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11년 9월 24일~25일
장소: 대구 팔공산과 동화사, 선본사, 갓바위
코스: 서울-대구 동화사-선본사-갓바위-선본사 주차장-동화사-동화사 제1주차장-부도암
안부-917봉- 철탑 삼거리 안부-약사마애여래좌상-비로봉-동봉-염불봉-부도암-동화사-서울
거리: 팔공산 산행거리: 14.2km(동화사 입구부터) / 5시간 10분 소요
조계사 일주문(24일:12:00)
1년에 한번있는 포교사 8재계 수계 실천 대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 동화사로 가기에 버스를 타러 조계사로 간다.
오랜만에 조계사에 갔다. 대한민국 불교의 총본산인 조계사는
늘 분주한 모습이다. 시간이 조금 남아 조계사 대웅전에 들려
부처님에게 여법하게 3배의 예를 올리고 대구가는 버스에 오른다.
포교사들도 이젠 후배들만 보이고 예전에 처절하게 공부한 도반 포교사님들은
원로인 까닭인지 아는 얼굴이 그리 많지가 않다. 몇몇분이 반갑게 인사를 해온다.
조계사 대웅전의 모습
12시 조금 넘은 시간에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청원I.C에서
청원~상주간 고속도로 화서 휴게소에 도착하여 포교사단에서 지급한
경비를 받아 산채 비빔밥 한 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커피한잔으로
후식까지 마친다음 다시 버스에 오른다. 칠곡 휴게소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대구 동화사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조금 안되었다.
동화사마애불 좌상 ( 17:00)
동화사 입구 오른쪽의 암벽을 다듬어서 조각한 불상이다.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이 불상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개성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부피감을 느낄 수 있는 비교적 풍만한 모습인데,
세부표현은 평면적이며, 짧은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고, 어깨는 반듯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에 대어
손끝이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게 빚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나타나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끝이
날카로운 배(舟) 모양이다. 주변 가장자리는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는 구름 위에 떠 있는데, 구름무늬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이 불상에
활기찬 생동감을 주고 있다.
원만한 얼굴, 장식성이 강한 대좌(臺座)와 광배의 표현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팔공산 동화사 봉황문(八公山 桐華寺 鳳凰門)
일주문이 아니고 봉황문이라,,, 좀 특이하다
동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자 팔공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대구 도심에서 동북쪽으로 22km 떨어진 팔공산 남쪽 기슭에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극달화상이 세운 절로, 그때 이름은 유가사였으나,
흥덕왕 7년(832년)에 심지왕사가 다시 세울 때 겨울철인데도 경내에
오동나무가 활짝 피었다고 해서 동화사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
대구 경북지역을 관리하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9교구 본사이다.
동화사는 비로암, 부도암, 내원암, 양진암, 염불암, 약수암 등 6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으며, 보물 6점, 대구광역시 지정문화재 7점을 보유하고 있다.
1992년에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의 낙성을 전후하여 많은 건물들이 새롭게 지어졌다.
봉황문 천정에 용 두마리
동화사는 일부문 대신에 “봉황문”이라고 부르고 지붕 천정에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용 두마리가 조각이 되어있다. 이 용의 이름은 ‘마라난타’ ‘난타’라는
이름을 가진 용으로 난폭하기 그지없고 중생들을 엄청나게 괴롭힌 아주 못된
용이었는데 부처님의 법문을 들고 아주 착한 용으로 변하여 늘 부처님을 외호하고
중생들을 보호하는 용으로 변하였다. 그러는 바람에 용은 사찰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8재계 수계실천 대법회에 참석하러가는 범여(24일 17:20)
동화사에 들리니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투코리안스라는 뚜엣이
부른 노래로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나 안오시뇨...’ 오동나무와 봉황을 상징되는 동화사와 맞는 노래이다.
당간지주 안내판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254호)
321.0×73.0×32.0cm 통일대불 가는 길 맞은편에 금당암 입구 들어가는 길목에 통일신라 에 건립된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기 위해 좌우에 지탱하는 돌기둥이다. 통일신라 때부터 사찰 앞에 설치했던
구조물로서 두 개의 기둥 사이에 기다란 장대(당간)를 세우고 당幢(의장용 깃발)을 매달아 이곳부터
사찰 영역이라는 것을 표시하였다. 동화사 당간지주는 금당암으로 올라가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금당암 자리는 심지가 던진 불골간자가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는, 창건 당시의 영역이다.
당간을 끼우는깃대와 당간은 사라지고 지주만 남아 있다.
동화사 인악당비 머리장식(桐華寺 仁岳堂碑 裝飾)
인악대사비는 대웅전 가기직전에 우측 금당선원 가는 길목옆
해탈교 옆 당간지주와 함께 있다. ‘仁岳堂’이란 편액이 걸린
허름한 비각안에 봉안되어 있는 비석으로 인악대사의 전기(傳記)한
비석으로 귀부를 거북으로 하지않고 봉황으로 조각한 점이 다른 비석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널리 알려진대로 동화사의 지세가
봉황이 알을 품은 형세(鳳凰抱卵形)와 깊은 깊은 관련이 있다.
비문은 1808년 당시 경상감사로 있던 김희순(金羲淳)이 짓고 글씨도 썼는데
당시 왕의지 풍의 필체로 서법이 유려하다.
仁嶽堂 義沾大師(1746~1796)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인악당仁嶽堂 의첨대사義沾大師(1746~1796)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을 탁본한 것이다. 팔공산 동화사에 있는 이 비의 비문과 글씨는 김희순이 짓고
썼는데 매우 유려한 행서체이다. 대사는 지금의 대구에서 태어났다.
18세에 인근의 용연사(龍淵寺)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던 중 스님들의 정진 모습에 감동
받아 불교에 귀의하였다. 22세에 스승인 벽봉(碧峰)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훗날 영원정사(靈源精舍)에서 화엄종장(華嚴宗匠)으로 있던 상언(尙彦)스님을 만나 화엄경의
진리를 터득하였다. 비슬산, 계룡산, 황악산 등에서 강석(講席)을 열어 많은 후학을 지도하다가
동화사로 돌아왔다. 정조 14년(1790)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된 용주사(龍珠寺)
불상 조성의 증명(證明)이 되어 이를 감독하고 『불복장원문경찬소(佛腹藏願文慶贊疏)』와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을 지었다. 정조 20년(1796) 용연사 명적암(明寂庵)에서
열반하였다. 저서로『화엄사기(華嚴私記)』,『금강사기(金剛私記)』,『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
『인악집(仁嶽集)』등이 있으며, 호남지방의 연담 유일(連潭有一) 스님과 함께 화엄조사로서
쌍벽을 이루었던 학승이다. 현재 용연사에 부도가 남아 있다
동화사 금강계단(24일 17:30)
금강계단이라 쓴 현판이 보인다.금강계단이란 금강보계(金剛寶戒)로 일컫는
불사리(佛舍利)를 설해놓고 수계의식(授戒儀式) 등을 행하는 곳을 말한다.
통도사에 있는 금강계단이 잘 알려져 있다. 금강계단 북쪽으로 통일대불이
보이는 곳에는 ‘統一祈願大殿 ’이란 편액이 있다. 오늘 수계법회가 열리는
장소가 금강계단을 지나 통일대불로 가는 길목이다.
통일약사 여래대불
석조대불 높이 17m, 최대둘레 16.5m, 좌대 높이 13m, 지하암반에서 참배단까지 3m로 총 33m이다.
석조대불 원석 규모는 8등분으로 조성되며 약 300톤 원석으로 조각 되었으며 불상원석은 2,000톤(전북 익산군 황동석),
좌대원석 : 3,000톤. 총 5,000톤이고 원석을 300km 옮겨서 조성된 석불중 세계 최대이다. 1992년에 완공됐다
석불의 몸체 안에는 미얀마 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2과를
모셨고 대불 앞에는 국내 최대 규모인 17m의 석탑 2기와 7,6m의 석등
2기를 세웠고 대불 앞에는 통일대전을 건립하여 남북으로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불자들의 간절한 발원을 모았다
통일기원대전 지하에는 2007년 10월 20일 개관,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성보박물관이 있다.
1992년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의 낙성을 전후해 동화사의 많은 당우들이 새롭게 지어졌다.
아마 노태우 대통령 때에 지어졌는지 편액 아래에 ‘대통령 노태우’라고 써여 있다.
동화사의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24일18:20)
수계8재계 실천법회 프로그램
08:30분부터 여법하게 저녁예불을 끝내고 입재식을 시작하다.
부처님 치아사리
오늘은 참으로 운이 좋았다. 통일대전 금강계단에 강원도 고성군
금강산 건봉사에 있는 부처님 치아사리를 이곳에 한달동안
모셔져 있는 것을 친견할 수 있었다. 10여년전에 건봉사에서
친견했을 때보다 훨씬 커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장율사가 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신것을 임란시 왜병이 침탈한 것을
사명대사가 환수하여 건봉사에 모셔졌던 치아사리 2과를 이곳
동화사 금강계단에 한달동안 모셔진다고 한다.
치아사리 설명서(21:30)
8재계 실천대법회가 한참 무르익고 1분도 사적인 시간을 주지않고
타이트하게 법회가 진행된다. 23시부터 01:00까지 금강경 독송을
하고 촛불행진을 준비한다. 꽤나 많은 이슬이 내려 옷은 촉촉하고
기온이 너무 많이 떨어져 날씨는 한겨울 같은 느낌이다. 가져온
겨울파커를 꺼내 입는다.
촛불행진(25일 01:20)
‘참 나(我)를 찿아’ 촟불행진에 나선다. 환희심에 희열을 느끼면서...
동화사 통일대불에서 해탈교를 지나 봉서루 금강문, 2차선 도로를
지나고 다시 봉황문을 거치는 약 3km의 구간을 1시간 반에 걸쳐
포행(布行)을 하고 나니 추위도 많이 가시고 밀려오는 잠도
다라아나는 기분이다. 기분이 너무도 좋다. 하늘에는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촘촘하다
포행(布行)
천천히 걸으면서 선(禪)을 행한다는 의미이며 불교에서는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포행은 본래 좌선(坐禪)을 하다가
졸음이나 피곤으로 인한 심신(心身)을 풀기 위하여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산책하듯 느린 걸음으로 걷는것이 목적이었다.
행진을 할때 쓰는 컵 양초
동화사에서는 초파일 지난지가 꽤나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연등을 환히 밝혀서 포교사들을 상당히 배려하는 느낌이다.
참으로 고맙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연등들이 넘넘 멋있다.
새벽예불과 보살계 수계식(03:30~05:00)
2400여명이 함께하는 새벽예불의 오분향례는 정말 장관이다.
목탁에 맞쳐 천수경을 독경하고 이어서 혜총 포교원장 스님의
증명하는 가운데 보살계 수계식을 여법하게 마치고 10분간의
짧은 휴식시간에 밀려오는 졸음에 깜빡하고 잠이 드는데
김해 친구가 꿈속에 나타난다. 이 친구한테 무슨 일이있나...?
이어서 회향식을 마치고 모든 의식이 끝이난다(05:30)
통일대전 너머로 하현달이 이별을 준비한다.
주변 정리를 마치고 베낭을 지고 선본사로 가기위해 주차장을
향한다. 아직도 주변을 어둡기만 하다.
서서히 팔공산의 여명은 밝아오기 시작하고...
수계첩
수계첩을 선본사가는 버스에 수령하고 갓바위 부처가 있는
선본사로 향한다. 동화사에서 선본사 주차장까지는 버스로
약 30분이 소요되는데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도 그리 피곤한
것 같지는 않는다. 오히려 몸이 가쁜한 느낌이다.
갓바위 올라가는 지도(07:00)
선본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대구.경북지역 포교사단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공양하고 모닝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니
잠은 좀 가시는 듯하다. 아침을 먹고 약사여래불을 만나러 가야지.
갓바위가는 입구(07:30)
선본사 주차장에서 20분만에 관봉에 오른다.
이곳은 갓바위 부처로 유명한 관봉(853m)에 이른다.
이곳이 갓바위다. 갓바위라... 참으로 아이러니이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약사여래불을 갓바위 부처라고 부르다니
무식하기 그지없는 짓거리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산물을 아직도 그대로 부르고 있다니... 조선시대에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던 시대에 선비들이 쓴 갓처럼 보인다고 해서 갓바위 부처라니
참으로 얼토당토 아닌 짓거리를 부처님의 머리에 쓴 것은 갓이 아니라
천개 [天蓋]이다. 천개란 원래 햇빛이나 비를 막기 위한 우산에서 출발하여
귀인(貴人)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불보살상의 머리 위나 사원의
천장을 장식하는 장식물로 변한 것을 말하는데 아직도 불교에 유교의
잔재물이 남아 있다니 불자로서 창피한 일이다. 하루빨리 고쳐지기를 바란다.
팔공산은 우리나라 약사신앙의 일번지이다.
동화사 입구의 마애여래좌상, 삼성암터 마애여래좌상, 비로봉의
마애여래좌상,동봉의 석조약사여래좌상, 관봉의 석조여래좌상과
1992년에 동화사의 약사여래대불 등이 약사여래이거나 그렇게
신앙되는 불상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관봉약사여래좌상이다.
팔공산의 약사신앙을 대표하고 그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공식명칭이
아닌 ‘갓바위 부처님’로 유명한 이 불상의 명성은,이 지역을 넘어 명실상부한
전국적이다. 음력으로 매달 그믐부터 초이레까지는 밤낮으로 하루종일
이어져 매일 수천명이상이 여기를 찾는다고 한다.입시철이 되면 전국적으로
몰려드는 기도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 정성스레 기도하면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생겨난 풍속도이다.
이곳에 이르니 온 사방이 다 보인다. 오늘은 참으로 기분이 좋다.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신다는 약사여래 부처님에게 간절한 소원을
기원하고 갈길이 멀어 서둘러 선본사 주차장으로 향한다.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07:50)
이른바 갓바위는 돌부처가 머리에 커다랗고 평평한 돌을 이고 있어서 '갓바위'라 불리는데,
신라 선덕왕때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어머니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관봉 석조여래좌상은 해발 850m에 위치하며 높이는 약 6m이며 머리의 갓 지금은 1.8m이다.
머리에 쓴 갓의 모양이 대학학사모와 비슷하게 생겨 해마다 입시철이면 합격을 기원하는 행렬로
북새통을 이룬다한다.
선본사 주차장에 돌아오니 8시 10분경 이제 도반들은 서울로 올라가고 나는 여기서 다시
동화사로 향한다. 기왕 온김에 대구에 있는 초딩이 동창인 정락이란 친구와
팔공산 산행을 함께하고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서 동화사로 가기 위해 등산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동화사로 가는데 차량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차에 대구 운전사 불자 연합회
택시(정법호출택시)가 봉사를 하겠단다. 너무나 고맙다. 동화사 입구에 도착하여
차비를 주니까 봉사하겠다며 한사코 사양을 한다. 그래도 안받는다고 하기에
차에 택시비 10,000원을 놓고 서둘러 내린다. 동화사에 도착하여 경내를 관람하고
친구가 전화가 오는바람에 다 구경을 못하고 산행을 준비한다.
봉서루(鳳棲樓)
봉서루는 '봉황이 깃든 누각' 이란 뜻으로 동화사를 대표하는 누각이다.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다.이곳이 봉황의 꼬리 부분이며, 누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 봉서루 뒤편에는 대웅전을 향해 '영남치영아문'의 현판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 동화사에서 승병을 지휘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현판이다.
봉황알의 유래
봉황의 정기가 서려져 있다는 의미의 봉서루앞 바위 위에 올려놓은 3개의
작은 돌을 봉황알 이라고 부른다.
동화사 터가 풍수상 봉소포란형(봉황이 알을 품은 모습) 의 지세이며,
심지대사가 절을 중창할때 오동나무 꽃이 한겨울에 상서롭게 피었다 하여
동화사로 불리 운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봉황은 태평성대에 나타나며 오동나무에 깃들고, 먹는 것은 대나무
열매만을 먹는다는 속설이 있듯이 절터 주변에 오동나무가 많았고 대웅전
뒤편에 대나무가 많은 것은 스님들의 훌륭한 환경보비보책의 하나이면서
봉황과 관련이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동화사 대웅전(보물 제1563호)
봉서루 누대 밑을 지나 절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여러 차례 중창을 거듭하였는데 현재 건물을 조선 후기 영조 3년(1727)에서 영조 8년(1732)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대웅전 축대 아래 양쪽에는 한 쌍의 괘불대와 노주가 있고, 법당으로
오르는 층계는 정면에 반원형으로 쌓아 올렸다. 대웅전 내부 불단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좌측에 아미타불, 우측에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또 천장에는 세 마리의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금당선원동화사의 동쪽 별당이다.
진표 율사로부터 영심 대사에게 전해진 팔간자를 심지 대사가 받은 뒤 팔공산에 와서 이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지으니 이곳이 바로 동화사 첨당 북쪽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 우물터가 바로 금당선원 자리이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금당선원은 한국불교의 선맥을 잇는 수선의 참구도량으로 개원 이래
운수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았으며, 수많은 도인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석우, 효봉 대종사를
비롯, 성철 스님 등 해방 이후 불교 정화의 주체가 된 많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결사를 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다.
1974년 5월 증개축 불사로 선원의 면모를 새롭게 정비하였으며, 현재 납자들이 정진 중에 있다. 금당선원은
사찰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보물 제248호 삼층석탑 2기가 극락전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동화사를 대표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웅대한 건물로서 조선 영조대에 건립되었다
틀린 나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자연미를 살렸고 내부에는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설법전(說法殿) 해탈교를 지나 동화사의 바깥 마당 오른편에 있다.
설법전 안에는 대중 스님들의 맡은 바 소임을 적어 놓은 용상방이 붙어 있다.
1990년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 불사 때 지은 설법전은 각종 법회와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지하에는 공양간이 있다.
오늘 팔공산 산행구간의 지도
동화사 제1주차장 입구(25일 09:00)
대구에 사는 친구가 차를 끌고와서 주차장에 세워놓고 산행을 시작한다.
이 넘하고는 작년 11월에 포항에서 보고 10만에 해후를 한다.
어렸을 때 참으로 친한 친구였는데 서울에 살다가 사정상 대구에 살고있다.
간단하게 베낭을 점검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오랫만에 일반산행이다.
부도암(09:10)
동봉 등산로 입구(25일.09:20)
콘크리트 임도를 계속 따라올라 오다가 좌측으로 꺽어
본격적인 산행길에 접어든다. 이곳은 주 등산로가 아닌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나 여기저기 등산로가 많이 나있어
여기저기 나뭇가지들이 들어나 있어 마치 서울의 북한산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가끔은 등산객들이 보인다.
부도암부도(浮屠庵浮屠: 09:15)
문화재자료 제34호 (동구) 조선시대
부도암은 동화사에서 팔공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암자 동쪽으로 멀찍이 떨어진 산 기슭에 이 부도가 놓여 있다.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는 것으로, 시신을 화장한 후 나오는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비교적 작은 규모인 이 부도는 현재 무너진 상태로 있는데, 3단을 이루는 기단(基壇)과
탑몸돌, 지붕돌을 갖추었고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기단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서, 원형을 이루는 맨 아래와 윗부분에는 연꽃을 새겨 두고,
8각을 이루는 가운데에는 모서리마다 배흘림 모양의 기둥을 본떠 새겨 놓았다.
탑몸돌 역시 여덟 모서리가 기단에서 보이던 얕은 배흘림의 기둥 모양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 모서리선을 뚜렷이 표현해 놓았고, 각 선이 미끄러지는
끄트머리에 덩쿨무늬를 한 꽃조각을 돌출되게 조각하였다.
8각을 이루는 모습의 부도는 통일신라시대에서부터 유행하던 것이나, 이 부도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록 꼭대기의 머리장식도 사라지고
무너져 있긴 하나, 각 부분들은 대체로 본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부도암을 지나서 염불암으로 향하지 않고 좌측 능선 안부의 편안한 걸음을 한다.
이곳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고 길이 그리 험하지 않아 오랫만에
친구와 이런 저런 세상사를 논하면서 약간의 된비알을 걸으면서 올라간다.
다시 염불암 가는 임도를 만난다. 그리고 다시 우측으로 오르니
좌측 능선에는 팔공산 올라오는 케이블카 내리는 지점이 나타나고...
917m봉에서 바라본 케이블카장
917m봉 정상(10:10)
산행시간 1시간이 조금 넘어서 917봉에 도착한다.
바로 아래에는 팔공산 케이블카 내리는 곳이 보이고 대구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이곳에서 친구와 함께 막걸리 한병을 나눠 마신다.
건너편에는 염불암이 보이고 데크목으로 전망대를 만들어 놨다.
이곳은 등산객이 꽤나 많다. 이곳에 산행을 온 중국 유학생으로
보이는 남,여 학생들이 길을 잃어 애를 먹고 있어 자세히 설명을
해주니 고맙다고 하면서 인사를 하고 간다.
친구 정락이와 함께 917m봉 정상에서
염불암의 모습
팔공산의 6부능선에 자리한 즈음에 자리한 염불암은 동화사의 말사이다.
신라 경순왕 2년(928년) 영조대사가 창건하여 1962년에 개축하였다고 한다.
그 옛날에 바위 뒤에서 염불소리가 나서 이곳에 암자를 지어 ‘염불암’ 이라
지었다고 한다, 염불암에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19호인 청석탑이 있다.
청석탑은 벼루를 만들던 흑색 점판암으로 만든 탑으로 현재는 10층의 지붕돌만
포개진 채로 남아있다.
917m봉에서 바라본 팔공산 비로봉과 동봉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인후에 다시 비로봉을 향한다.
능선 정상에서 편안한 안부길을 걸어가다 다시 고도를
낮추다가 다시 오름길을 시작하는데 이곳은 염불암쪽에서
오는 등산객과 합쳐지는 곳이라 등산객들이 상당히 많다.
정맥꾼 범여는 이런 번잡한 곳은 상당히 낯설고 불편하기 그지없다.
탑골 등산로(10:40)
이곳은 등산객이 많은 탓에 막걸리와 아이스케키를 파는
사람이 있어서 친구와 둘이서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오르막을 계속한다.
이곳 오름길은 바위들이 마치 두부모 짜르듯이 반듯반듯한 바위들이
많이 보인다. 지난해 부산 금정산 구간 탈때도 이곳 팔공산도 라디오나
MP3같은 걸로 음악을 크게 틀고 가는 사람들 땜에 상당히 불편하다.
음악이나 라디오를 청취하려면 리시버를 끼고 들어야지 그냥 틀고
다녀 남들을 불편하게 하는지... 남을 좀 배려하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동봉 갈림길(10:45)
동봉 아래에서 서봉쪽으로 좌측으로 400m쯤 가다가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쪽으로 올라간다. 서봉까지 가기는 아무래도 서울가는 시간땜에 무리일 것
같아 이곳으로 해서 비로봉, 동봉으로 하여 산행길을 잡는다.
마애여래좌상 가는 길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10:55)
이곳 절벽(絶壁)에 새겨진 이 불상(佛像)은 통일신라때의 뛰어나고 거대한 마애약사불상(磨崖藥師佛像)이다.
연꽃대좌(臺座) 위에 앉아 불꽃무늬에 휩싸인 이 불상은 민머리칼의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세련되고
단아한 이목구비, 탄력있고 우아한 얼굴과 어깨의 둥글고 탄력감나는 표현, 잘쑥한 허리와 무릎에서
밖으로 내려뜨린 오른손과 무릎 위에 얹어 약그릇을 들고 있는 왼손의 세련성 등은 이상적인
사실양식(寫實樣式)을 나타낸 것이다.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불의(佛衣)는 몸의 굴곡이 드러날 정도로
얇은 편인데, 옷 주름들은 유려(流麗)하고도 규칙적이며, 가슴에서 옷깃이 한번 뒤집혀지는 등 8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광배(光背)는 두신광(頭身光)과 불꽃무늬의 거신광(擧身光)으로 구성되었는데,
연꽃무늬와 당초(唐草)무늬가 유려(流麗)하면서도 정교(精巧)하게 새겨졌으며, 대좌는 연꽃대좌로
복련 (伏蓮)과 겹잎의 앙련(仰蓮)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을 받치고 있는 용(龍) 두 마리가
표현되어 있어 화려하다.
마애여래좌상에서 바라본 팔공산 서봉
북쪽으로 보이는 곳이 칠곡 다부동쪽이란다.
60년 전에 6.25 전쟁 당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던 다부동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니...
비로봉 가는 길에서 포즈를 취한 초딩이 동창
암릉에서 바라본 팔공산 비로봉
비로봉 정상에는 KT 송신소와 군부대 시설물로 완전히 산의 형태를
잊어버리고 요새화가 되어 있는게 안타깝기만 하다.
동봉 올라가는 길이 번잡하여 우회를 했는데 이곳은 사람들도 없고 한적하기만 하다.
암릉이 험하여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이곳에 인적이 드문지 아님 마가목의 효능을
알지 못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해발 800m 이상에서만 난다는 마가목이 천지다.
얼른 베낭에서 봉투를 꺼내서 손이 닿는곳에 있는 건 모조리 베낭에 담았다.
오늘의 전리품 - 마가목
비로봉이란 이름을 부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산이 어디일까. 아마도 금강산이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금강산 1만2000 봉우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주봉인 비로봉의 높이는 해발 1638m. 그뿐인가. 원주 치악산의
주봉도 비로봉(해발 1288m)이고 소백산 주봉의 이름도 역시 비로봉(1440m)이다.
그 외에도 오대산 최고봉인 비로봉(1563m)과 속리산국립공원 내의 비로봉(1057m)도 빼놓기 아쉽다.
금강산 외에 북한의 또 다른 명산인 묘향산의 주봉도 마찬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해발 1909m로 가장 높다.
이렇듯 비로봉은 많은 명산의 주요 봉우리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공산 비로봉이란
이름이 여전히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비로봉과 서봉, 동봉 등으로 명명돼 있는 팔공산 주요 봉우리들은 예전에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비로봉은 제왕봉, 동봉은 미타봉, 서봉은 삼성봉이었다는 것. 일부 산꾼들이 옛 이름 찾기 운동을 하고 있단다.
비로봉(毘盧峰)의 '비로'는 불교에서 '높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비로(毘盧)자나'는 모든 곳에 두루 비치는 부처님
몸의 빛을 뜻한다. 또한 '비로(毘盧)자나불'은 법신불을 뜻한다. 즉 산봉우리에 붙은 비로봉이란 이름에는 그 산에서
최고 높은 봉우리라는 뜻과 불교적 의미가 함께 내포돼 있다.
정상 주위 반경 300m에 철조망이 둘러처져 있어 바로 올라갈 수는 없고
철조망을 끼고 우회해서 가야한다. 이것도 45년만에 지난해에 개방됐다고 한다.
비암 딸기도 보이고...
비로봉 아래 쑥부쟁이도 반갑게 산꾼들을 맞이한다.
철조망을 우회하여 다시 비로봉을 향한다.
팔공 지맥은 보현 지맥상의 석심산(750.6m)에서 군위군과 영천시의 경계를 따라 금호강과 위천을 분기하며
최고봉인 팔공산(1192.8m)으로 오른다. 이후 가산(901.6m) 북서쪽 1.8km지점에서 팔공지맥은 금호강 북쪽
울타리 역할을 포기하고 위천의 물줄기를 따라 군위, 의성, 구미시 경계를 경유하며 낙동강과 위천의
合水處인 경북 상주시 중동면 새띠 마을까지 이어지는 120.7km의 산줄기를 신상경표에서는 팔공지맥이라 칭한다.
제천단 비석
비로봉에서 바라본 영천쪽의 능선
신라 오악이라는 것은 동쪽 토함산(동악), 서쪽 계룡산(서악), 남쪽 지리산(남악), 북쪽 태백산(북악) 그리고
중앙의 공산(중악)을 지칭한다. 이는 곧 팔공산이 통일신라의 중심지적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팔공산은 신라 호국성신인 오악의 하나로서 신라의 상징적인 존재로 국가차원에서 숭배되어 온
영산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령스러운 땅에 불교가 수용되면서부터는 자연히 신라불교의 성지로서
자리매김 되었으며,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원찰지로서 원찰 조성과 원탑조성 등 융성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공산"이라고만 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지금의 팔공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졌는데, 이는
태조 왕건과 후백제왕 견훤이 동수대전에서 격돌했을 때 신숭겸, 김락 등 여덟 장수를 기리는 뜻에서 이름을
고친것이라 한다. 이 흐름은 고려시대에서도 계속되어 고려의 초조대장경이 부인사에 봉안되고, 유가종의
거봉인 홍진국사 혜영, 자정국사 자안은 동화사 주지로서 전국의 불교를 관장하는 오교도승통이 되어 이 땅의 불교를 호령하였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도 은해사가 인종태실수보사찰로, 파계사가 영조의 장수를 비는 원찰로서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는 등 팔공산의 법등은 계속 밝혀져 왔다.
이같은 전통으로 이곳에는 현재도 수십개소의 사찰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다.
팔공산의 불국(佛國)은 영산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방 세력의 거점지였기 때문에 신라.고려. 조선 등
왕조를 달리하면서도 계속 왕실의 호위를 받을 수 있었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각 왕조의 중심적 불교문화가 지속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듯 지방 호족적이면서도 중앙왕실적 불국으로서의 팔공산의 불교사는 군위 삼존석불을 비롯, 동화사,은해사 등 도처에 남겨진
불적과 현존하는 사찰들에서 그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맥을 이어온 불교의 역사와 함께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남겨져 있는 이같은 불적들을 보노라면,
마치 이 곳에 불교의 모든 사상 형태들이 포함된 듯이 보인다. 아미타신앙, 미륵신앙, 밀교신앙 등이 시대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전개되었으며, 그러한 사상에 따른 불교예술도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그래서 시간성을 배제하고 본다면 팔공산은 모든 불교신앙이 집약된 듯한 느낌을 갖는다.
팔공산 비로봉 정상 삼각점(11:30)
팔공산비로봉(1,193m)
우측 봉우리가 동봉(1,155m)이고 송신탑이 있는 좌측으로 서봉(1,147m)이다.
팔공산은 대구의 진산으로 최고봉인 주봉 비로봉을 중심으로 좌 우에 동봉과 서봉을 거느리며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편것처럼 펼쳐있다한다.대구 중심부에서 22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남쪽으로 뻗어진
낙동정맥에서 떨어져 나와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곳에서 솟아 올라 행정구역상으로는 대구광역시
동구에 속하지만 영천시, 경산시, 칠곡군, 군위군과 경계를 맞닿은 엄청나게 큰 산이다.
계곡이 아름답고 산봉이 웅자하며 부근에 많은 사적이 있어, 1980년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팔공산의 옛 이름은 공산(公山)·부악(父岳), 중악(中岳)이라고 하여 신라 오악중에 하나이다.
오악이란 토함산(동악),계룡산(서악),지리산(남악),태백산(북악), 팔공산(중악)으로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신라 말에 견훤(甄萱)이 서라벌을 공략할 때에 고려 태조가 5,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견훤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오히려 팔공산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만나 포위 당하고 말았다.
그 때 신숭겸(申崇謙)이 태조로 가장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태조가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하며 이 때 신숭겸·김락(金樂)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하여 팔공산이라 불리워 졌다 한다.
동봉가는 길(11:45)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
팔공산 정상인 동봉에서 약간 낮은 서쪽편의 초우지에 위치한 거대한 화강암석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깝게 조각된 이불상의 높이는 약 6m로 상당히 높은 곳에 서쪽을 향해 직립하고 있다.
머리는 소발에 얕은 육계가 있으며,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없다. 두 볼은 풍만하며 입가의 미소와
잘 조화되어서 이웃집에서 늘상 만날 수 있는 소박하고 자비심 많은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다.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나, 목의 표현이 없어 삼도 또한 뚜렷하지 않다. 법의는 통견으로 도포자락과
같이 무릎 아래까지 닿아 있다. 신체비례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크게 표현된 양손과 발은 세밀하게 조각되었지만
그 수법은 고르지 못하다. 오른팔은 아래로 향하여 손바닥을 안쪽으로 하고 있으며 왼팔은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려 중지와 엄지를 구부리고 있는데 지물을 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듯하다. 광배 또한 두광이 있는 것
같이 보이나 마모가 심해 확실치 않다. 이 불상은 손과 발의 기형적 조각수법이 나타나기는 하나 거대한
입불에 잘 조화되는 옷주름이나 얼굴모습 등의 조각솜씨로 보아 갓바위 불상과 같이 통일신라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약사여래(藥師如來) : 동방의 정유리세계(정유리세계)에 있으면서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 부처이다.
그는 과거에 약왕(藥王)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한 12가지
대원의 공덕에 의해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대구 동구청-
팔공산 동봉(1167m:12:00)
석조약사여래 입상에서 계단을 올라오니 동봉이 나타난다.
아마 오늘 산행중에 사람이 가장 많은 것 같다. 정상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사람 많은곳을 자주 다니지 않다보니 마치 범여는
이방인이 된 느낌이다. 팔공산의 주봉인 비로봉이 군부대와 통신사의 송신소가
주인 노릇을 하는 바람에 동봉이 팔공산의 실질적인 주봉 노릇을 하고 있다.
팔공산의 지세를 보면 비로봉을 본존불을 하고 동봉과 서봉의 좌우 협시불로 두고
있는 형상이다. 동봉의 원래 이름은 미타봉이라고도 한다.
동봉 정상석의 뒷면
동봉에서의 전망은 일망무제이다. 저 넘어 아침에 들려던 관봉도 아련히 보이고 눈앞에
팔공산 골프장과 영천쪽도 훤히 보인다. 친구와 둘이서 다시 막걸리 한통과 사과하나
그리고 모찌떡으로 점심 식사를 대신하고 염불봉을 지나 서울 가는길이 바빠서 염불암
갈림길로 내려선다.
팔공산 골프장 전경
저 멀리 영천 시내도 보이고...
갓바위 부처님을 모신 관봉도 뚜렷히 보이고...
염불암 갈림길(12:45)
忍苦의 세월을 넘어
염불암 갈림길을 지나서 인적이 많은 염불암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인적이 거의 없는 호젓한 등로를 택한다. 2~3시간 후면 헤어질 친구와
우정을 조금이라도 더 나누고 싶은 탓일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듯 동화사 주차장 옆 도로가 나타나 산행을 종료하고 친구 차를 타고
식당으로 향한다.(14:00)
참 맛있는 식당(14:20)
산행을 마치고 동화사 주차장에서 차를 가지고 나와 점심식사 장소로
산골기사식당으로 와서 해물 순두부에다가 막걸리 한통을 시킨다.
기사식당이라서 그러려니 하고 갔는데 간판만 기사식당이지... 음식맛은
끝내준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미어 터지는 느낌이다.
본관에는 자리가 없어서 별관으로 가서 식사를 하는데 해물 순두부 한그릇에
6,000원인데 정말 맛이 있다. 경상도 음식점에 이런 맛있는 곳이 있다니...
사실 경상도에 와서 味覺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대구에는 토속 막걸리가 없어서 맛을 보지
못하고 그냥 국순당 막걸리를 먹는게 조금은 아쉽다.
이곳 식당이 팔지 않은건지... 아님 없는건지는 몰라도 좀 아쉽다.
서울 장수 막걸리, 부산생탁, 울산 태화루처럼... 대구를 대표하는 막걸리가 없는걸까?
대구고속버스터미널(16:00)
동화사 입구대로변에 있는 산골기사식당에 도착하여 해물 순두부에다가
막걸리 한병을 친구는 운전땜에 먹지않고 혼자 마시고나서 동대구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차에 타자마자 잠에서 떨어진 모양이다.
친구가 터미널에 도착하여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나누고 헤어져 서울가는 표를 사니 40분이란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곳 동대구에 와 본진지가 15년이 넘었건만
이곳은 별로 변하지 않은 옛모습 그대로이다
대구에서 서울오는 고속버스표
'♣ 일반산행 ♣ > 梵如의 山行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왕산과 능경봉 (0) | 2012.07.16 |
---|---|
청계산 (0) | 2012.06.07 |
명절이면 갈곳없는 실향민? (0) | 2011.09.12 |
새해 첫 산행 - 청계산 (0) | 2011.01.01 |
살방살방 청계산에 다녀오다. (0) | 2010.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