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5년 04월 20일
☞ 산행날씨: 하루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고
짙은 안개로 인해...조망이 전혀없는 실망스런 산행
☞ 산행거리: 도상거리 17.2km / 11시간 4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기짓재- 295m봉- 무명봉- 무명봉- 안부- 288.8m봉- 287m봉
안부- 309.3m봉- 안부- 무명봉- 안부- 조망바위- 암봉- 무명봉
안부- 이정표- 부곡산- 409.8m봉- 암봉- 안부- 무명봉- 암봉
392.8m봉- 조망바위- 안부- 322m봉- 무명봉- 공성산- 무명봉
안부- 309.1m봉- 암봉- 232.7m봉- 갈림길- 안부- 갈림길- 91.3m봉
묵밭- 갈림길- 동신마을 쉼터- 신리삼거리- 신리교회- 36.1m봉
농로 삼거리- 갈림길- 해남윤공&김해김씨 묘- 78.2m봉- 이신고개
암릉- 오성산 갈림길- 안부-암봉-오성산- 다시 오성산 갈림길
조망바위- 밀양박공&김해김씨 묘- 내저고개- 무명봉- 안부- 조망바위
172.2m봉- 안부- 176m봉- 무명봉- 172.5m봉- 옹암마을 갈림길1
157.3m봉(깃대봉?)- 옹암마을 갈림길2- 조망바위- 안부- 조망바위
암봉- 84.6m봉- 무명묘지-송전탑- 광산김공&전주이씨 묘-합수점
무명묘지- 옹암방조제- 옹암마을회관
☞ 소 재 지: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읍 / 강진군 대구면. 마량면
장흥(신산경표상:사자)지맥 마지막 구간을 두고 고민이 아주 많았다.
여느때처럼 심야고속버스를 타고 광주로 가서 새벽에 장흥으로 가는
버스로 산행 들머리인 장흥군 대덕읍까지 가려면 2시간 3~40분은 족히
걸리고, 다시 택시로 기짓재까지 가서 산행을 시작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10시정도는 될 듯하니, 남은거리의 맥길도 만만찮아 느림보인
내 발걸음으로는 거의 무리일듯 싶다.
세상에 살면서 죽으란 법은 없는가 보다.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서 사자지맥의 마무리할
생각에 한창 고민중인데, 한 동네에 사는 지인이 사무실에 왔다.
이 분도 산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나처럼 맛이간(?) 산꾼은 아니고
집에서 가까운 청계산이나 관악산을 주로 다니는 명산 마니아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번주는 어디로 가시나요...묻기에 장흥을
간다고 하니 자기 고향이 장흥이란다...그러기에 내가 이런저럼
고민이 있다고 하니...그럼 새벽에 산행을 시작하면 끝낼수 있겠네
하기에 그러면 되긴 하는데 새벽 교통편이 문제라고 하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장흥읍에 사는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면서 여차여차하니 나하고 같이 개포동에 사시는 분인데
니가 이른 새벽에 대덕읍까지 태워주라고 친구에게 부탁을 하니
한방에 OK를 하는 모양이다...지인만 믿고 토요일을 기다렸다가
오후에 베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장흥행 버스표
토요일 오후에 조금 일찍 집을 나서서 호남터미널에 도착하니
장흥가는 고속버스가 15:05, 16:10, 17:00 등 1시간 단위로
연달아 있기에, 조금이라도 장흥에 빨리가서 휴식을 취하려고
오후 3시 05분에 장흥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올 4월에 들어서는 매주말마다 산꾼과 무슨 악연이 있다고 비가
오는지?...이번주 일요일에도 비가 온다고 하여 일기예보를 검색하니
다행히도 장흥지역은 토요일 저녁에는 비가 오지만, 일요일은 맑음이라고
하기에 구라청(기상청)을 철석같이 믿고 장흥으로 향하는데, 버스가
호남고속도로 정읍을 지나면서 장마철을 연상케하는 비가 쏟아지는데
이게 뭔 조화람...나주혁신도시를 지나고, 영암을 통과할 무렵에는
비가 그친다.
장흥시외버스터미널(19:40)
장흥 터미널에 도착하여 지인의 친구분과 새벽 5시에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하고, 추어탕집에 들려서 저녁 식사를 한 다음에 모텔로
향한다
아이비 호텔(20:50~05:00)
지난주에 와서 滿室이라는 이유로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던
호텔에 둘리 다행히 방이 있어서 50,000원 주고 방에 들어가
샤워를 끝내고 일치감치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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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에 일어나 호텔을 빠져나와 터미널로 가니 아직 지인의
친구분은 나오지 않았다...편의점에서 군고구마 하나와 커피한잔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편의점을 나오니 지인 친구분이 나를 기다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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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터미널에서 기짓재까지 가는 길에는 짙은 안개가 도로를
가로막아 차는 생각보다 속도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기깃재에 도착한다
기잿재(蟹峴:215m:05:55)
장흥군 대덕읍 신월리 내동마을과 분토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819번 지방도인
2차선 포장도로(도로명 주소:대대로)가 지나는 곳으로 대덕읍 소재지가 있는
신월리에서 강진군 대구면 계율리로 향하는 곳의 좌측으로는 분토리로
이어지는 도로(도로명 주소:분토로)가 내려가는 삼거리 고개이다
기짓재의 지명유래는 해유령(蟹踰嶺:게가 넘는 고개)의 작은 말인 해현(蟹峴)이란
뜻으로 옛 사람들은 고개를 넘나드는 인파가 게가 이동하듯 끊이지 않고 일정하게
열을 짓는 모습을 재치있게 해유령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동지도(장흥)에 계치(界峙)로
표기되어 있으며 ‘월정리 서남쪽에 있는 긴 고개이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산행을 시작하다(06:05)
기짓재에 도착하니 이미 날은 훤히 밝았지만, 밤에 비가 내린 탓인지
짙은 안개가 고개를 덮고 있다...나를 태워준 지인의 친구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면서 작별을 한 후에 산행을 준비하는데
일기예보와는 달리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보슬비가 내리는데 참으로
난감하다...아무래도 오늘은 비를 맞으면서 걸어야 할 우중산행이
될 듯 싶다...카메라와 스마트폰은 비닐로 싸고 산행을 시작한다
보슬비를 맞으면서 기짓재로 올라서는데 벌목후에 황칠나무를
조림한 지역의 급경사로 벌목지 숲에서 숨어피는 각시붓꽃이
애처롭게만 보이는구나
각시붓꽃(꽃말:기쁜 소식)
화랑 관창의 정혼녀 무용의 애처로움이 고스란히 담긴듯한
각시붓꽃...꽃의 모양은 새색시 무용을 닮았고, 잎은 관창의
칼끝을 닮았다는 젊은 남녀의 애처로운 전설이 전해지는 꽃이다
황칠나무 조림지 사이드에는 성터의 흔적같은 돌담이 보이는데
예전에 이곳이 연해산성(沿海山城), 만리성(萬里城), 고장성(古長城),
계치성(戒峙城) 이란 기록이 이 지역 신문인 장흥투데이라는 기사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산성의 흔적으로 짐작되는 것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가 고장성(古長城)인데, 고장성이 장흥 문헌에 등장한 것은《장흥읍지-정묘지》로
즉 ‘대흥방’편 고적조에 나오는데, “고장성 : 진목리 뒤(영보마을)에서부터 평원을 가로 뻗혀
계치(戒峙)를 너머 강진 경계에 이르며, 석축 면이 모두 안을 향하고 있으나 연대는 알 수 없다.
古長城 : 起自眞木里後 橫 平原, 踰戒峙至康津界, 石築面皆向內, 年(代)未詳”의 기록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석축은 바깥 즉 해안 쪽이 아니라 내륙을 향하여 쌓은 성이라는 의미다.
이에 대해 위의환 씨(고문학자, 전 장흥환경연합의장)는 “일명 만리성(萬里城)이라고 한다.
분토마을엔 이 성과 관련 구전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개 바닷가의 성은 바다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으로 이 성은 반대로 바다 쪽에서 육지를 방어하는 성이기 때문에
《정묘지》에서 석축 면이 모두 안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성을 중심으로 율지 마을을 성안,
연평 마을을 성밖 마을이라고 부른다.
1996년 《대덕읍지》 664페이지에서 ‘본성을 답사한 이은상 선생의 말씀이 ‘이 성은 당시를
그려보면 자보고의 성이 아닐 수도 없고, 당시 (장보고에) 끌려 온 당인(唐人)들이 남아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기록돼 있다”고 설명하고 “장보고가 이 성을 쌓은 목적은 만가촌과
보문사(普門寺는 율치촌에 있었다)를 보호하고 보문제(普門題)를 통해 식량조절을
하겠다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또 《대덕읍지》 ‘고려시대 문화유적’ 조에는 ‘만리장성지(萬里長城址)(古長城)’
부문에서 더 장황히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만리장성에 대한 소개 내용은 일제 때의
조사 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의 강진군 ‘용운리
성지조(龍雲里城址條)’와 ‘구수리성지조(九修里城地條)’의 조사 내용까지 곁들였다.
“용운리성지조= 성명(城名)은 연해장성(만리성)이라는 하는데 성벽이 대체로 완전하다.
횡단면은 구형(矩形-곱은 형태)인데 연해장성은 옛날 돌성(석성)으로 진도에서 시작하여
강진 대구면 해변, 장흥 대흥면(현 대덕읍)을 거쳐 바다 건너 흥해(興海)의 연해제산에
이르고 경상도 연해까지 이어진다. 고려 문종 원년, 1046년에 동해로부터 해남(남해안)까지
연해에 성벽(城壁)과 농장을 쌓아 준동하는 해적을 방위하였다.(고려사). 그러므로
하등 구비(口碑)와는 상관이 없다.”
이어 ‘구수리성지조(九修里城地條)’ 조사 내용도 기록했는데, 그 내용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제시된 문헌으로 한 기록도 첨언했다.
즉, 《고려사》의 내용으로,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병부낭중(兵部郞中) 김경(金瓊)을
보내 동해(東海)로부터 남해(南海)에 이르기까지 연변(沿邊)에 성보(城堡)와 농장(農場)을
만들어 해적의 요충을 제압하게 하였고, 文宗卽位 遣兵部郞中金瓊, 自東海, 至南海,
築沿邊城堡農場, 以扼海賊之衝.”(《고려사》志>卷第三十六)를 소개하고, “이 사료를
근거로 어렴풋이나마 남도 성역에도 해적에 대한 방비책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렇지만, 위 사료들이 밝히는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되었다’는
내용에 대해서, 현지 조사 결과 성축은 해안이 아닌 내지를 향해
축조되어 있어, 이들 사료에 의혹이 간다는 식으로 기술하였다.
유적 현황에서는 민가나 도로 등이 있는 부문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① 대덕읍으로는 기잿재 부근에서 완전한 형태의 성축 일부가 보이고
②강진군과 경계지점인 분토리 ‘가는 골’에도 300m 가량이 비교적 양호한 형편이고
③강진군의 관찰봉 주변으로는 거의 파괴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고 기술했다.
장흥의 향토학자 양기수 씨도 《장흥읍지》 기록 외에, 강진의 황상(黃裳,1788∼1870)이
“성의 이름을 마류장성(馬留長成)이라 하여 말이 머무는 긴 성이 있다”고 소개한 사실과,
강진의 윤정기(尹珽崎,1814∼1879)가 《동환록東寰錄,1859년刊》의 강역편 진도조에서,
“고석성(古石成)이 진도에서 시작하여 강진군 대구면의 바닷가를 지나 장흥군 대흥면에
거치고 바다를 건너 흥양(興陽, 현 고흥군)의 바닷가까지 뻗치며 경상도 바닷가까지 연결된다.
지금도 성의 형태가 완만하게 남아 있으나 어느 때 쌓았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 되어 있다”고
소개한 사실도 소개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성이라면 마땅히 바다 쪽을
향해 쌓아졌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내륙을 향해 쌓았다는 점이 의혹이다”며 이 만리장성
사료들에 의문점을 제기했다
출처 : 장흥투데이(http://www.jhtoday.net)
초반부터 비를 맞으면서 청승맞게 가풀막을 치고 오르는데
산에서 만나기가 쉽지않은 노란각시붓꽃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오늘 뭔 존 일이 있을라나...오늘 범여의 바람이란 다 필요없고
비를 맞지않고, 무사히 합수점까지 갔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연해산성이라는 성터같은 곳을 지나 숲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장흥(사자)지맥의 마지막 구간 능선으로 올라간다
295m봉(06:20)
가랑비에 땀까지 범벅이 되면서 빡세게 능선에 오른 다음에
숨한번 크게 내쉬고, 좌측으로 꺽어지는 능선을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무명봉(06:26)
무명봉에서 맥길은 남쪽으로 향하고 가랑비 탓인지
곰탕집의 진한 육수같은 짙은 안개가 산을 휘감고 있으니,
주위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게 지극히 정상적이다
산성터의 흔적처럼 보이는 너덜겅으로 올라간다.
이곳도 연해산성의 성터일까?...실체도 없는 성터인지
처음 이곳을 지나는 범여로선 확신이 서질 않는구나
무명봉(06:32)
안부(06:34)
계속해서 만나는 실체가 역사적으로 완벽하게 입증되지 않은
성터같은 흔적을 치고 올라가는데 비에 젖은 등로는 미끄러우나
오늘은 지난주와는 달리 날씨가 포근하여 비를 맞는데도 불구하고
그리 춥지가 않은것에 감사하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288.8m봉(06:42)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맥길...마루금과 같이가는 등로에는
망가진 녹색휀스가 보이는데 예전에 약초재배지였던
곳인듯 하나, 지금은 관리가 안되는 모양이다
좌측 아랫쪽으로는 장흥군 대덕읍 신월리 내동마을쪽인데
짙은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신월리(新月里)에 있는 내동마을은 거정 서쪽의 골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축하객 하나없이 홀로 지맥길 졸업 산행에 나서지만
여태껏 거의 홀로 걸었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라
아무런 감흥도 없다...그저 힘들다는 지맥 하나
끝내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287m봉(06:51)
비에젖고 나뭇가지에 묻은 빗물에 젖으니 초반부터 내 몰골은
새앙쥐 신세...똑닥이 카메라 렌즈에 물이 묻고, 습기가 차니
불편하기 그지 없다... 비닐봉지에 꽁꽁 묶은 스마트폰도 습기가
차는것 같아 걱정인데...트랙을 확인 안할수도 없으니 난감하구나.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지나온 구간과는 달리
잡목의 저항이 덜하니 그것에 감사하면서 걸어야지...
안부(06:56)
309.3m봉(07:02)
부곡산으로 향하는 길...산죽길이 시작되지만
범여처럼 기럭지가 짧은 산죽이라 그리 겁은 안나는구나.
안부(07:03)
잠깐의 산죽구간이 끝나고 암릉구간으로 향하는데,
산죽 이파리에 묻어있는 빗물이 등산화 안으로
들어갔는지, 신발안에 빗물이 파도를 치는지 철석거리는데
엄청나게 불편하고 찝찝하다
群鷄一鶴이 아닌 群木一松인가?
지저분한 잡목이 판치는 지맥 능선에 조선조에 송도의
뭇남성의 애간장을 태웠던 기생 黃眞伊의 도도함만큼이나
꿋꿋하게 맥길을 지키는 저 멋진 소나무의 도도함...부럽다
* 황진이(黃眞伊)는 조선 시대의 명기(名妓)(?~?). 자는 명월(明月)이며,
재색이 뛰어난 명기로, 서경덕, 박연 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으며,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 관계(師弟關係)를
맺은 일화가 유명하며 한시(漢詩)와 시조(時調)에 뛰어났으며, 서경덕(徐敬德:1489~1546)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완성했으며, 대표작으로는〈원이기(原理氣)〉·〈이기설(理氣說)〉·〈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했다.
무명봉(07:08)
내년을 기약하며 퇴장하는 진달래를 보면서...
짧은 산죽구간을 통과한다
안부(07:11)
안부에서의 오르막길은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스럽게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조망바위(07:17)
좌측 아랫쪽으로 보여야 할 대덕읍 신월리는 한치앞도 안 보이는
그야말로 五里霧中이다...신월리(新月里)는 대덕읍 소재지가 있는 구릉성 평지로
이루어진 마을로, 논농사가 주로 행해지며 마을 북쪽으로 영산강이 흐른다.
월정리, 거정리, 내동리, 신기리 등을 병합하면서 신기와 월정의 이름을 따 신월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월정, 가리정골, 거정, 내동, 서나뭇골, 축내마을 등이 있다.
월정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고, 가리정골마을은 월정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가리점(목기 만드는 곳)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거정(巨井)마을은 신월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내동마을은 거정 서쪽의 골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서나뭇골마을은 서나무가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축내마을은 앞에 방죽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맥길을 이어가는데, 빗물을 가득
머금은 부처손이 범여의 마지막 맥길을 축하해주는구나.
나도 빠질순 없지 하면서 철쭉도 축하해 주는데...
그래 다들 고맙구나...내가 운제 한턱을 거하게 쏠게...
암봉(07:20)
낙엽속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제비꽃도 범여의 장흥지맥
졸업산행 축하에 동참한다...다들 고맙다...이 맛에 맥산행의
묘미에 빠져드는가 보다.
무명봉(07:36)
안부(07:38)
안부에서 암릉 사이를 낑낑대며 올라서니 맥산꾼들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씨잘데없는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정표(07:40)
좌측으로는 장흥군 대덕읍 신월리 초당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오늘 처음으로 족보가 있는 부곡산을 1분만에 도착한다
부곡산(富谷山:425,0m:07:41)
장흥군 대덕읍 신월리와 도청리, 분토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이대장이
설치한 백두사랑산악회산패와 2등 삼각점이 있고, 잡목이 우거지고, 안개가
짙게 깔려있어 아무것도 볼 수가 없고 또다른 지명으로 어등산( 御登山)이라고도
한다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고, 대덕읍의 자료에는 대덕읍 서부지역에 있는 산으로
표시되어 있다...분명히 지도상에 족보있는 산이라면 왜 부곡산이라 부르는가에
대한 이유가 있을텐데...
부곡산 정상 2등삼각점(△ 신지 21 / 1993 재설)
인증샷
부곡산에서 지맥길은 남쪽으로 이어지는데 소강상태를 보였던 비가
또다시 간헐적으로 내리기 시작하는데, 짙은 안개와 우거진 나무로
인해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부곡산을 지나면서 좌측으로는
기짓재부터 같이해 온 대덕읍 신월리와 작별을 하고 도청리로 들어선다
도청리(道廳里)에는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활약했던 무장(武將)이자
무역상이었던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의 휘하에 있던 장졸과 백성들이 거주했던
촌락이 있었던 곳이란다
지금의 대덕읍 신월리 초당마을과 ‘한국말산업고등학교’에서부터 도청리 도서마을
뒤뜰까지였는데 이곳 뜰의 이름이 만가촌(萬家村) 또는 망가촌(亡家村)으로 불리는데
전하는 바로는 만가(萬家)는 ‘많은 가구가 있어 만가촌 ’이라 했다하고, 망가(亡家)는
왜구의 침입으로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마을이라 하여 망가촌이라 했다 한다.
《대덕읍지》 ‘전설과 설화’ 편에 ‘만가촌(萬家村)’의 설화가 나오는데, “대덕읍 도청리
어등산(魚登山) 아래 해안선을 끼고 만여 호의 큰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그곳에는 주춧돌이며 기와장, 석기(石器) 등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 땅의 넓이가
약 5만여 평에 이른다고 하며, 이곳의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보아 만가촌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작은 건천이 있는데 이 하천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장사(將士)가 나고 남쪽에는
재사(才士)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 만가촌이 없어진 것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또 ‘도청리 도동마을’편 문화유적에서도, 만가촌에
대한 설화가 소개되고 도동마을의 옛터로 만가촌의 고허(古墟)가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도청리 도동마을이나 도서마을 모두 성촌의 시작을 고려 때부터 만여 호가 성촌되어 5만여
평의 광활한 대지에서 대촌을 일구며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일부 향토사학자들(대덕읍지 편집자, 양기수‧위의환 씨)은 도청 마을의 만여 호의 대촌을 장
보고와 그 추종세력이 살았을 것으로 유추하면서 만리장성 또한 장보고와 관련이 있는 장성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장보고(張保皐)는 남북국시대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신라, 일본 간 해상무역을 주도한
상인으로 출생일은 미상이며 846년(문성왕 8)에 사망했다. 청년기에 당에서 군사 및 해상무역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고 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신라·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했으며, 산동성 적산촌에 법화원을 건립하고 후원했다...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해 거대한 지방세력으로 성장했고 왕위계승분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신무왕(神武王:신라45대 임금) 즉위에 관여했고 이후 중앙정부와 반목하다가 옛 부하 염장에게
암살당했다.
빗줄기도 조금씩 굵어지고 바람도 불어대면서 추위 걱정을
하지않고 걸었던 조금전과는 달리 옷이 젖은 터라 추위를
느끼면서 걷는다
또 다시 밀려오는 짙은 안개...오늘은 주위를 볼 필요도 없고
그냥 걷기만을 해야 할 듯 싶다...그렇게 걷다보니 409.8m봉에
도착한다
409.8m봉(07:52)
409.8m봉을 지나면서 암릉이 나오고 좌측의 내리막길을 내려서는데...
어느 산꾼의 시그널 타이틀이 비맞은 새앙쥐처럼 걷고있는
범여에게 웃음을 선사한다...뭐하다뇨... 맥길을 걷고 있습니다
암봉(07:55)
맥길은 또 다시 좌측으로 향하고...
쉬어가기 좋은 너럭바위가 나오고, 좌측으로 보여야 할
도청리(道廳里) 계곡으로 이어지는 멋진 仙景을 즐기는 건
포기해야 할 듯 싶다.
장흥군 대덕읍에 속해있는 도청리는 영산강이 흐르는 평지에 자리한 농촌마을로,
도청교가 놓여있고 면사무소가 있으므로 도청리라 하는데 자연마을로는 도청, 도동,
가는골, 팽남골마을 등이 있다.
도청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도청리의 그것과 같으며, 도동마을은
도청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가는골마을은 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팽남골마을은 팽나무가 많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물푸레 나무들의 꽃을 보며 도청리 계곡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계속되는 내리막길로 향한다
안부(07:59)
무명봉(08:01)
무명봉을 지나면서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고...
항공안전 유도 안테나를 최근에 설치했는지
선답자들의 산행기에서는 보지 못했다
몰려오는 짙은 안개와 함께 가랑비는 계속되고, 산행기록을
해야하는 똑닥이 카메라에 물이 들어가면서 사진은 엉망으로
되어간다
암봉(08:13)
계속되는 오르막길
나그네길 / 정연복
살아가는 일이
더없이 즐겁고 행복할 때
또 하루하루 삶이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하늘에 흐르는
구름 하나를 바라보면서
인생은 굽이굽이
나그네길이란 걸 기억하자.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기쁨의 길이든 슬픔의 길이든
그 길의 크고 작은 풍경들을
눈과 가슴에 담으면서.
등산화 안에서 철석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걷다보니
나뭇가지에 시그널들이 비를 맞으면서 오르막길을
안쓰럽게 올라오는 범여가 측은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범여님!...여기가 392.8m봉이요 하는듯 하여 쳐다보니
선답자의 시그널에다 392.8m봉이라 표기가 되어 있으나
있어야 할 준.희 쌤의 산패는 보이지 않는구나...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그냥 길을 떠난다
392.8m봉(08:25)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걸려있는 곳에서 몇발자국을
옮기니 그곳에 준희쌤의 산패가 갑자기 툭 튀어 나오는구나
392.8m봉을 지나자마자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비가 오지 않는다는 예보를 믿고 천리도 넘는 먼길의
장흥땅을 와서 멋진 피날레를 장식하려 했는데 모든게
꼬여버린 느낌이다...
조망바위(08:30)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주변은 짙은 안개의
몽니로 인해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오리무중이다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서는 좌측에
보이는 멋진 바위도 안개에 휩싸여 갈 길은
잃은 모양이다
안부(08:36)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던가...
산행 시작부터 비를 조금씩 맞으면서 걸었는데 이제는
속옷까지 다 젖은 느낌이다...그렇다고 이런 곳에서는
우의를 입을 여건도 안 되니 방법이 없구나...비가 올 때의
지맥길 산행이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하루이다
조금씩 고도를 높히는 등로에 있는 산딸기가
하얀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데, 여름에 이 곳을
지나가려면 고생깨나 하겠구나...
남도의 산길에서는 만나기가 그리 쉽지않은 족도리풀도
간간히 보이는데 이파리를 들쳐 보니 아직은 꽃은
보이지가 않지만 조만간 꽃이 필듯이 보인다
322m봉(08:50)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무명봉이 나온다.
이곳부터 좌측은 대덕읍 도청리에서 잠두리로 행정구역 바뀌지만
우측은 계속해서 분토리와 같이 한다...지도를 보면 우측으로는
분토리 하분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장흥군 대덕읍에 속해있는 잠두리(蠶頭里)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농촌마을로,
마을 동쪽으로 영산강이 흐르며, 마을 뒷산의 지형이 누에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잠두리라 하는데 자연마을로는 잠두, 구선창, 분탕골, 장자골마을 등이 있다.
잠두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잠두리의 그것과 같으며 뉘댁박이라고도
불리며, 구선창마을은 과거 이곳에 선창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분탕골마을은 불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불당골이라고도 불리우며, 장자골마을은 장자(부자)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무명봉인 322m봉에서 살짝 좌측으로 향한다
무명봉(08:58)
맥길은 살짝 남서쪽으로 꺽어진 다음에 공성산으로 향한다
오르막길이 시작되지만 현재로선 어디가 어딘지
感은 오질않고, 봉사 문고리 잡는 심정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매주 베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급경사 구간을 만나면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
수반되지만, 그 고통을 이겨내고 느끼는 喜悅은
산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알리라...
미끄러운 등로에다 암릉구간...조심스럽게 올라서니 공성산이 나온다
공성산(孔聖山:367.2m:09:03)
장흥군 대덕읍 분토리와 잠두리, 신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묘터의 흔적같은 돌담이 보이고 본듯한 대장이 설치한 백두사랑산악회
산패가 있으나 주변의 나무들로 인해서 조망은 전혀 없는 편이다
지명의 유래는 산의 지세가 성인(聖人)같고 준수하여 신성하고 영험스런 산으로
여겨 왔으며, 주민들은 산 밑에 모성래(慕聖來)라는 서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마음을 닦으면 공자와 같은 성인이 날 것이라 기대하여 공성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한 지 3시간을 지나니 조금씩 피곤함이 몰려온다.
거기다가 우중산행이라 疲勞度가 가중되는 느낌이라 비야 오던말던
베낭을 내려놓고 10분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앞으로 가야할 등로의
트랙을 확인하는데...헐!...이게 뭐람.
비닐봉지에 꼭 싸맨 스마트폰에 물이 들어 갔는지 트랙이 작동되지 않고
이상한 기계음이 울려되니 참으로 난감하네...스마트폰 앱에 깔려있는
트랙 하나만 믿고 길을 걷는데 큰일이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야 있겠지 하는 믿음 하나로
다시 길을 나선다...맥길은 우측의 아랫쪽으로 향한다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고수님께서 턱 버티고 서 있으면서
하시는 말씀...그대의 산행 짠밥이 얼만데 ...쪼느냐고...
잘 알겠습니다
비에 젖어 새앙쥐가 된 듯한 범여의 몰골
계속되는 내리막길...트랙이 없으니 바짝 긴장이 된다.
등로에 신경을 쓰고 간간히 보이는 선답자의 시그널을
등대삼아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가늘게 내리던 가랑비는 다시 소강상태로 모드가 바뀌지만
옷이 다 젖어 버렸고, 스마트폰의 작동이 불능 상태이니
비가 오거나 말거나 체념한 상태로 맥길을 이어간다
무명봉(09:27)
무명봉에서 맥길은 남서쪽으로 이어지고 암릉이 나오는데
좋은 날씨라면 멋진 조망이 전개될 조망바위 같은데 오늘은
그걸 기대하는 자체가 무리일 듯 싶다
내려서면서 바라본 조망바위 아랫쪽의 모습
간간히 만나는 선답자들의 흔적을 따라서 조심스레 내려간다
내리막길의 등로는 갑자기 사라지고 이리저리 헤매면서 내려서는데
소화기 질환과 각종 통증에 효험이 있다는 백선(白鮮)이 얼굴을 내민다
백선은 전통 한방에서 오랜 시간 사용되어 온 약초로, 그 독특한 향과 풍부한 영양소로
인해 현대에 와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특히 항염증, 해독, 면역 강화 효과로
주목받고 있는 약초이다
무작정 내려오지만 등로는 보이지 않고, 제피나무 사이로
치고 내려오니 흐릿한 등로 보이는 안부가 나오는데, 선답자들의
시그널들이 보이니 지맥길이 맞는 것 같다
안부(09:42)
안부를 통과하자마자 또다시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쓴다는 족도리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족도리풀(꽃말: 모녀의 정)
이름답게 넓은 이파리 아래에 숨어서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신혼 첫날
거사를 치르는 새색시마냥 수줍은 모습인데 슬픈 사연이 있는 꽃이다
옛날 경기도 포천 지방에 아주 예쁜 소녀가 살고 있었는데, 꽃처럼 아름다워서
꽃아가씨라고 불렸는데, 꽃아가씨는 산나물을 캐고 꽃나무를 심으며 생활하다
궁녀로 뽑혔으며, 궁궐에서 생활하던 중 중국으로 팔려가고 말았다.
결국 중국 땅에서 들판에 굴러다니는 풀처럼 살다 죽고 말았는데 그러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도 죽었다...두 모녀가 죽은 뒤 그 집 뒷마당에 풀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 풀에 핀 꽃은 여자가 시집갈 때 쓰는 족두리처럼 생겼으며,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사람들은 그 꽃이 꽃아가씨의 한이 맺힌 꽃이라고 했고,
그 풀을 족도리풀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질급한 병꽃도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태세이다
숨이 꼴깍 넘어갈 정도의 급경사 오르막길
비에 젖은 등로는 엄청나게 미끄럽고
등로가 뚜렸하지 않으니 마루금인지 확신은 서지 않지만
그래도 오랜 지맥길을 걸으면서 쌓은 노하우(?)로
맥길을 이어간다
등로는 보이지 않는데 저 앞의 철쭉나무 가지에 걸려있는
노란 시그널 하나가 이곳이 맥길임을 알려준다
안부에서 빡세게 치고 오르니 능선이 나오는데
아!...힘들구나.
긴 한숨을 내쉬면서 서쪽으로 향하는데...
암릉옆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309.1m봉 산패가 보인다
309.1m봉(09:58)
맥길은 우측으로 꺽어지면서 급경사의 내리막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암봉(10:01)
이제 비는 완전히 그친 느낌이다...하지만 나뭇가지가 머금은 빗물을
내뱉으니 비가 오나 그치나 매한가지인 느낌이나. 그나마 다행인 건
바람이 불지않아 춥지 않은 것 만으로 감사하며 길을 걷는다
트랙도 없이 感으로만 걷는 범여에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다들 복받을깁니다
걷다보니 커다란 동백나무 한그루와 앙증맞은 돌들이
반상회하듯 모여있는 무명봉인 232.7m봉에 도착한다
232.7m봉(10:10)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의미없는 길을 걷는 건 아니다.
내가 언제 편하고 쉬운 길만 걸은적이 있었던가...조그만 계곡물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가듯이, 지맥길 하나 하나를
마무리 하다보면 162지맥길의 끝이 보이겠지...
좌측 아랫쪽으로는 안개가 뒤덮힌 계곡이 보이는데
아마도 대덕읍 신리 마을로 이어지는 계곡인 듯 하다
갈림길(10:15)
맥길은 좌측 아래로 향하는데 계속해서 고도를 낮추면서 내려간다
등로는 보이지 않으나 먼저가신 분들이 등불을 밝혀주시니
스마트폰이 죽었다고 해서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산행기는 집에가서 작성할 건데...
빛바랜 레전드의 흔적...
안부(10:20)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서니
편백나무 조림지가 있는 안부에 도착한다
갈림길(10:23)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건 불변의 진리이다.
그러기에 주어진 시간에 부지런히 걸어야만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가 있는데, 발걸음이 느린 범여는 그게
가장 큰 컴플렉스인 듯 하다...우측으로 발걸음을 옮겨
북쪽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편안한 임도가 툭 튀어 나온다.
임도로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91.3m봉...
91.3m봉(10:30)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걷다보니 갑자기 草地처럼 보이는 묵밭이 나온다
묵밭(10:33)
갈림길(10:35)
묵밭을 지나니 우측의 서신마을로 내려가는 임도가 보이고
임도 좌측으로 선답자의 시그널 2개가 이곳이 맥길이니
오라고 손짓을 한다
부뜰이님의 안내를 받으면서 내려서니 갑자기 등로는 사라지고...
어디로 가야하나 한참을 버벅거려 보지만
등로는 보이지 않고 무대포로 치고 내려간다
반가운 최상배님의 시그널의 안내로 내려가니...
대밭이 나오는데 길은 보이지 않고 우측으로 그냥 밀고
내려오니 민가 마당이다...6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정네한테 남의집 안으로 들어왔다고 뒤지게 혼이나고
미안하다는 말을 한없이 되내이며 다시 좌측으로 돌아가서
논두렁을 따라간 다음에 장흥대로라 불리는 23번 국도로
들어선 다음에 신리 삼거리로 향한다
신리 삼거리로 가는 길에서 바라본 장흥군 대덕읍 신리 동신마을의 모습
대덕읍에 속해 있는 신리(新里)는 동신, 서신, 이신마을로 갈라져 있으며
생각보다 마을의 규모가 꽤나 크게 보이는데, 이곳 신리는 평산신씨 집성촌이란다.
구릉성 평지로 이루어진 신리마을은 논농사가 주로 행해지는 곳으로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신리라고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대삿골, 서나뭇골, 새몰, 동신, 서신, 비석거리, 오성그미마을
등이 있는데 대삿골마을은 대삽(대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서나뭇골마을은
서나무가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새몰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며, 동신마을과 서신마을은 각각 새몰의 동쪽, 서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비석거리마을은 비석이 서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오성그미마을은 오성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23번 국도를 따라서 신리삼거리로 향한다
동신마을 쉼터(10:50~11:13)
비가 오지 않는다는 예보만 믿고 산행을 시작했는데 예보와는 달리 오전내내 가랑비를
맞았더니만 옷이 젖은 탓인지 살짝 추워지는 느낌이다...마치 동신마을 입구에 쉼터가
있어서 이곳에 베낭을 내려놓고, 산행후에 갈아 입을려고 가지고 온 여벌옷으로
미리 갈아입고, 빵과 두유로 이른 점심을 해결한 다음에 20분 넘게 휴식을 취한다
젖은 옷을 갈아 입고나니 훨씬 나은 듯 하다...아직까지 핸드폰은
작동이 되지 않지만 이곳에 오기전에 읽고 온 선답자의 산행기의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다시 산행을 시작한다
신리 보건진료소와 동신마을회관을 지나 동신과
서신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신리 삼거리에 도착한다
신리삼거리(11:15)
장흥군 대덕읍 신리에 있는 삼거리로 직진으로는 23번국도(장흥대로)가 통과하고
식당과 구멍가게,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는 서신마을 표시석과, 육각정자가
보이는데, 선답자들은 서신마을 표시석으로 방향으로 내려왔다는 산행기를 봤는데
나는 한참을 좌측으로 돌아온 셈이다
삼거리 방앗간을 지나니...
삼거리 방앗간 맞은편에는 대통령각하 하사금 사업으로 지었다는
동신창고라는 건물이 보이는데, 참 어려웠던 시절에 이런 곳까지
각하께서 배려해 주신 모양이다.
민초들에게 조그만 창고 하나라도 배려해주고, 민초들의 살림살이에
각하께서 신경을 써 주셨는데, 지금의 지도자라는 자들은 저런 것에는
아예 관심조차도 없고, 니편, 내편으로 편가르기를 하면서 자기들만
잘 살면 되는 정치를 하니...민초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하고 힘이드는구나
동신창고를 지나자마자 2번 군도를 버리고 신리교회 입구 골목으로 들어선다
신리교회(11:17)
오늘이 부활절인데 한참 북적거려야 할 교회는 쥐죽은듯이 조용하다.
목사님 대신 개쉬키 2마리가 거칠게 짖어대며, 격하게 환영을 해준다.
서둘러 교회 뒷쪽 능선으로 올라간다
숲속으로 들어서니 등로는 지저분하고 선답자들의 흔적은 전혀없다.
선답자들의 신행기를 소환하면서 천천히 올라서니 넓은 밭이 나온다
36.1m봉(11:22)
드넓은 밭에 갖가지 묘목을 골고루 심어놓은 밭 너머로는
잠시후에 올라야 할 오성산이 까칠한 모습으로 범여를
내려다보면서 빨리 오라고 하는데, 나도 빨리 가고 싶지만
느림보가 어디 내맘대로 안 되는데 우짜란 말이요.
36.1m봉 정상에는 눈개승마를 심어논 조림지를 가로질러 내려서니
시멘트 농로가 나오고 농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시멘트 도로로 따라가는 맥길
오늘은 초반부터 개고생의 연속이었지만 동신마을부터
잠깐이긴 하지만 힘들어 하는 범여의 몸뚱아리에게
휴식을 주면서 쉬엄쉬엄 걸어간다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농로 삼거리(11:30)
오성산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나 역시
까칠한 오성산을 오르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다
갈림길(11:34)
직진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농로를 버리고
묘지로 이어지는 좌측으로 향한다
갈림길 우측에 서 있는 동백나무 가지에 걸려있는
선답자의 흔적이 보이니 지맥길을 제대로 가고 있구나
보리밭을 통과한 다음에...
묘지로 올라선다
해남윤공&김해김씨 묘(11:36)
묘지 뒷쪽으로 보이는 숲속길을 향해서 걸어간다
가던길을 멈추고 조금전에 내가 걸었던 길을 뒤돌아 본다.
지나온 공성산은 아직도 구름모자를 쓰고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오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걸었던 산행기록을 압축시켜 주는 느낌이다
스마트폰은 완전히 맛이 가서 봉사 문고리 잡는 격으로
맥길을 걸어가는데, 등로에서 만나는 선답자들의 흔적이
눈물나게 고맙다
78.2m봉(11:43)
오성산으로 가는 길
묵밭같은 곳 아래로 내려서니 새로 조성한 듯한
양천허씨 제양공파의 가족묘가 평장(平葬)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신(二新) 고개(11:46)
장흥군 대덕읍 신리의 이신마을에서 78.2m봉을 오르기 위해서
헤어진 시멘트 도로를 다시 만난다...이신마을에서 좌측의 옹암리
내저마을로 내려가는 시멘트 임도로 고개를 가로질러 오성산으로 향한다
이신고개를 지나니 우측에 묘지가 보이고...
선답자들의 반가운 흔적을 보면서 본격적인
오성산을 향하는 까칠한 오르막길로 들어선다
동신마을에서 이신고개까지 편하게 왔으니 이제부터
고생을 좀 해보라는 건지...지맥길이 본색을 드러내며
범여에게 이지매를 가하면서 까칠하게 굴기 시작한다
암릉(12:10)
이신고개에서 오성산 갈림길까지 아주 짧은 구간에
급격하게 고도를 높이려니 숨이 끊어지는 느낌이고
습한 날씨 탓인지 수술 자국에서 나오는 통증이
아파도 너무 아프다...내가 꼭 이렇게 걸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든다
오성산 갈림길(12:19)
이신고개에서 오성산 갈림길까지 거리는 아주 짧지만
급경사라 그런지 35분 가까이 시간이 걸렸다.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 마신 다음에
스틱만 가지고 지맥길에서 벗어나 있는 오성산으로 향한다
안부(12:21)
안부를 지나 오성산으로 가는 길에 암릉구간이 나오고...
오늘 산행을 하면서 산에서 처음으로 조망을 맛보는데 강진항이 있는
마량면에서 완도의 고금도를 잇는 고금대교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안으로 확인이 안되니 답답하구나
완도군 고금면 고금도(古今島)는이순신장군 초장지(初葬地)로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통제영(統制營)이 있었던 곳으로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묘당도(廟堂島)는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와 조선 수군의 본영이 있던 고금도에 딸린 섬으로 그 거리는
20리 안팎이었으나 간척으로 고금도와 하나가 됐다.
이 순신장군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54세를 일기로 순국하자 유해가 처음 간 곳은
이락사라 불리는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지이며 이후 남해 충렬사로 모셔진 유해는
본영이었던 충무사가 있는 이곳에 80여 일간 안장한 후 이듬해 충남 아산(현충사 근처)으로 옮겼다.
이처럼 장례가 84일만에 치러진 것은 사후 선조로부터 우의정 벼슬을 받아 당상관에 오르면서
당시 법도에 따라 3개월 후에 장례를 치렀기 때문으로 사후 1604년 좌의정, 선무공신 1등에
오르자 후손들의 상소로 16년 후인 1614년 일등공신 격에 맞는 절차로 지금의 묘역인
어라산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어서 정조(1793)代에 이르러 영의정에 추증되며, 정조가
친히 지은 글로 어제 신도비가 세워지고 충무(忠武)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 통제영(統制營)이란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삼도수군을 통할하는 통제사가 있는 본진을 말하는
조선수군의 최고 통치관청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여서 표현한 것으로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한산진영(현 한산도)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암릉 아랫쪽에는 조그만 선착장 같은 곳이 보이고 오성금펜션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날씨만 좋으면 뚜렸하게 보이는 바다 너머의
고금도와 서편재 촬영지로 유명한 청산도는 마음의 눈(慧眼)으로만 감상한다
암봉(12:23)
오성산(五聖山:215.5m:12:26)
장흥군 대덕읍 신리 오성그미, 이신마을과 옹암리 내저마을 경계에 있는 산으로
장흥(사자)지맥 마루금에서 약 200여m 정도 벗어난 지점에 있으며 정상으로
접근하는 등로 북서쪽으로는 강진만 주변의 바다가 시원스레 보이나, 정작
정상에는 잡목으로 인해 조망은 전혀 없으며, 백두사랑산악회레서 설치한
산패와 선답자들의 시그널만 어지럽게 걸려있다
지명의 유래는 오성그미라는 마을 이름이 지닌 두 가지 유래가 있는데
1, 옛날에 머슴이 풀밭에서 금덩어리 다섯 개(五星金)를 발견해서 주인에게 가져간 것에서
비롯되었고, 2, 오성금이 성인 다섯 명을 배출한다는 뜻에서 전해져 내려 왔다는
것인데, 지금은 두 번째 의미(五聖今)로 굳어졌다고 한다.
다시 베낭을 벗어둔 오성산 갈림길로 되돌아 가는데 넙도와 초완도
그리고 그 뒷쪽으로는 고금도가 보이고, 맨 우측으로 사자의 꼬리처럼
튀어나온 곳이 내가 장흥(사자)지맥의 휘날레를 장식할 합수점이다
오성산 갈림길로 되돌아 가는 길에는 혈액순환 개선과
간 기능 개선에 효험이 있다는 예덕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다시 오성산 갈림길(12:33)
오성산을 되돌아 와서 내저고개를 향하는 내리막길은
조금씩 잡목의 저항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조망바위(12:38)
이제 비는 완전히 그친 모양이다...조망바위 아랫쪽으로는
내저마을과 저수지 선착장이 보이고 소나무가 막고 있는
툭 튀어나온 부분이 합수점의 종착지이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서는데 물푸레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에공!...미치겠구먼...
등로가 보이지 않는 곳을 보물찾기하듯 무조건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스마트폰이 먹통이라 맥길을 완전히 感으로 걷고 있는데
선답자들께서 이렇게 도움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무대포로 치고 내려가니...
묘지가 보이고 내저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밀양박공&김해김씨 묘(13:05)
묘지를 내려서면서 바라본 내저마을의 모습
장흥군 대덕읍 옹암리에 속해있는 내저마을은 매생이로 유명한 마을이다.
청정 해역의 조간대(만조 때 수중에 잠기는 부분에서 간조 때 노출되는 곳까지) 상부에서
자라는 갈파래과 해조류로 녹색 해조류인 매생이는 파래의 일종으로, 어릴 때는 짙은 녹
색이지만 자라면서 연녹색으로 변하며 다 자라면 보통 길이가 10~30cm, 굵기가 3mm
안팎으로 머리카락보다 가늘어서 ‘실크(비단) 파래’란 별칭을 갖고 있다.
매생이는 ‘생생한 이끼를 바로 뜯는다.’는 뜻의 순우리말로,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에서 서식하는
대표적인 무공해 식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전남 완도 · 강진 · 고흥 등 남해안 지역이 주요 산지다.
매생이는 정약전(丁若銓:1758~1816)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
'매산태(莓山苔)'라 기록되어 있으며, 매생이의 형태와 맛에 대해 "누에 실보다
가늘고 쇠털보다 빽빽하며 길이는 몇 자에 이르고, 빛깔은 검푸르다.
국을 끓이면 연하고 미끄러우며 서로 엉키면 풀어지지 않으며, 맛은 매우 달고 향기롭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산어보(玆山魚譜)』의 내용이 오늘날의 매생이를 두고 이른
말인지는 불분명하며, 매생이는 다른 지방에서 상품 가치가 낮았기 때문에 주로 전라남도
지역에서만 식용으로 널리 이용되었다고 한다.

장흥 겨울 별미를 이야기할 때 매생이를 빼놓을 수 없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매생이 양식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 바로 장흥 대덕읍에 위치한 내저마을인데
매생이는 파도가 잦아지는 곳,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곳에서 잘 자란다.
항아리 형태의 지형을 가진 내저마을 앞바다는 매생이 양식에 최상의 조건을
갖춘 곳으로 해마다 12월 중순에서 다음해 2월 말까지, 찬 바다에서 자란 매생이를
거둬들이는 겨울이 되면 장흥 어디에서든 뜨끈하고 향긋한 매생이국을 맛볼 수 있다소 한다.
여리고 가는 매생이는 국을 끓이면 연하고 부드러우면서 향기가 좋은데 재료를 참기름에
볶은 뒤 매생이를 넣고 끓이면 매생이국이 완성되는데, 장흥에서는 국물이 안 보일 정도로
걸쭉하게 끓이는데, 입에 넣으면 씹을 것도 없이 후루룩 넘어가는 데다 뜨거워도 김이
올라오지 않아 무심코 먹다가 입천장을 데기 십상이라 오죽하면 ‘미운 사위가 오면
매생이탕을 내놓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마을 도로를 빙 돌아서 내저고개로 향하는 길에 효자비각인지 열녀비각인지
모를 정려(旌閭:예전에,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이르던 말)인 것 같은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망가진 채로 방치되어 있어 작금에 이 나라 농촌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내저고개(13:08)
장흥군 대덕읍 옹암리에 속해있는 마을 위에 있는 고개로 내저마을 표시석과
내저매생이1길과 내저매생이2길이 만나는 Y자 지점에 있는 고개이다.
우측 아래는 내저마을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대덕읍 신리 신리마을이 흐릿하게
보이는 도로옆에는 매생이를 채취할 때 사용하는 대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내저마을은 행정구역으로는 옹암리에 속해 있지만 생활권은 신리지역이다.
아침에 지나온 신리 삼거리는 손에 잡힐듯 가깝게 있지만, 옹암마을은 한참을
더 가야 한다
내저고개를 가로질러 시멘트 농로가 있는 오르막으로 올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휴식(13:10~25)
오전에 비 올때 걸어면서 등산화에 물이 들어가서 조금전 동신마을
쉼터에서 스타킹을 갈아 신었는데, 스타킹이 신발속의 물을 다 먹었는지
발이 엄청 불편하다...거기다가 스타킹에 박힌 가시 때문인지 통증이
심하다...원님덕에 나팔 분다고 했던가, 베낭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어
가시를 빼내고, 초코렛 하나로 원기를 보충하면서 휴식을 취한다
15분정도 휴식을 취하고나니 몸이 훨씬 개운한 느낌이다.
다시 길을 나선다.
묵밭같은 곳을 지나니 묘지가 나오고 숲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걸어둔 선답자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힘을 낸다
등로는 전혀 보이지 않고 빡센 오르막으로 향하는 길.
고도를 높혀가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다시
짙은 구름이 주변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 버리는구나
우측으로 살짝 열리면서 내저마을 앞바다가 얼굴을
내밀지만, 멋진 조망 대신에 餘白이 대신하고 있다
무명봉(13:52)
까칠한 등로를 치고 오르니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벚나무 한그루가
정상을 지키고 있고, 나무가지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 서남쪽을 향해서 맥길을 이어간다.
안부(13:53)
조망바위(13:57)
조망바위를 지나는데 두릅과 고사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두릅은 너무 늙어버려 수확을 포기를 하고, 야들야들한 고사리를
꺽어면서 걷다보니 172.2m봉 정상에 도착한다
172.2m봉(14:10)
172.2m봉 정상에서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 걸려있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을 보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안부(14:13)
최근에 162지맥길을 완주하신 부뜰이님이
범여가 염려스러운가 본다...지금 엄청나게
쫄면서 걷고 있으니 잘 인도해주셔요...
176m봉(14:18)
어디로 가라는 얘기인가...
산은 누구나 오를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무에게나 너그럽게 대하지는 않는다
더군더나 길이없고 고도가 낮은 산이라고
해서 그렇게 깔보다가는 큰 코 다치기 쉽상이다
내가 16년간 오지 산행을 하면서 터득한 경험이다
이곳도 꽤많은 고사리가 갈길 바쁜 범여를 유혹한다
예덕나무(꽃말:덕성, 맑은 마음)
야오동(野梧桐)·야동·일본야동·깻잎나무·비닥나무·예닥나무·적아백·채성엽·
홍화인·추자 등의 여러 별칭이 있는 나무로 예절과 덕성을 함께 갖춘 나무라 하여
예덕나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또한 나무 모양이 오동나무를 닮았다 하여 야오동·
야동이라 하는데 우리나라가 원산지이고 나무껍질은 회갈색이고 세로로 얕게 갈라진다.
어린가지는 비늘털로 덮여 붉은빛이 돌다가 차츰 회백색으로 변하며, 공업용·관상용·식용·
약용으로 이용되며 열매는 물감으로 쓰이고 재목은 상자·기구재 등으로 쓰이며 타닌과 쓴
물질이 들어 있는 나무껍질은 야동피라 하여 약재로 사용하며,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거나
산제로 하여 사용하며, 술을 담가서도 쓴다.
예덕나무에 함유된 루틴(rutin), 퀘르세틴(quercetin) 같은 플라보노이드 성분은 체내
활성산소를 억제하는 데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며 활성산소는 노화와 각종 만성질환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는데, 예덕나무는 이러한 산화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을 주는 나무다.
항산화 효과는 피부 노화 방지뿐 아니라, 심혈관 질환 예방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간 기능을 개선하고 간세포 재생을 돕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나무다
먹기 좋을만하게 자란 엄나무순도 조금 수확했다
등로도 사라지고, 선답자들의 시그널도 보이지 않으니
조금은 불안하다...그러나 합수점으로 가는 길은 외길이라
알바할 그런 곳이 아니기에 천천히 주변을 살피면서 길을 간다
무명봉(14:38)
그라먼 그렇지 레전드님께서 범여를 안내한다
내가 지맥길을 걸으면서 가장 도움을 많이
받는 분이고, 가장 많이 만나는 분이다
험한 길을 무대포로 헤치고 올라서니 172.5m봉 정상이 나온다
172.5m봉(14:46)
옹암마을 갈림길1(14:48)
172.5m봉에서 내려서니 이정표가 나오고 좌측으로는신리 개매기 체험장과
옹암어촌체험학습장으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옹암마을 쪽으로의
등로는 잘 보이지 않고, 지맥길은 깃대봉까지 0.4km를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한다
옹암마을 갈림길을 지나면서 고도차도 없고 생각보다 등로는
뚜렸하다...편안하게 7분정도 걷다보니 준.희쌤의 산패가
걸려있는 157.3m봉에 도착한다
157.3m봉(14:55)
조금전 옹암마을 갈림길의 이정표에서 표기한 깃대봉의
표식이 이곳인 모양이다...하지만 산꾼들이 이용하는
지도의 어느곳에도 이곳이 깃대봉이란 표기는 없다.
이 이졍표는 지맥길을 걷는 산꾼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씨잘데 없는 무용지물이다
대덕읍 신리에는 개매기 체험장이란 곳이 있는데
‘개매기’란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큰 바닷가에 그물을 쳐놓은 후 밀물 때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고기떼가 썰물 때 그물에 갇히면 손으로 잡는 어업법으로, 신리마을의 개매기
체험장은 100㏊(33만평)의 갯벌 가운데 약 4km 정도에 걸쳐 그물망을
미리 박아두어 고기를 걸려들게 하는 방식으로 주로 잡히는 어종은 숭어, 농어, 돔,
전어, 가오리, 운저리(망둥어의 사투리) 등이며 매년 4회(7월~10월)에 걸쳐 축제
형식으로 진행는데, 미끈거리는 양질의 뻘에서 펄떡이는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아
싱싱한 횟감으로 입에 넣으면 이보다 더 신기하고 재미있는 체험은 없다고 한다.
157.3m봉을 지나면서 다시 등로는 뚜렸하다
군 교통호같은 벙커도 통과한다
옹암마을 갈림길2(15:03)
잡풀속 사이로 이어가는 지맥길
조망바위(15:04)
암릉 구간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는다마는 오리무중이니
지금 내가 걷는 위치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걸어간다
암릉 아래로 이어지는 남해바다의 멋진 仙景은 마음으로만 즐긴다
안부(15:06)
조망바위(15:08)
감사합니다.
빛바랜 독도님의 격려문구를 바라보며 좌측으로 내려간다
등로는 조금씩 거칠어지나 희미하게 보이니
이것만으로도 감사...또 감사하게 생각하며 합수점으로 향한다
엄나무 군락지를 지나는데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나물로 먹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서 그냥 패스를 한다
암봉(15:20)
암봉 정상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좌측으로 우회하며
계속되는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늦은 시간에 조금씩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구나
이곳은 합수점까지 외통수로 이어지는 길이라
알바할 걱정은 없다마는 스마트폰이 작동할
기미조차 안 보이니, 간간히 만나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오늘따라서 한없이 고맙기만 하다
‘ 산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조망이 있으며 성취가 있다 ’는
명언이 있는데 오늘 산길은 그 명언과는 정반대의 느낌이다
고사리가 꽤많이 보인다...아무리 바빠도 이런건 수확해야지...
고사리를 꺽어면서 걷다보니 장흥(사자)지맥길의
족보있는 마지막 봉우리인 84.6m봉에 도착한다
84.6m봉(15:55)
무명묘지(15:58)
송전탑(16:00)
송전탑 NO가 다 지워져 식별이 불가능하다
무명묘지와 송전탑을 지나면서 합수점으로 향하는 등로는
졸업산행을 하는 맥꾼들을 위함인지 등로는 아주 잘 정비되어 있다
광산김공&전주이씨 묘(16:05)
광산김공 묘지 아래로 내려서니 예전에 집터였는지 콘크리트
잔해가 보이고 철거된 흔적이 있는 곳에 반가운 선답자의 흔적들이
정말 힘들게 지맥길을 졸업하는 범여를 축하해 주는듯 하다
드디어 지맥길의 끝이 보이고 범여도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어면서 쥔장을 잘못만나 개고생을 하면서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않은 내 두다리(足)에게 정말 고맙다는
생각을 전한다
남해바다 합수점(16:10)
반바지님의 흔적을 지나 갯바위로 내려선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장흥(사자)지맥의 마루금도
남해바다로 入水하면서 5번에 걸쳐서 걸었던 산행을 종료한다.
바다 건너에 멋지게 보여야 할 약산도(완도군 소재)는 아예
짙은 안개에 가려져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합수점의 갯바위 우측으로는 초완도를 비롯한 꼬맹이 섬들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이순신 장군의 초장지가 있었던 완도군
고금도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지마는 흐릿하게 보인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졸업의식은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포기를 하고 베낭과 스틱으로 인증샷을 남긴다
인증샷
왔던 길을 되돌아서 올라간다...트랙을 믿고 왔는데
스마트폰이 먹통이니 참으로 답답하다.
광산김공 묘지를 지나니 우측으로 뚜렸한 길이
보이기에 내려서니 대머리 무명묘지 한 기가 보인다
무명묘지(16:25)
묘지 좌측 아래로 내려서니 편백나무 조림지가 나오고
조림지 사이로 이어지는 묘지로 연결된 등로는 갑자기
사라지고 마치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잡목에 갇혀 버린다.
이곳에서 한참을 버벅거리는데 아무래도 옹암리로 가는
길이 이닌데 다시 되돌아 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다
능선을 2개나 넘고, 잡목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지만
살아야겠다는 절박한 때문에 무조건 치고 나간다
가도가도 보이지 않던 끝이 조금씩 보인다
예전에 집터같은 흔적이 보이면서 조금을 더 진행하니...
희미한 등로가 따라서 가니 묘지가 나온다.
묘지가 있다는 것은 뚜렸한 길이 나온다는 얘기다
묘지를 지나면서 바닷가 절개지 사면길로 나가니
옹암방조제가 보이니 이제야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긴장이 풀린다
옹암방조제(17:20)
바닷가 윗쪽의 사면길을 치고 나오니 옹암방조제가 나오고
좌측으로 지맥길의 탈출로인 듯 뚜렸한 내리막 등로가 보인다
저곳으로 내려오면 금방인듯 한 길인데, 아주 짧은 거리에
마지막으로 지맥길이 아닌 탈출로를 대형 알바를 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1시간 이상 시간이 지체되어 버렸다
옹암방조제를 지나서 최근에 개설된 듯한 길을 따라서
옹암마을로 향한다
옹암리에도 항구가 있나?
어선10여척과 크레인을 보면서
옹암마을을 향해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매생이 양식장 사진 촬영명소란다.
카메라를 좀 다룰줄 아는 범여가 보기에는
진사들의 출사 장소라기에는 너무 지저분한 느낌이다
옹암마을 포구에는 매생이 양식에 필요한 자재인듯한
어구들이 배에 실려있고, 썰물때라서 그런지 갯뻘에 묻혀있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한참을 걸어오니 옹암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장흥군 대덕읍 옹암마을의 모습
장흥군 대덕읍에 속해있는 옹암리(甕岩里)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해안지역으로, 수산업과
논농사가 주로 행해지는 곳으로 지형이 항아리[甕]와 같이 생겼고 바위[岩]가 마을 주변을 이루고
있어 옹암리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자연마을로는 옹암, 당거리, 싹골, 띠끼, 안띠끼마을 등이 있다.
옹암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옹암리의 그것과 같으며 독바우라고도 불린다.
당거리마을은 어부들이 풍어제를 지내는 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싹골마을은 싹(삵)이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띠끼마을은 딱나무가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안띠끼마을은 띠끼의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옹암마을회관(17:45)
옹암마을 연혁비
마을회관에 도착하여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교통편을 물어보려
했지만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커녕 개미새끼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다...사람을 찾아서 이리저리 걷는데 이 마을의
버스회차지가 보이고 버스가 한 대 들어오기에 쫒아가면서
손을 흔드는데 나를 보지 못했는지 그냥 버스를 돌려서 나가
버리니 참으로 난감하다...이걸 어쩌나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상황 정리를 하려는데, 택시한대가 손님을
실고 옹암리로 들어오고 있다...손을 흔드니 마을에 손님을
내려놓고 나오기에 대덕이나 관산으로 가서 광주가는 버스를
타야하는데, 시간이 어떻게 되냐고 물으니, 대덕에서 출발하여
관산, 장흥을 거쳐 광주로 가는 막차가 대덕에서 18시 20분이라고
하는데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면서 관산으로 가자고 한다
관산버스터미널(18:35)
관산터미널에 도착하니 대덕에서 오는 버스가 도착하기 5분전...
서둘러 표를 예매하자마자 버스는 도착하고 재빨리 버스에 오른다
관산발 → 광주행 버스표
거의 2시간 가까이 걸려서 광주에 도착하니 긴장이 풀리는지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다
광주 유스케어 터미널(20:40)
과연 내가 이 짓거리를 왜 하는지 내가 나를 모르겠다.
서울행 버스표를 예매한 다음에 약국에서 박카스 한병을 사서
마시고는 버스 탑승장으로 향한다
광주발 → 서울행 버스표
밤 9시 10분에 서울행 버스를 찬 이후에 정신없이 잠에서 빠졌다가
일어나니 버스는 안성 근방을 지나는데 늦은 시간인데도
교통사고가 났는지 차량의 흐름이 지체된다...서울에 도착하니
0시 30분...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참으로 힘들게 장흥(사자)지맥을 끝낸 감회는 남다르다.
오늘은 지인의 도움으로 한번 더가야 할 길을 끝냈으니
가슴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느낌이다...낼 출근하여 지인과
점심이나 같이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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