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25년 02월 16일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지독한 미세먼지
☞산행거리: 도상거리 15.7km / 7시간 05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원동 마을-낙원교회- 문내원동 사거리- NO74송전탑- 명량로
산들농원- 연자재- 석교 버스정류장- 용암저수지- 나주정공묘
구안산(71.8m봉)- 안부- 무명봉- 심동버스 정류장- 심동마을회관
여산송씨 세장산- 시멘트 도로- 무명봉- 농로 삼거리- 무명봉
가숫고개- 무명묘지- 76.5m봉 갈림길- 76.5m봉- 다시 76.5m봉 갈림길
성도재가복지센터- 농로 삼거리- 무명봉- 무명봉- 신창길- 76.8m봉
NO27송전탑- 신창길2- 안부- 동산- 방죽재- 남평문씨 가족묘- 조망바위
일성산 갈림길- 일성산- 안부-다시 일성산 갈림길-안부-안부- 무명봉
무명봉- 293.6m봉- 조망바위- 안부- 무명봉- 안부- 임도- 김해김공묘
153.0m봉- NO17송전탑- kt 이동통신 화원 중계기지- 이목고개
☞소 재 지: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 화원면
지긋지긋한 화원지맥을 빨리 끝내고 싶은데 산행하는 것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구나...지난주에 화원지맥을 나서려는데, 해남지방에 눈이
많이 온다는 예보로 아무래도 나홀로 산행을 하는 범여로서는 급변하는
날씨에는 대처할 방법이 마땅찮을것 같아서 창녕쪽으로 가서 지맥길
한 구간을 했고, 2주만에 다시 길을 나서기로 한다.
토요일 조금 일찍 사무실 업무를 정리하고,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호남 고속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해남행 버스표
이번에 걸어야 할 화원지맥 구간의 접근이 어중간하여 참으로 예매하다.
들머리인 해남군 문내면 원동마을은 해남읍에서보다 목포에서 접근하면
시간이 많이 절약되나 문제는 교통편이라 고민이 많다.
접근 방법으로 첫 번째는 예전처럼 전날 해남으로 가서 모텔에서 자고,
새벽 6시에 해남에서 목포로 가는 330번 버스를 타면 택시를 타지
않아도 되니 교통비를 대폭줄일수 있고,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문제는 전날 해남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야
한다는게 단점이다.
두번째는 당일 새벽에 목포행 KTX열차를 타고 목포로 간 다음에
목포터미널에서 해남으로 출발하는 첫 차를 타고, 원동마을로 가는 방법이다.
목포에서 화원, 우수영을 거쳐 원동으로 가는 해남버스의 첫 차의 출발시간이
08시이다...목포에서 원동까지 가는 버스 소요시간이 1시간 이상이 걸리는지라
아무리 빨리 산행을 시작해도 9시 30분이라 그러면 산도 얼마 하지도 못하고
귀경을 해야 하기에 부득히 토요일 저녁에 해남으로 향한다
17시에 목포를 거쳐 해남으로 향하는 버스는 오늘 만차로 출발한다.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정안 휴게소에 15분정도 쉬었다가 다시
목포로 향하는데 서서히 어둠이 시작되고, 한참을 달려, 군산, 부안
고창지역을 달리는데 남도의 들판은 순백색의 눈에 휩싸여 있다.
평소와는 달리 15분정도 늦게 목포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탑승객의
80% 이상이 내리고 해남으로 향한다...예상시간보다 10분정도
늦게 해남 터미널에 도착한다
해남터미널(10:05)
SP모텔(22:10~05:20)
모텔에 들어섰는데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쉽게
잠이 오질 않는구나...이리저리 뒤척이다 새벽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터미널로 향하는 길 모퉁이에 편의점이 있어서 김밥 한줄에
따끈한 믹스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터미널로 향한다
06시에 해남을 출발하여 황산, 우수영, 화원을 거쳐 목포로 향하는
330번 버스를 타고 가는데 오늘은 나를 포함하여 젋은 친구 2명이
탔다...해남을 출발한 버스는 아무런 멘트도 없이 손님이 없으면
정류장을 무조건 통과하는데, 도로에는 미세먼지인지, 안개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짙게 깔려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해남을 출발한 지 정확하게 1시간만에 2주전에 산행을 종료한
원동 방앗간 앞에서 버스에서 내린다.
원동 마을(院洞:07:00)
해남군 문내면 석교리에 있는 원동마을은 원(院)이 있었던 곳으로 삼기원(三岐院)과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화원목장(花原牧場)의 원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행을 시작하다(07:10)
원동 떡방앗간 앞에서 산행 채비를 하는데 동네 개쉬키들이
합창단처럼 떼거지로 짖어대는 바람에 아직까지 잠에서 깨지않은
민초들에 민폐가 될까봐 걱정이구나
도로명 주소가 명량로와 신창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우측의
신창길 방향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낙원교회(07:13)
낙원교회를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사유지라는 경고 팻말이
붙어있는 철대문이 보이는데, 문내초등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폐교가 되었고 아마도 학교가 개인에게 매각된 모양이다
폐교된 초교 담벼락을 따라서 가는데 문내원동사거리 팻말이 보인다.
날이 훤해질 시간대이지만 지독한 미세먼지가 온 세상을 뒤덮혀
있어 거리도 희미하고, 도로에 켜져있는 점멸등조차도 흐릿하다
문내원동 사거리(20.9m:07:16)
이곳 사거리서 직진으로 향하는 신창길(도로명 주소)을 버리고 좌측으로
향하는 남석길(도로명 주소)을 따르는데, 가나안 인력사무소 입간판이
서 있고, 입간판 아래와 관리가 안되어 있는 수준점이 있다.
관리가 안되는 수준점...고도가 20.9m란다
오늘은 아무래도 미세먼지가 쉽게 걷힐것 같지는 않을 모양이다.
미세먼지가 심하면 기저질환을 앓고있는 범여로는서 난감한데...
맥길은 인간들의 삶이 뭘 그리도 궁금한 지 남석길을 버리고
우측의 마을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고물상을 지키고 있는
개쉬키가 이방인을 바라보고는 지랄발광을 하면서 짖어댄다.
하기사 산도 아닌 마을 골목길을 베낭을 메고 걷는 이상한
산꾼을 보고는 경계할만도 하지...
원동고물상을 지난지 2분만에 다시 명량로와 조우를 하는데
도로 건너편에는 SK주유소와 원동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아침에 내린 원동방앗간에서 명량로를 따라서 직진으로
금방 올것만 같은 길을 한참을 돌아서 왔다
맥길은 명량로로 가기 직전에 민가를 끼고 우측의 북쪽 방향으로 이어진다
민가와 비닐하우스을 끼고 가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간다
마지막 민가를 지나는데 미세먼지 탓인지, 카메라의 셋팅이
잘못됐는지, 아니면 걸으면서 급하게 셋터를 눌러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진이 흐릿하니, 정말 맘에 안든다
민가를 지나면서 맥길은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농로를 안골 마을로 향한다
안골마을로 들어선 다음에 파란색 지붕의 민가를 끼고 우측으로 꺽어져
북쪽으로 향하는데, 민가안을 들여다보니 주말이라 늦잠을 자는지
인기척이 없다.
앞에 보이는 송전탑을 포스트 삼아 밭가운데의 농로로 이어지는
맥길을 따라서 걸어가는데, 송전탑 우측으로는 꽤나 큰 규모의
태양광 패널이 산허리를 뒤덮고 있는데 송전탑 뒷쪽이 지맥길이다
NO74송전탑(07:26)
NO74 송전탑 뒷쪽의 시멘트 도로로 가니 태양광 패널이 있는 곳인데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는구나...이리저리 헤집고 다녀도
능선으로 이어지는 맥길에 접근할 방법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되돌아 나온다.
화원지맥의 맥길을 걷는데는 정답이 없는 듯 하다.
산꾼들마다 산행기록이 다른데, 어떤 분들은 원칙대로 가려고
애쓰시는 분들도, 계시고, 어떤분들은 힘든 곳은 띵가묵고, 도로를
따라서 걷는 산꾼들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도로로 이어지는
맥길에서는 자동차로 이동하시는 분들도 계셨더라...
그거야 걷는 산꾼들의 엿장수 마음인데, 탓할수는 없다.
나는 어차피 다른 산꾼들과는 산행 속도도 느리고,
홀로 다니는 산꾼이라 가급적이면 원칙적으로 맥길을
걸으려고 애를 쓰는데 지금처럼 가고 싶어도 내 맘대로
안될때도 많지만, 답이 없다...우짜겠노 순리대로 따라야지
태양광 패널밭의 태클로 인해 정상적인 맥길을 걷지 못하고
되돌아 나와서 서쪽으로 내려서니 조그만한 원동저수지가 나온다
원동 저수지 앞에서 우측으로 수확을 끝 밭가운데로 향하는데
태양광 패널 뒷쪽으로 미세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지맥 능선이
범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미세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저 봉우리가 카카오 지도상에는 거북산이라
표기가 되어 있지만국토지리원의 지도에는 숫자조차도 표기가 안되어
있는 무명봉이다
원동 저수지 옆의 고공수로를 끼고 좌측의 밭가장자리로 탈출한다
우회길을 걸으면서 바라본 원동저수지
고공수로를 지나서 맞은편에 있는 꽤나 큰 규모의
산들농장을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명량로(07:33)
원동 정류장에서 왔으면 몇분도 안걸릴 거리를 맥길을
고집하면서 걷다가 원칙대로 가지도 못하고 되돌아
나오니 괜히 시간만 빼앗긴 꼴이지만 후회는 없다
산들농원(07:35)
명량로를 따라서 마루금이 아닌 우회길을 터벅터벅 걸어가지만
맥길을 걷지 못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하다...의미없는
길을 걷고있는 셈이다
연자재(07:38)
지도상에는 연자재란 표시가 분명히 되어 있다... 예전엔 고개였으나
지금은 진도로 향하는 명량로란 도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곧바로
석교버스정류장이 있고, 지명의 유래도 알 길이 없다.
석교 버스정류장(07:38)
석교 버스정류장이 있는 명량로는 직진으로 향하고 우측의
오르막길로는 석교리로 가는 길인데, 석교리 마을 표시석과
반석교회 팻말이 보이는ㅏ자형 삼거리로, 이곳에서 우회길은
석교리 방향으로 향한다
해남군 문내면에 속해있는석교리(石橋里)는 마을 앞에 돌다리가 있어 ‘독다리’,
‘독나루’, ‘석교’라 불렀으며, 현재 석교마을, 심동마을, 신창마을, 일정마을,
목삼마을, 삼덕마을, 송정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석교마을은 1600년경 박인후(朴仁厚)가 나주에서 내려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심동마을은 1300년경 김해김씨 김흥남(金興南)이 당화를 피하여 은신하러 왔다가
정착하였다고 전해지며, 신창마을은 1600년경 해남윤씨 윤동영(尹東永)이 강진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하며, 일정마을은 1600년경 김해김씨 김명필(金命弼)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하며, 목삼마을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치홍(金致洪)으로
강진에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삼덕마을은 밀양박씨 박성수(朴成樹)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하며, 목삼과 삼덕은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
황일면(黃一面)에 속한 마을로 나오며,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 소득원은
쌀이며, 특산물은 배추, 양파, 양배추, 대파를 재배하고 있다
미세먼지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얼마 걷지를 않았는데
목이 아프고 숨쉬는 소리가 거칠어지지만 안 갈수도 없잖은가
용암저수지(龍岩堤:07:40)
석교리로 향하는 길은 뿌였기만 하다.
난생 처음가는 이 길...두번 다시 이곳을 올 일이
없을것만 같은 길...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모를
잡것이 오늘 산행길에 그림을 망쳐 놓구나...
마루금에 복귀를 한다(07:44)
도로를 따라서 한참을 우회하면서 편하게 걸어왔다.
비록 肉身은 비록 편안했을지는 몰라도, 맘은 편치가 않구나.
도로를 따라서 석교마을로 이어지는 직진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올라서면서 오늘 처음으로 산길에 접어든다
과수원을 지나 최근에 조성한 듯한 나주정공 묘지로 올라선다
나주정공묘(07:46)
조상의 함자(銜字)를 잃어버린 모양이다
맨 윗쪽에 새겨진 오석에 '증조할아버지之墓 ' 라고
기록해놨는데, 내 아들도 증조할아버지의 함자를 모르는건
아닌지...뿌리를 忘却하고 사는 우리세대의 자화상이란
생각이 드니 왠지 씁쓰레한 생각이다
조금전에 오르지 못하고 우회하며 돌아온 거북산
너머로 올라온 日出... 미세먼지가 그림을 망쳐놨다
갑자기 길은 사라지고, 잡목의 강력한 태클에 직면한다
오로지 정통 맥길을 고집하면서 가실분 다 가셨구나.
다들 대단하십니다.
이런것 쯤은 각오하고 산길에 접어들었기에 아무런 감흥도 없다
잠시후에 카카오 지도에는구안산이라 표기되어 있는 71.8m봉에 도착한다
구안산(71.8m:07:54)
카카오 지도에는 구안산이라 표기가 되어 있지만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71.8m라고만 표기되어 있으며, 구안산에 대한 유래를
찾아봤지만, 해남군의 어떠한 자료에도 찾을수가 없어서 아쉽다.
북사면길로 내려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그물망이 처져있는 밭이 보이고...
대파밭이 보이는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08:02)
안부 고개에는 아주 크고 멋진 오동나무 한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안부 고개를 가로질러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완만한 오르막길에 준.희쌤의 흔적도 만난다
무명봉(08:05)
아무 볼품도 없는 무명봉에서 등로가 보이지도 않는
북동쪽으로 맥길을 이어가는데...
화원지맥길을 걸으면서 이 정도의 각오를 하지 않고 왔단
말이야... 하면서 맥길이 힐난을 한다...각오는 했지만
너무 힘이 드네요...
문내면 석교리 심동마을이 보이는 시멘트 도로로 내려서는데
심동마을 저 너머로 심동저수지가 흐릿하게 보인다
좌측 아랫쪽에는 도로명 주소가 심동길이라는 도로가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보이지 않는 시멘트 도로로 올라가니
키작은 소나무와 범여의 허리까지 차오르는 억새밭이 나온다
억새밭을 지나 내려서니 낙석방지용 휀스가 길을 막고 있어서 조금을 더 간다
휀스가 끝나는 지점으로 내려서니 우측으로 반석교회의
팻말이 보이고, 반석교회 방향으로는 갈우리로 향하는 석교길이고
직진으로는 심동길로 충평마을로 내려서며 고개 좌측에는
심동 버스정류장이 있다
심동버스 정류장(08:13)
심동 버스정류장에서 반사경을 끼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심동마을회관(08:14)
해남군 문내면 석교리에 있는 심동마을은 1300년경 김해김씨
김흥남(金興南)이 당화(黨禍)를 피하여 은신하러 왔다가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맥길은 심동마을회관 앞에 있는 밭으로 이어진다
마을회관에서 밭으로 올라서서 대밭으로 향하려는데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나를 보고는 거기는
길이 없으니 가지 말라고 한다...이런자에게 지맥길이
어쩌고 저쩌고 설명을 해봐야 알아 묵을 일이 없으니
아!...그런가요 하면서 다시 되돌아 나온다
좌측의 대밭 윗쪽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은 눈팅이로만
걸으니 많은 아쉬움이 남지만, 낯설은 남도땅에 와서
봉변을 당할까봐 찍소리도 못하고 우회길을 걷지만
그리 맘은 편치가 않구나...
심동마을을 빠져나와 마루금 방향으로 향한다
심동마을회관 앞 대밭에서 이어지는 마루금이 보인다
여산송씨(礪山 宋氏)소윤공파(少尹公派) 세장산(08:20)
세장산(世葬山)이란 世葬之地(세장지지)라고 하여 같은 집안과
문중의 대대(代代)로 묘를 쓰고 있는 땅(곳)先山(선산)이라고도 한다.
여산송씨 세장산비를 지나 생전에 부인을 둘씩이나 거느린
女福이 많으셨던 연안차공(延安車公) 묘지에서 마루금에 복귀하여
시멘트 도로 안부로 내려선다
시멘트 도로(08:22)
어지러운 잡목을 헤치고 들어서니 반가운 선답자의
시그널이 보이고 입구와는 달리 등로 안쪽으로는
생각보다 등로가 뚜렸한 편이다
관리가 되지 않는 편백나무 숲을 만난 다음에....
좌측으로 맥길은 이어지고 잠시후에 무명봉에 도착한다
무명봉(08:29)
잠깐의 개고생을 한 다음에 잡목의 물리치고 내려서니...
최근에 파종한 듯한 양파밭이 보이고 오늘 내가 걸어야할
일성산은 아주 가까운 거리임에도 지독한 미세먼지 탓인지
흐릿하기만 하다
좌측의 코 앞에 있는 심동저수지도 잘 안보인다
그만큼 미세먼지가 심하다는 얘기다
농로 삼거리(08:32)
농로 삼거리를 가로질러 들어서니...
산본리님의 빛바랜 시그널은 보이지만 길은 아예없다
이 분도 상당히 원칙을 고집하시는 분인 듯 싶다.
범여는 세상 살아가는 법을 古稀를 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는데
살다보니 딱 부러진 정답은 없더이다...때로는 타협할 줄도
알고 물러설줄도 알아야, 세상살이가 편한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게 되던가요...나도 님과 비슷한 스타일인데
그러다보니 손해보는 일도 많이 생기더군요
잡목지대를 이리저리 쑤시면서 직진으로 향하는 길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는데 좌측으로 눈을 돌리니
개활지(開豁地)처럼 보이는 넓은 묵밭이 보인다
묵밭으로 빠져 나와서 잠시지만 편안길을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또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완만한 능선으로 오른다.
봄을 준비하는 春蘭도 꽃을 피우기 위한 기재개를 켜기 시작한다
무명봉(08:40)
똥벼락님의 시그널을 확인하면서 북측의 내리막으로 내려서는데...
기럭지가 짧은 범여의 어깨까지 오는 억새밭을
헤치면서 내려서려니 시간도 걸리고,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빗물을 잔뜩 머금은 억새로 인해 금방 옷이
다 젖어 버린다
잠시후에 오를 76.5m봉을 바라보면서 내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가시덩쿨의 폭군...빠져나갈 틈이 안보인다
아!...미치겠다
가시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이리저리 헤매는데
다행히 개구멍같은 틈이 보이기에 낮은 포복으로
겨우 빠져 나온다
가시와 전쟁을 치르면서 나오니 황칠나무를 심어논 조림지가
나오고 아래로 내려서니 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가숫고개(08:45)
도로명의 주소가 문내화원로인 2차선 도로가 지나가는 곳으로
대상유통의 육묘장 안내판이 보이고, 좌측 아래는 충평 제2저수가
있으며 직진으로 내려가면 문내면 충평리 갈우 마을로 이어진다.
석교리와 충평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좌측의 제2충평저수지쪽에
숫고개란 지명이 보이고, 이곳은 가숫고개란 지명으로 표기가
되어있으나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도로를 가로질러 임도에 들어서자마자...
우측으로 꺽어져 묘지로 향하는 편안한 길로 올라간다
무명묘지(08:48)
묘지 뒷쪽으로 올라서니...
너럭바위가 나오고 잠시후에 능선에 올라선다
76.5m봉 갈림길(08:53)
이곳에 베낭을 내려놓고 마루금에서 좌측으로 살짝
벗어나 있는 족보가 있는 76.5m봉으로 향한다
76.5m봉으로 가는 길도 그리만만하지는 않다.
마루금도 아닌데 왜 사서 개고생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가고 싶어진다.
내 생전에 두번 다시 올 일도 없고, 더군더나 베낭을
벗어놓고 왔으니 안 갈수도 없잖은가...
76.5m봉(08:57)
카카오 지도에는 산승산이란 山名으로 표기가 되어 있으나
국토지리원의 지도에는 그냥 76.5m봉으로만 표기가 되어있다.
76.5m봉을 찍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서 간다
다시 76.5m봉 갈림길(09:00)
키작은 동백과 해송에서 떨어진 갈비(소나무잎)사이로
비교적 뚜렸한 등로가 보이나 사람들이 다닌 흔적은 전혀없다
우측으로 옴팍한 임도가 보이기에 내려서니...
비닐하우스 좌측으로 성도재가복지센터가 나오는데 저 앞에 보이는
일성산은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미세먼지로 인해서 엄청나게
멀게만 보인다
성도재가복지센터(09:07)
성도재가복지센터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배추밭 사이로 맥길을 이어간다
배추밭길에서 바라본 해남군 문내면 충평마을의 모습
충평리(忠坪里)는 본래 산수가 좋고 버드나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유평(柳平),
버릿돌, 벗들이라 부르다가 해방 이후 국가에 충성을 해야 된다는 의미로
충평(忠坪)이라 지명이 바뀌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갈우리와
무고리, 신평리, 충평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해남군 문내면 충평리로
개설되었고. 1789년에 편찬한 『호구총수』에는 신평리, 무고진리가 황이면에
속한 마을로 나오는데, 현재 충평마을, 신평마을, 갈우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충평마을은 입향조 서흥김씨 김무용(金武勇)이 1600년경 진도에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하며, 신평마을은 1500년경 입향조 서흥김씨 김마동(金馬東)이
영암에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다고 전하며, 갈우마을은 1500년경 하동정씨
정성진(鄭成珍)이 약초를 캐러 왔다가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오늘 여기까지 걸어온 산길은 가장 높은 봉우리이라봐야 고도가
80m가 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산이라 잡목과
가시로 생채기가 심했고, 거기다가 나뭇가지가 빗물을 머금고
있어서몸뚱아리에 난 상처자국이 엄청쓰리고 아프다.
마루금은 좌측의 황토밭 뒷쪽으로 이어지나, 너무 힘이들어
몸뚱아리를 추스릴겸 잠깐동안 농로로 이어지는 우회길을 택한다
범여의 손등 좀 보소...화원지맥길을 걸으면서
몸뚱아리는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네요.
충평리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축사 뒷쪽의
마루금으로 올라가려고, 농장안으로 들어갔는데, 길이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쥔장에게 걸려서 뒤지게 혼나고 쫒겨난다
농장 정문을 지나 좌측의 논두렁을 따라서 마루금 복귀를 시도한다
농장으로 들어가서 맞은편의 축사 뒷에 보이는 이동통신탑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한참을 돌아서 마루금을 찾아간다
마루금으로 복귀하는 길에서 바라본 서승산(121m:문내면 난대리 소재)의 모습
농로 삼거리(09:22)
15분을 우회하면서 몸뚱아리를 추스린 다음에 마루금에 복귀한다
잡목의 저항을 뚫고 들어서니 선답자의 시그널이 범여를 반긴다
잡목의 저항을 뿌리치면서 올라서니...
편백나무와 동백나무가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벌이는 무명봉에 도착한다
무명봉(09:27)
무명봉을 내려서자마자 수확을 끝낸 밭이 나오고
밭가운데를 가로질러 올라서니 양지바른 곳에 묘지가 나온다
묘지로 올라선 다음에...
묘지 뒷쪽의 숲속으로 들어선다
저수지에서 물을 퍼올려 밭으로 가는 파이프들이 많이 보인다
무명봉(09:31)
무명봉을 내려서지마자 시멘트 도로가 나오고 트랙상에는 좌측으로
충평제1저수지가 있다고 나오는데 저수지는 보이지 않는구나.
시멘트 도로 앞 밭 가운데의 저 앞에 보이는 숲으로 맥길이
이어지는데. 산 아랫쪽으로는 내 키보다 더 큰 울타리가
처져 있어서 마루금을 이어가는 걸 포기하고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내리막길에서 우회길은 우측으로 이어지고...
우측에서 내려오는 마루금을 바라보면서...
수로를 따라서 충평길이라는 2차선 도로로 올라간다
충평길(09:40)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수준점(46.0m)
트랙상의 지도에는 분명히 이곳에 수준점이 있다고
표기가 되어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수준점은 보이지 않는다.
수준점 수색에 실패하고 도로를 가로질러 맥길을 이어간다
충평길에서 마루금에 복귀한 다음에 도로를
가로질러 76.8m봉을 바라보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도로 우측 아랫쪽으로 흐릿하게 충평리 갈우마을과
갈우저수지(渴牛堤)가 흐릿하게 보이는데 갈우마을은
1500년경 하동정씨 정성진(鄭成珍)이 약초를 캐러 왔다가
정착한 마을이라고 한다.
묘지를 지나...
76.8m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의외로 등로는 뚜렸하다
76.8m봉(09:53)
엄연한 화원지맥 마루금상에 있는 족보있는 봉우리이건만
맥꾼들한테 철저히 외면을 받는듯한 봉우리인 듯 싶다
카카오의 지도에는 앞산이라 기록이 되어있는 봉우리로
고수들의 시그널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맥길에서 처음보는
시그널 하나만 외롭게 정상을 지키고 있다
76.8m봉 정상에서 북쪽으로 향하면서 내려서니
송전탑이 76.8m봉 산허리를 지키고 있다.
NO27송전탑(09:54)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가다가...
송전탑을 관리하는 한전에서 설치한 빨간 리본을 따라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배추밭을 내려가니 조금전에 헤어졌던 신창길을 만난다
신창길2(09:57)
배추밭에는 지금 한창 수확중이고 길가에는 김해김씨
감무공파 세장산비가 서 있는데, 조금전에 헤어진
길이 직진의 남쪽으로 1~2분 거리에 있다.
왜 맥꾼들이 76.8m봉을 패싱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마루금은 김해김씨 감무공파 세장산비 뒷쪽의 밭을 가로질러
김해김씨 선산으로 가게 되어 있으나 북쪽에 있는 일성산을
바라보면서 신창길을 따라서 우회길을 걸어간다
도로를 따르는 우회길을 5분정도 걸어간 다음에 마루금에 복귀한다
신창길을 버리고 쓰레기가 잔뜩 버려져 있는
경고판 좌측의 시멘트 도로로 오른 다음에...
본격적인 잡목과의 싸움을 준비하는데...
잠깐이지만 싸움은 의외로 싱겁게 끝이난다
갑자기 뚜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선답자의
시그널까지 범여를 반겨주니 굳이 싸움을 하면서
갈 일이 뭐 있겠나...
무영객님께서는 이곳을 동산이라고 표기를
해놨는데 실제 동산은 조금을 더 가야 있다
안부(10:10)
안부를 지나면서 갑자기 등로는 사라지고
잡목의 저항을 헤치면서 동산에 올라선다
동산(57m:10:13)
해남군 문내면 충평리 최북단 야트막한 능선에 있는 산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전혀 올라올 일이 없는 산인듯 하고,
맥꾼들도 왠만하면 우회해서 가는 홀대받는 봉우리이다.
국토지리원의 지도에는 표기조차도 안되어 있는 산이고
카카오 지도에는 “동산”이 아닌 “안산”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해남군의 산에 대한 무관심은 알아줄 만하다
조그만 산에도 지명이 있고, 고개도 많으나 해남군의 그 어느
자료에도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어 답답하다.
잔소리 하지말고, 그냥 산만 타고 가라는 얘기인가보다.
하기사 내 生前에 여기 올 일이 있겠나...갈 곳이 천지삐가리인데...
동산 정상에서 맥길은 우측으로 90도 꺽어져서 내려간다
어마무시한 분들의 시그널
난 저 분들을 한번도 뵌 적이 없지만 산행기를 보면 아무리 거리가
긴 지맥길도 한방에 끝내버리는 분들...아마 저 분들은 전생에
산신령인지, 축지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아시는 분들인가...
느림보 범여로서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동산에서 내려가는 길은 범여의 인내를 시험하는 느낌이다.
모든걸 체념한 체 조심스럽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佛家에서 수행 중에 나타나는 10가지 큰 장애를 물리치는
수행법인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에서 나오는 한 구절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나니,
그리하여 성인이 말씀하시되,
' 어려움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리라
나보고 산을 우습게 보지말라는 뜻인지
아니면 맥길을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런 길은 너무 힘이드는구나
잡목의 거센 저항을 받으면서 내려서니...
넓은 들판이 나온다
밭으로 내려서니 밭에서 봄배추 수확이 한창이다.
민초들이 저렇게 힘들게 일을 해서 낸 세금을 평생 흙한번도
만져보지 않았던 정치를 한다는 인간들은 맨날 쌈박질만
하면서도 호의호식하는 그 복을 어디서 왔을까.
이제 제발 그만들 싸우고, 힘들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도
생각해보기를 바란다...民心은 天心이라 했거늘
힘든 민초들이 들고 일어나면 무섭다는 걸 저들은 모를까?
조금전에 지나왔던 동산을 뒤돌아 본다
농로사거리가 보이고 앞에 보이는
민가를 끼고 맥길은 좌측으로 꺽어진다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일성산(336.7m)이 조금씩 가까워진다
배추밭 뒷쪽에 보이는 저 능선으로 맥길이 이어지나
1분도 안되어서 내려와야하고, 지금 배추밭에서 수확이
한창이라 쥔장과의 마찰도 우려되어 그냥 편한길을 걸어간다
2월 /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
보여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방죽재(36m:10:28)
해남군 문내면 고당리와 화원면 장춘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고당(우)에서 장춘(좌)로 이어지는 도로명 주소가 일성길인
2차선 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며, 지명은 고개 위에 있는 방죽재라는
저수지가 있어서 부르는 지명인 듯하다...이곳부터 좌측은 문내면
충평리에서 화원면 장춘리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방죽이란 물이 넘치거나 치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세운 둑이란
뜻인데 예전에 고당리가 바다를 막은 간척지라 이곳에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범여의 생각 中에서)
방죽재에서 바라본 해남군 문내면 고당리(古棠里)쪽의 모습
고당리(古棠里)는 당집이 있어서 당몰, 당리라 부르다가 옛 당집이라는
의미로 고당(古棠)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전리,
고당리, 장서면의 방하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해남군 문내면 고당리로
개설되었다.
고당리 일대는 백제의 황술현과 통일신라·고려의 황원현 치소터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로는 마을에 감옥터와 향교터로 전해오는 옥태[옥터], 생깃터 등의
지명이 있고, 마을과 가까운 일성산 정상에 고대에 쌓은 돌성이 있고, 마을
깊숙한 곳까지 배가 드나들 만한 포구가 있으며, 그리고 고당마을 인근에 고전,
고평, 고대 등 ‘고(古)’ 자가 들어간 마을이 있기 때문이며,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나오는 고현내리(古縣內里)가 고당 일대로 추정된다.
자연마을로는 고당, 고전, 건네, 새태, 옥터마을 등이 있는데, 고당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고당리의 그것과 같으며, 고전마을은
고당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고, 건네마을은 고전 남쪽의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태마을은 고당 동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옥터마을은 과거 이곳이 황술현의 감옥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황술현(黃述縣)은 6세기에 백제가 해남 지방을 통치하면서 백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하기 위해 설치하였는데, 해남 지역은 삼국이
정립되는 시기까지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4세기 근초고왕 무렵 백제에 의해 일시적으로 복속되기는
하였으나 다시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해남이 백제의
직접적인 지배에 들어간 것은 6세기 성왕 대 담로제 실시 시기와
5방(方) 1군제(郡制) 사이인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양무군 조에 따르면 “황원현(黃原縣)은 원래
백제의 황술현(黃述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라고 하며,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에 따르면 “황원군(黃原郡)은 본래 백제의
황술현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 들어 내속시켰다... 삼내도(三內島)·죽도(竹島)·
노도(露島)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황원은 본래 백제의 황술현이었는데,
신라에서 황원으로 고쳐서 도강(道康)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고쳐서
영암의 임내(任內)로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황원은 본래 백제의
황술현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양무군에 딸린 현이
되었으며, 고려 때에는 영암군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본현에 내속되었고, 목장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성산 오름길에서 만난 방죽제
농로가 마루금인 일성산 오름길
산에 올 때마다 힘들다 힘들다하면서도
주말이면 맥길이 그리워서 베낭을 메고
집을 나선지가 어언 15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원래 계획은 지난해 끝내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어찌 사람사는게 자기 마음대로 된 게 있었던가.
몸뚱아리에 칼을 대는 불상사(폐암수술)를 겪은 후에
급격하게 떨어지는 체력탓에 제대로 산행을 하지도
못했고, 지금은 느림보에 산행속도를 제대로 낼 수가
없어서 지맥길 완주가 자꾸만 뒤로 미뤄지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 지...
잠시후에 오를 일성산(우)과 293.6m봉이 범여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면서 하는 말...오름길이 조금 까탈을 부리겠지만
꼬라지 내지말고 천천히 올라 오라고 한다
일성산 가는 길에는...
호화롭게 꾸며진 묘지들이 많이 보인다
일성산 오름길에서 바라본 호암산(136.9m:문내면 석교리 소재)의 모습
남평문씨 가족묘(10:45~55)
남평문씨 가족묘에서 망자의 밥상을 빌린 다음에 일성산에
오르기 전의 원기를 보충하려고 소보로빵 하나에다 두유로
간편한 점심을 대신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정오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미세먼지의 극성이 멈추지 않으니
목이 답답하다
10분간의 꿀맛같은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길을
떠나고 잠시후에 해오름농장 간판을 지난 다음에...
해오름 농장 입구에서 맥길은 우측으로 향하고...
뭔 용도인지는 몰라도 어설프게 쌓아놓은 블록 담장이 있는 곳에서
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위의 밭에서는 지금 대파 수확이
한창인데, 일하는 인부들이 외국인들인지 그들이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넓은 임도에서 직진으로 이어지는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편안한 직진길로 올라서다가...
우측의 급경사 능선으로 올라간다
등로는 없지만 선답자들이 길을 안내하니 큰 걱정은 없다
코가 땅에 닿을만큼 산비탈이지만 잡목과 가시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뿐이다
어찌 안보인다 했습니다...늘 길 안내 감사드립니다
땅바닥에는 남도지방에서만 볼 수있는 마삭줄 줄기가
등산화에 감기면서 갈길 바쁜 범여의 발길을 붙잡는다
물기를 머금은 나무뿌리가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 또 조심하면서 오르는데, 스틱과
다리에 잔뜩 힘을 주면서 오르다보니
다리에 쥐가 날것 같은 예감이다.
잠깐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한다
집채만한 암릉이 길을 막지만 그렇다고 맥꾼들이 안 가는거 봤어
우측으로 우회를 한 다음에 황소걸음으로 능선을 오른다
가다서다를 반복하면서 올라서니 부처손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조망바위가 나온다
조망바위(11:20)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長春里)의 모습
장춘리(長春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장평리(長坪里)의 장(長) 자를
취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장평마을은 간척한 농토가 길어서 장평(長坪)이라
불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서면의 장평리, 초호리, 이목리, 그리고 방하리와
문내면의 고당리, 신평리, 무고리의 일부를 통합하여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로
개설되었으며, 장평리와 이목리는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
장서면 장평리(長坪里)와 이목정(梨木亭)으로 나온다... 장평리는 그대로 이어져서
장평마을이 되고, 이목정은 이목마을로 바뀌어 현재 장춘리는 장평마을, 이목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장평마을은 1628년경 들어온 나주정씨 정고문이 입향조라고 전하며, 이목마을은
『호구총수』에도 기록이 나와 있고, 이천서씨 선산 비문에도 200년 이전으로 기록이
있어 1800년 이전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목마을은 원동네를 중심으로
당거리, 아네미, 개초리로 나누어져 있다.
북서쪽으로는 잠시후에 가야할 293.6m봉이
까칠한 모습으로 산꾼을 겁박한다
그리움 / 이상윤
얼마나 아파야 꽃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순결해져야
울음이 될 수 있을까
그리움 하나로
새들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강물은 뿌리까지도 남김 없이
온 몸 바다로 가 닿네
돌아오지 않는 사랑 앞에서
날마다 가난한 마음으로
푸른 등을 내거는 별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가슴에 작은 아픔 하나
밝힐 수 있을까
온 몸으로
너에게 그리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일성산으로 향하는 발걸음
천천히 더 천천히 맥꾼답지 않게 걸어간다
편백나무와 동백나무들
무질서하지만 끼리끼리 어울려 뭔 얘기를 나눌까
가까이가서 귀를 쫑긋거려 봐야 나무들의 언어를
내가 알아들을수가 없구나...
눈에 꽁깍지가 씌였나?...뭣이 저리도 좋을까
가풀막을 다 올라선 모양이다.
우측의 고당리에서 올라오는 제도권
등로를 만나서 일성산으로 향한다
고도를 높힐수록 바닷가 근처라서 그런지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땀에 젖은 옷이 바람에 맞으니 살짝 추워지는 느낌이나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돌담이 보이는데 아마도 일성산을 휘감고 있는 황원봉수터(黃源烽燧址)인 모양이다
일성산 갈림길(296.7m:11:45)
이곳에 베낭을 벗어놓고 우측으로 250여m
정도 떨어져 있는 일성산으로 향한다
안부(11:47)
안부를 지나고 대밭을 지나 일성산으로 오르는데,
일성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무인산불감시카메라가
범여를 쬐려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를 한다.
마치 조지오웰의 소설 "1984" 내용처럼...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이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통치자 '빅 브라더(Big Brother)'가
모든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미래상을
그린 소설 "1984"는 디스토피아적 예언서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하는 작품이다.
조지 오웰은 이 작품을 통해 독재 정권의 기만적 속성, 감시와 억압의 공포, 자유와
인권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으며, 오늘날에도 "1984"는 정치적 자유와
인권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며, 무리한 국가 권력의 확장과 감시 사회의 위험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경고로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경각심을 일껴워주는 소설이다.
* 조지오웰(George Orwell:1903~1950)은 영국의 소설가·수필가·비평가로
〈동물농장〉과 전체주의 질서의 공포를 분석한 반유토피아 소설 〈1984년〉으로 유명하다.
일성산(日星山:336.7m:11:52~56)
해남군 문내면 고당리와 화원면 장춘리, 청룡리, 성산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호남정맥(湖南正脈)에서 분기한 땅끝기맥[土末岐脈]에서 뻗어내린 화원
지맥(花源枝脈)에 속하며, 문내면 고당리와 화원면 장춘리, 성산리의 진산이다
지명의 유래는 산이 높아서 해가 뜰 때 산 뒤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고, 별이
뜨면 별이 산 봉우리에 걸려 있는 듯이 보인다 하여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하며,
정상에는 황원봉수터[黃源烽燧址]가 전한다.
일성산은 고당천의 발원지이며, 고당천 물줄기는 금호호로 유입되며, 일성산
큰골에는 마치 애기를 업은 바위처럼 생긴 애기업은바위가 있으며, 장평마을
동쪽 가삼동마을 북쪽에 여덟 개 바위로 이루어진 여덟바우가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황원(黃原) 봉수는 현의 서쪽 60리
[약 23.56㎞]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남쪽으로 진도군 점찰산에, 북쪽으로
무안현의 유달산에 응한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같은 내용이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황원 일성산(日城山) 봉수로 쓰여 있다. 황원 봉수와 일성산 봉수는 같은 명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른 봉수는 산 이름과 함께 언급되는데, 일성산 봉수는 황원
봉수로만 기록되어 있고, 『여지도서』에서는 봉수의 이름이 산 이름으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조선지형도』에서 일성봉(日星峰)이 확인된다.
일성산 정상의 봉화대의 불빛은 우수영 8경 중의 하나인 제6경 일성봉화(日星烽火)로 전한다.
일성산 정상에서 바라본 금호도(錦湖島)의 모습
해남군 산이면에 속하였던 섬으로 금호도의 옛지명은 목화를 생산하여
돈을 묶는다는 뜻의 속금이었으며, 1920년경 금호라 불러야 무한한 발전과
부흥을 이룩할 수 있다 하여 개칭하였고, 금호(錦湖)는 섬 주위를 둘러싼
바다의 경치가 비단자락을 펼쳐놓은 듯 아름다우며 물결이 호수처럼 잔잔함을
의미하며, 1989년 12월 착공된 금호방조제가 1996년에 준공되면서부터 육지화가
되어 섬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일성산에 전해 내려오는 애기바위와 엄마바위에 대한 전설
「애기바위와 엄마바위」는 2016년 12월 11일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
이목마을에서 채록하였으며, 구술자는 박귀환[남]님으로 2017년
해남군에서 펴낸 『설화로 꽃피는 땅끝해남』 하권에 수록되어 있다
1970년대까지 해남 일성산 정상에는 ‘엄마바위’와 ‘애기바위’라는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었다...옛날에 매우 가난하게 살던 아이 엄마가 있었다.
아이 엄마는 시집와서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친정에 가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아이 엄마는 바구니에 아이와 먹을 떡을 조금 담아서 일성산을 올랐다.
종일 밥을 굶은 아이 엄마는 산을 오르자 기운이 없어 잠시 멈추어 섰는데,
바구니를 내려놓을 힘조차 없었던 아이 엄마는 한손으로는 머리에 인 바구니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아이를 잡고 선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그대로 바위가 되어 버렸다.
애기바위와 엄마바위 인근의 마을들은 모두 빈곤하여 인근 주민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일성산에 애기바위와 엄마바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을 청년들이 산에 올라가 두 바위를 밀어 버렸는데, 바위를
밀어 버린 이후 신기하게 마을의 살림살이가 좋아져 잘사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판독이 불가능한 일성산 정상 삼각점
일성산에 잠깐 머무는 사이에 바람탓인지 추위가
몰려와서 서둘러 왔던 길로 되돌아 간다
다시 일성산 갈림길(12:00)
일성산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물 한모금 마신
다음에 베낭을 들쳐메고 다시 길을 나선다
정오가 지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미세먼지는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293.6m봉으로 향하는 길은 급하게 안부로
뚝 떨어졌다가 다시 빡세게 올라야 하는데 안부로 내려가는
급경사길은 장난이 아니다...다리와 스틱에 힘을주고 조심스레
내려간다
나뭇가지 사이로 잠시후에 오를 293.6m봉이 보이는데 상당히 까칠하다
안부(12:13)
일성산 갈림길에서 안부까지 내려오는 길은 마치
천국에서 죄를 짓고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293.6m봉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다시 희미한 등로로 이어지는 오르막길
두릅나무들이 많이 보이는데 한달만 늦게 왔더라면
깔끔하게 손맛을 볼 수 있었는데, 에공~~~많이 아쉽다.
인연이 안되는데 우짜겠노...
오르막길의 바위에는 콩짜개덩쿨들이 간간히 보인다
콩짜개 덩쿨(꽃말:꿈속의 사랑)
콩짜개덩굴은 잎의 모양이 콩을 반쪽으로 쪼갠 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와 비슷한 종이 콩짜개난인데, 콩짜개덩굴은
꽃을 피우지 않지만 콩짜개난은 6~7월에 연한 노란색 꽃을 피운다.
이름이 소박하지만 거울을 닮았다고 해서 거울초, 동전을 닮았다고 해서 지전초,
바람이 불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풍부동, 황금으로 만든 갑옷과 같다고 해서
금지갑 등으로도 불리는 등 특이한 이름도 많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부 지방과 섬 지역 등지에서 자라는 상록성 여러해살이풀로,
특히 난대성 양치류에 속하는 식물로 공중습도가 높거나 주변습도가 높은 곳의
바위나 나무에 붙어 자란다. 줄기는 황갈색으로, 뿌리줄기 부분은 둥글고
불규칙하게 가지가 갈라진다.
콩짜개덩굴 잎은 길이가 1~2㎝, 폭은 0.6~1.5㎝로 타원형이며, 잎자루 밑부분은
마디가 있으며 인편이 촘촘하게 많이 있고, 포자낭이 달리는 포자 잎은 주걱 모양으로
길이는 2~4㎝, 폭은 약 0.4㎝의 크기이다. ..포자 잎의 끝은 둥글며 밑부분이 좁아지고
양쪽에 포자낭이 달리며, 잔고사리과에 속하며 콩조각고사리, 콩짜개고사리라고도 한다.
관상용으로 쓰이며, 뿌리줄기를 포함한 전초는 나염초(螺草)라고 해서 약으로 쓰인다.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서니
준.희쌤의 격려문구가 산꾼을 반긴다
안부(12:25)
무명봉(12:29)
안부에서 다시 293.6m봉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어젯밤에 잠을 설친 탓이라 그런지 졸음이 쏟아진다
등로도 조금씩 거칠어지고, 칡넝쿨 사이로 이어지는 맥길인데
바람도 불지않고,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는 곳에 베낭을 내린다
꿀맛같은 쪽잠(12:35~13:05)
아무도 지나지 않는 등로 가운데에 베낭을 베개삼아 하늘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꿀맛같은 쪽잠을
잤는지 일어나보니 30분이란 시간이 흘러 버렸다.
그런데 몸은 엄청나게 개운한 느낌이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시간은 많이 허비했지만 천근만근같은
몸뚱아리는 엄청 가볍다...오늘 목표로 한 지점까지 못가면
어때...다음에 한번 더오면 되지...이게 나홀로 산행을 하는
독립군의 특권이 아닌가...
산죽 사이로 이어지는 마루금
그래도 누군가가 간벌을 해놓아 293.6m봉으로 향하는 길은 걸을만 하다
무명봉(13:11)
빡세게 올라선 이 봉우리가 293.6m봉인줄 알았는데
올라서서 보니 293.6m봉은 아직도 멀었구나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멋진 암릉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멋진 立石...이름을 뭐라고 해줄까?
바위군들을 지나면서 등로는 제도권 등로처럼 아주 뚜렸하다
293.6m봉 오르는 길에서 뒤돌아 본 일성산의 모습
293.6m봉(13:20)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와 성산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애기엎등산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으나 국립지리원의 지도에는
그냥 293.6m봉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멋진 전망바위가 있다
293.6m봉 아래에 있는 전망바위로 향한다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해남군 화원면 산호리(山湖里)의 모습
산호리(山湖里)는 산수(山水)마을은 마을 가운데로 냇물이 흐르고, 마을 주위를
산이 감싸고 있는 형국으로 예로부터 산과 물이 좋아 ‘산수(山水)’라고 불렀다.
석호(石湖)마을은 마을 주변에 돌이 많아 ‘돌곶지리(乭串之里)’라 부르다가 마을
앞에 저수지가 생기자 돌 ‘석(石)’자와 호수 ‘호(湖)’자를 써서 석호(石湖)라고 불렀다.
1920년대 이후 간척사업으로 농토가 늘어나자 마을이 새로 생기거나 분리되어 마을이
6개로 늘어났는데, 현재 신용마을, 온수마을, 산촌마을, 산수마을, 학상마을, 석호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장서면에 속한 온수동리(溫水洞里)와
돌곶지리(乭串之里)[석호], 그리고 잉박지리(芿朴之里)가 나온다.
『구 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는 장서면 소속의 온수리(溫水里)와 석호리
(石湖里), 그리고 잉박리(芿朴里)라 나온다. 마을 이름이 온수동리에서 온수리로,
돌곶지리에서 석호리로, 잉박지리에서 잉박리로 바뀐 것이다.
신용(新龍)마을은 1924년 간척사업으로, 학상(鶴翔)마을은 1930년대 일본 군인 대좌
출신인 길촌(吉村)의 간척사업으로 생긴 마을이고, 산촌(山村)마을은 원래 온수리와
한 마을이었다가 간척으로 농토가 넓어지고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이 늘어나자
온수마을과 분리되었으며, 간척사업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있었던 잉박리가
없어지고, 간척사업으로 신용, 산촌, 학상 등 3개의 마을이 새로 생긴 것이다
온수마을은 최초 입향자가 밀양박씨라고만 전해 온다. 산수마을은 처음에 오씨가
터를 잡았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고, 그 뒤 윤씨가 들어오고 1750년경 밀양박씨
박영택이 석교리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석호마을은 1456년경 현풍곽씨 곽사녕(郭思寧)이 단종 손위를 보고 은거하기
위하여 내려와 정착하였다고 전하는 마을이다.
오후가 들어면서도 짙은 미세먼지가 걷히지 않아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우측 아래로는 꽤나 큰 규모의 낭초저수지(朗草)가 보이고, 진도에서
목포로 이어지는 77번 국도가 시원스레 달리고 있다.
서북쪽으로는 신안군 장산도가 길게 펼쳐지는데 가까운 거리임에도
미세먼지로 인해 가늠조차 할 수 없으며, 서쪽의 우수영과 진도대교,
진도타워는 아예 보이지도 않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77번 국도 너머에서 목포 구등대로 펼쳐지는 화원지맥 능선은
흐릿하게만 보인다...오늘 저 능선을 걸을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리막길에 발길을 서두르니 등로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가
한마디 툭 내볕는다...산은 늘 거기에 있으니 오늘 못가면
다음에 가면되면 되지 뭘 서두르냐고... 느림의 美學도 모르냐고
힐난을 한다...명심할께요
조망바위(13:23)
2번째 조망바위를 만난다.
낭초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신안앞바다는 아주 가까운
거리임에도 짙은 미세먼지로 인해서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우수영 너머로 보이는 진도쪽도 마찬가지이다.
아쉬움을 안고 내리막길로 향한다
내리막길은...
의외로 등로가 뚜렸하다
안부(13:27)
벌거숭이 나무들도 봄을 알리는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무명봉(13:30)
급경사의 내리막길에는 안전로프가 땅바닥에 나딩군다
안부(13:34)
너덜길같은 곳에서 맥길은 북쪽의 4시 방향으로 이어진다
임도(13:38)
임도를 가로질러 153.0m봉으로 향하는데 송전탑이
있는 곳인지 한전에서 설치한 빨간 띠지들이 많이 보인다
등로는 완전히 고속도로를 가는 기분이다
김해김공&배유인 제주고씨 묘(13:47)
묘지 뒷쪽의 나뭇가지에는 우리나라 지맥길에 있는 봉우리에 이름을
지어주는 작명가(?)께서는 이곳을 작은 일성산이라 붙여놨다.
카카오의 지도에는 이곳도 일성산이 표기를 해놓고 고도도
150m라 표기해놨는데, 지리원의 지도에 표기된 높이와는 다르다
153.0m봉(13:48)
김해김공 묘지를 지나니 신선님께서 154m라는 산패를
붙혀났으나 지리원의 지도에는 153.0m라고 표기가 되어있다
NO17송전탑(13:50)
송전탑에서 바라본 해남군 화원면소재지의 모습
송전탑 석축을 내려선 다음에 급경사가 나오고...
갑자기 등로가 사라지고 잡목의 강한 저항이 시작된다.
트랙을 확인하면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kt 이동통신
화원 중계기지를 만난다.
kt 이동통신 화원 중계기지(14:02)
kt 이동통신 화원 중계기지를 내려서는데...
다시 등로는 사라지고...
산꾼을 괴롭히는 화원지맥 능선의 꼬라지는 정말 심하다
한참을 버벅거리다가 좌측으로 내려서니...
잘 꾸며진 신안주공과 김해김씨 부부묘가 나온다
묘지 아래에 있는 둠벙을 지나서...
묘지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로 내려서니
진도에서 목포로 이어지는 77번 국도를 만난다
이목고개(梨木峴:32m:14:15)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 이목마을에서 신덕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진도에서 목포로 향하는 77번 국도(도로명 주소: 관광레저로)가
시원스레 달리는 곳으로 대체적으로 맥꾼들은 이곳을 한 구간으로
끊으면서 77번 국도라 부른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목고개라 부르는데 고개 좌측 아래 이목교차로와
버스 정류장이 있고, 도로 맞은편에 수정카센터가 있다고 하는데
간판은 잘 보이지 않는다...이목마을은 장춘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지금이 오후 2시가 좀 넘었고 도로로 내려서니 산에서보다 훨씬 바람이 드세다.
3km정도 더 걸어서 산호리 임도까지 갈까 생각을 하다가 어차피
내 발걸음으로는 남은 구간을 한번에 끝내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한번 더 오기로 하고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한다
성산교차로(14:23)
시간적 여유도 있고, 이곳에서 화원면소재지까지 그리 멀지 않을것
같아서 77번 국도를 따라서 화원으로 향하는데 이곳 도로는
교통량이 많아서 갓길쪽으로 바짝 붙어서 길을 걷는다
성산교차로에서 가지를 친 도로를 따라서
내려간 다음에 교차로 굴다리를 통과한다
해남군 화원면(花源面)은 조선 후기에 장서면(場西面)과 장목면(場牧面)으로
편제되었다가, 1906년(광무 10)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감목관이 혁파되고,
그 자리에 관저면(管底面)이 신설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따라 장서면과 장동면, 그리고 관저면 등 3개 면을 합하여
해남군 화원면을 개설하였으며, 이런 지명은 조선 초에 설치한 황원곶목장(黃原串牧場)의
‘원(原)’ 자를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두 면은 황원곶 목장을 중심으로 서쪽에 장서면,
아래쪽에 장목면이 있었다... 화원의 면리는 1906년 지방행정 제도를 개편하면서 약간의
변동이 일어나는데, 황원감목관을 폐지하고 그 자리에 관저면(官底面)을 새로 만든 것이다.
이에 따라 화원 지역은 장동면과 장서면, 그리고 관저면 등 3개 면으로 편제되었다.
이때 장목면이 장동면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동면과
장서면, 그리고 관저면 등 3개 면을 합쳐 화원면을 개설하였다. 이후 화원면(花源面) 지역은
화원면은 1980년 2월 1일 행정리 후포리를 후포와 온덕으로 분할하고, 1980년 5월 2일
행정리 내주리, 외주리를 주광리로 합병하고 행정리 신주광리를 청룡리에 신설하면서
약간의 변동이 일어났을 뿐 1914년 개편 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화원반도의 끝 부분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문내면과 인접하여 있고, 동쪽으로
금호호를 사이로 산이면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바다(해남만)를 사이에 두고
영암 삼호읍과 목포 신외항을 바라보고 있으며, 서쪽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신안군
장산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농지는 동쪽 금호호와 남서쪽의
바닷가에 주로 분포한다.
주요 산은 일성산, 운거산, 지령산, 매봉산, 깃대봉, 큰봉산 등으로 해발 200m 넘는 산들이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조선지형도』에서 화원반도를 살펴보면, 서쪽과 동쪽 일대의 해안선은
드나듦이 복잡하고 여러 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활발한 간척사업으로
지금의 해안선은 그때보다 단조로워졌고, 섬들도 없어졌다.
골목안으로 형성된 화원 5일장은 장날이 아니라서 그런지
상가들은 철시(撤市)된 체 인적을 찾아 볼 수가 없구나
하리 버스 정류장(14:35)
화원면 하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여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해남터미널에 14시 20분에 출발하는 버스가 16시에 이곳에
도착하여 10분간 쉬었다가 목포로 간다고 하는데 시간이
너무 길구나...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하여, 수통에 남은 물로
수건에 적셔 간단하게 몸뚱아리를 씻고,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베낭에서 바나나 하나와 초콜렛으로 원기를 보충한다.
정류장 의자가 따끈따끈하게 불이 들어오니 잠이 쏟아진다
얼마나 잤을까...정신을 차려보니 15시 30분이 지났다
이럴줄 알았으면 산행을 산호리 임도까지 갔어도 될뻔 했다.
16시가 다 되어서야 해남에서 오는 버스가 도착하고
버스에 올라 목포 터미널로 향한다
화원면 하리 정류장 버스 시간표
목포터미널(17:05)
목포발 → 서울행 버스표
목포에 도착했어도 시간적인 여유는 많다
대합실에서 50분을 밍기적 거리다가 서울가는 버스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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