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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9기맥 자료및 산행후기 ♣/남강(진양)기맥(終)

진양기맥 제7구간 - 머리재에서 청현재까지

by 범여(梵如) 2012. 4. 8.

☞ 산행일자: 2012 ,4, 8(무박산행)

☞ 산행날씨: 맑음, 약간 더운날씨, 산행하기 더없이 좋은 날 

☞ 참석인원: 백두사랑 산악회 21명과 함께

☞ 도상거리: 약 24.2km + 약 2 km+ 2.4km(알바) / 10시간 05분 소요

☞ 산행거리: 머리재-송신탑-망룡산-327봉-천황산-363봉-용당재-삼각점봉-신촌재(어옥고개)

                  막고개-동향고개-서낭재-내리실고개-응석고개-월명암-집현산동봉 갈림길

                  동봉-갈림길-헬기장-집현산 부봉-오봉 갈림길-무너미재-집현산 갈림길-호조참판 묘

                  급경사내리막길-송전탑-청현재-경남 축산시험장(산청군 신안면)

☞ 소 재 지: 경남 의령군 대의면. 칠곡면 / 진주시 대곡면, 미천면, 집현면, 명석면 / 산청군 생비량면, 신안면

 

올 봄은 참으로 이상하다. 도대체 날씨를 종잡을 수가 없다.

마치 요즘 돌아가는 세상사와 똑같은 느낌이다. 하긴 인간사가 비정상인데

날씨인들 정상적일리 있겠는가?

요즘 우리동네 아파트와 우리 매장앞에는 하루종일 국회의원 후보들이

와서 떠드는 바람에 조용한 날이 하루도 없다.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보이는 자들이 별별 공약을 다 내걸고 유권자들을 유혹하는데 참으로

가증스럽다. 저거들이 언제 民草들 한번이라도 생각을 해봤나...

자기들 이권과 뱃속 채우길 바빴지... 유권자들이 장기판에 卒로 보이나

 

우리동네는 재건축 문제 때문에 서울시장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찬

플랑카드로 아파트 단지가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다.

그런데도 박원순시장은 꿈적도 하지않고 우리 의견을 깡그리 깔아 뭉개고 있다.

그러면서 한다는게 서울대공원에 있는 돌고래를 제주 구름비 앞바다에

돌려 보내고 한강변에다 텃밭을 분양하는등... 이상한 짓거리만 한다.

그게 1,000만이 사는 수도 서울시장이 할일인가?  아직도 시민단체장으로

 착각하는 건 아닌지?... 차기 대권에 꿈이있어 텃밭을 표밭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지난주에 고흥지맥 구간 산행하면서 무리를 했는지 허리가 너무 아프다.

산행을 해야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이 앞서지만 한 구간을 빠지면

2014년까지 마감 지어야 하는 기맥산행을 마무리 할 수가 없기에

억지로 베낭을 메고 출발장소인 양재역으로 향한다.

동료 산꾼들에게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 할터인데...

 

 (원본클릭)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머리재-청현재의 트랙

양재역에서 버스에 올라 신갈을 지나서 잠을 들려는 찰나에 버스는 천안 휴게소에 선다.

잠이 깨버린다. 그 이후로 잠을 좀처럼 이룰수가 없다. 이리저리 뒤척이는 사이에 산꾼을

실은 버스는 대진고속도로 단성 I.C를 지나서 단성면을 지나고 신안면소재지를 지나

의령군 대의면으로 접어들어 이어 새벽 2시 40분경에 머리재(대의고개)에 도착한다.

단성면소재지에 접어들어 우측을 보는데 퇴옹당(退翁堂) 성철(性徹) 대종사의

생가에 세워져 있는 겁외사는 보이질 않는다. 아마 이 시간쯤이면

새벽예불을 준비할 즈음인데... 겁외사를 향한 마음속 禮를 표하는 사이에

범여를 실은 버스는 경호강을 건너서 신안면으로 접어든다.

 

요즘처럼 이 혼란스런 불확실성의 시대의 큰 스님의 법문이 간절히 그리웁건만

스님을 친견할 기회가 없으니... 요즘처럼 이기적이고 편협한 衆生들에게

회초리를 들어주시길...큰스님 정말 당신이 그리습니다.  

벌써 큰스님이 열반하신지가 올해 19년이 되었다. 그리고 탄생 100주년이라

어디가서 이 큰 스승을 뵈올까...

머리재(02:40)

새벽 2시 40분경에 버스는 오늘의 들머리는 머리재(경남 의령군 대의면과 칠곡면 경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산에모텔과 대의고개 휴게소를 운영하는 한회장님의 친구분이 야심한 새벽에

우리를 반가히 맞이한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새벽 3시 45분에 산행을 하겠노라 약속을

한 산행대장은 뭣이 그리도 급한지 3시 15분에 산행을 강행한다.

그리고는 뒷 사람들을 생각을 하는지 안하는지 엄청난 속도로 진행을 하는데 아마 오늘도

2시간 이상을 어둠속에 헤매야만 할것 같은 기분이다. 원래 동이트기 전까지는 천천히

모여가야만 하는게 원칙인것 같은데... 리더로서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이건 아닌가 싶다.

몇번이고 건의를 했건만 시정이 안되고...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이 산악회와 인연이 다되어 가는 느낌이다. 5월부터 시작하는 팔공기맥은 아무래도 혼자서

해야할 듯 싶다. 혼자서 여유롭게 대중교통을 타고 주위를 두루두루 구경하면서...

진양기맥 구간에 내 고향 의령땅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어둠속에 걸으니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대한민국에 가장 郡勢가 약한 의령군이지만

그래도 이곳 출신들은 자부심이 대단하고 인재들이 참으로 많이 배출한 곳이다.

특히 남강을 끼고있는 이곳이 우리나라 재벌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 이곳 아닌가.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인 삼성(의령군 정곡)과 L.G와G.S(진양 지수) 그리고 효성

벽산(함안)이 이 지역이 배출한 재벌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중국집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하림각’의 소유자인 남상해 회장도 이곳(의령 유곡)출신이다.

그외도 이름 안난 알부자들이 수두룩하다.

산행을 시작하다(03:15)

의령군 대의면 다사리에서 칠곡면 산북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머리재

도로를 넘어 맞은편 S-OIL 주유소 뒷편 담벼락 개구멍을 통해서

진양기맥 날머리로 들어선다. 주유소에서 사용하는 청색 물탱크를

지나서 밤나무 단지를 지나니 이내 소나무 숲이 나타나고 어둠속에

임도인듯한 편안길을 따라 망룡산으로 향한다. 어둠속에 사물의 구분이 안되고...

대의고개 휴게소 맞은편 도로를 건너 망경 휴게소를 지나서... 

S-OIL  주유소 개구멍을 통과하여 진양기맥 등로로 올라선다.

이동통신 송신탑(03:25)

10분정도 오르는데 차에서 수면을 취하지 못한 탓인지 몸은 자꾸만

무겁고 허리는 아파온다. 몸이 예열되기 전에는 조금 천천히 가면

좋으련만 선두는 거침없이 질주를 한다. 어둠속에 걷는 이 길은 참으로

의미없는 길이 아닌가 싶다. 10분정도 오르니  어둠속에 통신사 기지국인

인듯한 송신소가 나타난다. 음력 3월 열여드렛날의 달은 밝은데 카메라

후레쉬가 약한 탓인지 사물을 앵글속에 담을수가 없다. 

망룡산(望龍山:441.6m:03:45)

경남 의령군 칠곡면과 대의면 진주시 대곡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KBS 송신탑이

정상을 점령하고 있는 바람에 정상 표지판이 송신탑 철조망에 을씨년스럽게

걸려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이곳에는 송신탑을 관리하는 사택이 있고

사람이 사는갑다. 그리고 조금 내려서니 사각정자가 있고 그 아래로 칠곡면의

마을과 저 멀리 의령읍내의 불빛이 아직도 깊은 밤임을 알려준다.

KBS 망룡산 기지국

망룡산 아래로 내려서니 커다란 배나무 과수원 단지가 나타나고 거기다가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이 쳐저있다. 이곳도 낙남정맥 진주구간처럼 여름에

이곳을 지나가는 산꾼들은 아마도 과수원 주인과 많이 부딪힐듯 싶다.

콘크리트 도로를 타고 200m정도를 내려가다가 급히 우측으로 틀어서 기맥을

이어간다.

의령 여씨 가족묘

과수원을 조금 지나니 ‘의령 여씨’ 가족묘가 나온다. 이곳은 묘지의 봉분을

없애고 검은 대리석을 눕혀서 마치 국립묘지의 묘비를 연상케 한다.

이곳에서 조금지나 과수원에서 벗어나 숲으로 들어가는데 소나무와 진달래가

흐드르지게 피어있고 주위가 확트여서 전망이 더없이 좋은 곳이나 어둠속인

점이 한없이 아깝기만 하다. 휘영청 밝은 달빛속에 지나온 자굴산이 아련히 보인다.

여기서 부터 좌측은 의령군 칠곡면에서 진주시 대곡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327봉(04:40)

지도상과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327봉을 지나면 천황산(314m)이 나타나는 걸로

 되어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어둠속에 찿을 길이 없다. 조금지나  관리가 안된

‘김해허씨’의 묘지에서 5분간의 휴식을 취하고 다시 산행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방갓산이 나오는데 어둠속에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363봉(05:10)

이제 서서히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하지만 아직도 주위의 사물이 구분되지 않는다.

잠시후에 363봉에 도착을 한다. 이곳은 벌목을 해놔서 주위의 전망이 좋고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群鷄一鶴이 아닌 群雜一松으로 멋진 자태를 나타내고 있고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숲길을 헤쳐 나가니 다시 과수원을 만난다. 

임진년 음력 삼월 열여드렛날의 달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서히 서산으로 기운다.

어둠속에 선두를 쫒아 가다가 어둠속에 용당재와 삼각점봉(267m)를 놓쳐 버린게 아쉽기만 하다.

계속해서 감나무와 밤나무 단지 과수원을 지나다가 이곳에서 5분간 휴식을 취하면서

소주 2잔을 연거푸 마신다. 오늘은 지난구간에 비해서 거리도 훨씬 짧고 난이도도 덜하건만

왜이리 서두르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날씨가 밝아오면서 진달래 숲사이로 경남 진주시 미천면 신촌마을 빼꼼히 보인다.

이곳부터는 우측은 의령군 대의면에서 진주시 미천면으로 좌측은 대곡면에서

미천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진주시 미천면(美川)面 지명의 유래 - 전설에 의하면 셋 고을(동향, 오방, 상미) 川으로 흐르는

 맑디맑은 거울 같은 세천(細川)이 뱀처럼 너울거려 흐르고 있어 지나가던 어느 스님이 사천(蛇川)이라

이름 지어 부르다가 지역에서 연도는 알 수 없으나(융희 2년경으로 추정) 뜻있는 선비들이 혐오감을

 주는 사(蛇)라 하여 아름다울 미(美) 자를 붙여 미천이라 칭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어옥 저수지의 모습(경난 진주시 미천면 어옥리 소재)

날이 밝으면서 과수단지 사이에 피어있는 진달래가 시야에 들어온다.

진양기맥 능선에서 바라본 진주시 미천면 미곡리 신촌(新村)마을의 모습

어느때에 어느 성씨가 들어와서 새 마을을 이루며 살아 신촌이란 촌명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옛 문헌에 성태동의 속방에 신촌이란 촌명이 있는 것을 보면 오래된 마을이다. 밀양손씨가

 제일먼저 들어오고, 다음으로 능성구씨가 들어왔다 하며, 김녕김씨와 진양강씨들도 살고 있다.

 본 마을이 도로변을 따라 길다랗게 형성되어 있고, 이외에 여러 땀이 주위에 산재해 있으니,

 동쪽에 있는 작은 메조골에 4.5호의 농가가 살고 있고, 다리건너 주걸정에도 네댓집 살고 있다.

동리 남쪽에 있는 마을을 정자마을 또는 담장모티라 하니 예전에 정자가 있었다 하며 7,8호 농가가

 도로변에 연이어 있고, 건너편 금동골에도 대여섯집이 살고 있다. 마을 앞에 길다란 들이 펼쳐져

 있으니 북쪽을 진웅등들이라 하고, 정면에 있는 들을 묘종견래(猫從犬來)들이라 하니,

들 서편에 고양이가 쥐를 쫓고 개가 쫓아오는 형국의 산이 있어 개에 쫓기어 고양이가 쥐를 놓쳤다는

뜻에서 이런 들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남쪽의 정자마을 앞들을 학들이라 하니 들 전체가

경리정리와 관개시설이 잘 되어 농사짓기가 편한 곳이다.

신촌재(05:15)

경남 진주시 미천면 미곡리 신촌마을과 어옥리 어옥저수지를  잇는 고개로

길은 꽤나 넓은 임도이다. 이 지역  어옥리 사람들은 어옥고개라

부르고 미곡리 사람들은 신촌재라 부르는 모양이다. 산꾼들은 어옥고개라

많이 부른다. 성황당의 흔적인듯한 돌멩이들과 꽤나 큰 나무 한그루가 있다.

조금 올라서니 묘지가 있고 지나온 기맥능선과 신촌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일출은 어김없이 시작되고... 그 앞으로 제트기가 지나간다.

좀 이른 시간에 아침상을 펼친다... 오늘은 돼지고기 불백에 상치쌈이다.

차에서 잠을 못잔 탓인지 영 밥이 먹히질 않는다. 도시락은 2/3나 남기고

불백에다 막걸리 서너잔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베낭을 정리하고 나니

오늘도 또 꼴찌로 출발을 한다. 

이곳은 진달래가 흐드르게 피어있다. 산꾼들 봄바람나기 좋게...

가는길은 편하다... 방화선같은 임도를 따라 걷는다.

아침해가 뜨면서 날씨는 꽤나 덥다.  잡목이 많아서 짧은 티는 입을수가

 없고 하여 대신에 속옷을 벗어 버린다. 훨씬 시원하게 길을 걷는다.

진양기맥의 산그리메

날이 밝으면서 저 멀리 으령의 진산인 좌굴산이 아련히 보인다.

193봉(07:15)

193봉에 오르니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그 아래 기맥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상당히 관리가 잘 된 왕름만큼이나 커다란 묘지 봉분이 보인다.

다시 우측에 과수원을 끼고 능선길을 걷는다. 진달래와 어우려져 있다.

여름 산행에는 상당히 고생을 해야될 듯 싶다.

왕릉처럼 잘 꾸며진 묘소를 지나고...

저 멀리 가야할 집현산의 山群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약간의 고도를 높인다... 경주최씨의 묘소를 치고 올라가서 길이 없는 우측으로

기수를 돌린다. 무심코 길이 잘 나있는 내리막길을 가면 알바하기 딱 좋은 곳이다 (알바주의)

과수원을 끼고 내려오니 콘크리트 도로가 나온다.

이 도로는 과수원 일을 하기 위하여 만든 사유도로인듯 싶다.

다시 과수원을 따라 산 능선으로 따라 올라간다.

꼬부랑 할미꽃도 세월앞에 어쩔수가 없는가 보다.

편안한 소나무 숲속을 다시 걷는다.

다시 과수원 철조망을 끼고 걸어간다.

하얀 매화꽃이 핀 과수원 철조망을 따라 내려간다.

내려갔다가 막고개 도로를 지나서 다시 저 멀리 보이는 과수원

능선으로 가는 길이 진양기맥길이다. 더운 날씨탓이 식수가 걱정이다.

매화꽃도 갈길 바쁜 산꾼을 유혹하고...

안간 배수지(진주시 미천면 소재)

과수원의 조그만 능선을 올랐다가 다시 경사진 곳을 내려오니 아마 이 지역은 상수도가

없는 모양인지 커다란 원형 스텐레스로 만든 이 지역 식수를 저장한 물탱크가  자리잡고

있고 그 아래에는 주유소가 보인다. 같이 동행한 한회장님이 이곳 안간에 대해 설명을 한다.

이 지역은 33번 국도가 인접해 교통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란다.

그래서 이 지역이 텃세가 엄청 심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설프게 가는건

안간’만 못하다고 하여 안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ㅋㅋㅋ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이 지역 출신인 月波 선생한테 함 물어봐야겠다.

선두들은 막고개를 지나 벌써 저멀리 지나고 있다.

막고개(07:45)

경남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와 오방리를 연결하는 1007번 지방도로

지나는 곳으로 폐업중인 GH OIL 주유소가 있고 옆엔 휴게소였던 것 같은

부속건물이 있는 도로로 내려선다. 우측 40여 m거리에 미곡,상미마을로

들어가는 길 표시판과 포장도로가 있는데 이 길이 망월산과 363봉 사이의

 상미 저수지로 가는 길이다.

이곳을 국립지리원 25000지도는 막고개로 표기했고 영진 5만지도는 조금전에

지나온 193m넘어 세멘트임도 삼거리를 막고개로 적고있다

주유소에서 도로를 따라 약간 내려오다 주유소 뒷편 과수원으로 올라선다.

머리재-막고개의 트랙

지나온 기맥 능선의 모습 - 배수지 물탱크가 보인다.

과수원을 지나서 다시 소나무숲으로  접어드는데 이곳은 길이 전혀없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발자국도 전혀 보이질 않고... 迷路속을 헤맨다.

나무와 잡목숲을 헤쳐 나가는데 여기저기를 할키는데 얼굴이 따갑고

쓰리기 시작한데 그래도 지난주 고흥지맥에 비해선 양반이다 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소나무숲을 빠져 나와서 다시 밤나무 단지 옆의 길로 내려선다.

오늘 구간은 거의 과수원 트레킹이라고 보면 될것 같다.

동향 저수지의 모습

우리가 가야할 집현산 동봉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아래에

33번 국도가 지나간다. 가야할 내리실 고개도 보이고...

19번 송전탑

NO 19번 송전탑에서 급한 내림길을 내려간다. 낙엽이 쌓여 그런지

상당히 미끄럽다. 조금 내려오다가 잘 가꿔진 산소에서 간식과 막걸리를

한잔하고 베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두준 농장위의 잘꾸며진 묘지에서 막걸리 한사발을 하고...

두준농장

산소에서 10분정도의 휴식을 취하고 내려오니 기맥길에 철대문을

달아놓고 길을 막고있다. 그렇다고 안다닐까. 다행히 오늘은 문이 열려

있어서 편안하게 내려오긴 했지만...

동향고개(08:40)

 경남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와 향양리를 25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2차선 도로로

차량통행이 거의 없다시피한 도로이다. 느낌의 조그만 마을 진입로  같은 느낌이다. 

도로로 내려서니 좌측에 재령이씨 문중 만남의동산 표시석이 있고, 두준농원입구

 표시석이 설치되어 있다. 

만남의 동산 표시석에서 좌측 농장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임도를 좋아하는 임도파들은 우측에 잘되어 있는 임도로

올라가도  나중에 다시 만난다.

CCTV 촬영중이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는 쇠줄을  간단히 넘어

버리고 농장 가운데 길을 올라서 숲으로 접어든다.

숲의 우측에는 밤나무 농장들이 계속 따라 나서고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저 멀리 집현산군과 월명암이 보인다.

서낭재를 지나서 210봉을 치고 올라갔다가 급경사로 내려서니

우리가 넘어야 할 33번 국도가 지나가고있다. 다시 급경사를 내려간다. 

33번 국도로 내려서는데 거의 200m 이상을 깔아뭉개고 길을 냈다.

철재 계단을 내려와 다시 이렇게 중간에 시멘트 도로를 타고 내려간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다. 이 정도면  터널방식이

훨씬 공사비도 덜 들고 친환경적일텐데... 산을 타면서 이런델 만나면

안타깝고 어떤때는 화가 치민다... 자연은 후손들에게 물려줄 소중한 자산인데...

시멘트 도로를  내려와서 다시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내리실 마을의 모습

내리실고개(09:15)

진주에서 합천으로가는 시원하게 뚫린 33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기맥길이 짤려서 4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여 길을 건넌다.

다행히 교통량은 그리만치 않은 곳이다. 3분 먼저 가려다 30년 먼저갈라...

착한 산꾼은 지하차도를 지나 삥둘러서 우회하여 내리실 마을로 온다.

내리실마을

내리실 마을은 한적하고 조그만 시골촌락이다.

이곳 정자 쉼터에서 5분정도 휴식을 취하며 시원한 맥주 생각에

구멍가계를 찾았지만 가계는 보이질 않는다. 진주 시내버스가

올 정도의 마을이라 가계 하나 정도 있을법한데... 보이질 않는다.

여기서부터 진주시 미천면이 끝내고 새로운 집현면을 맞이한다.

내리실마을 버스 정류소(진주시 집현면 소재)

정자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가도 되지만 좌측 대밭사이로 올라가서

밭을 지나니 이동통신 중계탑이 나오고 임도를 따라 등로로 올라선다.

등로에서 바라본 33번 국도

중계탑에서 우측으로 올라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반가운 준.희님의 시그널

이 분은 국제신문 2대 산행대장을 지내신 최남준님이란다. 

 <준>은 이분, <희>는 오래전 돌아가신 부인의 이니셜을 따

 <준.희>로  여러 산에 이정표 역할을 하여 주고 있는데

정맥이나 기맥, 지맥에 쏟는 정성은 정말 존경스럽다. 늘 감사하다

범여의 롤모델로 삼고 싶은 분이다.

호젓한 길을 동료 산꾼들과 같이 걷는다.

후미팀을은 여유로와서 좋다. 산은 이렇게 즐겨야 하는데...

오늘 날씨는 상당히 덥다. 흐드르지게 핀 꽃은 참으로 곱다.

꽃이 아름다와 보인다는 것은 늙은 간다는 증거일까

그 생각을 하니 웬지 모르게 서글퍼진다는 생각이 든다.

나뭇가지 사이로 집현산 동봉과 월명암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 특이한 점은 해발 450이상인 이곳에 엄청나게 넓은

대밭이 형성되어 있다.

렌즈로 당겨본 월명암의 모습

능선에서 임도로 들어선다. 조금후에 응석고개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한 고문님과 산동네님이 막걸리를 마시면서 한잔을 권한다.

내리실재에서 마시지 못한 막걸리가 왜이리 맛있는지?

응석사 가는길

저 콘크리트 도로로 내려가면 유명한 응석사가 나온다.

응석사(凝石寺)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 741번지 집현산(集賢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의 말사다. 
신라시대인 554년(진흥왕 15)에 연기(緣起) 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662년(문무왕 2) 의상 스님이 강원(講院)을 설치했다고 전하는데,

그러나 이 해는 의상 스님이 중국 당나라에 유학 중이었으므로 연대에 문제가 있다.
고려시대에서는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스님 등이 머물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명 대사 유정(惟政, 1544~1610) 스님, 진묵 일옥(震默一玉, 1562~1663)

스님 등이 머물며 화엄도량으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당시 가람의 규모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문수전·극락전·비로전·영산전·나한전·팔상전 등과 163개의 방이 있었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몰려와 관음전에 참배하던 중 관음상 밑에 숨겨 두었던

승병들의 무기가 발각되자 모든 건물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 뒤 1736년(영조 12)과 1899년(광무 3)에 각각 중수가 있었다. 근대에 와서는

구산 수련(九山 秀蓮, 1909~1983) 스님이 1950년에 응석사에 머물며 수도한 바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누각 형식으로 된 종루가 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경내가 시작되는데,

종루 앞에는 대웅전이 금당으로 자리한다.
대웅전 뒤쪽으로 나한전과 산신각·독성각이 거의 같은 축선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특히 산신각과 독성각은 거의 처마가 잇대어 있을 정도로 근접해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창건이후 임진왜란 직전까지의 모습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임진왜란으로 사찰 대부분의 당우가 불에 타 없어진 뒤, 사역의 규모가 상당히

축소되었고, 그 때 그 때 형편에 따라 전각을 세우면서 이러한 배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내부의 삼존불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1호)

 과거,현재,미래를 나타내는 삼세불상으로 조선 후기에 확산된 형태이다.

복장 유물에 의해 조성연대가 1643년으로 확인되어 이 시기에 조성된 삼존불은

그 예가 드물어 보존가치가 뛰어난 불상으로 불상의 규모가 학술적 가치가 높은 불상이다.

 

대웅전은 두 차례에 걸친 사찰의 중건 때(1736년, 1899년)에 새로 조성되었으며,

이후 1983년에 재차 개수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건물이다.

기둥은 가운데가 약간 불룩한 배흘림으로 대단히 굵다. 지붕의 처마는 건물의 높이에

비해 짧으며 완만하게 처리되었다. 팔작다포계 양식의 건물이지만 화려함보다는

오히려 소박한 느낌을 준다. 1983년에 개수하면서 중건 당시의 건물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때까지도 대웅전은 정면과 우측면은 겹처마이고 좌측과

 배면은 홑처마로 구성되어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으나 2003년 대웅전을

 전면적으로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되었다.

신라말 풍수지리학의 시조이며 대가인 도선국사가  이곳 응석사에 주석하면서

모감주 나무를 심어 대를 이은 고목으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 96호로 지정되어 있고

지금도 그 열매를 따서 염주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응석사 뒷쪽에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된 무환지 나무도 있다고 하는데

도선국사가 심었다는 전설로 전해지는 이 나무는 응석사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듯 하다.

응석고개(10:10)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등로에서 100m 정도 벗어난 월명암으로 향한다.

월명암(月明庵10:15)

월명암은 그저 소박하고 조그만 사찰이다. 나 이런 절을 좋아한다.

대웅전에 들려 부처님께 여법하게 삼배의 예를 올리고 무사산행을 기원한다.

마당에 있는 감로수의 맛은 정말로 기가 막히다. 세수를 하고 좌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월명암 인법당에 모셔진 삼존불

 

 

월명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86호)

월명암 인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복장발원문에 의하면

1612년에 수화승 현진이 학문(學文), 명은(明隱), 의능(義能), 태훈(太訓) 4명의

조각승을 이끌고 제작한 불상으로 함양 상련대 관음보살좌상과 동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상련대 관음보살좌상에서 공덕주로 나오는

벽암 각성이 월명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서는 복장시주자로 나타나서 불상제작에

벽암 각성이 깊이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좌상의 전체적으로 동시 조성된 상련대 관세음보살좌상보다 넓은 어깨와

 당당한 신체 비례를 보인다. 불상의 두부는 둥글고 높은 복발형으로 앞으로 살짝 숙이고 있다.

 나발 사이에 둥근 정상계주와 반달형의 중간계주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상호는 갸름한 타원형으로 이마는 넓은 편이며 반개한 두 눈은 좌우로 길게 뻗어 있다.

 호형을 그리며 내려오는 콧대는 콧등이 얇고 돌출되어 있으며, 작은 입술에는 미소를

짓고 있어 전반적으로 인자한 모습이다.

넓은 어깨에 가슴은 편평하여 양감 있고, 허리는 길며 아랫배는 살짝 부풀어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올리고 왼손은 오른발 위에 올려 자연스럽게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다.

하체는 오른발을 위로 올린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무릎은 낮고 넓은 편이어서 안정적인 자세이다.

 법의는 일반적인 이중착의법으로 착용하였으며, 승각기는 가슴까지 올려 일자로 표현하였다.

 다리를 덮은 대의자락은 형식화된 4단의 부채모양의 주름이 길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표현은 동시

 조성된 상련대 관세음보살좌상과 유사하다.

월명암 아미타불좌상은 현존하는 현진작 불상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현진작 불상의

 양식변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아울러 17세기 전반기에 나타나는 불상양식의 편년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월명암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막고개-월명암의 트랙

월명암을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집현산으로 접어든다.

여기서 말하는 집현산은 지도상에서 말하는 집현산이 아니라

549봉을 말한다.  진주 사람들은 지도상의 집현산이 아닌 549봉을

집현산으로 삼는 까닭은 아마도 지도상의 집현산이 산청군에 속해

있었기에 자기 지역에 있는 부봉을 집현산으로 삼았고 통념상

진주 집현산으로 부른다.

월명암에서 집현산으로 오르는 길은 관리가 굉장히 잘되어 있다.

오르는 길도 완만하고 주위에 소나무 숲으로 걷는 맛은 그야말로 一味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월명암 주위로 해발 400m 이상의 고지에 거대한

대밭(竹田)으로 형성한 점이 좀 특이하게 보인다. 잠시 후 동봉 갈림길이다.

집현산 동봉 갈림길(10:50)

집현산 동봉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200m 정도 떨어져있는 곳에있다.

베낭을 벗어놓고 스틱만 들고 동봉으로 한다.

집현산 동봉 갈림길에 있는 집현산 등산 안내도

집현산 동봉(539m:10:55)

옛 고려시대의 한 선비가 집현면을 지나다가 산세가 험하고 웅장한 산세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내 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요상한 산세를 본 일이 일찍이 없으며

 용이 승천한 것이 틀림이 없다고 혼잣말로 지껄이며 지나가는데 마침 이곳은 가뭄과

 수해 등으로 백성들은 찌들어 죽을 지경에 놓여 있던 차에 어린 꼬마가 선비가

 지껄이는 말을 엿 듣고는 선비를 붙잡고 이 지역의 우환이 왜 이런지 가르쳐 달라고

통사정했으나 뿌리치며 이 지역의 백성들이 죄를 범하여 지금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가뭄과 수해 등으로 농사는 안 되고 주민들은 병들어 그 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계속적인 재난으로 고생을 하고 있던 차에 선비가 지나가던 시절의 어린 꼬마가 청년이 되어,

그 선비가 말한 것을 회상하면서 손뼉을 치고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읽으면서 바쁜 걸음으로

 집현산으로 입산하였다. 청년은 집현산 구석구석을 헤매다가 큰 바위 옆에서 그 때 그 선비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빌며 선비에게

 본 면의 우환을 풀어주도록 울면서 호소하였다.

한동안을 계속 빌고 나니 밤이 되어 선비와 함께 바위 옆에서 잠자리도 같이 하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계속 애걸하니 마침 선비가 입을 열어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인즉 내가 바로 승천한 용인데 한가지의 미비한 점이 있어 이승으로 하강하여

도를 닦고 있다고 말하자 청년은 계속 다그쳐 물었다. 그러자 선비는 승천 시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이 지역의 주민들이 나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승천하는

용을 보라고 고함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이승에서 고생을 하고 주민들은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우측 산봉우리로 올라가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고서는 굉장한 번개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청년은 맥이 빠진 채 집으로 돌아와 주민들을 모아 놓고 집현산 우측 꼭대기에서 일어난 일을

소상하게 이야기하고 매일 등산하여 천지 신에게 빌었다. 하루하루의 세월이 흘려 100일이란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 청년도 지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은 그 청년의 애절한

 심정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뜻에서 계속 집현산에서 빌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번개가 치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나기가 대지를 적시자마자 병들은 농작물은 일시에 소생하고 병들은

주민은 회생하여 평온한 온기를 되찾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으며, 지금도 마을 주민의

 우환이나 걱정거리가 생기면 집현산 정상 소나무 밑에서 비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집현산 동봉 정상에는 돌담으로 빙 둘러 처져있고 그 안에는 조그만 불상이 가득하다.

이건 사찰에서 한 형태는 아니고 아마 이 지역의 무속인들이 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그 옆에 커다란 소나무 둘레에도 누군가 소원을 빌었던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돌담안에는 집현산 동봉과 장군봉이란 표시석이 나란히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구경을 하고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간다.

집현산에 있는 구조목 표시목

집현산 동봉 임도에서 바라본 집현산 부봉(진주 집현산의 모습)

방화선 임도같은 길을 따라 내려가니 산청군 생비량면의 금광과

현동으로 내려가는 도로가 나오고 다시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는데

배가 고파오고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하며 허리가 끊어질듯 아파오기 시작한다.

다시 오르막을 오르니 앞서가던 동료산꾼 잰틀맨님이 지친 모습으로

쉬고있다. 여기서 동료산꾼들과 두유 한개와 쑥떡으로 허기를 면하고

멋진 소나무 아래서 10분정도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부봉 헬기장(11:30)

참으로 곱기도 하다.

집현산 부봉 오르기 직전에 좌측으로 응석사 가는 갈림길이 나타나고

이동통신 중계탑이 나타나고 잠시후에 부봉에 오른다.

산 정상에는 온 사방이 시원하게 보이는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집현산 부봉에 오른다. 산 정상의 날씨는 상당히 덥다.

정상에 올라서니 진주시 집현면에 파견된 산불감시 요원 아저씨가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어서 ‘어서 오이소’하고 반갑게 산꾼을 맞이한다.

그리고는 시원하게 조망되는 주변의 산능선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신다.

진현산 부봉은 진주 사람들은 진주 집현산으로 부르고 있다. 동봉, 부봉,

집현산으로 지도에 표시되어 있어 약간은 헷갈릴듯 싶다.

 

집현산의 유래는...

집현산(集賢山)은 산(山)의 정상부가 7평 남짓 된다 해서 칠평산으로도 불렸고,

장대산(朝鮮總督府)가 발행한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장단산(將壇山)이라

기록돼 있음)·진등산과 함께 집현을 대표하는 산(山)으로 면민들의 삶의 중심부에 항상 자리하고 있다.

 집현(集賢)이라는 지명이 문헌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조 순조 32년(1832)에 완성된

 경상 도읍지(慶尙道邑誌)의「晋州牧邑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내가 걸어온 능선과 우측의 진주시 미천면과 좌측의 집현면이 보인다.

저 멀리 항상 첫사랑의 설레임처럼 항시 마음에 와닿는 지리산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내가 지나온 의령의 좌굴산과 합천 황매산도 보인다.

집현산 부봉(진주 집현산:572.2m:11:35)

집현면(集賢面)은 집현산(集賢山)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집현산(集賢山)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서도 보이는데, 집현면(集賢面)이 집현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기록은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韓國地名總攬)과 건설부 국립지리원의

한국지명요람(韓國地名要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진주목읍지(晋州牧邑誌)상의 집현산(集賢山)은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또 단성현(丹城縣)에서도 보이는데 덕유산으로부터 왔다'라고 적혀 있다.

(集賢山在州北四十里 亦見丹城縣 來自德裕山) 진양지(晋陽誌)의 산천(山川)란에도 집현산(集賢山)은

높이가 572.2m로 '덕유산(德裕山)의 일맥이 동으로 달려와서 사굴산이 되고, 사굴산의 한가지가

서쪽으로 구으려 이 산이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진주 월아산과 그너머 사천 와룡산과 남해도 보인다.

부봉을 지나니 조경업자들이 침을 흘릴정도의 자그맣고 이쁜 소나무들이 많다.

우측 너덜길을 바라보면서 오르막을 치고 오르다 다시 내림길을

내려가니 오봉 삼거리가 나타난다. 허리가 끊어지는 느낌이다.

오봉 삼거리(11:45)

원숭이 나무에 떨어지다. 9정맥중에 5정맥을 나홀로 한 범여가

알바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하였는데 허리가 너무 아픈 나머지

지도를 확인도  않고 이곳을 집현산 갈림봉으로 착각을 하고 베낭을

등로옆 바위뒤에 숨겨놓고 스틱만 가지고 편한 걸음으로 집현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1.2km를 걸어가니 선두에 가던 동료 산꾼들이 왜 베낭을 어쨌냐고

 하면서 의아하게 생각을 한다. 얼른 지도를 펴니 이곳이 집현산 갈림길이다.

 

아! 이걸 어쩌나 1.2km이니 왕복으로 2.4km를 더 걸어야 하다니 갑자기

다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이왕온 것 집현산 정상에 갔다가 다시 베낭을

찾으러 오봉 삼거리로 향한다. 도착하여 베낭에서 초콜렛 1개와 음료수를

마시고 왔던 길을 다시 간다. 어제부터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제는 예식장에 갔다가 핸드폰을 식당에 놓고와서 퀵서비스를 시켜서

가져왔고 오늘은 새벽에 네비게이션을 켜놓고 버스에 두고오질 않나...

치매현상인지, 나 원참 아직은 그럴 나이는 아닌데... 뭣에 홀린 느낌이다.

뭇 남성을 유혹하는 얼레지꽃

슬픔이란 꽃말을 가진 얼레지가 집현산 가는 구간에 두 군데나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얼마나 범여의 맘을 설레게 했던가. 샤워를 마치고 촉촉한 물길을 머금은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생기 넘치는 꽃

성숙한 여인의 탄력있는 가슴을 한껏 뒤로 져끼어 활처럼 뒤집어서는 본능적 생동감으로

온종일 춤을 추고 있는 바람기 많은 꽃.

땅만 보고 있는 척 하면서도 지나는 이의 눈을 곁눈질로 맞추어 붙들어 놓고는 온 마음을

송두리째 빨아가는 악랄한 꽃. 살랑거리는 봄바람의 리듬에 맞쳐 온몸을 풀어 헤쳐 혼란한

유혹의 춤을 추는 꽃. 그 장단에 안 넘어가는 사내가 있을까 

방금 감은 듯한 촉촉한 머릿결을 뒤로 넘기면서 눈웃음을 치는 듯한 당신의 분홍빛 유혹에

 과연 몇명의 사내들이 살아 돌아 올 수 있단 말인가.

무너미재(11:53)

오봉 삼거리에 급한 내림길을 내려오니 주위에 얼레지가 홀로가는

산꾼을 유혹하고 있는데 마음이 바빠서 눈길조차 줄 시간도 없다.

진주시 명석면과 산청군 생비량면을 연결하는 고개로 이정표도 뚜렸하다.

호남정맥 주월산쪽에서 만난 무너미재와 명칭이 같은 걸로봐서 아마

이곳도 예전에 바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무너미재란 물넘이재란

뜻으로 물이 넘어 온다고 해서 그 뜻을 붙였다고 하니 거기와 비슷한 걸까.

무너미재를 넘으니 진주시 집현면에서 좌측은 진주시 명석면(鳴石面)으로 접어들고

우측은 산청군 생비량면을 맞이한다. 이곳은 산청 집현산인 탓에 생비량면 관련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생비량면의 유래를 보면... 

 

옛날 생비량 어느산 중턱에 절이 하나 있었다. 그 절의 비량이란 스님이
덕망이 있어 신도들이 많이 따랐으며 주민 교화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으므로 도승(道僧)으로 일컬어졌다. 때가 되어 돌아가실 지경에 이르자
주민들은 “스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고 통곡을
하였다. 그러나 결국 비량 스님은 입적하고 말았으며 스님의 입적을 애석히 여기고
이를 그리워한 나머지, 스님은 비록 돌아가셨지만 영혼은 우리 곁에 살아 있을 것이란
믿음과 염원으로 ‘비량(比良)’스님의 이름자 앞에 생(生)자를 붙여 지명을 생비량(生比良)
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비량 스님께서 “내가 죽은 후에 지명을 생비량이라고 부르면

 나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란 유언을 함에 다라 주민들이 그에 따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무너미재에서 집현산 갈림길 가는길은 다리는 천근만근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고... 참으로 미치겠다.

뭣이 아쉬어 이짓거리를 해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거기다가 2번을 이 길을 걸어야하니 너무나 맥이 풀린다.

집현산 갈림봉(12:10)

집현산(集賢山:577m :12:30)

진주시와 산청군의 경계를 이루고, 진주시의 명석면, 집현면, 미천면,

산청군의 생비량면, 신안면을 품고 있는 산이다.

 집현산은 예전에 정상이 七坪이라고 하여 칠평산으로 불리었으며,

 봉우리가 일곱이라고 칠봉산 혹은 칠성산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集賢山群 7봉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로 행정구역상 산청군 생비량면에

있어서 자존심 강한 진주 사람들은 진주시 집현면에 있는 부봉을 진주

집현산으로 부른다. 이곳 정상에는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고 데크목으로

전망대를 설치해놨지만 이곳은 주위에 나무가 울창하여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집현산 삼각점

집현산 갈림봉으로 되돌아와서 동료 산꾼들은 다

가버리고 나홀로 호젓한 산행을 시작한다.

호조참판을 지낸 묘비석도 지나고...

집현산 갈림길에서 청현재까지 짧은 구간에 고도를 300이상을

낮추다보니 엄청나게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그러나 산청군에서

로프를 설치해 놨어 내려오기는 편하다.

저 멀리 지나온 합천 황매산과 합천군 대병면의 3산인

허굴산, 약견산, 금성산이 아련히 보인다.

청현재가 가까워지니 그앞에 산꾼들의 기를 죽이는 엄청나게

커다란 송전탑이 나타나고 좌측 아래는 보국충석(輔國忠石)이

있는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 마을이 나무사이로 보인다.

 

 고종 18년에 몽고가 침략한다는 원나라의 통첩이 있은 후 나라에서는 각 고을에

성지(城池)를 수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명을 받은 백성들은 성을 쌓기 위해 힘든 노동을 계속 했다.

그래서 집현산의 자웅괴석(雌雄怪石)이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고자 진주성을 쌓는데 참여하려고

스스로 굴러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가는 도중 구복골에서 광제사(廣濟寺)를 찾아가던 한 도승을 만났다.

돌이 굴러가는 모습을 본 도승은 하도 신기하여 큰 소리로 돌에게 물었다.
“두 자웅석은 어디로 그렇게 급히 굴러가는가?”
그러자 돌은 진주성을 쌓으러 가는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백성들이 성을 다 쌓은 후였다.

그래서 도승은 이 사실을 굴러가던 두 자웅석에게 알려주었다. 성을 다 쌓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돌이

 그 자리에 멈추고, 백성을 돕지 못한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크게 울었다고 한다.

이 전설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돌의 모양이 둥근 것을 보면 전설에서처럼 굴러서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 바위는 성기바위가 분명한데도, 마을에서는 보국충석(輔國忠石)이라 부르고 있다.

성기라는 명칭을 부끄러워하는 시대를 살아오면서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굴러 가던 돌이

안타까워했다는 전설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웅석에는 해마다 음력 3월 3일이면 명석면에서 준비하는 제를 지내고 있다.

이는 돌을 옮겨온 이후에 생긴 것이고, 본래 동전마을에서 행했던 자웅석에 대한 마을 제의는

정월 보름에 산신제(혹은 범제), 동신제와 함께 이루어졌다.
산신은 동전마을에서 최고의 신으로, 마을 뒤편의 광제산에서 제의가 이루어진다.

 먼저 제의를 지내는 보름날로부터 일주일 전, 제관을 선정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생기복덕이 맞고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한다. 이 때 ‘지리산-지평산-강제산’에 올리는

합동 제의를 주관하는 또 다른 제관 3명도 뽑는다. 선출된 제관들은 3일 전부터 근신 기간에

들어가며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금줄을 치고 주변에 황토를 뿌린다.

 

 

제를 지내는 보름날 새벽, 첫닭이 울면 제관이 쌀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서 밥을 한다.

 이 밥과 함께 조미료를 넣지 않은 나물을 산신에게 바친다.

그리고 절을 한 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그리고 마을 개인의 소원성취도 함께 빌어준다.

산신제는 매우 엄격한 제의로써 마을 사람들 중에서 오직 제관만 참석할 수 있다.


강제산의 중턱에는 지리산-지평산-강제산의 산신에게 합동으로 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다.

산신제를 마친 뒤 제관들은 마을로 내려오든 도중 이곳에 들른다. 그리고 합동 제의를 담당하는

제관 3명이 밥상 3개를 들고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산으로 올라온다. 이 두 제관이 만나서 지

리산-지평산-강제산의 신들에게 1년 12달 마을의 태평과 풍요, 자식의 안전 등을 기원한다.

그리고 3년마다 돼지 머리나 명태 머리를 묻어 둔다. 마을 사람들은 제의를 지낸 역사가

300년에서 500년은 된다고 믿고 있다. 제를 마치면 역시 꽹과리와 징을 치며 마을로 내려온다.
제관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마을에 있는 정자나무에서도 제를 지내는데, 이를 ‘동신제’라고 한다.

동신제를 주관하는 제관은 1명으로 산신제 제관을 뽑을 때 함께 뽑는다. 동신제 때에도 마을의

 안녕과 개인의 소원 성취를 소망한다. 이때는 풍물놀이도 하면서 음식도 나누어 먹고 흥겹게

 지내는데,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할 수 있다.
동신제가 끝나고 오후 2~3시경이 되면 이장과 마을의 유지들이 음식을 차려 자웅석(울돌)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제물은 밥 1공기ㆍ나물ㆍ탕ㆍ과일 등인데, 어물(魚物)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제관들이 자웅석 앞에

제물을 진설하고 두 번 절을 한 뒤 소원을 빌며 소지를 올린다.
이처럼 정월 보름에 행해지는 동전마을의 제의는 ‘산신제-합동산신제-동신제-울돌제사’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이들 제의를 통해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한다. 즉 자웅석에 대한 울돌제사는 정월 보름에

동전마을 주민들이 중심이 된 마을 제의였던 것이다. 또한 자웅석에 대한 제의는 마을 전체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찾아 제의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부녀자들이 찾아와서 바위에

 붉은 고추나 숯을 꽂은 기우(금줄)를 치고 미역과 홍초를 차려 공을 들인다.

이렇게 하면 자웅석이 아이를 점지해 준다고 믿었다. 이는 자웅석이 기자신앙(祈子信仰)의

 대상물로써 성석(性石)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현재의 울돌제사는 명석면 면장이 제관으로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마을 사람들의 신앙물이었던 자웅석(울돌)은 보국충석의 의미가 담긴 명석면 전체의 신앙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서로 떨어져 있던 자웅석을 하나로 모으고 그곳에 전각을 세워 해마다 제를 지내게 된 것이다.

이들이 제를 지내는 까닭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보국충석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처럼 동전마을의 자웅석은 전설과 융합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이는 제의의 모습이

마을 중심의 제의에서 면 전체의 제의로 변화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울돌제사의 변화된

 모습은 사람들이 기원하는 내용도 변화시켰다. 그래서 아이를 낳게 하거나 마을의 풍요를 기원했던

 마을 제의에서 바위의 충성을 보답하는 제의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전국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변화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 이 바위를 신성한 바위로 여기고 숭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료출처 : 중앙대 민속학과 김종대 교수

자료출처 : 중앙대 민속학과 김종대

오늘의 날머리 부근이 청현재위 송전탑에서 바라본 산청 생비량면의 모습

그 뒤로 우람한 모습을 보이는 산이 합천의 진산인 황매산이다.

오늘의 날머리인 집현산 끝자락인 청현재에 도착한다.

오늘 산행의 최고 백미인 집현산은 임진왜란과 동학혁명의 아픔을

많이 간직한 산이다. 집현산 끝자락인 이곳 청현재(청고개)는  임진왜란

당시인 임진년(1592년) 10월 9일 김준민 장군이 이끄는 500여명의 군사가

진주성을 구하기 위하여  진군하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렀다.

500여 군사가  이동하다가보니 뜻밖에 이곳 산청군 지역이 청현, 오동, 정태

단성일대의 왜적들이  마을마다 약탈질을 하는데 불을질러 연기가 하늘에

닿을정도이다.  이에 김준민 장군은 군사들을 이끌고 왜적들을 휩쓸었다.

 

또한 군관 윤경남 등이 장수가 적진에서군군분투하고 있음을 외치면서

뛰어드니 500여 군사가 일시에 함성을 지르고 내달아 돌진했다.

왜적들이 죽림속을 빠져나가 달아나다가  강을 건너서 대항하기 이르렀는데

우리 군사와 강을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이니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고 포성이

진동하였다.  때마침 승군 의병장 신열이 승병을 이끌고 합세하여 사기가

충천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왜적들이 퇴각하여 청고개를 넘어서면서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어서 김준길 장군이 단성쪽으로 향하여 거기서

약탈하는 왜적을 격퇴하고 창고에서 불타고 있는 곡식을 구했는데 자그마치

6,000여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단성의 적지골의 유래는 그때 생겨났다고 한다.

청현재(12:48)

 경남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에서 산청군 신안면 청현리를 잇는

1006번 지방도인데 비포장 임도이다.

월명암-청현재의 트랙

청현재에서 우측으로 약 2km정도를 걸어가야만 버스가 기다린다.

다들 아무도 보이질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까봐 걱정이다.

부지런히 걷는데 허리통증은 더 심해지고 발바닥이 아파온다.

호젓한 오솔길을 걸어가니...

조그만 저수지가 나타나고...

경남축산 시험장 후문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경남 축산시험장 앞(13:05)

시험장 앞에 먼저온 동료 산꾼들이 기다리다 꼴찌로 온 범여를

개선장군처럼 환영하며 반긴다. 장비를 정리하고 버스에서 올라

이곳에서 30여분 떨어진 산청군 신안면소재지로 옮겨서 경호강가에

있는 식당에서 아구찜으로 식사를 마치고 식당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은 다음에 주위 꽃구경을 한 다음에 서울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신안면쪽에서 바라본 경호강과 단성면소재지

이곳에서 보이는 우측 저 다리로 가면 합천 삼가와 쌍백이

나오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범여의 고향인 의령군 부림면이 나온다.

 

이곳 단성은 지리산 중산리가는 초입이고 조금 더가면 이곳 출신인

목화를 중국에서 몰래 가져와 한국의 의생활에 일대 변화를 준 문익점의

생가가 나오고 좌측에는 대한민국 불교계의 가장 큰 어른이셨던 

퇴옹당 성철 큰스님의 생가가 있는 묵곡리도 이곳 단성면이다.

조금 더 가면 시천면에 있는 남명 조식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산천재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