길(11:50)
좌측 아래쪽으로 0.20km지점에 흥복사가 있다고 하나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지는 않는다
갈까말까 몇번을 망설이다 포기하고 승반산 방향으로 향한다
흥복사(興福寺)는 김제시 흥사동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로
1954년 불교 정화 운동 때 임시 조계종 전북종무원으로 약 1년간 교단의 행정본부가 되었으며,
1961년에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셨던 월주(月珠) 큰 스님이 금산사와 흥복사의 주지를
겸임하면서 전라북도 지역 불교 정화 운동의 핵심 구실을 담당하였던 절집이다
650년(의자왕 10) 고구려에서 온 보덕(普德)이 창건하여 처음에는 승가사라 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였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1625년(인조 3) 김제 지역에 살던 흥복(興福)이라는 처사가 기원 도량으로 삼아 극락전을 중건하고
흥복사라 하였다... 그 뒤 다시 퇴락하였는데, 1974년부터 중창을 시작하여 1976년 정면 4칸, 측면 2칸의
대웅전과 육각형의 건물인 미륵전·삼성각·사천왕문·요사 등을 중건하였다. 지금의 당우 가운데 극락전과
정혜원은 192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흥복사에는 수령 약 600년가량의 신단수(神壇樹)와 설천(雪泉)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1호로 지정된 흥복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좌상(興福寺大雄殿木造三尊佛坐像)과
흥복사 석조미륵상(興福寺石造彌勒像), 부도 옥개석(屋蓋石) 2기가 있다.
흥복사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승반산 정상이 나온다
승반산(升盤山:57.6m:11:51)
김제시 흥사동에 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풍수지리상 쌀을 되는 되(升)를
거꾸로 엎어 놓은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승반산의 정상에서 북쪽으로
두악산과 백산저수지, 서쪽으로 백산 들녘이, 남쪽으로 김제 시가지가 펼쳐져 있으며
동쪽으로 용지들녘이 펼쳐지는 곳으로 두월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는 산이다
해동지도(김제)에는 승가산(僧加山) 옆에 있는 봉우리로 표기되어 있고 호구총수에는
백석면(白石面) 승방산(升方山)이라고 적혀있지만 현재에도 승방 마을과 승방서원이 있어
그 유래를 짐작하게 하며 향토지에 의하면 1995년에 주민들의 요청으로 승방지명은 정리되었다.
승반산 정상에 있는 삼각점
잘못 기재를 했는지 모든 기록을 막아놔서 알 길이 없다...언제쯤 고치려나
국토지리정보원장님!...책상머리에서 하...세월만 보내지 마시고 얼른
바로 고쳐서 民草들이 낸 세금으로 먹고 사는데 밥값은 하겨야죠...
다른곳과는 달리 대삼각점이다...선답자 부뜰이님의 산행 기록에는 익산 27이란다
승반산을 지나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흥복마을쪽의 고속도로(?)같은 길을 버리고...
흥복(興福)마을은 승가산(僧伽山)[56m]에 있는 흥복사(興福寺)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고려 말 우왕 때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정제 박선중이 말년을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인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전설에 따르면, 흥복은 당시 김제 지역에 살던 관리였는데 욕심이 많고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다... 어느 해 흉년이 들었을 때, 흥복은 백성들에게 쌀 한 톨
나누어 주지 않았으나 그의 아내는 곳간을 열고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어느 날 꿈에 구렁이가 나타나 “네가 저지른 죄값으로 너와 내가 모습을 바꿀 때가 되었으나,
너의 부인 때문에 원통하게 업을 벗지 못하게 되었구나.” 하고 엉엉 울더니 사라졌다.
그후 흥복은 아내의 뜻에 따라 열심히 불도를 닦고 자신의 재산을 털어 흥복사를 지었다고 한다.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는 우측의 숲 속으로 급하게 꺽어진다
등로가 전혀없는 숲에 선답자의 흔적 2개가 보인다
대구 지맥팀의 묵언님과 세르파님의 흔적...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맥길을 걷는 분들은 “不狂不扱(미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이라 하셨죠.
162지맥을 무탈하게 완주하시길 응원할께요
숲을 지나니 대나무숲이 강한 태클을 걸어댄다.
대나무가 범여를 내려다보고, ‘멀쩡한 집 나두고 뭔 개고생을 하요’ 하며 訓戒를 한다
千辛萬苦 끝에 대밭을 빠져나오니 코 앞에는 桃花밭이 펼쳐지고 23번 국도가
지나가는 흥사교차로가 떡하니 지맥길을 짤라 먹고는 미안한 기색도 없다.
흥사인터체인지 너머로 보이는 두악산은 산이라기 보다는 밋밋한 봉우리다
대밭을 내려와서 비닐하우스를 통과한 후에 뒤돌아본 모습
포장도로를 따라서 흥사교차로 방향으로 내려간다
흥사교차로를 통과하는 23번 국도는 생각보다 교통량이 많아서
목숨을 담보로 도로를 걷고 싶지는 않아서 돌아가기로 한다
지나온 순동산업단지로 이어지는 도로 아래를 통과한다
암거를 통과한 다음에...
좌측의 도로로 꺽어져 가는데 건너편에는 스파힐스C.C가 보인다.
나도 다음주 주중에 2번이나 필드를 나가야 하는데 맨날 이러고
다니니 동반자들에게 민폐가 안 될란지 모르겠네...그래도 우짜겠노
2년반은 죽자살자 다녀도 162지맥을 끝낼지 모르겠네...
미경이 언니가 가리키는 홍미경가든 방향으로 향한다
23번과 29번 국도가 교차하는 흥사교차로
저 앞에 보이는 곳이 지맥 마루금인데, 돌아도 한참을 돌아서 간다
오랫만에 보는 보리밭이다
23번 국도 암거(12:05)
미경이 언니가 가라는 방향을 따라서 23번 국도 암거를 통과한다
23번 국도 암거를 통과하니 오르막이 나오고 오르막길에서 관망대 방향으로 향한다
도로 좌측에 관망대수퍼라는 구멍가계가 있다...이른 아침에 집을 나온
탓인데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서 걸었더니만 졸음이 쏟아지기에
캔커피를 하나 사먹으려 했더니만 쥔장이 출타했는지 문이 굳게 잠겨있다
은빛가든(12:10)
주변에 골프장이 있어서 그런지 식당과 모텔들이 많이 보인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자주 등장하는 은빛가든...점심때라서
그런지 손님들이 많아 보인다
은빛가든 식당을 지나 갈림길이 나오고 관망대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관망대 방향으로 꺽어지자마자...
도로 양쪽으로 많은 모텔들이 있는데 이렇게 많은 모텔촌은 처음본다
다들 밥은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갈림길(12:15)
직진으로 이어지는 두악산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두악산가는 길
두악산가는 길에서 만난 자연보호헌장
두악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두악산 오름길 계단 옆에는 두악산과 전망대 안내판이 방치되어 있다.
두악산 전망대(斗岳山展望臺 )가 시야에 들어온다
김제시 흥사동과 백산면 하정리 경계에 있는 전망대로 흥사동은 1989년 김제시에
편입되기 전에 백산면에 속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두악산전망대를 일명 백산전망대
또는 관망대라고도 부른다.
두악산전망대는 1967~1971년 호남 야산 개발 당시 시민의 휴식 공간을 확보할 목적으로
1967년 호남 야산 개발 기공식이 있던 장소에 설치된 시민 휴식 공간 겸 전망대로
호남 야산 개발 추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두악산전망대에서 열린 기공식에 참석하였다.
두악산(斗岳山:52.6m:12:20)
전라북도 김제시 흥사동과 백산면 하정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두악산전망대가
있고, 아래에는 주차장과 자연보호헌장, 이동통신탑, 좌측 아래에는 마머주의 창시자가
설치한 듯한 ‘백혈구는 自由(政治)를 상징한다’라고 적힌 표시석이 보인다
지명의 유래는 김제평야에서 바라보면 마치 말[斗]에다 쌀을 담아 놓은 형상이라는데서
붙여진 지명으로 1967~1971년 호남야산개발사업 기공식 때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했던
산으로 널리 알려져서 유명했던 산으로 정상에 있는 두악산 전망대를 이 지역 사람들은
관망대라고 부르기도 하며, 두악산에서 발원하여 성덕면 남포리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신평천(新坪川)의 발원지이기도 한 산이다
두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김제 들녘
대한민국 최고의 곡창지대답게 모든게 풍요롭게만 보이는구나.
두악산 전망대로 아래로 내려오니 ‘백혈구는 自由(政治)를 상징한다’라고
적힌 표시석이 두악산 아래에 버티고 서있다
마머주의창시자 박병묵선생과 박윤오선생 비석
박명묵(호:밝해)은 1925년생으로 김제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부터 ‘자유공산주의’를
주창하면서 지금까지 인간해방의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헌신했다고 하며, 해방 직후
20대 초반의 나이에 ‘공산주의를 하되 자유 없는 공산주의는 옳지 않다’고 보아 ‘자유에
기반한 공산주의 곧 자유공산주의’를 주창한 인물이라고 한다.
모든 사상은 인간의 생명현상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아, 인간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흡수하고(먹고) 필요치 않은 것은 배척함으로써(막음으로써) 생명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먹고 막는 활동의 유기체’인 만큼 ‘마머주의’라는 이름으로 사상을 정리하신 분이라고 한다
비석 뒷면의 모습
마머주의 비석에서 올라와서 북쪽으로 내려서니...
익산시가 아련히 보이고 두악산 허리를 깔아 뭉게고 새만금 전주 고속도로가
건설중이다...후답자들은 나중에 이 길을 어떻게 지날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두악산을 내려와서 뒤돌아 본 모습
조금전 은빛가든에서 모텔촌을 지나 두악산으로 오르지 않고 우측으로 이어진
도로를 다시 만나 합수점으로 향하는 마루금은 계속해서 도로를 걸어야 할 모양이다
도로 좌측은 고속도로 공사중이고, 도로 우측은 수로이고
여산송씨 두악산 종중묘소 입구가 나오는데 이곳 김제땅을
걸으면서 느끼는 점은 조상에 대한 禮敬心이 강한지 아니면
姓氏간의 경쟁심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표시석을 다른
지역에 비해서 유난히도 많은 느낌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들녘을 가지 고장이라 그럴까?...水路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도로에서 바라본 백산저수지(白山貯水池)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에 있는 농업 관개용 저수지로 다른 저수지와는 달리 주변에서
집수된 물이 아닌 섬진강 수계인 운암호의 물을 간선 수로로 이동시켜 펌프로 퍼올려
저수하는 양수저수지로 호남 야산 개발과 함께 축조된 저수지로서 1969년 1월 1일
착공하여 그해 12월 31일 준공되었으며, 아름다운 서해의 낙조와 자연농원지구,
그리고 금만경평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연화라는 식당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점빵문이 굳게 닫혀있다.
도로를 따라서 서쪽으로 무작정 걸어간다
달마조사(達磨祖師)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道를 구하기 위함이지만
범여가 서쪽으로 가는 까닭은 지맥길 하나를 끝내기 위함일까...
세계난초연구소(12:45)
세계난초연구소를 지나자마자 (주)고추와 육종 농업법인 입구가 나온다
김제시 백산면은 들녘이 넓은 평야지대라 그런지는 몰라도 영농법인이
많이 보이는데 백산면은 우리나라 종자산업의 메카라고 불리는 곳이다
백산저수지가 꽤나 큰 모양이다...아직도 내 시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로명 주소조차 없는 이름없는 도로를 걷는데 차량이 없어서 호젓하게 홀로 걷는다
대동태양광협동조합 간판을 지나니...
쉬어가기 좋은 팔각장과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맥꾼을 반긴다.
시간만 있다면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갔으면 좋으련만
도로를 계속 걷다보니 고도차가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리
피곤한 줄은 모르겠다...가는데까지 가보기로 하고 조금을 더
걸어가니 702번 도로와 합류하는 복지교차로가 나온다
복지교차로(12:55)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下亭里 )에 있는 복지교차로... 김제시 백산면에 속해있는
하정리는 호남야산개발이 시작되면서 만들어진 백산저수지가 중앙에 위치해 있는
평지고원지대로 자연마을로는 학당, 생건, 정동, 소라, 복지 등이 있다.
정동은 쇳골, 솥골, 하두악이라고도 부르는데 쇳골은 쇠붙이를 다루던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하두악은 두악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생긴
지명인데 특산물로는 동충하초가 유명하다고 한다.
도로명 주소가 하정로라는 2차선 도로를 빠져 나오니 4차선의 702번 도로가
나오고 최근에 개설된 도로인지 교통량이 별로 없다보니 4차선의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신호등조차도 없다...도로를 건너서 새만금산업이라는 콘크리트
제조업체 뒷산이 삼각점이 있는 족보있는 산이라 그리로 향한다
새만금산업 마당이 보이는 곳에서 좌측으로 올라간다
43.9m봉 오르는 길에서 뒤돌아 본 복지교차로의 모습
등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水路를 따라서 올라서니 43.9m봉이 나온다
43.9m봉(12:59)
판독이 불가능한 43.9m봉 정상 삼각점
43.9m봉을 내려오니 묘지가 보이고...
묘지에 피어있는 보라색 제비꽃이 외롭게 홀로걷는 범여에게 말한다.
외롭게 혼자 다니셔요?...그러다가 다치시면 어쩌려고...
묘지 아래로 내려서니...
(주)하이테크 글로벌이라는 회사마당으로 내려선다.
702번 도로를 무단횡단하는데 스마트폰앱에 깔려있는 오룩스맵
지도에는 702번 도로가 신설도로라 그런지 도로 자체가 없다
702번 도로를 무단횡단한 다음에 좌측으로 이어지는 샛길이 마루금이다
4차선의 702번 도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들어서니 좌측의 황토밭 너머로 백산저수지가 보인다
도로 우측에는 화려한 진주임씨 숙계공파 봉안당이 보인다
차량통행이 거의없는 도로를 따라서 걸어간다
오늘은 예전과는 달리 미세먼지가 덜 심하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라서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임대 매물로 나온 공장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도로 좌측으로는 백산저수지 방향으로 이어지는 조그만 샛길도 보인다
망해버린 부페식당 너머로 보이는 절골마을에는 G5스테이션 아파트공사가 한창이다
삼거리가 나오고 지평선마을 버스정류장 부스가 보이는 곳으로 직진한다
지평선마을 버스정류장(13:17)
김제평야는 들이 넓어 국내에서 유일하게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곡창 지대로
여타 도시보다 역사·문화유산이 많이 있는 김제시는 새 천 년을 앞두고 김제시를 대표할만한
자랑거리 선정에 부심하였는데,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주식인 쌀을 생산하는 국내 최고·최대의
평야를 갖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김제지평선축제를 개최하게 되었다.
김제지평선축제는 김제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의 소중함과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 김제시가
1999년 이래 매년 개최하고 있는 행사로서 여느 지역 축제와는 다른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축제 개최 이후 2009년까지 5년 연속 전국 최우수 축제로 자리매김하면서 현재는 국내외로
명성을 떨쳐 문화관광부와 전라북도의 후원을 받으면서 외국 관광객들도 대거 방문하는
국내 최대의 축제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지평선산업단지 다목적 복합센터(13:20)
지평선산업단지 다목적 복합센터를 지나 직진으로
향하는데 아마도 공장이 들어설 모양이다
이곳은 김제 지평선 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된 곳이나 아직은 공장은 별로없다
산행이 아닌 도보순례는 계속된다.
무작정 걷다보니 직진으로 이어지는 지맥 마루금은 휀스에 막혀 버렸다.
휀스 안쪽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에는 김제 지평선 일반산업단지
공장들이 드문드문 보이나 갈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우측으로 향한다
마루금이 아닌 그냥 도로를 따라서 한참을 우회해야 한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 했던가...(13:30~40)
이곳 도로가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망고와 오렌지, 커피우유로
점심을 대신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휴식을 취하고 걷자마자 사거리가 나오고 지평선산단2길 이정표
방향의 좌측으로 꺽어져서 마루금을 벗어나 무작정 걸어간다
도로 건너편에는 HR E&I이라는 공장 정문이 보인다
김제 지평선 일반산업단지 휀스에 막혀버린 마루금의 모습
(주) 글로텍이라는 공장 정문을 지나니 공단사거리가 나오고 마루금에 복귀한다
공단사거리(13:50)
공단사거리 신호등이 적색이긴 하지만 차량이 다니지 않아서
무단횡단을 한 다음에 로얄캐닌이라는 공장 휀스를 따라서 걸어간다
맞은편에는 세중산업주식회사라는 공장이 보이고, 도로를 건너 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 뒷쪽에 보이는 절반쯤 날아간 봉우리가 지도상의 32.4m봉이란 올라간다
32.4m봉(13:54)
봉우리 절반은 날아가 버렸고 잡목의 강력한 저항(?)으로 봉우리에서 그냥
내려와 공단 도로로 복귀하니 길건너에 꽤나 큰 규모의 로얄캐닌 공장이 보인다
로얄캐닌(13:56)
로얄캐닌 공장을 보면서 공단길을 걸어간다
로얄캐닌 공장과 작별을 하고 도로를 건넌다
(주)케이비아이라는 분체도장 공장을 지나서...
삼거리가 나오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농업기술실용화재단 호남권종자종합처리센터 건물이 보이고
좌측의 도로를 따라서 김제대동농공단지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공단의 도로가에는 이팝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농업기술실용화재단 호남권종자종합처리센터(14:02)
농업기술실용화재단 호남권종자종합처리센터를 지나면서
지도상에는 이곳이 삼각점이 있는 35.5m봉인데 공단 부지를
조성하면서 없애버렸는지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길이
없어서 무척이나 아쉽다
대동농공단지 버스정류장(14:07)
대동농공단지 버스정류장을 지나서 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대동농공단지(14:10)
김제시 만경읍 대동논공단지가 속해있는 대동리(大東里)는 만경읍 동쪽에
있는 큰 마을이라 붙혀진 지명으로 1460년경(세조 6) 전주이씨 이희금(李希琴)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이희금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형인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증손으로, 1453년(단종 1) 일숙(壹叔)인
좌찬성 이양(李禳)이 3명의 재상들과 함께 순절하고[공주 동학사 「소혼각기(昭魂閣記)」
등재], 일문(一門) 삼육신이 화를 당할 때 몸을 피해 대동리까지 내려와 숨어 살았다고 한다.
동쪽은 백산면 수록리, 남쪽은 백산면 부거리, 서쪽은 장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평야지역으로, 대동, 소동, 동산동, 내죽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한참을 걸은 다음에 대동농단지를 벗어나니 소동교차로가 나온다
소동교차로(14:17)
소동교차로를 지나면서 바라본 소동마을의 모습
만경읍 대동리에 속한 소동마을에는 '김만경 외애밋들 들노래'가 전래되고 있는데,
만경읍 일원에서 농업노동요를 부르면서 농사일을 하는 전통 민속놀이로 만경은
글자 그대로 풀면 ‘두둑이 만개라는 뜻’으로서 이는 곧 들이 넓다는 뜻이다.
만경읍 대동리 소동마을 태생 故 이부휘 등으로부터 농요의 가사를 수집, 지난 1996년
봄부터 가창자와 농부들을 동원해 모심기와 김매기, 벼베기, 등짐하기 등을 실제로
실행하면서 김제문화원에서 35곡의 농요를 채록했는데, 현재는 김제 지평선축제 등에서
재현되고 있으며, 박보현씨에 의해 '모심는 노래' 등 11곡의 구전농요가 전승되고 있다고 한다.
소동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외국인 한명이 버스를 기다리다
나를 보더니 정확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넨다
소동마을 버스 정류장을 지나면서 새만금과 전주간 고속도로 공사장을 만난다
새만금에서 포항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준공되면 만경 남(모악)지맥 마루금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뀔듯 하다
새만금과 전주간 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지나서 도로를 따라서 가다가...
직진으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를 따라가면 백산면 부거리 부창(富昌)마을로
연결되는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 마을 도로를 따라서 대동1육교
방향으로 향한다...부창마을은 원부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도자기를 만들어
팔던 곳이어서 점촌(店村)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창으로
고쳤으며, 청주한씨 집성촌이다
백산면에 속해있는 부거리(富居里)는 동쪽은 하정리, 서쪽은 대동리, 북쪽은 수록리와
경계를 이루는 평지로 원부, 부건, 하건, 부신, 부창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부건은 수리시설이 없던 옛날, 마을에 매년 흉년이 들어 마를 건(乾)자를 써 부건이라
하였는데 광복후에 세울 건(建)자로 바꾸었으며 이 마을은 호남야산개발을 한 후
부유한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 양청마을을 지나간다
양청(兩靑)마을은 석교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대청(垈靑)과 앙청(仰靑)을
통합하여 양청이라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의 호종공신인 윤찬(尹瓚)의 후손들이 400여년간
대(代)를 이어 세거(世居:한 고장에 대대로 삶)하고 있으며, 문화재로는 호종공신 윤찬, 의병장 박정영,
병자호란 때 전사한 윤여임(尹汝任)과 백선남(白善南), 윤여임의 동생 윤여인(尹汝仁)을 기리는
청곡사(靑谷祠)와 함께 김제시 신곡동과 백산면 석교리에서 흐르는 신평천에 놓인 석교(石橋)가 있다.
지도상에는 보리밭 너머가 17.3m봉이 있다고 하는데 그냥 지나간다
조산농장을 지나는데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에 먹기좋은 엄나물순이 보인다
길가에 있는 엄나물순...자꾸만 손이 근질근질한데 오해받기 싫어서 그냥 지나친다
우측에 고속도로 공사현장이 보이고 조금을 더 지나니 대동1육교가 나온다
대동1육교(14:37)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와 만경읍 대동리를 잇는 육교로 육교
아래로는 김제와 군산을 잇는 29번 국도가 시원스레 달리고 있다
대동1육교 위에서 바라본 29번국도 군산쪽의 모습
베낭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에 정신이 팔려 아무 생각없이 도로를 걷다보니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에는 고속도로 공사 현장이 보이는데 행여 알바를 할까봐서
스마트폰의 트랙을 보려는데 이게 뭐여?...폰의 베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어 꺼져있다.
이것 참 난감하다...
그래!...君子는 大路로 걸어라 했거늘...그냥 직진으로 이어지는 큰 길을 따라간다
고속도로 공사중인 위에서는 일본식 가옥처럼 생긴 집도 보이는데 이곳은 대동리 유적이
출토된 곳으로 김제시 만경읍 대동리 소동마을 남쪽의 동서 방향으로 나 있는 구릉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초기국가시대의 유구 유적으로 유구(遺構)는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유적을 말하는데, 그 방식에 따라 크게 수혈 유구(竪穴遺構)와
구상 유구(溝狀遺構)로 나누어지며, 수혈 유구는 둥그런 구덩이를 파서 집을 지은 것이고,
구상 유구는 길게 도랑을 파고 기둥을 세워 집을 지은 것을 말한다
시멘트 도로가 끝나면서 고속도로 공사현장이 나오고 스마트폰을 켤려고 보니
왜 이리 충전이 드딘거야...이제 겨우 3%라 전화기가 켜지지가 않는구나.
에라 모르겠다...그냥 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가로 지른 다음에...
고속도로 현장을 올라서니 포장도로가 나오고 곧이어 대동2육교가 나온다
대동2육교(14:54)
대동2육교 아래로는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가고 남쪽으로는 서김제I.C가 보인다
대동2육교를 지나니 사거리가 나오는데 아직도 베터리 잔량이 부족한지
스마트폰이 켜지지 않는다...무작정 직진 방향으로 걸어간다
도로 우측에는 삭녕(朔寧)최씨 만경대죽문중 세천비가 보인다
뭣에 쓰는 물건이고?
보리밭 좌측 아래로는 능제저수지(菱堤貯水池)가 보인다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에 있는 능제(菱堤)저수지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만경현조에도 능제라고 기록되어 있는 오래된 저수지로 귀[굽이·귀퉁이]가 99곳이나
되는데, 귀가 100곳이 되면 나라에 큰 경사가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본래 주변 구릉지의 물을 가두는 재래지(在來池)였으나, 1930년 1월 1일 확장 공사를
시작하고 그해 12월 31일 준공되어 운암호의 물을 받아 저장하는 양수저수지(揚水貯水池)가
된 저수지이다.
한참을 걷다보니 전봇대 장산1길이라는 도로명 주소가 있는 장산리까지 왔다.
스마트폰 충전 표시가 20%를 가리키고, 전화기를 켜서 트랙을 확인하니
에공!...망해 버렸네...봉사 문고리 잡는 식으로 걷다보니 한참을 알바를 한다
그나마 다행인게 고도차 큰 봉우리가 아니고 도로라서 큰 걱정없이 왔던 길로
되돌아 대동2육교 방향으로 향한다
김제시 만경읍에 있는 장산리(長山里)는 남서쪽에 능제 저수지가 있는 낮은 언덕지형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장산, 대죽, 황산동, 용지동 등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장산은 마을의
산이 길게 뻗어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황산동은 항상 누런 황토흙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황상골로 불리기도 하는 마을이다.
다시 대동2육교 앞(15:10)
왕복 1.3km라는 소득도 없이 알바라는 헛짓거리를 한 다음에
대동2육교 앞까지 와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도로가에서 아주 오랫만에 만나는 자주광대나물꽃
길을 걸으면서 트랙을 보니 서해안 고속도로 서김제I.C 북쪽으로 보이는
황토밭이 트랙인데 스마트폰이 꺼졌던 대동1육교를 지나 마루금을 한참
벗어나서 걸어온 셈이다...10년과 달리 요즘은 전화기속의 트랙만 확신하고
걸어온 결과이다...지맥길을 시작할 초반 무렵에는 정확하게 기록된 선답자의
산행기를 달달 외우다 못해 A4용지 5장 분량으로 빼곡히 적어 가지고 다니면서
산행을 했는데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면 지도에다 나침판까지 다 되니 범여의
머리는 퇴화될 수 밖에 없제...어차피 서해안고속도로로 인해 제대로 마루금을
이어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알바의 흔적을 지운다....ㅋㅋㅋ
이곳도 새만금~포항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마루금의 지형이 확 바뀌겠지.
전봇대에 반가운 선답자들의 흔적이 보인다
도로 앞에는 전주세관성덕냉장보세창고가 보이기 시작하고...
전주세관성덕냉장보세창고(15:20)
전주세관성덕냉장보세창고와 참푸드라는 곳을 지나니 우측에 호화로운 묘지가 보인다
대석리 사거리(15:22)
직진으로 이어지는 좁은 도로 방향으로는 지평선 중.고등학교 방향이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도로를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대석리 버스 정류장(15:23)
김제시 성덕면에 있는 대석리(大石里)는 돌샘[石井] 부근에 있는 큰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자연마을로 소석(小石)·대석(大石)·용소(龍沼)·신기·신등(新等)·신평·
신교(新橋)·수교(水橋) 등이 있으며, 소석과 대석은 돌샘에서 솟아나는 물을 두 마을에서
먹은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작은 마을을 소석, 큰 마을을 대석이라 하였다.
도로를 따라서 간다
도로 우측에는 관리가 안된 재각(齋閣: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이
있고, 그 뒷쪽으로는 능제저수지 위로 조금전에 헛짓거리하면서 갔던 장산마을이 보인다
고속도로공사 현장을 지나니...
두무동마을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두무동(杜舞洞) 버스 정류장(15:30)
두무동(杜舞洞)은 김제시 성덕면 묘라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관 두사총이 마을 부근에
목단반개(牧丹半開)의 지형이 있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양수장은 묘라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섬진강(蟾津江) 유역의 옥정호 물을 만경면 지역에
공급하기 위해서 능제에 저수하고, 이 물을 뿜어 올리는 양수장을 설치한 뒤로 붙여진 이름이다.
사거리는 후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열 ‘십(十)’자로 난 길의 주변에 마을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네거리라고도 한다
묘라(妙羅) 버스정류장(15:33)
김제시 성덕면 묘라리의 본 마을로 묘라는 임씨가 터를 잡은 마을로, 300여년전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 두사총이 마을 모양이 풍취라대의 형국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묘라의 지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도 전해져 내려오는데, 마을 사람이 밥을 잔뜩
먹고 배가 불룩해지자 산으로 가서 누워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왜 이렇게 배가 부르냐고
물어 보자, “밥을 많이 먹어서 요래 됐소.” 하고 대답한 뒤로 요래가 되었다고 한다.
또 묘화라는 처녀가 이 마을에 살아서 묘라가 되었다고도 하는데, 충신효자 유지화
정려(忠臣孝子柳志和旌閭)가 있다
묘라 버스정류장을 지나 민가처럼 생긴 묘원사의 절집이 있는 우측의 小路를 따라서
500m지점에 남산서원, 400m 지점에 용화사가 있다는 표지판이 있어서 가고싶은
맘은 굴뚝같으나 귀경하는 차표를 끊어놓지 않아서 그냥 지나친다
남산서원은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에 있는 서원으로 사당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병자호란 때 척화파(斥和派)로 활약한 유지화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74년(선조 7)에 창건하였고 그후 순조 때 남궁 제를 배향하였으며 1870년(고종 7)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70년에 다시 중건된 서원이고, 용화사의 기록은 안 보인다
민가처럼 보이는 묘원사라는 절집을 지나자마자 도로 우측의 대밭으로 올라간다
등로가 없는 곳으로 치고 올라서니 삼각점이 있는 27.5m봉이 나온다
27.5m봉(15:43)
27.5m봉 정상 삼각점(△대야443 / 1980복구)
27.5m봉 아래로 내려서니 해주오공 묘지가 보이고...
조금전에 헤어졌던 도로명 주소가 만경로라는 도로로 다시 내려선다
도로 우측에 지도상의 22.7m봉이 있다고 표시가 되나 그냥 지나친다
만경삼거리 300m 남은 지점에 이정표
도로 좌측 아래의 구릉에 태양광 판넬이 있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다른 지역에 비해 가장 많이 만난게
영농법인, 태양광 판넬, 호화묘지 등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만경삼거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만경삼거리(15:55)
만경사거리에서 삼복주유소를 끼고 >자 방향으로
들어서 711번 도로를 따라서 마루금을 이어간다
삼복주유소를 지나자마자 버스정류장이 나오는데 이곳이 진구렁목이란다
또다시 이어지는 도로는 지맥길이다
가정집처럼 보이는 건물이 축산물육가공장인 다보실업이다
다보실업 앞을 지나가는데 만경읍에서 쥐불알만한 버스(마이크로 버스)가 온다.
갑자기 산행이 하기 싫어져서 버스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손을 들었는데도
버스를 세워준다...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버스에 올라타니 손님은 아무도 없고
달랑 나혼자다...버스 요금(1,000원)을 내고 버스내에서 베낭을 정리하는데
버스는 지 혼자서도 잘도 달린다...한참을 달리다가 김제시내에 접어들어
전통시장에서 손님이 꽉찬 다음에 가다가 김제역에서 10분정도 기다리다가
김제터미널에 도착하니 16시 48분이다
김제버스 터미널(16:48)
매표소에 가서 표를 예매하려니 16시 40분 버스는 출발해 버렸다
김제역에서 10분만 안 기다렸어도 16분 40분 차를 탈 수 있었는데...
김제버스 터미널 시간표
김제발 → 서울행 버스
버스표를 예매하고나니 2시간도 훨씬 더 남은 시간적 여유가 있다.
어차피 집에가면 늦을테고, 주변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려고
식당을 찾아보지만 터미널 근처에 있는 식당들은 한결같이 문이 닫혀있다.
한참을 걸어서 체육공원 아래로 내려서니 김밥천국이라는 곳에 문이 열려있다
식당에서 점심겸 저녁으로 사골 떡국 한그릇과 소주 한병을 시키니
소주는 팔지않는다고 한다...알고보니 청소년들이 많이오는 식당이다.
시간도 보낼겸 최대한 천천히 식사를 끝내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깔끔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다시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버스터미널에서 와서도 1시간 가까이 멍하니 앉아서 멍때리기를
하다가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만경남(모악)지맥(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경 남(모악)지맥 제5구간 - 만경삼거리에서 합수점까지까지 (0) | 2023.05.29 |
---|---|
만경 남(모악)지맥 제3구간 - 유각치에서 구암마을 버스정류장까지 (0) | 2023.03.20 |
만경 남(모악)지맥 제2구간 - 밤티재에서 유각치까지 (0) | 2022.11.28 |
만경 남(모악)지맥 제1구간 - 분기점에서 밤티재까지 (0) | 2022.03.07 |
만경 남(모악)지맥 개념도 및 지도 (0) | 2022.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