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3년 05월 28일
☞ 산행날씨: 하루종일 오락가락하면서 가는 빗방울
☞ 산행거리: 도상거리 18.3km / 5간 4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만경삼거리-가실삼거리-늘푸른한우목장-가실마을-가실마을 버스정류장
화산제양수장-석교마을 입구-진봉초교-하수네 마을입구-상궐정미소
갈림길-중앙마을-5.9m봉-진봉농협저온창고-종야마을입구-갈림길
고속도로 아래-702번 지방도-석치마을-갈림길-장수황씨가족묘원
안부-31.9m봉-십자안부-니성산-안부-안부-국사봉-702번 도로
갈림길-철조망-35.5m봉-안부-녹색명소 전망대-망해사 가는길
망해사-두곡서원-남촌 곽경열 선생 추모비-진봉망해대-진봉산
갈림길-신천강씨 추모당-심포마을 버스정류장-안하삼거리
이천서공&전주최씨 묘-66.1m봉-당산나무 쉼터-길곤마을 갈림길
안부-봉화산 봉수대 터-봉화산-안부-새만금 바람길 종점-40.3m봉
만경강 / 동진강 합수점(?)
☞ 소 재 지: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성덕면, 진봉면
요즘엔 뭔 조화인지 주말마다 내리는 비로 인하여 매주 산을 가야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괴롭다...내가 이럴진데 주말에 대목을 노리는 유원지의 자영업자는
얼마나 괴로울까...6월안에 백두대간에 가지를 쳐서 나온 지맥 강원도의 3곳이
남았는데 이곳은 산들도 높고 험하지만, 워낙 잡목의 태클이 심한대다 교통편마저
좋지 않아 잡목이 기승을 부리기 전에 끝내려고 하는데 이곳도 비가 온단다.
나홀로 하는 산행이라 이런곳은 비가오면 대처하기가 쉽지않고 거기다가
워낙 오지라서 스마트폰이 안 터지는 곳이 많아서 이번주는 이곳을
포기하고 우산을 쓰고도 걸을 수 있는 만경 남(모악)지맥 마지막 구간을
가기로 한다.
토요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서 하루종일 절에 있다가 오니 피곤하다.
집에서는 비오는 날에는 산엘 안 갔으면 하는데, 그렇다고
가지 않을 내가 아닌줄 알기에 일언반구도 않고, 닭좇던 개 지붕 쳐다보듯
무관심하다...가야할 김제지역 날씨를 검색하니 오전에는 흐리다가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이나, 워낙 기상청의 일기 예보가 맞질 않아서 믿지 않는
편이지만 영 안 믿을수는 없기에 참고만하고 아침에 일어나 베낭을 챙겨서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김제행 버스표
집에서 평소보다 늦은 05시 40분에 집을 나와서 터미널에 도착하니 06시경이다
버스표를 예매하고 30분 이상을 대합실 의자에 앉아 멍때리기를 하다가
버스에 올라 평소의 습관처럼에 깊은 잠에 빠졌다가 버스가 휴게소에 정차하는
바람에 잠에서 깨서보니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정안휴게소이다
이곳에서 아침으로 유부우동을 한 그릇을 해치우고 버스에 오르는데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논산을 지나 익산지역을 통과할 무렵에는 장마비처럼
쏟아지는데 산행을 시작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이 많다...버스는 서전주I.C를
빠져나와 완주 혁신도시를 지나 김제방향으로 향하는데 다행히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 지면서 소강상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김제터미널(09:35)
김제터미널 버스 시간표
터미널을 빠져나와서 택시를 타고 산행 들머리인 만경삼거리로 향한다.
터미널을 출발한 지 15분만에 만경삼거리 SK주유소에 도착하는데
다행히 비는 보슬비로 바뀌었다(택시요금 10,000원)
만경삼거리(09:50)
만경읍과 성덕면의 경계에 있는 삼거리와 711번 도로인 해학로와
지선인 만경로가 합쳐지는 삼거리로 직진을 하면 만경읍 소재지가 나온다.
‘만경(萬頃)’이라는 지명은 조선 시대 하천의 하류에 입지하였던 만경현(현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에서
유래되었는데, 본래 만경은 백제 시대에는 두내산현(豆內山縣)이었는데, 신라 시대에 만경현으로
개칭되어 김제군에 속했고, 고려 시대에는 임피현(臨陂縣)에 속하였으며, 1913년 김제군에 편입되었다.
‘만경’의 ‘경(頃)’은 ‘백만 이랑’이란 뜻으로, 넓은 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만경은 한국불교의 한국의 고승(高僧)이자 불교학자로 조계종 중앙역경원 초대원장을 지내며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대만에서 비교종교에 대한 특강을 하여 세계적인
석학으로 추앙받기도 했던 탄허(呑虛:1913~1983)선사의 생가가 만경읍 대동리에 있다
탄허 큰 스님께서 옛 말씀에,
“道를 잃으면 德이라도 갖추어야 하고 덕을 잃으면 仁(사랑,자비)이라도 베풀줄 알아야 하며
仁을 잃으면 義(정의,도리,옳음)라도 지킬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의를 잃으면 禮라도 차릴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요즘은 어떻게 되는지 스님의 바람과는 달리 인간이길 포기하고
사는 중생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다.
*탄허(呑虛)스님은 유불선 및 주역 등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은 현대 한국불교의
큰 스님으로 그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1913년에 탄생하여 22세인 1934년에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했는데 스님의 스승은 당대 최고의 선승인 한암스님이었다.
월정사를 중건하고 화엄경 등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도쿄대와 국립타이완대학 등에 특강을
통해 세계적인 석학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1983년 71세에 열반하셨다... 탄허스님은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예언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6.25전쟁, 울진ㆍ삼척지구 공비침투,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12.12사태, 남북통일, 일본의 수몰, 핵폭발, 지축의 정립 등 수 많은
예언을 했으며, 서예도 경지에 이르러 전국에 많은 사찰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산행을 시작하다(09:55)
산행 시작부터 711번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엄격하게 말하면 산행이기보다는
해파랑길 같은 그런 길이랄까...그래도 엄연히 트랙상의 맥길이니 안 갈수가 없구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이 다른 산꾼이 다 걸었던 이 길...나도 가야지, 우짜겠노,
생각보다 도로에는 차량들이 많이 다닌다...우산을 쓰고 길을 걸으려니
엄청나게 거추장스러워서 아예 우산을 접고, 비가 오면 오는대로 맞고
안오면 더 좋고 하는 바램으로 걍 그냥 걷는다
산행을 시작하자 만나는 새만금~전주간 고속도로 공사장
인간이 추구하려는 편리함 때문에 망가지고 있는 자연.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도 살지 못한다는 걸 우매한 衆生들은
깨닫지 못하는가 보다...
5~6년전인가 한국과 부탄과의 수교 30주년의 기념 행사의 일원으로
7박 9일간의 부탄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전세계의 국민
행복지수 1위였던 부탄을 여행하면서 가이드에 들은 얘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부탄의 헌법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전 국토의 68%는 산지로 보존하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터널을
착공하지 말것같은 친환경적으로 국정 운영을 하여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 법으로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가실삼거리(10:02)
711번 도로를 따라서 가다가 성덕면소재지로 이어지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져서 도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가실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지자마자 경주이씨 백사공파 정토산 묘원이 보인다
법구경에서는 길을 이렇게 정의했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어라.
피곤한 사람에게 길은 멀어라.
바른 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아아, 생사의 밤길은 길고 멀어라.”
* 법구경(法句經)》의 팔리어 이름은 《담마파다(dhammapada)》인데, dhamma는 ‘법’ ·
‘진리’, pada는 ‘구(句)’ · ‘말씀’이라는 뜻으로 초기 불교의 교단에서 전해지던
게송(偈頌:부처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들을 모아서 주제별로 분류하여 엮은
경(經)으로, 팔리어본은 26품 423송이고, 한역본은 여기에 13품이 추가된 39품 752송이다
빗줄기는 많이 가늘어졌으나 비는 계속 내리는데 아쉬운대로 걸을만하다
늘푸른한우목장(10:08)
유일한 인증샷
도로를 따라서 부지런히 걷는다...걷는 속도는 시간당 5km정도로 준수한 편이다
가실마을(10:15)
김제시 진봉면에 위치한 가실리(加實里)는 남쪽에 성덕산(26.5m)이 있는 낮은
언덕지형이며, 자연마을로는 가실, 정동, 정서, 신정, 부동, 가신성 등이 있다.
가실 마을의 형성 연대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으나 조선시대로 추측되며,
당시에는 큰동네, 서당너머, 달동네, 새터 등으로 불리다가 행정구역 개편시 가실로 변경되었다.
가실마을 버스정류장(10:16)
우리는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
길이란 그곳을 먼저 걸었던 이들이 만든 것이다.
길이 있다는 것은 나보다 앞서 걸어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누군가는 그 길을 통해서 어딘가에 다다랐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최고 곡창지대라는 김제 들녘은 쌀만 많이 나오는게 아니라
보리농사도 유명한 지 노랗게 익어가는 보리밭은 쳐다보는것 만으로도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화산제 양수장(10:19)
사람이라면 누구나 걷고 있는 인생이라는 길도 그렇다.
그 누구도 내 갈 길을 가르쳐줄 수 없다.
하기는 누군가가 걸었던 것과 꼭 같은 길로는 갈 수 없다.
그 길은 그때와는 달라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잘 걸어오던 길을
새삼스레 묻는 건 길을 잃어서가 아니다.
잘 걸어가고 있는지 되묻는 것이다.
길을 묻지 않을 때가 오히려 더 위험하다.
그러므로 문득 고개를 들어 길을 찾게 된다면,
계속 걸어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지면 된다.
홀로 앉고 홀로 눕고
홀로 거닐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한 곳에 집중하여 몸을 바르게 하고
숲속에 머무는 것을 즐긴다.
法句經의 廣衍品 中에서
水路를 지나서 계속해서 합수점으로 향한다.
맥길을 걸으면서 철저히 적용되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칙
우리나라 전통 지리의 핵심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신라에서 조선까지 거의 모든 지리서와 지도에 이 원리가 적용되었다.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는 분수령이라는 뜻으로 물이 산의 능선에 떨어지면 양쪽으로
갈라져 흐르므로 자연스럽게 산은 분수령이 되는 것이며, 갈라져 흐르는 물은 산의
능선이 존재하는 한, 하나로 만날 수 없이 두 개의 물줄기로 흐르다 능선이 없어지는
지점 즉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서로 합쳐지는데 이 지점을 합수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김제평야를 적시면서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수로는 인공 수로로
산자분수령에 적용되지 않는 물줄기이다...예전에 이곳은 간척지라고 하며
해발 고도가 10~20m 정도밖에 안되는 곳이란다
평야 / 김용택
그대 두고 돌아 오는 길
사랑 하나 없는 달빛 아래
김제만경 보리밭보고
울었습니다
차창에 기대에
달빛에 반짝이는
밤이슬 보며 울었습니다
캄캄하게 속 빈 갈대처럼
들판이 넓어서
들판이 넓어서
하얗게 울었습니다
보리걷이가 끝나고 모내기가 시작이 댓건만
왁짜지껄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구나.
들녘이 넓은 김제평야라서 그런가...
아니면 내 어렸을 적의 추억을 되돌린 탓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농삿일을 기계가 대신한 탓인가?
지리산 줄기쳐서 내려온 첩첩산중의 내 고향 의령땅의
학창시절에는 보리베기와 모내기철에는 가정학습이란
이유로 학교가 안가고 농사일을 거들었던 추억이 아련한데...
석교마을 입구(10:28)
이렇게 살기좋은 평야지대 마을도 점점 인구가 줄어드는 모양인지
도로에서 석교마을을 바라보지만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가
않는구나...석교(石橋)마을이라 예전에 돌다리가 있었던 마을인
모양이나 지명에 관한 유래는 알 길이 없으니 추측만 해본다
돌아보면 먼 길을 걸어왔다.
희망과 좌절, 기쁨과 슬픔, 땀과 외로움
속에서 걷고 걷다가 어느새 나이가 들었다.
사람들은 知天命이니 耳順이니 하며 삶의 연륜에
걸맞게 나이를 구분하여 말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삶은 어렴풋하기만 하다.
지금 삶이 불확실하다는 것 외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석교마을 버스 정류장을 지나니 정당리 갈림길이 나오고 맥길은 심포항으로 이어진다
김제시 진봉면에 속한 정당리(淨塘里)는 원래 마을 근처에 큰 연못이 있어 다못 또는
다뭇이라 하였는데,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깨끗한 연못[淨塘]으로 바뀌었다.
진봉면 대부분 지역이 그렇듯 방조제가 설치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특히 정당리는 지대가 낮아 간척된 뒤에도 연못이나 호수 형태로 남아서 지명 유래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갈전이나 대덕에서 소금을 굽거나 염전이 존재했다는 점도
이 지역 일대가 바닷가였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는데, 지금은 진봉평야의 일부가 되어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정당·효정(孝井)·다상(多上)·다하(多下)·
갈전(葛田)·대덕(大德)·소덕(小德) 등이 있다
흰머리가 늘어나고 가끔씩
뒤를 돌아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내 생각과는 다른 남의 생각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 아집과 편협함이 지금도 내 안에
크게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나를 해치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미움과 탐욕 그리고 원망의 감정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는다.
진봉초교(10:40)
1924년에 개교한 학교라고 하니 100년의 역사를 가진 초등학교이다.
도로에서 바라보니 학교라기 보다는 마치 기업의 연수원처럼 보이는 멋진 학교다
교문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비는 잠깐 멈추지만 높은 습도로
인하여 후덥지근하지만 그런대로 걸을만하다...바람만 조금 불어주면
錦上添花련만...하지만 그 바램은 어쩌면 내 욕심이 아닐까...
하수네 마을입구(10:42)
진봉면 상궐리에 속해 있는 마을로 1920년대 이후에 진행된 간척 사업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상궐정미소(10:43)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골 모델(?)이다
김제시 진봉면 상궐리(上厥里)는 1914년 고사리가 많이 나는 고사리 밭(궐전:蕨田)을
중심으로 위쪽을 상궐(上蕨), 아래쪽을 하궐(下蕨)이라 하였으며, 1872년에 제작된
지방군현도(地方郡縣圖: 신라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방 행정 단위인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을 표시한 지도)에 따르면 상궐리 대부분이 바다였었는데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상궐리 일대에 간척 사업이 진행되어 낮은 구릉을 제외하고는 마을 대부분이
해안가의 낮은 평야 지대로 변모하였다.
자연마을로 상궐·하궐·석교·상수내·하수내·신흥·망해·오산·전중 등이 있으며, 이 가운데
상궐·하궐·풍촌을 제외하고는 모두 1920년대 이후에 진행된 간척 사업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갈림길(10:45)
직진을 하면 진봉면의 행정구역이 있는 관기(館基)마을로 가는 길이고
지맥길은 좌측의 도로로 향한다
관기(館基)는 진봉면사무소를 비롯한 지서와 단위농업협동조합이 있는 마을로 앞으로
관청의 터가 될 것이라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진봉면 일대에 많은
농토를 개척한 일본인 다목(多木)이 소작료를 거두기 위해 농장 사무실·창고·정미소 등을 짓고,
거두어들인 소작료로 별장을 지어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치안과 안전을 위해 고사에 있던
지서를 이곳으로 옮겼다.
광복이 되어 다목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별장이 비게 되어 1952년 면의회 의원들이 상궐에
있던 면사무소를 이곳으로 옮겨 오자, 옛 전설이 맞아 떨어졌다고 함방귀씨는 전한다.
한편 마을 주민 김을수의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관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이곳 빈터에
쌓아 두어 관터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관기가 되었다고 한다.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도 관기(館基)로 적혀 있다.
y자형 삼거리에서 좌측의 도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가는데
행정구역도 진봉면 상궐리에서 고사리(古沙里)로 바뀐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앞서 지나갔던
끝없이 펼쳐진 그 길을 바라보며
이 순간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그리고 그 길에서 내가 정말
올바르게 가고 있는 것인지
그 길에서 묻고 또 묻는다.
중앙마을(10:58)
중앙(中央)마을은 관기에서 남쪽으로 약 1㎞ 떨어져 있는 마을로
진봉면 전체를 통틀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헌 등산화에 펑크가 난는지 등산화에 물이차서 걷기가 불편하다.
마을회관이 보이기에 신발도 교정할 겸 회관문을 두드리니
문은 굳게 잠겨있다...하는 수 없이 다시 길을 나선다
도로(道路)라는 말이 더 익숙하지만 차가
다니는 길은 차도(車道)이고 사람이 다니는 길은 인도(人道)다.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천도(天道)는 천체가 움직이는 길이다.
도(道)는 이렇게 무언가가 다니는 길이다.
유교에서는 ‘인도’를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 ‘천도’를 모든 것이 따라야 할
이치라고 했는데 길을 따라 걷는 이에게는 그 길이 걸어갈 방향이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길에서 흔히 들었던 “도를 아십니까”라는 말은
“살아갈 방향을 아십니까?”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이렇게 길이라는 말은 인생의 이치와 방법이 된다.
도로와 수로 사이에 흐드러지게 핀 양귀비꽃을 만난다.
요즘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되는 양귀비꽃.
뽕쟁이들이 보면 환장할 양귀비가 도로가에 심어져 있다.
근데 자세히 보면 양귀비가 아니라 개양귀비이다
마약 성분이 없는 관상용 양귀비를 ‘개양귀비’라고 부르는데, 옛날 사람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원래와 다른 것의 이름을 지을 때 접두사로 ‘개’자를 붙였다.
옛날 사람들이 진짜와 가짜,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을 가르는 기준은 참 명료했다.
그렇게 지어진 이름 중에 대표적으로 ‘개꽃’이 있는데 다름아닌 철쭉이다.
진달래에 참꽃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철쭉을 개꽃이라 하대(下待)한 이유는
진달래는 먹어도 좋지만 철쭉은 독성 때문에 먹을 수 없어서였다.
그런가 하면 오리지널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오리지널은 아니라는 의미로 ‘개’를
붙이기도 한다.
개양귀비(꽃말:‘속절없는 사랑)
개양귀비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을까... 오리지널인 양귀비꽃처럼
아편 성분은 없지만 양귀비꽃만큼 아름답고 예쁘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처럼 미모가 빼어난 꽃의 이름이 ‘개양귀비’라니 어감(語感)이 좋지 않다.
알고보니 개양귀비에는 다른 예쁜 이름이 있었는데 바로 ‘우미인초(虞美人草)’이다.
양귀비꽃이 중국 당나라 현종이 사랑한 여인이고, 우미인은 초나라의 영웅, 항우가 사랑한 여인이다.
항우가 유방의 군대에 쫓기다 사방으로 포위됐을 때 일이다.
항우는 어떻게든 적진을 뚫고 나간다지만 문제는 우미인(虞美人)이었다.
항우가 마지막 술잔을 들며 우미인을 걱정하는 시를 읊자 우미인은 그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답가(答歌)를 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훗날 우미인의 무덤에는 예쁘고
가녀린 꽃이 피었는데 사람들은 그 꽃을 우미인초라고 불렀다고 한다.
5.9m봉(11:04)
전봇대가 서 있는 자리가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 표기된 5.9m봉이다
5.9m1봉에 삼각점이 있다는 곳에는 작년에 수확하고 버려진 참깨 가지가 수북하다
스틱으로 치워보지만 삼각점은 망실되었는지 보이지가 않는구나.
주위의 밭을 다 헤집고 다녔지만 찾을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길을 나선다.
앞에 보이는 저 건물은 진봉농협저온창고이다
진봉농협저온창고 방향으로 가는 길에 도로옆에 방치된
삼각점이 보이는데 5.9m봉의 삼각점인지 지적도근점인지
모르겠다.
진봉농협저온창고(11:07)
종야(宗野)마을입구(11:08)
종야마을은 진봉면 고사리 관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약 500여 년 전 전주유씨(全州柳氏)
중시조 유승혜(柳承惠)가 5대째 독신으로 살던 중 너른 들판을 낀 마을에서 살아야 자손이
번성한다고 여겨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지대가 높아 ‘높은 들’,
‘마루 들’이라는 뜻을 담아 높을 ‘종(宗)’자와 들 ‘야(野)’자를 써서 종야라 하였다.
종야마을 입구에서 신고사 방향으로 향하니 종야 마을 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水路를 가운데 두고 포장도로와 비포장 도로로 나눠진다
버스 정류장 안에 있는 김제시 지도와 버스 시간표
갈림길(11:09)
이곳에서 신고사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버리고 비포장 농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좌측으로는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옥정마을이 보인다
진봉면 고사리에 속해있는 옥정(玉井)마을은 종야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
갈대가 우거졌던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샘물을 팠더니 구슬처럼 맑고 질 좋은
샘물이 솟았으므로 옥정이라 한 마을이다
길 / 이영춘
문득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본다
왠가 꼭 잘못 들어선 것만 같은
이 길
가는 곳은 저기 저 계곡의 끝
그 계곡의 흙인데
나는 왜 매일 매일
이 무거운 다리를 끌며
가고 있는 것일까
아, 돌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는
이 길.
고속도로 아래(11:16)
새만금~전주간 고속도로 공사현장 아래를 통과한다
고속도로 공사현장을 빠져나와서 우측으로 꺽어져 농로를 따르는데
들판 건너편에는 잠시후에 오를 니성산과 국사봉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합수점 가까이에 있는 진봉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보리밭 사이로 이어지는 시멘트 농로
들판 가운데 있는 농로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맥길을 이어간다
석치마을 뒷쪽으로 보이는 니성산과 국사봉의 모습
들판 가운데 있는 농로에서 다시 우측으로 꺽어진다
합수점으로 이어지는 맥길은 마치 迷路처럼 이어진다
옛날처럼 트랙이 없고 지도와 나침판에만 의존하던 때였다면
알바하기 딱 좋은 코스이다...앞에 보이는 미곡처리장을 바라보며
시멘트 농로를 버리고 논 가운데로 흐르는 수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가는데 앞에 보이는 마을이 고사리 석소마을이다
석소(石所)마을은 고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질 좋은 숫돌이
나와 나라에 바치게 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예전에 이곳이 간척지였다고 하니 과연 마루금이 어딘가하는 懷疑가 든다
702번 지방도(11:34)
종야마을 입구에서 들판 가운데 한참을 걸어서 702번 도로로 올라선다
석치마을(11:35)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에 속한 석치(石峙)마을은 인향 동쪽에 있는 마을로 1525년경
평산신씨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마을 사람들이 돌고개를 넘어서 나룻배를 타고
옥구를 왕래한데서, 마을 이름을 돌고개의 한자 표기인 석치(石峙)라 하였다.
석치마을 가운데를 통과한 다음에...
갈림길(11:39)
702번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 마을 안쪽으로 들어선다.
오늘 산행 시작점인 만경삼거리에서 8.5km를 도로를 따라서 이곳까지 걸어왔고,
초반부터 내린 비로인해 옷은 젖었다 말랐다 했기에 그런대로 견딜만 했으나
등산화 속으로 들어간 물이 질퍽거리는 바람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이곳부터는 도로와 작별하고 마을 골목을 통과하여 산 능선으로 올라가야 한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집이 들어서 맥길은 막혀 버렸다.
앞에 보이는 하얀 트럭 뒷쪽으로 맥길이 이어지는데
행여 쥔장이 시비를 걸면 어쩌나하며 조심스럽게 마당으로 들어선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인기척이 없어서 서둘러 마당을 통과한 다음에
뒷쪽으로 올라서니 황토밭에 여름 작물을 심으려는지 밭두둑을
만들어놨다.
황토밭을 통과하여 능선으로 오르는데 오늘 처음으로 산길로 들어선다
능선에 올라서면서 뒤돌아 본 석치마을의 모습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서니 묘지들이 보이고 묘지 주위에는 노랑꽃들이
많이 보이는데 처음에는 서양민들레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이 넘 역시
서양민들레와 같은 귀화식물인 서양금혼초이다
서양금혼초(꽃말:나의 사랑을 드릴께요)
유럽 원산의 귀화식물인 여러해살이풀로 줄기는 높이 30-50cm로 1cm 미만의
비늘조각이 듬성하게 나며, 잎은 모두 뿌리에서 올라오며, 도피침형으로 4-8쌍의
깃 모양으로 갈라지는데, 잎 양면에는 황갈색의 굳은 털이 밀생한다.
꽃은 5-6월에 피며, 줄기 끝에 노란색 머리모양꽃이 1개 달리고, 혀모양꽃은 끝이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데, 열매는 수과이고 겉에 가시 같은 돌기가 빽빽하게 있다.
1992년 제주도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국내도입의 경로는 1980년대 초반 초지 개량용
목초 종자의 수입과 함께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국내 밭, 밭주변, 길가, 초지, 잔디밭,
황무지 빈터 등 도처에서 땅을 덮으며 생육하고, 주로 제주도와 남부 해안지방에 주로
분포하며, 제주도에서는 민들레보다 흔하게 관찰되며, 모래언덕과 돌밭 같은 거친 땅에도
뿌리를 내리고, 추위에 잘 견디어 오름 정상부, 한라산 정상부까지 분포한다.
우리나라 토종식물에게는 생존의 위협을 가하는 대표적인 생태교란 식물로
외형적으로 서양민들레와 유사한데 서양금혼초의 로제트(짧은 줄기의 끝에서부터 땅에
붙어 사방으로 자라는 잎)잎에는 털이 빽빽하게 자라는 점이, 서양민들레의 로제트 잎에는
털이 없는 것과 뚜렷한 차이가 있으며, 또한 서양금혼초가 서양민들레에 비해 키크며,
한 개체에 여러 개의 꽃이 달리지만, 서양민들레에는 1~2개의 꽃이 달려, 두 종간 식별이 가능하다.
산길로 들어서니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명색이 지맥길이라 그런지
서서히 맥길의 本色을 드러내며 꼬라지를 부리기 시작하고 갑자기
빗줄기가 쏟아지는데 대처할 방법을 찾기도 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만나는 선답자들의 흔적들을 반갑게 만나는데
똑닥이카메라에 물이 들어 갔는지 액정 모니터에 자꾸만 error message가
뜨면서 켰다가 꺼졌다가를 반복하는데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난 기록물을 남길때 늘 똑닥이로 사진을 찍는편이라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하는 방법은 상당히 서투르다.
비에젖은 떼죽나무꽃(꽃말:겸손)
강원도 이남의 숲 속에 자라는 낙엽 작은 키의 나무로 세계적으로는 중국, 인도, 미얀마,
라오스,베트남, 필리핀, 일본 등지에 분포하며, 줄기는 높이 5-15m이며, 흑갈색이다.
잎은 어긋나며, 난형 또는 긴 타원형이고, 꽃은 5-6월에 잎겨드랑이에서 난 총상꽃차례에
2-5개씩 달리며, 흰색, 향기가 좋으며 수술은 10개이고, 아래쪽에 흰 털이 있다.
열매는 핵과이며, 둥글고, 완전히 익으면 껍질이 벗겨지고 씨가 나오며 관상용으로 심는다.
열매는 비누로 만들기도 하고, 감기약, 항균제 등의 약으로 쓴다.
묘지를 지나면서 나타나는 묵밭같은 곳을 지나는데 옷은 아예 다 젖어버리고
내 키만큼 자란 개망초와 잡풀 사이를 헤집고 지나는 자체가 곤혹스럽다.
등로는 아예 없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묵밭을 빠져 나오니 좌측으로 농로가 나온다
갑자기 나타난 農路...나무에 걸려있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반갑기만 하다.
편안한 농로를 따라서 가는데 잠시후에 오를 31.9m봉이 보인다
장수황씨가족묘원(11:50)
농로 우측에 있는 장수황씨가족묘원의 제단을 빌려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카메라를 점검하는데 왠지 불안하다
안부(11:52)
스산한 바람이 불더니
가랑비가 뿌려대고
빗방울이 구르면서
보석을 수놓으니
역마살로 무장한 홀로걷는 이 산꾼
레드카펫이 아닌 그린카펫 밟고가네
능선 오름길에 뭉탱이로 걸린 선답자들의 흔적이 새앙쥐가 된 범여를 반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는 불청객이 홀로걷는 산꾼을 곤혹스럽게 만든다...불청객은
다름아닌 시커먼 산모기이다...그것도 한마리도 아니 수백마리가 달라들어
비에맞아 땀냄새가 풀풀나는 내 몸뚱아리에다 빨대를 꽂아놓고 피를 빨아대는데
가려워서 미칠 지경이다...나뭇가지를 꺽어서 모기를 쫒아보지만 꿈쩍도 하지않고
오랫만에 만난 산꾼에게 작정을 하고 피를 빨면서 영양을 보충하려는 모양이다.
그래!...니들에게 내 몸뚱아리가 布施하는 셈 치자...내가 조금 괴로워 너희들이
배가 부르다면 그걸로 만족할께...그렇다고 죽기야 하겠나...
31.9m봉 아래에는 함안이씨 가족묘지가 보인다
31.9m봉(11:55)
오늘 처음으로 만난 봉우리라 그런지 엄청 반갑다.
고도가 낮다고 깐보냐고 하면서 산꾼에게 꼬라지를 부리지만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걸을만 하다
니성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유난히도 묘지를 많이 보인다.
옛날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묘지옆에 草幕을 지어놓고
그곳에서 3년간을 侍墓살이를 했다는데 지금은 상여가 나가는 날에
탈상을 해버리니 부모에 대한 예경심이 자꾸만 옅어지는 느낌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치더라도 최근에는 아버지를 살해하여 저수조에
유기하고, 재산문제 때문에 모친을 죽이는 일이 심심찮아 인간이길
표기하는 일이 너무 많은 끔찍한 세상이다
주자 십회((朱子十悔)의 제1에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란 말이 있듯이
"부모님에게 살아 생전에 불효하면 돌아가시고 난후에 후회한다" 라는 말인데
부모님에 대한 효도는 아무리 많이해도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에 비해
鳥足之血에 불과할 것이다.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자식이 봉양코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네.
往而不來者年也(왕이불래자년야)
가버리면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월이요.
不可再見者親也(불가재견자친야)
돌아가시면 따를 수 없는 것이 부모님이네
난 20대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효도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신세라 늘 부모님에 대한 아련한 추억만 가지고 있다
* 주자 십회(朱子十悔)란 사람이 살면서 해서는 안 될 열 가지 후회를
중국 송대(宋代)의 거유(巨儒) 인 주자(朱子)가 제시한 것을 말한다
주자(朱子:1,130~1,200)는 중국 송대(宋代)로 유학자로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인간에게는 선한 '이'가 본성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순한 '기' 때문에 악하게
되며 '격물'(格物)'로 이 불순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등로 우측의 나뭇가지 사이로 드디어 만경강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하고
그 만경강 건너 군산시의 나즈막한 들판과 산줄기들도 보이고 풀섶을
이루고 있는 전선도 제방이 마치 초원처럼 보인다
잠깐 사이의 잡목의 저항을 물리치고 전진하니...
갑자기 좋은 길이 나온다
십자안부(11:59)
편안한 길을 따라서 내려오니 십자안부가 나오는데 좌측으로는 고사리
인향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전선도 제방을 향하는 길이다
십자안부를 지나 대밭옆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니성산으로 향한다
빗물을 잔뜩 머금고 있는 엉퀑퀴는 오늘따라 왜이리도 청승맞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니성산으로 향하는 길.
니성산(尼城山:61.6m:12:05)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에 있는 산으로 정상 주위에는 숲으로 우거져서 조망은 전혀없고
비에 젖은 준.희쌤의 산패와 4등 삼각점만이 정상을 지키고 있으며, 이성산 또는 나성산으로도
불리는 산이지만 니성산에 대한 유래는 알 길이 없다.
니성산 정상 4등 삼각점(△군산 417 / 1991복구)
인증샷
비에젖은 똑닥이는 작동이 됐다, 안됐다를 반복하며 산꾼의 애간장을 다 녹인다
가랑비는 그칠 의사가 없는 모양이다
안부(12:09)
안부에서 바라본 김제시 진봉면 고사(古沙)마을의 모습
고사마을은 진봉면 소재지인 관기 서쪽으로 약 3 Km 떨어진 왕봉산 국사봉 밑에
오래된 절이 있었기 때문에 고사(古寺)라 부르다가 그 후 절 사(寺)자를 모래
사(沙)자로 바꾸어 고사(古沙)가 되었다고 하며, 만경강이 서해와 만나는 진봉반도
북쪽 해안 지대에 자리 잡은 마을로 만경강을 사이에 두고 군산시 옥구읍 및 회현면과
이웃하고 있으며, 해안 구릉지에 고사리에서 가장 높은 나성산(60.9m)이 솟아 있고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서쪽 심포리에 봉화산(82m)과 진봉산(72m)이 솟아 있다.
해안의 구릉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평지이며 멀리 만경읍 능제저수지에서 이어지는
관개 수로를 이용해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봉화산 숲길 이정표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와 기타 옛 자료에는 한결같이
‘전선포 제방’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김제시가 설치한듯한
봉화산 숲길 이정표에는 ‘전선도 제방’이라하니 상당히 헷갈린다
안부에서 밭두둑으로 올라서서 숲속으로 들어서니...
대밭 옆으로 이어지는 국사봉으로 향하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국사봉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나무계단...비에 젖은 탓인지 엄청 미끄럽다.
제도권 등로인 모양이다...뭔 뜻인지 알 수 없는 팻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비오는 날 산행은 참으로 힘이 든다...자꾸만 렌즈에 습기가 찬다.
고사마을 뒷쪽의 따르니 잠시후에 오를 국사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고사마을 뒷길에서 바라본 김제 들녘은 참으로 넓고 풍요롭게 보인다.
눈 앞에 펼쳐지는 김제시 광활면 들녁은 일제시대에 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들어 여기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일제강점기에 수탈이라는 아픔을 간직한 땅이다.
광활면(廣活面)은 1920년대 일제의 산미증식(産米增殖) 계획에 의해 광활방조제가
축조되어 신설된 간척지 면으로, 이름대로 넓은 평야에 농지정리가 바둑판처럼
잘 된 경관을 나타내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봄감자는 우리나라 생산량의 20%를
차지한다고 한다.
지명은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광활 간척지를 가리켜
'구구지간 광활만인지지(九區之間 廣闊萬人之地)'라고 했다고 하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넓다."고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향토지에서 전한다.
광활면은 본래 동진강 하류의 개펄이었으나 1949년 진봉면으로부터 행정구역이 독립되면서
광활면이라는 이름으로 3개 리, 9개 마을을 관할하였고, 1923년에 일본인 재벌이던 아베후사지로
(阿部房次郞)가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창설하고 방조제를 쌓아 3년 후에 준공을 하였다.
이로 인해 광활한 면적의 논이 조성되어 이를 '1답구'에서 '9답구'까지 이름을 붙이면서
이것이 곧 여러 마을들의 이름이 되었으며, 은파리(銀波里) · 옥포리(玉浦里) · 창제리(蒼提里)
등에 19개 마을들이 있고, 본래 김제군 진봉면의 지역이었는데 1949년 진봉면의 광활한 평야를
분할하면서 옥포 · 은파 · 창제의 3개 리를 신설하여 광활면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안부(12:14)
우측으로 묵은 임도가 보이나 좌측의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비는 계속 내리고 완만하는 능선으로 올라서니
등로에서 살짝 벗어난 국사봉 정상이 나온다
국사봉(國事峰:61.3m:12:20)
김제시 고사리에 위치한 산으로 진봉반도의 육지 끝자락에 니성산(尼城山:61.3m)과
진봉산(進鳳山:73.2m) 사이에 있는 산으로 만경강이 서해와 만나는 곳으로 주변에
전선포와 고사 마을이 있다... 고지도에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으나
『조선지형도』(군산)에는 고사리(古沙里)에 표기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인향리의
니성산도 그려져 있다.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 등록된 국사봉이 43개나 되는데 한문의 표기로는
대부분이 국사봉(國師峰), 국사봉(國士峰), 국사봉(國思峰)으로 표기되어
있고, ‘선비 사(士)나 스승 사(師), 생각할 사(思)’인데 이곳은 ‘일 사(事)’를
써서 국사봉(國事峰)으로 표기를 해놨는데 아마 誤記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국사봉 정상에서 트랙상의 맥길을 90도 좌측으로 꺽어져 냐려가야 하나
등로는 전혀 보이지 않고, 비가 계속 내리고 있으니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트랙에 살짝 벗어나 있는 편안한 직진의 임도로 내려서니 우측으로
전선포(戰船浦) 제방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으나 고사마을쪽으로 내려간다
선답자들도 내 생각과 같았는지 편안한 등로로 내려간 모양이다
편안한 임도로 내려와서...
702번 도로가 보이는 묘지로 내려선다
뚜렸한 우측의 임도를 버리고 묘지 아래로 내려서면서 좌측으로 향한다
702번 도로(12:27)
조금전 석치마을에서 헤어진 702번 도로를 따라서 합수점으로
향하는데 도로 좌측으로 펼쳐지는 광활면의 김제 들녁은 지금
모내기를 하는 논들이 간간히 보이는데 석치마을 뒷쪽 능선인
니성산과 국사봉을 거쳐서 다시 도로로 내려온 사이에 행정구역은
진봉면 고사리를 지나서 심포리 땅으로 들어서고 있다.
우리는 인생길을 가면서 항상 옳은 선택만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아쉬움이나 미련이 남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인해 옳든 그르든 간에 이미 선택 된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하나의 이름을 붙여 놓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길을 선택했든 간에 나 자신이 선택했다는 것이다.
702번 도로를 따라서 5분정도 걸어가다가 심포리 전선마을이 보인다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전선(戰船)마을은 만경강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고군산 열도와 계화도가 가까이 있어 예로부터 어선의 닻을 내리는 항구로
고려 후기에는 지금 해군기지와 같은 군항으로서 왜구의 적선과 싸움을 하기
위한 배(戰船)를 배치 시켰던 곳이라고 한다.
갈림길(12:33)
맥길은 전선포마을로 들어서기 직전에 우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702번 도로를 벗어나 통나무 계단이 있는 능선으로 올라간다
통나무 계단으로 오르면서 우측을 바라보니 전선포 제방 너머로
만경강이 보이고 강 너머로는 군산시 옥구들녘이 보이는데 감회가 새롭다.
2013년 1월말경에 지금은 남원으로 歸村하신 젠틀맨님과 금남기맥이란
타이틀로 강건너 아련히 보이는 저 산줄기를 걸은지가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진봉반도에 있는 전선포(戰船浦)는 옛날에 지금의 해군기지와
같은 군항(軍港)으로서, 고려 후기에는 왜구와 접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전선포 서쪽에 봉수대가 있어 정박한 전선들과 수시로 연락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만경강 입구에 위치해 있어 전라도를 적군으로부터 지켜내는 요새였으나,
지금은 ‘전선포’라는 작은 팻말을 세워 둔 것이 전부이다.
진봉반도는 만경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데, 고군산열도와 계화도가 가까이 있어
닻을 내리는 항구이기도 한 곳으로, 1920년대 일본인들이 간척 사업으로 만든 ‘전선포 제방’으로
인해 일부는 농경지가 되고 일부는 해안이 되어 전선이 정박했던 포구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현재 전선포는 10여 가구가 모여 있는 한적한 농어촌 마을로, 바로 근처에 진봉반도를 감싸는
해안도로인 지방도 702호선이 지나가고 있으며, 남쪽에는 간척지 평야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으며, 북쪽에는 만경강을 사이로 군산시 대야들이 보인다.
휴식(12:35~45)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이곳까지 걸어왔더니만 조금은 피곤하다.
베낭을 내리고 우산을 쓴 채로 빵과 쥬스 하나로 점심을 대신하고 있는데
이곳도 주변에 대밭이 있어서 그런지 산모기가 엄청나게 극성을 부리기에
10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다시 길을 나서면서 조금전에 지나온 니성산과 국사봉을 뒤돌아 본다
계속되는 비로인해 똑닥이를 켰다 꺼졌다하면서 자꾸만 에러 메시지가 뜬다.
렌즈를 통해서 카메라쪽의 물은 계속 들어가고...
철조망(12:50)
이곳도 봉화산 둘레 길인 모양인데 등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트랙상으로는 철조망 문 안쪽으로 지맥길이 이어지나 정원수가
많이 식재되어 있는 안쪽으로는 들어갈 수 있는 틈이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철조망 바깥을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간간히 만나는 비에젖은 왜솜다리가 오늘따라서 왜이리도 처량하게 보이는지?...
준.희 쌤의 시그널을 만나면서 좌측에서 올라오는 넓은 임도를 만난다.
반갑습니다
철조망 끝지점 위로 보이는 저 능선이 오리지널 지맥길이다.
지맥길 마루금에 복귀하여 계속 걸어간다
y자 갈림길이 나오고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묘지 뒷쪽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좌측 아래는 잘 관리된 가족묘지가 보인다
묘지 윗쪽 능선에서 바라본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전선마을의 모습
능선으로 올라가니 이곳의 등로 주위에는 우리나라 토종식물에게
심각한 危害를 가하고 있는 생태교란 외래종인 서양금혼초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묘지와 이정표가 나오고 이곳이 족보있는 35.5m봉이다
35.5m봉(12:55)
35.5m봉이건만 아무런 표식조차도 없다...표식이 숲 속 안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등산화와 양말이 물에젖은 탓인지 발이 너무 아파서
35.5m봉 흔적을 찾아서 숲속으로 들어가는 걸 포기한다
35.5m봉 아래에 있는 여산 송씨(礪山 宋氏)의 묘지
이제 똑닥이 카메라는 아예 작동조차 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어설프고 자신이 없는 스마트폰으로 기록한다
35.5m봉에서 직진으로 향하다가...
풀섶에 묻혀버린 희미한 좌측의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비에젖은 엉퀑퀴
밭 가장자리로 내려서니 심포리 규동(閨洞)마을이 보인다
규동(閨洞)은 심포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이 마을 사람들이 옛날부터 결혼을 하지 않은
규수처럼 얌전하고 예의바르기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도장골」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의 도장 규(閨)자를 써서 「규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동쪽에 1940년 의성 김익성씨가 학교 부지를 희사하여 설립된 심창초등학교가 있는데,
학교 이름은 지금의 광활면이 진봉면에 포함되어 있었을 때 심포리, 창제리의 전지역과
고사리의 일부가 학구로 되어 있어서 심포리의 심과 창제리의 창자를 따서 심창초등학교라
하였으며 이 마을에는 밀양 박씨, 곡부 공씨, 의성 김씨들이 8대째 살고 있다.
안부(13:02)
안부에서 밭 가장자리로 올라서니 멋진 2층 전망대가 보인다
녹색명소 전망대(13:04)
녹색전망대에서 바라본 만경강(萬頃江)의 모습
만경강(萬頃江) 유역은 전주시·군산시·익산시·김제시·완주군 등 4개 시, 1개 군에 이른다.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밤티마을에서 발원하여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국사봉까지 이르는
뱀 모양의 하천으로, 전라북도 북부 평야 지대의 젖줄이자 생명수로 김제 지역의 만경강
구간은 김제시 백구면에서 부용천(芙蓉川)이 만경강으로 합류되는 구간으로 매우 짧은
편이며, 강의 하구까지 81.75㎞의 길이이다
만경강의 이름은 만경현(萬頃縣)에서 비롯되었으며, 본래 만경은 백제의
두내산현(豆內山縣)이었는데, 신라 때 만경현으로 개칭되어 김제군에
속했다가 고려 때 임피현(臨陂縣)에 속하였으며, 1914년 김제군에 합병되었다.
만경의 경(頃)은 ‘백만이랑’이란 뜻으로 넓은 들을 의미하며, 만경강의 본래 이름은
신창진(新倉津)으로 조선시대까지 사용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하류는 신창진, 상류는
안천(雁川 : 지금의 고산천]과 남천(南川:지금의 삼천과 전주천)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지리전고(地理典故)」에는 만경의 신창진은 근원이 고산의 남천에서 나오는데,
서쪽으로 흘러 김제 경계에 이르러 신창진이 되고 만경현을 지나 북쪽의 바다로
들어간다고 나와 있으며,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신창진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에는 ‘사수(泗水)’로 기록되어 있다.
마루금은 심창초등학교 이정표를 따라서 간다
등로에서 바라보니 만경강 너머로는 10년전에 걸었던 금남지맥 끄트머리가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군산시 옥구읍 들녘과 군산시내 아파트들이 아련히 보인다
새만금바람길은 김제시 진봉면 일대에 조성된 바닷길로 진봉면사무소를 기점으로
진봉 방조제 0.5㎞, 전선포 4㎞, 망해사 1㎞, 망해사 전망대 0.3㎞, 두곡 서원 0.5㎞,
심포 항 1㎞, 안하 마을 쉼터 1.3㎞, 거전리 종점 1.5㎞에 이르는 총 10㎞ 구간 1개
코스로 소요 시간은 약 2시간 30분이다.
새만금바람길을 편안하게 잠깐동안 걷다보니 망해사로 내려가는 포장도로가 나온다
망해사 가는길(13:10)
어제가 초파일이고 날나리이긴해도 명색이 佛子인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지맥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망해사로 향한다
망해사(望海寺:13:12)
김제시 진봉면 진봉산(進鳳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754년(경덕왕 13) 법사 통장(通藏)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642년(의자왕 2)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그 뒤
1073년(문종 27) 심월(心月)이, 1371년(공민왕 20) 지각(智覺)이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거의 폐허화되었던 것을 1624년(인조 2)에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가 중창하였다. 진묵대사는 이곳에 머물면서 많은
이적(異跡)을 남겼는데 그 일화들이 오늘날까지 널리 전승되고 있다.
망해사를 들어서면서 선 채로 低頭三拜의 禮를 올리고 절집 안으로 들어서니
어제가 초파일이라 마당에 걸려 있어야 할 그 흔한 연등 하나도 안보이고
승용차 한대가 서 있기는 해도 인기척도 없이 그야말로 절간같은데 절집
1년 농사의 70%는 초파일의 수입으로 살아야 하는데 이래서야 되겠나...
스님께서 올 한해 끼니를 어떡게 해결할까하는 괜한 걱정을 해본다
망해사 마당에서 바라본 만경강의 모습
망해사 7층 석탑과 범종각
망해사의 주법당으로 쓰이는 듯한 극락전은 문이 굳게 잠겨있어 참배도 못했고.
극락전 우측에 있는 낙서전(樂西殿)과 절 마당에 있는 팽나무는 스마트폰으로
어설프게 찍다보니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기록으로 남길수가 없어서
아쉽기만 하다...조선조 인조 2년(1624)에 진묵대사가 지었다고 하는 낙서전(樂西殿)은
ㄱ자 건물로 튀어나온 부분에는 마루가 깔려 있어서 서해와 멀리 고군산열도를 바라보며
즐기는 아담한 전각(殿閣)으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28호이다
문이 잠겨서 들어갈 수는 없으나 자료에 의하면 극락전(極樂殿)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불좌상을 주존으로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또 옆 다른
불단에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진묵대사로 여겨지는 고승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낙서전에는 주불로 아미타불좌상(불신고58cm, 슬폭48cm, 좌대고18cm, 폭57cm)
우측 부처상으로는 관세음보살상(불신고58cm, 슬폭33cm, 좌고13cm, 폭40cm)을
모셔놓고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연화좌대위에 안치된 좌상으로서 조각의 수법이 기묘하다
망해사 요사채로 쓰이고 있는 청조헌(聽潮軒)의 모습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는지 일본식 건축 구조로 한국의 절집에서는 볼 수없는 전각이다
망해사는 서해의 섬들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서해의 일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승지이므로 망해사라 하였다고 하며, 절 아래가 바로 바다이기 때문에 절 이름도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절(望海寺)’이다...망해사는 절터가 넓지 못하여 바다를 향해
거의 한 줄로 낙서전(樂西殿), 극락전(極樂殿), 종루, 청조헌(聽潮軒) 들이 늘어서 있다
다시 마루금으로 복귀하는 길에 망해사 부도를 만난다.
망해사 부도전에는 4기의 부도가 일렬로 서있는데, 대체적으로 작고 소략(疏略)한 형태의 부도이고,
맨 좌측의 가장 큰 것이 만화당(萬化堂) 부도로 높이 149cm, 탑신 폭 70.5cm 규모이며,
두번째는 심월당(心月堂) 부도로 높이 91cm, 탑신 45cm이며, 세번째는 청심당(淸心堂) 부도로
높이 117cm, 탑신 41cm이고, 네번째는 덕유당(德有堂) 부도로 높이 118cm, 탑신 42cm이다.
다시 마루금에 복귀하여 우측으로 올라서니 망해사 주차장이 나오고 등로 좌측 아래로는
두곡서원이 보인다
두곡서원(杜谷書院:13:20)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고려후기 정몽주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1634년(인조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 강원기(康元紀),
함부림(咸傅霖)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先賢配享)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2년(고종 9)에 훼철되었다가 1901년 유림에 의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0년에 복원하였다... 복원·중건할 때 함부림은 봉안에서 제외되었고 별도의 서원건립이
추진 중에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4칸의 영모재(永慕齋), 숭의문(崇義門)
등이 있으며, 사우(祠宇: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집)에는 정몽주와 강원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영모재는 강당으로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고 한다.
두곡서원 안내판을 지나고 우측에 망해버린 산장휴게실을 지나니
애국지사 남촌 곽경열 선생 추모비가 나온다
망해버린 산장휴게실
애국지사 남촌 곽경열 선생 추모비(13:21)
애국지사 남촌 곽경열 선생 추모비
전라북도 김제 출신 독립운동가 곽경렬 선생(1901∼1968)은 1915年 항일비밀결사인 광복단에
입단하여 한훈· 류장렬 등과 함께 박곡· 벌교 등지의 친일파 부호를 숙청하였으며 오성의 일본
헌병 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고, 1916年 일본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한때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1918年 친일파 이종국이 광복단조직을 밀고함으로써 재차 체포망이 압축되자 지하로 은신하였으며,
1920年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4年 군자금모금활동
사실이 탐지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6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곽경렬 선생은 한인 반역자를 수시로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처단하는 행형부의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계속 한훈을 따라 日本 앞잡이들을 숙청하기에 전력을 다 하였는데 멀리
금강산으로 들어가 김동평과 윤답중 등 부일분자들을 사살하였고, 그 후 몸을 피하여 일시 만주로
망명을 하였던 것인데 그 때 권총 1정을 휴대한 채 향리로 돌아왔다.
그 후 1919年 03月 민족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으므로 일시 거사를 중지하고 있다가 동년 12月 11日
전북 옥구군 대야면 소산리 김영순의 집으로 들어가 상해임시정부로 보낼 군자금으로 당시
화폐 27원을 받아 연락원에게 전송하였다가 이 사실이 발각되어 1924年 체포당하여 2년여의
모진 고문 끝에 1926年 전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의 언도를 받게 되었다.
1929年 04月 01日 전주 감옥에서 출옥한 후로는 일제의 고문에 못 이겨 29세의 나이에
반병신이 되어 재향 영농에 치중하다 김제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다가 1968年 06月
향년 68세로 별세하였으며, 정부에서 그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애국지사 남촌 곽경열 선생 추모비를 지나서 진봉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보도블럭이 깔려있어 편하게 걷는다마는 몸뚱아리에서 나는 산꾼의
땀냄새 때문에 인해전술 형태로 따라붙는 산모기 때문에 참으로 힘이든다.
진봉망해대(進鳳望海臺:13:23)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뒷산인 진봉산(進鳳山:73.2m)에 위치한 3층 규모의 전망대로,
또다른 지명으로는 낙조대(落照臺)라고도 하며,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海風)을 맞으며
멀리 떠 있는 고깃배 등 바다 풍경과 만경평야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산모기의 등쌀에 너무 힘들어서 빨리 산을 벗어나고픈 생각 때문에 멋진 조망을
구경할 수 있는 3층으로 올라가는 걸 포기한다
만경강 너머로 군산의 서해안 하구인 금남기맥 합수점이 아련히
보이고 좌측 끄트머리로는 고군산군도도 흐릿하게 보이는 구나
진봉산(進鳳山:73.2m:13:28)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산으로 진봉면의 지명유래가 된 산으로 남쪽은 낮은 산들이
연이어 있으며, 건너편 봉화산(심포산) 정상에는 고려 시대에 축조한 봉수대가 있고, 북쪽은
미녀봉(美女峰), 그 건너편에 국사봉이 있고, 아래에는 옛날 수군(水軍) 기지였던 전선포(戰船浦)가 있다.
만경강 맞은편에는 군산과 옥구평야가 보이는데 『광여도』를 비롯한 군현지도에 대부분 기재되어
있어, 유래가 오래된 지명임을 보여 준다. ..『여지도서』(만경)에 진봉산은 "들판 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다고 표기되어 있으며 관아의 서쪽 2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옛지명이
납명산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보인다
진봉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진봉산(進鳳山)의 이름을 따서 진봉면(進鳳面)이라
하였으며, 진봉면이 자리 잡은 진봉반도는 암석 해안으로 봉화산(烽火山)·진봉산·국사봉(國士峰)·
니성산등이 솟아 있으며, 망해사(望海寺)를 중심으로 한 진봉산 주변은 수려한 자연 해안 경관을
간직하고 있고 서북쪽 해안의 산지를 제외한 지역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갯벌을 이루고 있었으나, 1915년에 이완용이 간석지 개간을 착수하였고,
1930년 본격적으로 제방을 축조하여 넓은 간척지를 조성하였으며 옛 지도인 비변사인(備邊司印)
방안지도, 『여지도(輿地圖)』, 『해동지도(海東地圖)』 등을 살펴보면, 진봉산은 높이 73.2m의 낮은
산임에도 크게 그려져 있고, 『해동지도』에는 당시 만경현 전체가 넓은 평지이기 때문에 높고
큰 산이 없음에도 진봉산의 규모가 웅장할 정도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만경현의 읍치와 고을의
풍수적 명당성을 강조한 표현 방식이자 진봉산의 장소성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제시의 다른 면 지역에 비해 전주·익산·군산과의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진봉산 정상 4등 삼각점(△군산423 / 1987재설)
진봉산에서 내려가는 등로 바닥에도 보도블럭들이 깔려있다
데크목 계단도 지나는데 비에젖은 탓인지 상당히 미끄럽다
갈림길(13:33)
진봉산에서 5분정도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오니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독도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전선포 제방으로 이어지는
제도권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져야 한다
제도권 등로에서 좌측으로 들어서서 마루금을 이어간다
신천강씨 추모당(13:35)
신천강씨 추모당 우측 아래로 내려간다
신천강씨 추모당을 내려와 숲속을 통과하니...
갑자기 등로가 사라지고 잡목의 저항을 받으면서 한참을 버벅거린다
아무리 쳐다봐도 빠져나갈 길이 안보여 좌측의 대밭으로 들어섰다가
내려선 다음에 진봉면 심포리 명동마을 뒷쪽으로 향한다
대나무의 강력한 저항을 이겨내며 심포리 명동마을로 내려선다.
명동마을 본래 심포 마을에 속했던 이 마을은 진봉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0년대 심포에서 떨어지면서 납명산(진봉산)의 「명」자를 따 「명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이 마을 뒤편 진봉산 중턱에는 낙조대로 불리는 관망대와 애국지사
남촌 곽경렬 선생의 추모비가 서 있으며, 진봉산 북쪽 기슭에는 망해사라는 오래된
절이 자리잡고 있다.
명동마을 골목을 빠져 나오니 오늘 산행중에 3번째 702번 지방도를 만나고
바로옆에 심포항으로 가는 길목 옆에는 심포마을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심포(深浦)마을 버스정류장(13:40)
심포리는 본래 만경군 하일도면의 지역으로서 갯가가 되므로「깊은 개」라 하였는데,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진봉산 남쪽 기슭에 형성된 마을로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이기 때문에 예부터 포구로 이용되어 「심포(深浦)」라 불렀다 한다.
심포마을 버스 정류장을 지나서 400m만 가면 심포항이 있다는 팻말을
보면서 702번 도로를 따라서 걸어가니 안하마을 삼거리가 나온다.
안하(雁下) 삼거리(13:45)
진봉면 심포리 심포마을 서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이 마을의 이름은 「목너머」,
「갈너머」, 「안하」의 순으로 바뀌었는데, 안하는 안행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기러기 안(雁)자”와 “아래하(下)자”를 써 나타낸 것이라고 하며, 안행산 북쪽 기슭에는 김제시
수산업협동조합 진봉 분소가 있고, 수십 척의 어선이 드나들고 있어 김제시 어업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안하마을 삼거리에 있는 안하버스정류장에서
702번 도로를 버리고 마을 골목으로 들어선다.
마을 골목길로 걸어가다가...
심포4길 표지판을 따라서 걸어간
주택 끄트머리에서 묘지를 바라보면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100만불짜리 미소
묘지에서 바라본 안하마을과 김제평의 모습
전라북도 김제시를 중심으로 정읍시·부안군·완주군 일부 지역을 포함한 지역에
펼쳐진 평야로 동진강(東津江)과 만경강(萬頃江) 유역에 발달된 충적평야와 그 주변의
넓은 야산지대를 중심으로 한 침식평야로 구성되어있다. 이른바 ‘김만경평야(金萬頃平野)’
혹은 ‘김제만경평야’로 불리며, 한국 최대의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한말에 만경강 하류 일대의 개척을 위한 이완용제(李完用堤)와 민영익제(閔泳翊堤)가 설치되고
1920년경 일제에 의한 동진강·만경강 직강공사의 실시로 인공제방이 설치된 뒤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관개수리시설의 발달은 삼국시대부터 그 전통을 가지고 있어 벽골제(碧骨堤)
등의 유구가 있으며, 여기가 국내에서는 가장 먼저 근대적 수리시설을 갖추어 관개가 이루어진
지역으로 이 평야지대는 비옥한 미작지역으로 국내 유수의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한말 이후 일제의
통감부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일인들에 의한 토지 투자와 그 뒤 산미증산정책에 의한 미곡 수탈
지역으로 전락하여 일인에 의한 대단위 개발 공사와 수리 사업 및 농장 경영이 이루어지던 지역이다
이천서공&전주최씨 묘(13:50)
묘지를 지나서 숲속으로 들어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심포항과 만경강의 모습
심포항(深浦港)은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조성된 포구로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자리하고 있는 항구로 예전에는 그 규모가 꽤 컸던 포구였으나
현재는 새만금간척지조성사업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는 심포항은
심포백합(深浦白蛤)이라 불리는 유명한 조개의 집산지였다.
이 일대 갯벌에서 잡은 조개들이 이곳에 모여 전국 각지로 팔려나갔고 조개구이집도 포구
주변에 즐비했으나 새만금방조제 공사가 끝나면서 이곳은 사실 바다로서의 운명을 다했다.
새만금방조제로 갇힌 거대한 호수로 변했기 때문이다... 어민들의 치열한 생존공간이었던
갯벌은 요즘 체험학습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근처에 망해사가 있는데, 해거름녘 풍경이
일품이다.
심포항을 바라보면서 올라가니 봉우리의 절반이 날아가버린 66.1m봉에 도착한다
66.1m봉(13:57)
좌측으로 내려서니 등로는 전혀없고 트랙상으로는 맥길이 맞는데 길은 없다
한참을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내려서니 농로가 나오고...
조금을 더 걸어가니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는 당산나무 쉼터가 나온다
당산나무 쉼터(14:04)
쉼터에는 이정표가 있고 봉화산까지 1.8km라고 한다
봉화산 숲길이라는 제도권 등로를 따라서 마루금을 이어간다
길곤마을 갈림길(14:08)
조금전에 당산나무 쉼터의 이정표에는 봉화산까지 1.8km라고
표기되어 있었는데 5분정도 지난 이곳의 이정표에는 0.6km란다
당산나무 쉼터의 이정표 표기 오류인 듯 하다
등로에서 바라본 길곤마을의 모습
길곤마을은 진봉면 심포리 안하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에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노활리」로 불렸으나 까닭을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지 「길곤」으로 불리고 있다.
어떤 사람은 길곤은 긴 곶을 말하는 뜻에서 긴 반도를 말하는데 지금은 얕은 바다인 이 일대에
큰 곶이 새로 생길 것을 예상하여 지어진 예언적인 이름이란 이야기도 있으며, 큰 곶이란
새만금지구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부(14:12)
안부를 지나서 5분정도 지나니...
봉수대 터가 보이고 문화재 조사구역이라 적어놓은 통제지역 표지판이 보인다
봉화산 봉수대 터(14:16)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봉화산 정상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 터로 길곶 봉수대터
(吉串烽燧臺址)는 황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세워져 있어 만경강과
동진강의 하구로 들어오는 적선을 곧바로 탐지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4
만경봉수조에 “길곶 봉수는 현 서쪽 29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부안현의 경계 화도에 응해 있고,
북으로는 옥구현 사자암에 응해 있다[吉串烽燧在縣西二十九里南應扶安縣界火島北應沃溝縣獅子巖].”
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되며, 조선시대 봉수제도의 도입과 함께 일찍부터 설치되어 조선시대
내내 주요 통신수단의 하나로 이용되었으나, 근대로 들어오면서 혁파된 뒤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1984년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김제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의 일환으로 봉수대 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물이 1985년에 『김제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로 간행되었다.
봉수대 축조에 사용되었음직한 자연 석재들이 직경 10m에 걸쳐 돌무덤처럼 쌓여 있는데,
그 중에는 불에 그은 흔적이 있는 돌들도 상당수 남아 있다.
조선시대 봉수제도는 세종 때 처음 마련되어 갑오개혁 때 폐지되기까지 외적의 침입을
막는 주요 통신수단의 하나였는데 특히 심포리 길곶 봉수대는 서해안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세워져 있어 외적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다
봉수대에서 바라본 김제들녁 사이로 흐르는 동진강이 보이니 합수점이 다와가는
느낌이고 봉수대에서 내려서니 커다란 소나무에 준.희 쌤의 봉화산 산패가 걸려
있는데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산이다.
봉화산은 국토정보지리원이 조사한 산 이름중에 가장 많은 47개의 봉화산이 있으며,
2번째는 43개의 국사봉, 3번째는 39개의 옥녀봉, 4번째는 32개의 매봉산, 5번째는
31개의 남산이다.
봉화산(烽火山:84.9m:14:17)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산으로 서해를 바라보는 봉화산(烽火山)
정상에 봉화대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나 심포산이라 부르기도 하는 산이다
정상에는 지금도 주춧돌과 자연석으로 쌓았던 담장의 흔적이 뚜렷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돌들을 흙으로 묻고 헬리포트를 만드려 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봉수대의 상단좌대는 가로 6m, 세로 10m의 직사각형이며,
서북쪽과 동북쪽은 능선이 있고 좌우는 절벽이다.
정상의 넓이는 330㎡ 정도 되며, 봉수대는 고려시대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봉화산의 봉수대가 조선시대에 이르자 일반 백성에게 피해를 입힌다 하여
계화도로 옮겼다는 설이 있다.
산 남서쪽에 거전마을이 위치하고, 북동쪽에 심포항(深浦港)이 위치하며, 동쪽으로 지방도
702호선이 지나고 있다... 진봉반도 서남쪽 육지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서남쪽은 서해바다인
새만금이고, 서북쪽은 만경강 하구, 동남쪽은 동진강 하구이다. 동북쪽은 만경강 연안에
봉화산처럼 50~60m의 올망졸망한 산들이 줄지어 있고, 동쪽은 진봉의 넓은 들녘과
호남평야가 펼쳐진다
안부(14:20)
합수점으로 향하는 묘지 위에서 바라본 부안 계화도와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동진강의 모습
동진강(東津江)은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의 상두산(象頭山:575m)에서 발원하여
김제평야를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유역면적 1,034㎢, 유로연장 44.7㎞이다.
도원천(桃源川)을 이룬 뒤, 정읍시 칠보면에서부터 하폭(河幅)이 50m 이상으로
넓어지면서 동진강이 된다
동진 지명은 동진나루와 관련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부안)에 "동진은
통진(通津)이라고도 벽골제와 눌제의 물이 합해져 북쪽으로 흘러 이 나루가 된다.
현의 동쪽 16리에 있다."라고 하는 관련 기록이 확인되며, 현재의 동진강은 구간별로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우선 동진강 상류에 해당하는 상두산과 묵방산 자락에서 나온 물이 칠보천과 축현천을
합해 용호천을 만나기까지의 구간은 도원천(桃源川), 평사천(平沙川) 또는 남천(南川)이라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태인)에 "남천은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상두산 남쪽에서
나와 이평에 이르러 정읍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김제군 동진으로 들어간다."
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등로에서 바라본 거전마을의 모습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서쪽 맨끝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앞쪽의 넓은 갯벌이 마치 큰 밭처럼
생겼다 하여 「거전(巨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서씨 제각이 옛날에는
서당이었는데, 약 200여 년 간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거전마을 앞으로는 702번 지방도가 지나가고 김제 들녁을 적시면서
도도히 흐르는 동진강이 뱀처럼 굽어져 새만금 간척지 방향으로 흐른다
새만금 바람길 종점(14:25)
새만금 간척지 위로 거대한 건물들도 내려다 보이는데 그 뒤로 김제평야와 부안군 쪽
산줄기도 보이고 조금을 더 진행하여 등로 좌측을 보니 드넓은 새만금간척지대 건너
계화도의 계화산이 섬처럼 보이는데 지금은 도로로 연결되어 육지와 연결된 섬이 되었다.
40.3m봉(14:31)
만경 남(모악)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우측으로 내려선 다음에 새만금 간척지 방향으로 내려간다
40.3m봉에서 내려서니 새만금 간척지가 나오고 어찌보면 이곳이
만경강과 동진강이 만나서 서해로 입수하는 합수점이나 바다를
메워서 간척지로 지도가 바뀌는 바람에 합수점에 대한 의미가
퇴색이 되어 버렸다
만경강/동진강 합수점(14:35)
만경강이 서해로 흘러드는 저 끄트머리까지 가보려고 했으나
별의미가 없을 듯 하여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간척지로 바뀌지 않았으면 현재 이곳이 만경강과 동진강이 이어지는
합수점이기에...
새만금개발사업은 1970년대 실시된 우리나라 서ㆍ남해안의 간척지 조사사업과
연관하여 1980년대에 들어와 전라북도의 만경강 .동진강 하구의 갯벌을 개발하여
최대한의 용지를 확보하고, 종합 농수산업 시범 단지를 조성하며, 항만과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여 장차 새만금 국제무역항의 건설 기반을 구축하는 등의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1991년부터 담수호, 양·배수장, 방조제, 용배수로, 배수갑문 등의 시설물을 건설했고,
약 19년 8개월 만인 2010년 4월 27일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었으며, 공사 완공 이후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의 굴곡진 100㎞의 해안선이 비응도~신시도~변산반도 사이를
연결하는 33㎞의 직선 방조제로 바뀌게 되어 그 방조제 안쪽으로 새로이 4만 100ha의
용지가 생김으로써 그만큼 국토가 확장되었다.
이 면적은 전주시 면적의 두 배, 여의도의 약 140배에 이른다.
새만금 방조제는 세계 최장의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으며, 간척 역사가 깊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간척사업으로 기록되었다.
만경강과 동진강이 만나는 합수점은 마음속에
그리면서 버스 정류장이 있는 거전마을로 향한다
거전마을 버스정류장(14:42)
거전마을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김제로 가는 버스가 서 있고 가서보니
버스문은 굳게 닫혀있다...정류장에서 베낭을 정리하고 수통에 남은
물로 타올을 적셔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베낭에 있는 두유와
빵 하나를 먹고 의자에 앉아 있으니 15시에 버스가 출발하기에 버스를
타고 김제터미널로 향하는데 비가와서 그런지 손님이라고는 터미널
도착할 때까지 달랑 나혼자다...버스를 전세를 내서 온 느낌이다
김제터미널까지 1시간 가량 걸린 듯 하다.
김제종합버스터미널(15:58)
김제발 → 서울행 버스표
터미널에 도착하여 화장실에 들려 신발을 깨끗하게 씻고 양말을 벗는데
발이 비를 맞은 탓인지 퉁퉁 불어서 신발이 잘 안 벗겨질 정도이다.
16시 40분에 버스는 출발하고 잠이들어서 얼마나 잤을까 잠에서 깨어보니
고속도로는 마치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천안~논산간 고속도로는
버스가 들어갈 엄두를 못내는지 논산에서 대전을 거쳐서 경부고속도로로
향하는데 이곳도 차가 밀리기는 마찬가지이고, 창밖은 마치 장맛비를
연상케할 만큼 폭우로 바뀌어 쏟아지기 시작한다...김제에서
서울까지 4시간 반정도 걸려서 서울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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