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2년 8월 26일(무박산행)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약간 더운 정도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30여km / 13시간 50분 소요
☞산행코스: 성삼재-성삼재 대피소-노고단 갈림길-노고단(왕복)-돼지령-임걸령-노루목-반야봉
삼도봉-화개재-토끼봉-연하천-형제봉-벽소령-덕평봉-선비샘-망바위-칠선봉-영신봉
세석산장 갈림길-한신계곡(오층폭포, 가네소 폭포)-백무동
☞소 재 재: 전남 구례군 토지면 / 전북 남원시 산동면, 산내면
경남 하동군 화개면 / 산청군 시천면 / 함양군 마천면
지난 3년 7개월만에 1대간 9정맥을 끝내고 기맥, 지맥산행 등 목적산행에 매몰되어
돌아 다닌지가 어언 4여년... 어느정도 산을 탈만큼 탔건만, 아직도 산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 원래는 원래 나홀로 금북기맥 2구간을 가기 위해서 토요일(25일 오후)
부여가는 막차를 타고가서 찜질방에서 자고 지티고개에서 놋점이고개 한구간을
끝내고 충남 서천군 판고역에서 장항선 열차타고 오려고 했는데, 어영부영하다가
버스표를 끊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갈데가 없어 2년전에 낙동정맥을 같이한
산악회에서 백두대간 지리산 구간을 하기에 지리산 산행을 신청한다.
낙동정맥길에서 10개월 동안 산에서 情이 든 방초님과의 오랫만에 같이
산행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서...
2년만에 이 산악회를 와보니 멤버들이 상당히 많이 바뀌어 이방인같은 느낌이다.
쑥 영감을 비롯한 아시는 분들과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오른다.
안성 휴게소에 들려서 전체 멤버들이 몰려서 막걸리 한 잔을 하고 지리산을 향한다.
이 산악회는 여느 대간, 정맥 산악회와는 좀 다른 느낌이다.
일반적으로 목적 산행을 하는 산악회는 굉장히 타이트하고 산행도 상당히
빡세고 산행 속도가 엄청 빠른데 이곳에 오면 일반산행을 온 것처럼 착각이 든다.
모든 사람들이 牛步 걸음이다. 서울 도착시간이 늦다는 단점도 있지만
마음의 여유와 情이 많은 장점도 있다. 버스는 전주-순천간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지리산 뱀사골 계곡과 달궁 게곡을 오르면서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03시 20분 지리산 성삼재에 도착하여 산행을 준비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성삼재에서 바라본 구례읍내의 야경(03:30)
난 이상한 버릇이 있다. 산을 다닐 땐 기록장치인 카메라를 2대를 갖고 다닌다.
버스가 성삼재에 도착하여 장비점검을 하는데 카메라 2대중 똑닥이는 정상인데
하이엔드 카메라 렌즈에 에러가 생긴다. 참으로 난감하다.
10여분을 작동하는데 되지않아 하는 수 없이 차에 내평개치고 똑닥이만 챙겨서
산행을 시작한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산행하기는
최적의 날씨라 지리산의 멋진 仙景을 몇 카트 건지나 했는데 카메라가 속을 썩이니...
03시 35분에 산행을 시작하여 노고단으로 향한다.
성삼재(性三峙) 주차장(03;30)
먼 옛날 마한땅의 어느왕이 진한의 난리를 피해 지리산골짜기에 숨어들어 달의 궁전을 짓고 산기슭에 도성을 쌓았다.
그뒤에각 능선마다 장수를 파견해 지키게 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달궁둘레에 있는 정령치, 황령치,팔랑치,
성삼재라는곳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종주를 시작하는곳으로 유명한 성삼재는
성이 다른 3명의 장수가 방어했던 곳이라 해서 성삼재라고 불리는곳이다.
성삼재는 오늘은 깊은 밤에 빠져있다. 올 때마다 산꾼들도 북적거려 돗대기 시장같은
분위기는 전혀없고 등산객이라곤 우리밖에 보이질 않는다.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하고 음력7월 초아흐레넷날의 달빛만이 한가로운 모습이다.
약간의 차가운 느낌이 들 정도로 차가운 날씨는 산행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이다.
성삼재 탐방 안내소를 통과하면서 빠르게 산행이 시작된다.
성삼재에서 고속도로 같은 길을 진행하다가 데크목으로 만든 샛길로 올라선다.
기맥, 지맥을 타는 범여로선 상당히 어색한 느낌이다.
길이없는 길을 만들어서 걸어야 하는 산꾼으로선 너무 호사스런 길이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오랫만에 40명이 넘는 인원과 걷는것도 어색하고...
샛길로 올라서니 노고단 대피소가 나타난다. 1년만에 와 보는데도 늘 반가운 곳이다.
노고단 대피소(04:00)
대피소에 목각 인형으로 된 마고할미가 오랫만에 찾은 산꾼을 반긴다.
대피소 안에는 이곳에서 비박을 한듯한 산꾼들이 산행을 하기위해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린 노고단 길림길을 향한다.
노고단 갈림길(04:10)
노고단 갈림길에 도착하니 성삼재에서 맑은 하늘은 온데간데
없고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 이곳에서 물 한모금 마신후에 베낭을
벗어놓고 노고단 정상으로 향한다. 오늘 무사산행을 위해서 노고할미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서 올라가는데 마치 한라산 정상 백록담을 걷는 느낌이다.
정상까지 데크목으로 아주 잘 해놨건만 곳곳에 국공파들이 붙인 출입금지
간판이 즐비하다. 하긴 그 자들이 할 수 있는게 뭐있남.
국민의 녹을 먹고 사는 자들이 하는 짓걸이라곤 하지마라, 벌금 매긴다. 등등
자기들 봉급주는 국민이 甲인데 늘 자기들이 수퍼 甲 행세를 하고 있으니...
主客이 전도되도 유분수지, 그렇다고 안가나... 이 바부들아.
老姑壇(1507m: 04:10)
전북 남원군 산동면과 전남 구레군 토지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과 더불어 지리산 3대 봉우리의 하나이다,
지리산 신령인 산신할머니(老姑)를 모시는 곳(壇)이라 하여 노고단이라 이름 붙였다 한다.
신라시대에는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가을에 이 곳에서
제사를 올렸고, 신라 화랑들이 이 곳을 수련장으로 삼기도 했다.
이 제사터는 원래 천왕봉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노고단이란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서 서양에서 온 기독교 선교사들의 별장터였던
노고단은 6.25 당시에 빨치산 소탕 작전때에 불타버려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이곳 노고단은 지리 10경의 하나인 운해(雲海)가 단연 유명한 곳이다.
노고단의 구름바다는 지리산 남쪽 자락을 휘감고 도는 섬진강의 습한 기온 때문에 다른 곳보다 빈도가 높다.
노고단 주변이 고요한 구름바다에 잠길때면 봉두산과 조계산 등 남녁의 산들은 마치 섬처럼 솟아
다도해 같은 선경을 연출한다 하는데 이른 새벽이라 달밤에 체조하듯 둘러보곤 갈길이
바쁜 산꾼이라 서둘러 길을 떠난다. 다시 노고단 갈림길로 오니 후미팀들은 노고단에
들리지도 않고 가는 바람에 다시 속력을 붙이면서 돼지령으로 향한다
노고단 돌탑의 유래
노고단은 신라의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련을 하면서 탑(塔)과 단(壇)을
설치하고 천지신명과 노고할미에게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시 화랑들이 쌓은 탑과 단은 1,0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초석으로 짐작되는 몇개의 큰 돌만이 남아 있었으나 지난
1961년 7월에 갱정유도(更定儒道:1928년 창교된 민족종교) 72인이 다시
축조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조성하여 보전되고 있다.
돼지평전(05:20)
이곳은 멧돼지가 종종 출몰하기때문에 '돼지평전'이라고 불리는데
실제로 이곳에는 멧돼지가좋아하는 원추리 뿌리며 둥글레뿌리가 많다고한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등산로에 "멧돼지 출몰 조심" 이라는 안내판도서있다.
아직도 짙은 어둠이 걷히질 않고 여기의 등로가 나무 숲사이로 진행되다가 보니까
어둠이 더 짙게 깔리는 느낌이다. 매주 무박을 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해가
1주일 사이에도 많이 짧아진 느낌이다. 처서가 지나고 나니 가을 느낌도 나고...
참으로 우리 조상들이 만든 절기는 정말 기가 막힐정도로 잘 맞는다.
피아골 삼거리(05:30)
전남 구례군 토지면으로 이어지는 피아골 삼거리가 나온다.
임진왜란•조선말 격동기•여순반란사건•6•25 등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지리산의단풍 산행코스로 유명한 피아골은 6.25 전쟁때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로 피로 물들은
계곡이라해서 피아골로 불린다고 알려져있으나 피아골이란 지명은 이곳에 피밭(직전,稷田)이 많아 붙은이름이다.
오곡중 하나인 피를 많이심었던 골짜기라, 즉 피밭골에서 유래되었다 하는데
이 골짜기는 해방이후 6.25전후까지 동족상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계곡이기도 하다. 왠지 가슴이 찡한 느낌이다.
이중환 택리지에서 '산속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많고 바깥쪽은 좁고 안쪽은 넓어
이따금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지리산을 이야기 하였던만큼, 크고 작은
산줄기들이 험하게 내려앉은 지리산은 비극적인 역사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지리산만큼 질곡한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한 산도 드물다.
멀리는 임진왜란 의병에서부터 한말 의병활동, 가까이는 한국전쟁(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은 피아간의 밀고 밀리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석주관성을 지키기 위한 섬진강변 사람들의 피어린 전투는 지금까지도
구례군민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석주관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는 관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천혜의 곡창 지대인 호남을 점령하기 위해 물밀듯 쳐들어 오는
일본군을 섬진강변 사람들이 석주관성에서 막아냈다.
해방 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지리산은 격렬한 싸움의 현장으로 전쟁통에 숨어들어온
빨치산이나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을 토벌하던 군경들과의 치열한 격전지였다.
지리산의 울창한 숲과 깎아세운 듯한 절벽들이 더할 수 없는 은신처였기에, 그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임걸령(林傑嶺:1320m:05:35)
조선 시대 선조(14대)때에 좀도둑이었던 임걸련(林傑年)은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의 활동무대는 반야봉 일대였다고 한다.
그는 화개장터에서 넘어오는 보부상을 털거나 인근 사찰을 털었는데
연려실기술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참 강성했을 때는 지리산에 있는
모든 사찰을 다 털었다고 한다.
이 고개가 그가 활동했던 장소라고 해서 임걸령이라고 한다.
임걸령에 도착하니 노고단에서 놓쳤던 동료 산꾼들은 만난다.
이제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주위의 사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오랫만에 이 산악회를 왔는데 예전에 낙동정맥을 같이 탔던 역전의
용사들은 보이질 않고 새 인물로 채워져 있다. 특이한 건 백두대간을
하는데도 타 산악회와는 달리 긴장감이 전혀 보이질 않고 그야말로
여유만만.하다. 그리고 젊은 여인이 많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10분 정도의 휴식을 취하면서 芳草님이 따라주는 막걸리
한 잔에 간식을 먹은 다음에 다시 노루목으로 향한다.
노루목 삼거리(1498m:06:10)
노루목이란 이곳의 지형이 노루의 목을 닮았다해서 붙은 지명인데 항간에는
노루가 다니던 길이라는 뜻에서 붙었다한다. 또다른 일설은 노루목 앞에 있는
바위의 모양새가 노루가 목을 치켜들고 있는 형상이라 노루목이라고 부른다.
선두팀들이 반야봉으로 향한다. 반야봉은 지리산 주능선에서 1km정도 떨어져
있는 관계로 일부러 가기에는 그리 쉽지않는 봉우리이다.
나 역시 이런 찬스는 절대로 놓치지 않기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반야봉으로 향한다.
노루목 삼거리에서 반야봉쪽으로 200여m 진행을 하니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두고 스틱만 가진 채 반야봉으로 올라간다.
주위에 짙은 안개가 가득하다. 그리고 상당히 고도를 높혀간다.
지리산 특유의 돌길과 철게단을 치고 오른다. 주위에는 야생화가 지천이다.
마치 야생화 천국에 온 느낌이다. 멋진 고사목도 보이고...
수줍게 피어있는 동자꽃
슬픈 아픔을 간직한 동자꽃이 이곳 반야봉 정상 주위에는 많이 보인다
반야봉(般若峰:1732m:06:40)
반야봉은 지리산 八景의하나인 반야낙조(般若落照)로 유명한산이다
지리산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아기엉덩이 처럼 보이기때문에
"아기궁뎅이처럼 보이는 산이 반야봉이야"라는 말이 유행할정도로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럽다
이런 반야봉은 사실 남성을 상징하는 산이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의 프라냐(prajna)를 음역한것으로 불교경전의
반야경(般若經)에 의해 알려진 명칭이다. 반야의뜻은 '절대변하지않는 완전한 지혜'를 의미하므로
지리산에서 지혜를얻는다"라는 말은 반야봉에서 유래된 것이라 추정할수있다.
전설에 따르면 천왕봉의 마고할매가 반야도사를 만나 혼례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야는 훗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며
서쪽으로 떠난 뒤 영영 돌아오지 않고 불도를 닦았다.
그 후 그가 도를 닦았던 산은 반야봉이라 불리면서 남성미를 상징하는산이 되었지만,
생김새가 한없이 부드러워 여성성도 가지고 있는 산으로 알려졌다.
지리산에는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제석봉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불교와 관련된
지명만으로 나열하면 반야봉을 제일 꼭대기에 있는 봉우리라 해석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완봉이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반야봉을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 말한다.
반야봉보다 높은 제석봉, 중봉, 하봉을 제쳐두고 반야봉을 천왕봉 다음의 제2봉으로
치는 것도 반야봉에는 불교적인 관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반야봉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반야봉 정상에는 우리 일행말고도 부산에서 온 팀들도 보인다.
그러나 주위의 짙은 안개가 반야봉의 仙景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하긴 지리산 진면목을 보려면 3대가 福을 쌓아야 한다고 했거늘
나처럼 제대로 복을 쌓지 않고 무임승차로 지리산의 선경을 감상할 순 없겠지.
반야봉의 또다른 자랑거리는 지리산만의 풍요로움과 고고함과 풍겨주는 반야봉 주변의
구상나무, 분비나무, 신갈나무 등 원수림 수해(樹海) 이다. 겨울철 삼도봉이나 돼지평전에서
하얀 눈을 흠뻑 뒤집어 쓴 설산 반야봉의 모습을 보면 때론 두려움이 느껴지곤 하는 곳이다.
반야봉에서 얼음골 내려가는 길목
반야봉은 대부분의 봉우리가 지리주릉에 있는 것과 달리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노고단 방향에서는 노루목에서 곧바로 오르면 되고, 반대 방향인 삼도봉에서는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오르면 된다.
반야봉을 중심으로 등산로는 여러 곳 있었는데, 주릉코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출입통제 구간이다.
달궁 쟁기소에서 시작하는 8km의 길은 원시림에 파묻힌 부드러운 길이고,
심원마을에서 시작하는 9km의 길은 노고단 방면으로 펼쳐지는 부챗살 모양의 전망이 일품이고,
반선마을에서 심마니능선을 경유하는 코스는 지리주릉, 서북능선, 삼정능선이 모두 조망된다.
이 외에도 심원마을에서 대소골, 반선마을에서 뱀사골-이끼폭포를 경유해서 올라오는 코스도
있는데 이 코스 또한 통제 되었다.
옅은 안개로 반야봉의 선경은 볼 수가 없다.
반야봉에서 10분 정도를 머문 다음에 다시 베낭이 있는 곳으로 원위치한다.
지리산은 벌써 가을준비가 한창이다.
반야봉 주위에는 쑥부쟁이가 지천으로 피어있고...
마타리도 자기를 함 봐달라고 사정을 하네.
그래 니 이쁜 모습은 어찌 내가 봐주지 않으리.
이곳 지리산 반야봉 일대도 전남 광양 백운산과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 학습림인 모양이다. 부디 잘 관리하시길...
멋진 구상나무도 많이 보이고...
반야봉 하산길에서 바라본 피아골의 모습
안개가 걷혔다 가리다를 반복하는게 마치 고려시대 개성의 뭇남성을
웃고 울리게 했던 보일락말락 하는 황진이의 치마폭같다. 몇년전에 가서 봤던
백두산 천지처럼 올만에 반야봉을 찿은 산꾼 범여를 애타게 한다.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서 좌측 천왕봉가는 길로 해서 삼도봉으로 향한다.
지나온 반야봉의 모습
삼도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불무장등봉
구례의 피아골과 하동 칠불암 안의 목통골의 경계를 가르는 불무장등은
그야말로 백미로 보인다. 반야봉에서 보는 안타까움은 어디로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지리산의 아흔아홉골의 골짜기가 한 눈에 보이니 가슴이 띄기 시작한다.
삼도봉(三道峰:1499m:07:20)
전남 구례와 전북 남원, 경남 하동의 경계면이 만나는 곳이라 해서 삼도봉이라 불린다.
원래 삼도봉은 이곳 모양이 불무장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낫의 날' 같다하여
낫날봉 이라 불리다가 "닐리리 맘보'를 연상시키는 "날라리봉"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삼도의 경계면에 있다하여 '삼도봉으로 명명되었다.
이 삼도봉 정상에는 석재가 아닌 강철제질의 구조물로 세워져있다.
지리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산!
지리산은 1967년 12월 국내최초의국립공원으로지정 전북과 전남, 경남 등의
5개 시,군, 15개읍. 면에,속하는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지리산의 총면적은 약472㎢이고 이는 계룡산 국립공원의 7배,
제주도 면적의4/1이자 서울시 면적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이다
지리산(智異山)의 명칭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라는 뜻에서 유래된것으로
이는 수많은 隱者들이 이 산에 숨어 도를 닦으며 정진 해왔음을 말해준다.
지리산은 옛날에 지리 또는 두류산이라고도 하였고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으로 불리었으며,
신라시대에는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팔공산을 오악이라 하였는 데 그 오악 중 지리산은 남악이라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자(1967년), 최대면적의 육상공원(14억 5천 6백만평)으로서 우리나라
산악의 대표성과 상징성 그리고 역사성을 고루 갖춰 흔히 민족의 영산으로 불릴만큼 우리의 정서속에
깊이 새겨진 자연유산인 지리산(智異山)은 산이 넓은 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두류(頭流),
방장(方丈), 지리(地理또는地利), 불복(不伏),반역(反逆), 적구산(赤拘山)으로 불려온 산 이름에서 벌써
지리산의 속내와 아픔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산맥이 지리산에서 멈추었다 해서 두류(頭流)로 한다 라고 썼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산세가 멀리 넓게 둘러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순 우리말 '둘러' '두루' '두리' 에서 음을 따와 한문으로
쓰다보니 '두류'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방장산은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중국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지리산을 지칭하는 이름인 동시에 불교적인 의미로도 쓰이는 산 이름이다. 현재 쓰고 있는 지리산(智異山)은
쌍계사 앞뜰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탑에서 출발한다. 신라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쓴
비문에 '지리산(智異山)'이 나온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지리산(地利山)으로 표기 했다가 『삼국유사』는
다시 '지리산(智異山)'을 썼으며, 조선시대에 편찬한 『고려사』는 '지리산(智異山)'으로 고쳐 썼다.
'지리산(地利山)'은 지리산이 문수도량이라 하여 문수사리(文殊師利)의 글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며,
'불복(不伏)'과 '반역(反逆)'은 태조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찾아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에서만 소지(燒紙)가 오르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유로 태조에 등극한 뒤에 지리산을
불복산, 반역산이라 하고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금강산은 빼어나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되 빼어나지 못하고」라는 서산대사의 비유가 있듯
지리산은 날카롭고 빼어남은 부족하나 웅장하고 두리뭉실한 기운이 돋보인다. 행정구역상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山 208번지에 소재한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이 대표적이며,
천왕봉에서 노고단을 잇는 100리 능선에는 1천 5백미터가 넘는 고봉이 10개, 1천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나
있을 정도로 높고 크다.
평평한 고원지대도 많이 발달해 야생화나 철쭉 등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해발 1915m, 지리영봉의 제1봉인 천왕봉, 아래 로 땅을 누르고 위로는 하늘을찌를듯 우뚝 솟아 찾는 이를 알도록 한다.
거대한 바위를 예로 부터 하늘을 받치는기둥이란 의미를 풀이해 천주라 불렀음인지 서쪽 암벽에 "천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남명 조식선생이 일찍이 "萬古天王峰 天嗚猶不嗚"이라며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 로
지리영봉의 장엄함을 찬탄했듯 그 위용은 아직도 변함없다. 천왕봉은 반야봉과 노고단등 1백10여개의
우뚝 솟은 준 봉을 거느리고 그 아래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연하선경에 울창한 원시림과 골골 마다 용솟음 치듯 흐르는 물보라등
태고의 숨결을 발아래 숨겨둔채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방장산(지리산)의 솔잎이 푸릇푸릇 다함이 없으니
만번 죽어 마땅한 신(臣)이
이것으로 여생을 마치기를 원합니다.
홍의장군 곽재우가 임진왜란 때 억울한 옥살이를
한 후에 관직에 임명되었을 때 사절하면서 남긴 말 中에서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이어지는 주 능선은 25.5km에 이르며 이 산의 둘레는 320km에 달한다.
이 넓은 터에 해발 15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 동쪽의 으뜸은
천왕봉 (1915m)이고 서쪽의 으뜸은 반야봉과(1732m) 노고단(1507m)이다
이 세 봉우리를 지리산의 3대 주봉이라 부른다.
최고봉인 천왕봉(1915m)에서 능선을따라 서쪽으로이동하면 제석봉(1806m),
연하봉(1730m), 촛대봉(1703m), 영신봉(1651m), 칠선봉(1576m), 덕평봉(1522m),
명선봉(1586m), 토끼봉(1534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 만복대(1433m),
고리봉(1304m), 바래봉(1165m)이 있으며 천왕봉의 동쪽에는 중봉(1875m),
하봉(1781m), 써리봉(1640m), 웅석봉(1099m)이있다.
이 가운데 천왕봉에서 노고단사이의 산행을 종주산행이라 말하며,
동쪽 끝의 웅석봉에서 서쪽끝의 바래봉까지의
산행을 지리산 태극종주 산행이라 부른다.
지리산에는 또한 20여개의 긴 계곡들이 있다. 동쪽 천왕봉에는 칠선계곡, 한신계곡,
대원사계곡이있으며 서쪽 반야봉에는 피아골,뱀사골, 심원계곡이있는데
어느하나 빼놓을 수 없는 저마다의 매력으로 넘친다.
지질학적으로 볼 때 이 산은 애초에 넓은 바다로 속했으나 모래등이 퇴적된 뒤
선캄브리아기와 고생대를 거치면서 육지와 호수 바다로 번갈아 바뀌었다가,
중생대에 발생한 거대한 지각변동으로 우리나라 전지역이 육지로 솟았을 때
지리산이 가장 높이 우뚝 솟았다고 한다.
화개재 가는 길에서 만난 물봉선
마치 수줍음을 많이타는 울님처럼 등로가에 다소곳이 피어 있다.
삼도봉에서 화개재로 향한다. 서서히 허기가 지기 시작한다
반야봉을 들리지 않은 동료 산꾼들은 오늘 아침 식사장소인 화개재로 가고
반야봉 들리고 삼도봉에서 지리능선의 仙景에 빠져 활홀경에 취했던 범여는
홀로 화계재로 향한다.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많아서 걷기는 편하다.
20분간 나홀로 걸으면서 지리산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한다.
화계재에 도착하니 벌써 식사를 끝낸 산꾼도 있고 지금 시작하는 이도 있다.
혼자서 가져온 돼지갈비를 구워 안주삼아 션한 곡차 한잔을 하는데
나보다도 늦게 방초님과 온누리님이 오신다. 허기는 지는데 밥맛은 없다.
억지로라도 밥을 먹는다. 30km정도를 걸어야 하는 장거리 산행에는
먹는만큼 걷는다고 했다. 특히 빵보다는 밥을 먹어야 한다.
탄수화물을 섭취해야만 장거리 산행에는 체력을 유지할 수 있기에...
30분간의 식사와 휴식을 취한 후에 후미팀들과 함께 연하천으로 향한다.
화개재(07:40)
화개재는 먼 옛날 하동의 화개장터와 남원의 산내장터 봇짐장수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고갯마루를 말한다.
먼 옛날 산내장터애서 올라온 70대의 소금장수가 이 고개를 넘다
너무힘들어 죽었다는 가슴아픈 전설이서려있다.
지리산 종주 코스중 가장 저지대에 속하는 이 곳 능선안부가 화개재이다.
화개재는 남원군 산내면과 하동군 화개면의 경계에 속하고 뱀사골 정상인데
예로부터 양측 주민과 상인들이 물물교역을 위해 넘나들던 길목이다.
뱀사골계곡 상류에 소금장수가 발을 헛디뎌 빠졌다는 '긴장소'에 얽힌 전설도
있는 걸로 보아 화개장처를 거친 해산물과 소금등이 운봉, 마천, 산내지방의
내륙 특산물과 함께 이 길을 통해 거래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계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반선으로 가는 뱀사골 계곡이 나온다.
뱀사골의 유래
300여 년 전 송림사에서는 해마다 칠월칠석날 법력이 높은 승려 한 사람을 뽑아 선인대에서 불공을 드리게 했다.
매년 열리는 행사를 이상하게 생각한 고승이 그 해에 뽑힌 승려의 옷자락에 독을 묻혀 올려 보냈다.
다음날 선인대에 가보니 이무기가 승려를 삼키지 못하고 죽어 있었다.
송림사에서 해마다 승려 한 명을 이무기의 제물로 바쳤던 것. 그 후 ‘이무기가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골’이라 부르게 됐다.
뱀사골 들머리 마을을 ‘반선(半仙·절반의 신선)’이라 지은 것은 억울하게 죽은 스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다
요룡대에서 이무기가 용이 돼 하늘로 오르다 떨어져 파였다는 탁용소를 지나 금포교까지는 뱀사골에서 가장 수려한 계곡미를 자랑한다. 여기서 뱀이 꿈틀거리는 모양의 뱀소, 바위틈 물길이 병을 닮은 병소, 병풍바위 사이로 물이 흐르는 병풍소, 고승의 영험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재승대, 보부상들이 소금을 지고 넘어오다 빠졌다는 간장소를 거치면 뱀사골 정상인 화개재다.
토끼봉(兎峰:1534m:08:40)
토끼봉이란 명칭은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즉 24방위의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봉
(卯峯)으로 부르는 것이다.
정상이 밋밋한 초원지대와 구상나무, 상록수림 지대로 정연하게 구분되어 있어 마치 인공적
으로 조성한 훌륭한 정원처럼 그 경관이 우아할 뿐 아니라 반야봉의 웅장한 모습이 서쪽에
솟아있고 북쪽은 뱀사골 동남쪽은 화개골의 광활한 지역을 덮고 있는 울창한 수해의 전망이
누구나 잠시 쉬어가기 알맞은 고봉이다. 정상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지보등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토끼봉을 지나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처음 알고 이용하던 샘인 총각샘은
등로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리산악회 노총각 2명이 발견한 샘인데
장터목 산희(山姬)샘이 여성적인 이름이라 해서 노총각 2명이 고심 끝에
총각샘이라 이름 붙였다 하는 샘은 결국 보지못하고 선두팀에게 민페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부지런히 편한 길을 빠른 속도로 걸어간다.
등로에는 살아천년, 죽어천년을 산다는 멋진 고사목도 보이고...
지리산 역사의 중심에 서있는 듯한 노거수도 보이고...
지나온 토끼봉의 모습
산은 뒤돌아 볼 때 아마도 가장 멋진 모습으로 다가오는 듯 하다.
토끼봉을 지나서 연하천 가는 길은 예전에 비해서 등로를 상당히
많이 정리를 해놔서 인위적인 냄새가 많이나긴 하지만 걷기는 상당히 편하다.
오르락 내리락을 계속하는데 지리산의 특성상 돌을 많이 밟다보니
관절에 무리가 초반부터 오는 느낌이다. 여기서부터는 등산객들을 만난다.
아마도 성삼재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다시한번 치고올라 명선봉에
올랐다가 연하천 대피소로 내려간다.
연하천(煙霞泉) 대피소(09:40)
명선봉의 북쪽 가슴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산지대임에도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속에서 흐르고 있다고 하여 연하천(烟霞泉) 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례에 있는 연하반 산악회(현 지리산 산악회)에서 명명한 이름이다.
‘구름속에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라는 뜻을 가진 이름처럼
연하천의 샘물은 사계절 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지역 자체가
고산지대임에도 늪지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항시 물에 흥건히 젖어있다.
연하천 대피소 앞에 걸려있는 文句
너무도 가슴에 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연하천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예전에 지리산 대피소 중에서 유일하게 민간인이 운영하였는데
아마도 지금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모양이다.
물건을 파는 직원이 국공파 직원의 제복이다.
1955년 4월 구례중학교 교사 몇 명이 구례경찰서에서 입산 허가를 받아 6.25이후 최초로 노고단을 등반하였다,
이들은 1955년 5월5일 등반모임인 “연하반”을 결성하여 지리산 등반로 개척에 나서게 된다.
연하반은 1950년대 후반부터 지리산의 숲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63년부터 “지리산 국립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정부요로에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정부에서 지리산을 보호해 달라고 건의하였다, 1976년 마침내
지리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 1호로 지정을 받게되어 그나마 지리산의 자연이 지켜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연하반은 후일 일반이 참여하는 지리산악회로 변신하고, 1972년 지리산악회 우종수 회장은 “국립공원협회”에서 발행한
창간호 “錦繡江山”(계간지)에 지리산의 대표적 경관 열곳을 선정하여 "智異山 10景"을 발표하였는데 노고단운해, 피아골단풍,
반야봉낙조, 벽소명월, 세석철쭉, 불일폭포, 연하선경, 천왕봉일출, 칠선계곡, 섬진청류 이다.
그 산악회가 이곳 연하천이란 이름을 명명한 곳이다.
지난 2년전 낙동정맥 산행때 회장을 역임하신 쑥맥영감과 오랫만에 해후를 한다.
재치있고 유머스러우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양반인데 이젠 산악회의
고물(고문)로 밀려난 모양이다. 세월을 어쩔 수 없는지 이젠 예전처럼 산행속도도
못내고 모든 陽氣가 입으로 다 갔는지 왜그리 말씀을 잘하는지...
나도 몇년후면 저리될까 무섭다. ㅋㅋㅋ... 늘 健安하시길.
연하천에서 20분정도의 휴식을 취한후에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형제봉으로 향한다.
형제봉 가는 길에는 길은 좋으나 길에 물이 흥건하여 걷기는 좀 불편하다.
오늘 가시거리는 꽤나 길다. 슬픈 아픔을 안고있는 대성동 너머로
저 멀리 호남정맥길의 마지막 명산인 광양 백운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 매화마을로 유명한 좆비산도 아련히 보인다.
음정가는 갈림길(10:10)
음정 갈림길을 지나니 암릉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상당히 시원한 바람이다. 이런 곳에서는 바지를 내리고
거풍을 즐기는데 참으로 안성맞춤이건만 여성 등산객들이
많아서 모든 걸 포기한다. 그래서 나홀로 산행이 최고야...
지리산 남부능선을 배경으로 멎진 포즈도 취해보고...
늘 인자하면서 엄한 어머니의 젖가슴만큼이나 포근한 지리산.
흔히들 지리산을 여자의 산에 비유를 하곤한다.
찌들고 지친 중생들을 늘 아무런 조건도 없이 보듬어 주는 산
해발 1700고지에도 풍부한 물을 제공하는 산!
난 지리산을 올 때마다 느끼는 건... 너무 크고 방대하여 두려움을
느끼곤 하지만 그때마다 힘든 범여를 보듬어 주는 울 엄니같은 산
울 엄니 돌아가신지가 어언 40여년 나에게는 늘 무섭게만 느낀
울 엄니가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나도 이제 출가할 나이가 다 된
내 새끼를 보니 울 엄니를 이해할 것만 같다.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형제봉가는 등로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엄나무가 보인다.
이른 봄에오면 수입이 좀 짭잘하겠는데 ㅋㅋㅋ
가야할 형제봉과 오늘 내가 걸어야 할 등로가 보인다.
해방이후의 좌.우 이념에 휘말려 슬픈 역사를 간직한 채
아무 말이없는 지리산 능선의 삼태골과 절골의 모습
저 멀리 오늘 가야할 벽소령 대피소와 선비샘이 있는 덕평봉의 모습
형제봉(兄弟峰:10:55)
높이 10m가 넘는 두개의 바위가 등을 맞대고 서있는 듯한 모습이다.
'형제바위'라고 불리는 이 입석바위도 전설이 있다. 옛날에 성불 수도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져 지금과 같은 바위가 됐다는 것이다.
이 바위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자그마한 동굴이 자리잡고 있는데, '연하굴'로 불린다.
이곳 달빛은 지리산 10경중의 하나인 <벽소령의 명월>보다 못지않다.
태고의 정적과 고요 속에 구상나무 숲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빛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 차갑고 시리도록 푸르고, 창백한 달빛과 은하수가 아름답다.
지나온 형제봉의 모습
벽소령가는 길의 멋진 암릉사이에서 풍경을 담는 방초님
벽소령(碧宵嶺:11:30)
이 고개에서 보는 달빛이 희고 맑아서 푸른빛으로 보인다고 해서
벽소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화개면, 마천면, 산내면의 경계점인 삼각고지에는 옛 6.25당시의 벙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이는 남쪽계곡이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 했다는 빗점골인데
삼각고지와 명선봉 일원에서 전투를 치열하게 벌였는지 몰라도 혹자는 벽소령까지의 능선을
'피의 능선'으로 부르기도 한다
벽소령(碧宵嶺) 벽소령은 지리산 8경 가운데 하나인 '벽소명월(碧宵明月)'로 유명하다.
'지리산 등뼈의 한가운데라고 할 벽소령을 덮고 있는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이 차갑도록 푸른 유기(幽氣)마저 감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고도 부르며, 여기서 맞는 달밤의 고요는 현묘한 유수로 몰고가는 태고의 정적 그것이라고나 할까.
광대한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룩한 고개로서 그 주위가 높고 푸른 산릉이 겹겹이 쌓여 유적한 산령을 이루고 있다.달밤이면 푸른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직도 갈길이 멀건만 동료 산꾼들은 여유만만하다.
시간과 거리를 보던 집행부가 아무래도 오늘 구간을 가지 못할 것
같으니 거리 단축을 발표한다. 처음엔 장터목에서 백무동 내려가는
코스인데, 세석산장에서 한신계곡을 거쳐서 백무동으로 향한단다.
그러나 그 구간을 다녀본 범여로서는 그래도 걱정이 앞선다.
왜냐고 그 구간을 다녀 봤기에... 정말 힘든구간이라 빨리해야
오후 6시가 넘을것 같기에... 나야 대간구간을 타는게 아니라
지리산을 즐기러 왔기에 상관이 없지만...
벽소령에서 의신(하동) 이정표
해방 후 좌익이란 이름으로 남쪽에 머물러야 했던 남부군 그들의 운명은, 애초부터
주변 강국들에 의해 잘못 줄그어진 38선의 그것과 함께 상존할 수 없는 슬픈 것이었을까..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유와 국가와 지역과
정권에 의하여 항상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은 미신이고,
사실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정의로운 것’일까(이태 남부군)..
62년 전 처절했던 전쟁의 상처는 저 대성골 안에 짙은 녹음에 묻힌 채로 말이 없다.
피아의 구분없이 빨치산과 수색대간의 치열한 교전 속에서 그들이 바랬던 당위와 정의와 자유는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민초들의 영혼은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그들이 이 산중에서 얻어야 할 '자유는 무엇이고,평등은 또 무엇이냐'고..
벽소령에서 휴식과 영양보충을 한 뒤에 서둘러 세석산장으로 향한다.
벽소령에서 세석산장 가는 구간은 초반 20여분은 그냥 임도길 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도차가 없이 편안하게 걷는다.
우측으로 빗점골 곡과 대성동, 의신마을이 보이고 저 멀리 백운산과
좆비산,박경리 여사의 土地의 무대가 되었던 하동 악양들도 아련히 보인다.
저 멀리 섬진강과 하동 평사리 그 너머로 광양 백운산도 보이고...
벽소령 출발 10분만에 1354m 지점에 도착하여 고도를 조금씩 높이기 시작한다.
이곳 등로에는 지리산 반달곰이 자주 출현하는 모양이다.
선비샘 가는 길에 서서히 고도를 높혀간다.
지리산 등로에서 바라본 빗점골과 대성동 계곡
대성동 전투가 6.25때 지리산 전투중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투이었다고 한다.
1952년 1월 17일 수도사단의 동계 토벌작전에 막바지에 몰린 빨치산들은
폭설로 인해 인근 빗점골, 거림골 등의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도망쳐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도사단 토벌군은 중무장한 야포와 박격포로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이러한 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미군 비행기들이 휘발유가 가득 드럼을
온 산에 떨어뜨리고 포탄과 총격을 가해 눈이 내려 정결하기 이를때 없는
설원은 피범벅이 되어 아비규환의 땅이 되어 사흘이나 계곡을 적셨다고 한다.
남부군은 대성골의 참패로 인해 몰락의 길로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도 모르고 이념전쟁에 휩싸여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리산의 넔이 되버린 저 民草들의 흐느낌이 60년이 된 아직도
아직도 범여의 깃가에 맴도는 같구나 영혼이여 다 부질없는 짓이요
이제 모든걸 잊버리고 더 이상 구천에 헤매지 마시고 부디 西方淨土로 가시길...
부디 왕생극락 하옵시고.
지리산 대성골에 피바람을 몰고온 남부군 총사령관 이 현상이 강원도를 출발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와 덕유산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지었다는 詩가
대성동에서 사살되었을 때 그의 수첩에서 나왔다고 한다.
智異風雲當鴻動(지이풍운당홍동: 지리산의 풍운이 바야흐로 크게 움직이니)
伏劍千里南走越(복검천리남주월: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일념하시비조국: 뜻은 한시도 조국을 생각지 아니한 적 없고)
胸有万甲心有血(휴유만갑심유혈: 마음속에 끓는 피가 솟구치네)
곰출현 주의 플랑카드
등로에는 넘어진 고사목을 지나서 다시 오르니 덕평봉이 나오고 조금 후에
상덕평 위에 있는 선비샘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산꾼들이 꽤나 많다.
선비샘(12:50)
선비샘의 유래
먼 옛날 이 샘터 아래의 상덕평에 살았던 노인이 화전민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일생을 후회하며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양반으로
대접 받기를 원했다. 이것이 한이 되었던 노인은 죽기전에 덕평봉 아래
지금의 샘터에다 자신의 묘를 써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훗날 이곳을 지나던 양반네들이 물을 먹기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는데
그 결과 샘터위에 할아버지 묘에 절을 모양새가 되어 노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후로 동네사람들은 덕평봉 아래에 있는 샘터의 이름을 선비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리산의 맛있는 샘물이라면 이곳 선비샘과 임걸령샘, 참샘이라고 한다
맛있는 선비샘물을 마시고 수통에 가득 채운 다음에 동료 산꾼보다
먼저 세석산장을 향한다. 나홀로 호젓하게 걷고 싶었기에...
이제 나홀로 다니는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정말 편하다
저 멀리 남해바다까지 아련히 보이는 지리 능선은 환상적이다.
아직까지 다리에 힘이 있어 걷는다는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가?
점점 세석산장이 가까워 진다. 계속해서 돌밭길을 걸은 탓인지
관절에 무리가 오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젠 산행속도가 계속 떨어진다.
베낭에서 아이스팩을 꺼내서 양 무릎에 교대로 갖다대니 조금은 나은 느낌이다.
망바위(13:25)
혼자서 편하게 길을 걸으며 오다가 보니 망바위에 도착한다.
망바위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저 멀리 남해바다에서
부터 지리산 남부능선이 한 눈에 보이고 동쪽으로는 칠선봉과 영신봉
저 멀리 중봉과 연하봉 그리고 지리산 제1봉인 천왕봉은 안개에 휩싸여 신비롭기만 하다
지리산 망바위에서
망바위에서 바라본 제석봉과 중봉의 모습
칠선봉과 영신봉도 보이고...
장터목 산장에서 하동바위로 해서 백무동으로 내려서는 능선
백무동 계곡너머로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창암산과 그 너머로
남덕유산으로 짐작되는 산그리메가 아련히 보인다.
돌로 단장된 길을 걷다가 보니 산행속도가 늦어진다.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나를 부를까?
뒤돌아보니 芳草님이시다. 난 내 앞에 간 줄 알았는데...
난 방초님을 잘 모른다.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모른다.
오직 닉만 알 뿐이다. 그리고 2년전에 낙동정맥을 10개월간
같이 타면서 있는 情, 없는 情이 다 들었다.
그렇다고 사석에서 술 한잔 기울인 적도 없는 사이이다.
그러나 늘 남을 배려해주는 그 맘씨가 너무나 고와서 정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해 호남정맥길에 몇번 동행하였다.
이젠 서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법문을 할 때 아무 말없이 꽃 한송이를 들어
보였는데 이때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쳐다보기만 하는데
이 때 부처님의 제자 중에 마하가섭 존자가 염화미소(拈花微笑)를 지은
것처럼 방초님과는 이심전심으로 나와 맞는게 많은 것 같다.
참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분... 늘 健安하셨으면 한다.
또다시 배가 고파온다. 둘이서 베낭을 내리고 약밥과 빵 그리고
우유와 커피를 나눠 마시고 다시 길을 걷는다.
그 이후로 백무동까지 약 5시간을 같이 걸으면서 참으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이름모를 버섯도 보이고...
칠선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칠선봉(七仙峰:13:45)
칠선봉은 둘레에 7개의 암봉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일곱 선녀가 노니는 모습과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힘들게 칠선봉에 올라서니 선두에 가던 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에서 지리산의 仙景을 감상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칠선봉을 지나서 다시 고도를 낮췄다가 치고 오르려니 힘에 부친다.
급경사의 계단을 치고 올라서 가쁜 숨을 몰아쉰다.
어느 산 할것없이 높는 산은 높은 산대로 낮은 산은 낮은 산대로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 인 모양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능선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산꾼의 피로를 다 몰고가는 느낌이다.
뒤돌아 본 칠선봉의 모습
지리산과 설악산의 고산지대에서만 볼 수 있다는 산오이풀
참으로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히 커가는 너의 모습이 대견하기만 하다.
영신봉(1651m:14:40)
영신봉의 남사면의 한참 아래쪽에 있는 큰세개골 상단에 영신사라는 절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좌고대와 창불대, 가섭상이라는 바위가 있다.
신 동국여지승람은 영신사 좌고대에 올라 3번 절하는 사람은 성불을 이룬다고 하였다.
영신사는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는데 세석평전 아래 음양수 아래 대성동의
큰세개골 위가 영신사 터라고 한다.
2년전 낙남정맥길 김해 고암나루터에서 출발하여 이곳 영신봉에서
쫑파티를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으니?
또 한번 와야할 구간이다 내년에 계획하고 있는 이곳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남해대교까지 잇는 신백두대간(우듬지 구간)이 이곳에서
시작하기에 내년에 또 한번 와봐야지.
세석평전(細石平田)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은 소백산맥 남쪽에 위치하고 북으로 덕유산
국립공원에 이어지며 천왕봉은 남한 내륙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智異山 명칭은 두음법칙의 예외로 특이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작은 돌이 널려있는 평지라는 뜻을 가진 세석평전(細石平田)은 지리산의 주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남 산청의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과
연결되어 있는 지리산의 중심지이다 세석평전(1600m)은 고원지대에 펼쳐진 평원이다.
높은 산 고원 어디서 이런 습지가 있단 말인가!
세석평전은 본시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석평전과 촛대봉의 전설이 적힌 안내판
세석평전에서 바라본 촛대봉
발끝에 부딪히는 잔돌(細石)들이 척박한 고원을 철쭉으로 일구는 '연진(蓮眞) 낭자'의
손끝으로 아려와, 돌이 되어 촛대봉에 굳어 버린 사랑을 향해 '호야(乎也)'는 아직도
세석에서 떠나질 못하는는가 보다 사랑의 힘이 이리도 무섭고 애절하단 말인가..
음양수 한잔 마시고 어느 산봉우리에 올라 어느 님을 그리워 하며 돌이 될 수 있을까..
이 슬픈 사랑의 원인제공을 한 그넘의 호랑이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참으로 기막힌 슬픈 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백무동으로 길을 재촉한다.
국립관리공단은 모든일을 부정적 투성이다. 하지마라, 들어가지 마라. 과태료 매긴다.
도대체 당신들이 할 수있는 건 뭐요. 국민들의 녹을 먹으면서... 제발 군림하지 말고
下心으로 봉사할 수 있는것 함 찾아보슈. 2년전 모 건설회사의 광과가 생각 안나요.
모든걸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마시고 긍정을 믿습니다 라는 생각을...
영신봉에서 바라본 촛대봉
음양수 전설의 주인공인 연진처자가 낯에는 세석평전의 철쭉밭을가꾸고,
밤에는 죄를 사하기 위해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올리던 장소라하여 촛대봉이란 이름이붙었다고 하는데 오늘은 정상에 구름이 가려 신비롭기만 하다.
지리산 남부능선
세석평전에서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의 청학동으로 뻗어있는 지리산의 남쪽능선을 말한다.
남부능선은 산행내내 지리산의 주능선을 전부볼수있어 전망이 좋은 곳이다
이곳은 낙남정맥길과 신백두대간 능선이 지나는 곳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세석산장과 세석평전의 모습
세석 갈림길(14:50)
동료 산꾼들은 모두 다 세석산장으로 향하는데 난 방초님과 함께
산장에 특별한 볼 일이 없어서 산장에 들리지 않고 갈림길에서
한신계곡으로 향한다. 주위에는 산오이풀을 비롯한 야생화가 지천이다.
세석 갈림길에서 한신계곡 가는 길
세석평전에서 백무동 내림길
영신봉에서 멋진 마무리를 하고 세석대피소를 뒤로 하고 백무동 내림길로 접어든다.
6.5km의 내림길은 말 그대로 고행길이다. 아예 스틱을 접고 네발로 기어 내려간다.
온 천지가 바위로 구성되어 있고 거기다가 몇일전에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바위들이
많이 젖어있고 나무 뿌리들이 상당히 미끄럽고 위험하다.
인생길이고 권력이고 내려올 때 조심하라고 했거늘 아뭏든 조심 조심해서 내려온다.
길은 없고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데 초반 0.7km 내려오는데
약 1시간 가량이 허비한다. 바위가 미끄러워 상당히 위험하다.
도저히 산행속력을 낼 수 없는 그런 곳이다.
한신계곡 내림길에 저 맑디 맑은 물에 이 육신 덩어리를 담가서 일상에서 찌든 스트레스와
욕망, 미움, 분노, 그리고 그리움 등을 이 계곡물에흘러 보내고 텅빈 마음으로 世俗으로 돌아가고 싶다
약 2시간을 계속해서 계곡 바위를타고 내려오니 다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길이 조금은 유순해지기 시작한다.
방초님이 베낭에서 마지막 비상식량(?)인 막걸리 한병을 꺼낸다.
폭포옆 시원한 너럭바위에서 한병을 나눠 마시고 백무동으로 향한다.
오층폭포(16:430)
가네소 폭포(16:55)의 유래
먼 옛날 한 도인이 이곳에서 수행을 한 지 12년이 되는 어느날
마지막 수행으로 가내소 양쪽에 밧줄을 묵고 눈을 감고 건너고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지리산 마고할미의 셋째 딸인 지리산녀가 심술을 부려
도인을 유혹하였고 , 도인은 그 유혹에 넘어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도인은 “에이~ 나의 도(道) 는 실패했다. 나는 이만 가네” 하고
이곳을 떠났다. 그래서 ‘가내소’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신계곡(寒新溪谷)
깊고 넓은 계곡 또는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게 하는 계곡이라는 뜻으로,
계곡의 물이 차고 험하며 굽이치는 곳이 많아 한산하다고 해서 부르던 이름이 한신이
되었다고도 하고, 옛날에 한신이라는 사람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가 급류에
휩쓸려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백무동에서 세석고원까지 여러 개의 폭포를 이루면서 10여㎞에 걸쳐 흐른다.
백무동 위에서 세석까지 흐르는 본류 외에도 덕평봉 북쪽에서 발원하는 바른재골과 칠선봉
부근에서 내려오는 곧은재골, 장터목 방향에서 흐르는 한신지계곡 등 4갈래의 물줄기가 엄천으로 흘러 남강 상류를 이룬다.
본류는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의 협곡을 흘러 가네소폭포에서 한신지계곡과 합류한다.
지리산 계곡 가운데 폭포를 가장 많이 끼고 있으며, 지리산 등반코스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계곡과 절벽 사이로 울창하게 우거진 숲을 2㎞ 정도 오르면 20여 개의 물줄기가 흐르는
첫나들이폭포(바람폭포)가 나오고, 다시 1㎞를 더 가면 폭포수와 넓은 반석, 울창한 수풀이
어우러져 계곡의 절정을 이루는 가네소폭포가 나온다. 15m 높이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며,
사철 변함없는 수량을 자랑하는 검푸른 소(沼)를 만들어 기우제 장소로도 유명하다.
가네소폭포 아래부터 본류까지 오층폭포와 한신폭포를 따라 세석으로 흐르고,
내림폭포를 따라 장터목으로 이어지는 한신지계곡이 흐른다.
첫나들이 폭포
하산길에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수준점도 보이고...
백무동 입구(17:10)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곳으로 100명의 무당들이 숨어 살았다는 유래가 있다.골깊은 백무동 계곡에는 모두 3개의 등산로가 있다. 백무동에서 세석평전으로 오르는 한신계곡코스, 한신계곡에서 장터목으로 오르는 한신지계곡코스, 백무동입구에서 바로 장터목으로 오르는 하동바위코스가 있다.
예전에 100명의 무당들 은거지였던 탓일까
버스 정류장 옆에는 지리산 천왕할매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백무동 탐방 안내소(17:25)
13시간 50분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마지막 스틱을 접는다.
그리고 버스를 막고 담벼락에서 내려오는 물에서 알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나서 막걸리에다가 늦은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후미팀들이 너무 늦게 내려오는 바람에 컴컴한
저녁 8시에 백무동을 출발하여 성남 모란시장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넘었다. 아들이 차를 갖고오는 바람에 동료들과
인사도 제대로 못나누고 집에 도착하니 새벽 1시이다.
아~ 피곤하다. 그리고 가장 바쁜 월요일에 힘이 많이 드는구나.
'♣ 일반산행 ♣ > 梵如의 山行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억새를 찿아서- 영남 알프스 1박 2일중에 첫째날에... (0) | 2012.10.15 |
---|---|
파주 심학산과 약천사 (0) | 2012.10.02 |
대모산과 구룡산을 한바퀴하고... (0) | 2012.07.20 |
제왕산과 능경봉 (0) | 2012.07.16 |
청계산 (0) | 2012.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