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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전국의 사찰

청계산 청계사

by 범여(梵如) 2012. 3. 1.

 

 

청계사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11번지 청계산의 남쪽 태봉 기슭에 자리하고있는 청계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한 유서깊은 사찰로 청계산 남쪽 태봉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경기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 선사의 출가자로 경허선사의 선맥을 이은 만공, 금오, 월산 선사의 체취가

경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청계사 창건연대는 확신치 않으나 통일신라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세종 때 1차 중창, 숙종 때 2차 중창을 거쳐 사격을 유지해 내려오다가

지난 2001년 종상스님이 주지로 부임해오면서 사격을 일신하고 진입로 불사를 마무리해 대찰의 면모를 갖췄다.

 

현재는 성행스님이 주지를 맡아 경허, 만공, 금오, 월산 선사의 부도를 조성하는 등

회주종상스님의 지도아래 민족 문화사적 위상제고를 위하여 경허 스님등 청계사와 인연을 가졌던

한국불교의 빛나는 고승 4분의 부도탑 조성을 위하여 선종 종찰로서 명실상부한 “ 한국 선불교 중흥 본찰” 로서

거듭나게 되어 호국안민은 물론 그 위업을 길이 계승하고 후손들의 정신교육의 산실로서

지역사회의 역사문화교육의 산 현장이 되고 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편액

도서와 관지가 없어 작자와 쓴 시기를 알 수 없지만 글씨로 보아서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해서체의 글씨가 별 다른 꾸밈없이 단정하면서 힘이 있어 화려함보다는 내실을 느끼게 한다.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極樂寶殿 阿彌陀三尊佛

아미타삼존불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불상은 높이 110㎝이고 두 보살상은 높이 107㎝로 모두 조선 후기에 속하는 양식을 지니고 있다.

 

극락보전 신중탱(極樂寶殿 神衆幀

극락보전 후불탱보다 다소 앞선 시기인 1844년(헌종 10)에 그려진 신중탱은

화폭을 2단으로 구분하여 윗부분은 제석과 범천을 위주로 한 신중의 그림을,

아랫부분은 천룡을 위주로 한 무장 모습의 신중을 그렸다. 

세로 172㎝, 가로 219㎝의 크기로 이전 시대의 것보다 채색이 짙어지고

윤곽선도 뚜렷해졌으나 그림의 각 형태는 도식화된 느낌을 준다.

 

 

*극락보전 *

경내 가장 뒤쪽 중심에 자리잡은 극락보전(極樂寶殿)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를 하고 있다.

기단부는 최근에 쌓은 것이지만 중수할 때 대들보에서 ‘庚子 三年 三月’이라는 글씨가 확인되어

1900년(광무 4)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장전* 

지장전안에 지장보살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삼성각* 

 

 

 

동종각 (銅鐘閣

*동 종*

극락보전 왼쪽에 위치한 종각에 봉안되어 있으며, 현재 보물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 110㎝, 입지름 76㎝로, 종의 표면에 ‘康熙四十年辛已四月日鑄成 廣州靑龍山淸溪寺大鐘七百斤’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1701년(숙종 27)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도(浮屠

극락보전 옆에 봉안된 석조 지장보살입상 앞에 있다. 현재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고,

기단부와 탑신부는 부도석이지만  그 이상은 다른 여러 부재가 혼성되어 있다.

하지만 팔각의 기단부와 탑신부의 양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부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사적이 전하지 않는 청계사 연혁에 있어서 문헌자료의 결핍을 보충해 주는

중요한 유물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선중흥조 오대선사 부도*

 

경허선사

경허선사(鏡虛禪師, 1849∼1912)의 속성은 송(宋), 속명은 동욱(東旭), 법명은 성우(惺牛)로

1849년 8월 24일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子動里)에서 송 두옥(宋斗玉)씨와 밀양 박씨 부인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죽었으며,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스님의의 밑에서 물긷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내고 14세 때 절을 찾아 온 선비에게 글을 배우는데,

눈에 거치면 외우고, 듣는대로 뜻을 해석할 만큼 문리(文理)에 크기 진취가 있었다.

 

그해 가을에 계허스님의 천거로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뿐 아니라 <논어>·<맹자>·<시경>·<서경> 등의 유서와 노장 등의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1880년 홍주 천장암(天藏庵)에서 용암(龍岩)의 법을 이은 후 천장암과 서산 개심사(開心寺),

영주 부석사(浮石寺) 등에서 활동하였다. 1894년 범어사의 조실이 되었고,

1899년 해인사의 경전간행불사(經典刊行佛事)와 수선사(修禪社) 불사의 법주가 되었다.

또한 청암사(靑巖寺)에서 설법으로 방한암을 대오하게 하였으며, 1902년(광무 6) 범어사의

금강암과 마하사(摩訶寺)의 나한상개분불사(羅漢像改粉佛事)에 증사가 되었다.

 

1904년에는 안변 석왕사의 오백나한개금불사의 증사가 되었다가 자취를 감추었으며,

그후 박난주(朴蘭州)로 개명하고 머리를 기르고 유관을 쓴 모습으로 갑산·강계 등지를 돌아다니며

 기행을 남겼다. 1912년 4월 갑산에서 입적하였다.

 

 만공선사

만공선사(滿空禪師, 1871∼1946)는 근대의 고승으로 본관은 여산송(礪山宋)이며,

송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전라북도 정읍출신으로 신통(神通)의 아들이다.

1883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金山寺)에서 불상을 보고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 공주 동학사(東鶴寺)에서 출가하였다.

1884년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경허(鏡虛)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받아 득도하였으며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였다.

 

1895년 아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에 범종을 치면서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게송을 읊다가 홀연 깨달았다.

그 후 공주 마곡사(麻谷寺) 토굴에서 보경(普鏡)과 함께 계속 수도하다가 경허(鏡虛)로부터

"아직 진면목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조주의 무자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선을 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정진하였다. 그 뒤 경허를 모시고 서산 부석사(浮石寺)와

부산 범어사의 계명암(鷄鳴庵) 등지에서 수도하였다.

 

1901년 경허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백운암(白雲庵)에 들러 며칠 머무르는 동안,

새벽에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철벽의 어둔이 모두 밝게 하소서

(願此鐘聲遍法界 鐵圓幽音悉皆明)."라는 게송을 읊으면서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곧 천장사로 돌아와 법열을 즐기던 중, 1904년 함경북도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

 

1905년 예산 덕숭산(德崇山)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보임을 하는 동안 참선을 하려는 수도승들이 찾아와

그 지도를 맡게 되었다. 그 뒤 3년 동안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의 선(禪) 지도와 1937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 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가까이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초암을 짓고 생활을 하다가

1946년 10월 20일에 입적하였다. 나이 75세, 법랍(法臘) 62세였다.

 

 

*청계사의 부처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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