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12년 10월 01일
산행시간: 2시간 정도
" 세월은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며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가고 오고 변하는 것 뿐이다."
법정스님 글 中에서
추석날 절에서 제사를 모시고 나서 집에 계속 있었더니만 소화도
안되고 하여 집에서 나와 무작정 차를 몰고 자유로를 향했다.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나홀로 그냥 훌훌 어디론가 가고 싶기에...
시원한 자유로를 달리니 한층 기분이 쿨한 느낌이다.
무작정 달려 도착한 곳이 파주시 출판단지 뒷산인 심학산이다.
심학산 산행안내도
파주출판단지를 지나서 수투바위 주차장을 지나 조금 더가서 약천사쪽으로 간다.
약천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천사 약사여래대불에 방석을 깔고 고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둘레길로 접어든다.
약천사 약사여래대불
교하 신도시와 파주 출판단지 뒷편 야트막한 산에 약천사가 자리를 잡고있다.
심학산은 고도가 194m에 불과하지만 주위에 산이 없고 들판 가운데 우뚝
서있어 그런지 상당히 높아 보인다. 이곳에 둘레길이 조성되어 추석 다음날이라
그런지 산을 찾은 인파들이 엄청나게 몰려있다. 우리 동네 근교인 대모산이나
청계산만큼이나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심학산은 파주출판단지와 교하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에는 야트막한 야산에 불과했다.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이 산은 일약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이 곳에 있는
약천사는 심학산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심학산에 둘레길이 만들어 지면서
생겨난 절이기 때문이다.
심학산 등산로와 둘레길 중간에 위치하여 대부분 약천사를 거친다.
높이가 13m에 이르는 대형약사여래불은 2008년 10월에 남북통일과
일체중생의 병치료를 발원하며 모셔졌다고 한다.
약사여래불은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건강과 희망을 주실 것 같은 넉넉한 모습이다.
약천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약사여래불의 원력인 중생 치료에 그 원력을 두고 있다.
약사여래불에 예를 올리고 심학산 둘레길에 접어든다.
매주 산을 타지만 이런 둘레길이나 도시 근교의 사람들이
많은 곳에 오면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언제나 나는 이방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사람이 많은 산은 딱 질색이다.
우측에 있는 수투바위가 있는 쪽으로 돌아간다.
이곳은 남녀노소 가족단위로 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곳곳에 이정표가 잘 설치되어 있고...
수투바위 갈림길 이정표에서 정상으로 올라선다.
정상이라봐야 250m 정도를 올라간다고 표시가 되어있다.
돌탑이 있는 곳에서 아이스케키 하나를 사먹는다.
하나에 1,500원이란다. 여긴 높은 곳도 아닌 주차장이
가까운 곳인데 엄청나게 폭리를 취하는 느낌이다.
이곳은 사유지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250m라고 표시되어 있는 정상으로 올라간다.
산허리를 빙 두르는 둘레길은 정말 잘되어 있는 느낌이다.
5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니 정상에는 펜스가 처져있고 좌측으로
우회를 하여서 정상으로 올라가니 팔각정이 자리를 잡고 있다.
심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임진강 건너 김포 문수산의 모습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심학산(尋鶴山)을 심악산(深岳山)으로 기록한다.
심악산이 학(鶴)에 비유하는 심학산으로 변한 이유는 풍수지리학의
영향임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여지도서에 따르면 심악산은
교하군(交河郡) 남쪽 15리에 자리하며 고향군 고봉산(高峰山) 주맥이라 하였다.
한강이 서울을 벗어나 서북쪽으로 흐르다 정북 방향으로 몸을 트는 곳,
북에서 흘러온 임진강과 합류하기 직전 지점에 심학산이 솟아 있다.
심학산은 심악산으로 불렸는데, 영조 때 궁궐에서 기르다 날아간 학을
이 산에서 찾으면서 심학산(尋鶴山)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본디 홍수 때 한강이 범람해 들어오는 물을 막는다 하여 ‘수막’으로
불린 점으로 미뤄 ‘수막’이 ‘심악’을 거쳐 ‘심학’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정상에서 바라본 파주시 교하읍과 문산읍의 모습
심학산 줄기는 교하읍 동패리에서 출판단지 쪽으로,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정상은 한강 쪽(서쪽) 끝부분이다. 등산로 입구는 동패리 교하배수지,
서패리 꽃마을, 약천사, 배밭 등 대여섯 곳이 있는데, 동서로 능선을 따라
오르는 동패리 배수지 쪽 말고는 정상까지 오르는 시간이 20~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800m 안팎 거리다. 배수지 쪽에서 정상까지는 2.9㎞로, 완만하고 널찍한
산책로가 나 있어 주민들이 애용하는 코스다. 어느 코스든 마지막 200m가량만
가파른 나무 계단계단길을 타고 오르면 운동시설과 팔각정 등이 자리잡은 정상에 이른다.
교하배수지, 약천사, 서패리 꽃마을 쪽 등산로 입구엔 주차장이 설치돼 있다.
전망 테크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산행로가 짧고 다소 싱거운데, 지난해 파주시에서 길쭉한 산줄기 둘레를 따라 산자락을
도는 6.8㎞ 길이의 둘레길을 만들었다. 2시간가량이면 한바퀴 돌 수 있다.
봄엔 심학산 돌곶이마을 꽃축제가 열리고 여름·가을이면 활엽수 숲이 울창하며
겨울엔 설경이 눈부셔, 사철 주민들이 찾아와 둘레길도 걷고 정상에 올라 탁 트인 전망도 즐긴다.
겨울 심학산은 다소 썰렁한 분위기지만, 오르내리면서 주변 전망을 감상하기엔 더 좋다.
정상 팔각정에 오르면 유장하게 흘러가는 한강 하류 물줄기 풍경에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아득한 서울 쪽 상류에서부터 일산대교와 김포 들판,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거쳐 임진강 하류와
만나는 합수지점까지 고개를 한참 돌려야 한다. 쾌청하지 않은 날에도 물길 너머 북한
개성 땅의 건물들이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엔 강화도 쪽 산들과 영종대교, 그리고
개성 쪽 송악산까지 선명히 눈에 잡힌다고 한다. 이뿐이 아니다.
눈을 뒤로 돌리면 일산과 교하 새도시 일대의 거대한 아파트 숲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데,
그 너머로 흰 눈에 덮인 북한산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솟아 있다.
정상에서 바라본 통일전망대와 북한지역의 모습
저 멀리 임진강변에 있는 오두산 전망대가 보이고 그 너머
임진강 건너로는 북한땅이 손에 잡힐듯이 보인다.
특이한 점은 북한지역의 산들은 한결같이 나무하나 없는 민둥산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파주운정지구의 모습
심학산의 유래를 보면
교하면 동패리에 소재하고 있는 심악산은 한강하류에 있는 산으로
동편은 동패리, 서편은 서패리, 남편은 산남리등 3개리가 둘러 있다.
가운데에 우뚝 솟은 봉우리와 동체는 마치 대호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인 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물위에 떠있는 큰 군함같기도 하다. 또한 장군 영병 비룡상천형이라고도 한다.
산봉우리 주위는 바위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심부 10여평 남짓한 편편한 곳이 있는
이 자리는 수십자를 파도 비세황토 흙이 나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풍수지리설로 천자가 나올 자리(천자지지)라 전해져 욕심내는 사람들은
밤중 남몰래 수차에 걸쳐 시체를 암매장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자리에 시체를 매장하면 산이 울며 동네에서 병고가 일어나
동네 사람들을 일제히 동원하여 상봉에 올라 시체를 파헤쳤다 한다.
조선조 말 김포에 살던 예안이씨 이지열(李志烈)이 이 마을에 들어와 훈학을 하였으나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곳에 몰래 시체를 암매 장하였다.
그러자 이 동네에 사는 김면제(金勉濟) 성균관박사 댁(成均館博士宅) 하인이
일자무식한 사람인데 별안간 미쳐서 이지열이가 여기다 산소를 써서 큰일 났다며
동네를 뛰어다니자 동네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파헤쳤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지금은 아예 묘를 쓸 생각조차 못한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이 묘자리 턱 바로 아래 발복지지 묘도 2개소가 나란히 있다 한다.
옛날에는 이 산 주위로 물이 흘러 한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되어 있었다 한다.
그러므로 한강 물을 막고 있 다하여 당초에는 수막산(水漠山)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조선조에 내려와 언제나 홍수가 있을 때에는 한강물과 조수물이 넘쳐 수막산이
물 속에 잠기게 됨으로 깊은 물에 들어갔다 하여 심악산(深嶽山)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 오악(송악, 감악, 심악, 북악, 관악)중에 하나로 불리우고 있다.
그후 조선조 숙종대왕 시절 왕궁에서 학을 기르다가 학 두 마리가 도망을 치자
궁궐에서는 이 학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찾으러 다니다가
심악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잡아간 후 숙종대왕께서 이 산에서 학을
찾았다 하여 심학산(尋鶴山)으로 명명하여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항간에는 수막산으로 불리우고 있으나 각종 문헌에는
심악산으로 명기하고 있으며 이 심악산 동편 중턱에는 유명한 법성사(法成寺)절이
있고 위에는 속병이 잘 낫는다는 신기한 약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모여들고 있다
또한 이 산은 조선조에 유명했던 송구봉선생께서 이 산의 정기를 받아 탄생하여 성장하신 명산이다.
따라서 일설에는 송구봉선생이 출생할 때 정기를 흡수하여 이 산에 초목이 일시
고사(枯死)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온라인 자료 참고 작성)
심학산(尋鶴山)은 해발 194m 높이로 한강 하구에 접해있으며 조선말 이곳으로 천도(遷都)설이 제기될 만큼
명당중에 명당으로 꼽히는 명산이다.그런데 6.25이후 이곳 한강하구에는 줄곧 군 작전용 방책선이 설치되어
사람의 래왕이 통제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곳은 철새 도래지가 되어 해마다 겨울철이면 수십만마리의 철새들이
심학산 바로 앞 한강 둔치에 날아들어 겨울을 보내고 있으며 이중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학(두루미) (鶴)을 볼 수 있다.
임진강 너머 김포지역의 모습
심학산을 경기오악(京畿五岳)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경기5악으로는 일반적으로 화악산(1,468.3m), 운악산(945m), 감악산(675m),
관악산(632m), 송악산(488m)을 꼽는데 이 고장 사람들은 관악산과 송악산은 각각 서울과
북한 개성에 있는 산이어서 그중 하나를 빼고 심학산(193m)을 넣어 말하는 것이다.
이 산은 폭 50m의 둑이 생기기 아주 오래 전 한강 가에서 한강'물'을 '막'아주는 산이라 하여
'수막산(水莫山)'이라 불리다가, 홍수 때마다 물에 깊이 잠기는 산인지라 깊을 深(심),
큰 산 岳(악) 심악산(深岳山)이라 하였다.
파주시는 비옥한 평야에 있는 도시라 주변에 산도 드물지만 산이 있어도 그리 높지가 않다.
주변에 가장 높은 산이 김포공항 뒤 부평의 계양산(395m)이요
다음이 고봉산(208m), 심학산(193m), 덕양산(124.8m), 정발산(88m) 순이다
심학산(尋鶴山:194m)
심학산은 한강하류의 파주시 교하읍 동패리, 서패리, 산남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심학산의 유래는 "고봉산 서맥 끝머리 벌판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이 산은
홍수때 한강물이 범람하여 내려오는 물을 막았다 하여 수막 또는 물속으로 깊숙히 들어간
메뿌리라하여 호칭하였으며영조때 궁중에서 기르는 학이 날아 도망가자 이 산에서 찾았다 하여
유래되었다" 고 전해지고 있다.자유로를 따라 파주쪽으로 가다보면 출판단지 뒤에 홀로 우뚝
솟구쳐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심학산의 모습이 보인다.정상에 올라서서 보면 한강 하구를 고스란히
품고 있으며, 인천대교와 강화도, 이북의 송악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심학산 정상에서 북쪽방향의 개성까지 35km, 서쪽방향으로 인천까지 42km, 남쪽방향으로 서울까지 31km,
동쪽방향으로 의정부까지 29k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강과 임진강을 건너 이북의 송악산까지 한 눈에
담을 수 있다.특히 저녁 해질녘 한강과 강화도 위로 떨어지는 해(낙조)의 아름다운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육산 특유의 고속도로 같은 넓은 등산로가 정상까지 잘 조성되어 있어서 늦가을 등산로를 뒤덮은 참나무등의
활엽수림이 활짝 펼쳐진 단풍숲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자유로변에 위치한 유일한 산으로 한강하류가 눈 앞에 내려다 보이는 심학산으로
해마다 "돌곶이 꽃 축제" 가 열리는 심학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모든 사람들이 잘 감상할 수 있도록
파주시에서 이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하여 지난 2009년 10월 24일 심학산의 5부~7부 능선의 산허리를 따라서
평탄하게 만든 폭 1.2m~1.5m의 자연 숲길을 조성하여 어린 아이들도 맨발로 쉽게 걸으며 산책을 할 수 있도록
5개 구간에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최대한 이용하여 도상거리 6.8km의 둘레길을 조성하였다.
둘레길 주변에는 "오두산통일전망대", "파주출판단지", "헤이리문화마을" 등의 관광명소가 자리잡고 있다.
분단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흐르는 임진강의 모습
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는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올라갈
엄두도 못낸체 그냥 바라만 보고 산 아래로 내려온다.
팔각정 아래에 있는 심학산 삼각점(△23 2007 재설)
심학산의 특이한 점은 산 정상은 꽤나 넓고 평평하지만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둘레에는 꽤나 바위들로 둘러쌓여 있다.
조금 내려오니 우측에 헬기장이 보이고...
이곳이 명당 자리라서 그런지 둘레길 주위에 묘지들이 많이 보인다.
묘지를 지나니 우측에 大倧敎의 經典인 < 天符經 >이 적힌 비석이 나온다.
지난해 한남금북구간의 괴산지역에서 만난 내용과 같다.
약천사 쪽 등산로 입구엔 물맛이 좋은 샘이 있다.
1990년대 세워진 약천사라는 절 이름도 이 샘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절에서 볼만한 것이 높이가 13m나 되는 거대한 청동 좌불상이다.
2008년 남북통일을 염원하며 만들었다는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이다.
사람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알려주려는 듯, 길이 1m는 돼 보이는 두툼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오가는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심학산이 비록 낮은 산이긴 하나 들판 한가운데 솟은 까닭에 정상에서 부는 바람은 매섭다.
가람내에서 가장 큰 지장보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대체적으로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는 사찰은 대웅전이
가장 중앙에 있고 전각도 가장 큰데...
허정스님의 면모를 보는 것 같다.
허정 큰 스님은 매달 한번씩 만나는 모임의 일원이다.
그 모임에 내가 총무를 맞고 있는데 늘 겸손하시어 나를 굉장히
편하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조계사 주지와 중앙종회의원까지
하신 큰 어른스님은 늘 소탈하고 유모어 풍부하신 멋진 스님이시다.
지장전 내부의 모습
지장전 가운데에 지장보살님이 근엄하게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은 부처 입멸 후부터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의
부처 없는 세상에서 육도의 중생을 교화한다는 대비보살이시다.
지장보살은 흔히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머리 뒤에는 서광이
빛나고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白毫)가 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석장(錫杖)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들고 있다.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봉안하고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되어 있고
좌우에 시왕을 안치하며 그 앞에 동자상을 안치하고,
판관(判官)·녹사(錄事)·장군(將軍) 등의 존상(尊像)을 갖추고 있다.
지장보전 옆에는 큰스님들이 머무시는 요사채이 있다.
요사채 건물이 나무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게 참 담백하게 보인다.
요사체는 주인(큰스님)의 성품을 그대로 보는것 같다.
큰스님에게 전화를 해보니 마치 긴히 볼 일이 있으셔 읍내에 계신다고 한다.
늘상 들리라고 하시면서... 절밥은 먹기 싫다고 하니까.
총무님이 오시면 절밥말고 맛있는거 사주시겠다고 말하시는 큰스님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목소리만 들어도 정겹기만 하다.
다음주 금요일에 모임이 있기에 그날 뵙겝다고 하니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는데 미안하다고 몇번이나 말씀을 하신다.
지장보전은 입구에서 보면 2층이지만 절마당에서 보면 1층이다.
스님 말씀마따나 목탁하나 들고 파주땅에 와서 큰 서원을 세우시고
얼마나 큰 원력으로 고생을 하셨는지 짐작을 하고도 남음이 보인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지장보전.
편액엔 尋鶴山藥泉寺란 편액이 걸려있다.
약천사 지장보전에는 일본에서 한류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탤렌트 故 박용하의 위패가
봉안되어 유명한 절이다.
★생전 박용하의 소속사인 요나 엔터테인먼트 김재현 본부장은 “팬들의 추모공연 요청이 끊이지 않았고 팬들의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한결같은 사랑을 외면할 수 없어 추모식을 마련했다.”라고 밝혔다. 가족과 친지 그리고 일본팬 1700명 등이 참석한 추모식은 불교 법요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3시간여 동안 계속됐다. 팬들은 우산을 접은 채 박용하의 사진을들고 분향했다. 곳곳에서 오열이 터져 나왔다.분향행렬은 1시간이상 이어졌다.박용하의 친구인 탤런트 박광현(34)은 “네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네가 없다는 걸 느꼈고 다시금 슬픔에 잠겼다.이런 나를사람들이 위로했지만 그것은 사치라고 생각한다.”라며 울먹였다.“기쁨도 같이 나누고 슬픔도 같이나누며 함께할수있었던것은 나의 일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었다. 고맙고 사랑한다.”라고 애도했다.추모식 이후 박용하의유골이 안치된 분당 메모리얼 파크에서는 헌화식이 열렸다.한편, 박용하는 지난해 6월30일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열하는 일본의 여성팬들(펌 사진)
약천사 대웅전
약사여래대불 왼쪽 위에는 보통 사찰에서 주존으로 모시는 대웅전이 자그만하게 자리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금당인 대웅전에는 목조삼존불좌상은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양쪽에는 협시불인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약사여래대불의 뒷모습
여기서 내려다 보니 약사여래대불의 웅장한 모습과 약천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약사여래대불에서 넓은 지장보전 마당으로 내려오니 좌.우에
소원지를 올리고 부처님에게 발원하는 약천사 인연대가 있다.
흡사 일본의 신사에서 볼 수 있는것과 흡사해 보인다.
우측의 인연대 앞에는 푸근한 모습의 포대화상이 있었는데
포대화상 위에서놀고 있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조각이 있는데
이 절집 주인인 큰 스님의 유머만큼이나 유머스럽게 조각되어 있다.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석상이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아이들을 감싸 안은 모습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중국 당나라의 포대화상은 중생들이 주는 대로 받아먹어 풍선처럼 부푼 뚱뚱한 몸집을 갖게 되었고
대지를 방바닥으로 삼고 구름을 이불삼아 전국을 유랑한 자유인의 삶을 사신분이다.
지팡이에 큰 자루를 달아 메고 다녔는데 그 자루 속에는 온갖 물건들이 다 들어있어서
중생들이 원하는 데로 내주어서 포대스님이라는 이름을 얻었단다. 특히 동네를 돌면서 아이들에게
그 자루속의 장난감이나 군것질거리를 아낌없이 나누어주곤 했다.
아이들이 놀리고 때려도 웃음으로 받고 아이들의 눈높이로 교우하면서 세속사람들과 차별 없이
어울리는 삶을 사셨던 분이었습니다. 입적하시고 미륵보살의 화신임을 알게되었다.
사찰 마당에서 바라본 약천사 약사여래대불과 대웅전의 모습
허정 스님 (파주 약천사 주지) | ||||||||||||||||||
# 연기적 질서 속에 날마다 자신을 담금질 할 때 ‘명품 인생’ 파주출판단지와 교하신도시를 품은 심학산. 해발고도 194m의 낮은 산이지만 5곳의 등산로와 근래 조성된 둘레길을 찾는 ‘뚜벅이 족’들이 늘고 있다. 잘 정비된 정상에서는 일산과 파주지역이 한 눈에 조망되고 한강의 유연한 흐름과 임진강 유역, 오두산 전망대와 그 너머 북한 지역의 산자락까지 볼 수 있는 요지다. 서쪽으로 떨어지는 낙조는 사시사철 아름답다. 15년 전, 그러니까 파주 출판단지와 신도시가 형성되지 않았던 당시의 심학산은 여느 야산과 다를 것이 없었다. 사람이 다니는 곳에 길이 나고 길은 삶의 애환으로 다져진다. 심학산에 난 길이 그렇다. 삶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위하여, 육신과 정신 건강을 위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하여 길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더 행복한 내일을 갈망한다. 20만 교하 신도시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산책 코스 심학산의 길들, 그 중심에 약천사가 있다. 등산로나 둘레길의 중간에 위치해 심학산을 찾는 사람은 대부분이 약천사를 거치게 된다. 웅장한 지장보전에서는 기도가 그치지 않고, 2008년 10월에 남북통일과 일체중생의 병고치유를 발원하며 모신 높이 13m의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의 엄숙하면서도 다정한 상호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희망을 선물한다. 약천사는 심학산에 길이 만들어 지는 시간을 따라 천천히 일구어진 도량이다. 어느 날 갑자기 기술과 자본이 투입되어 뚝딱뚝딱 지어지는 아파트 같은 절이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좀 쑥스러운 얘기일지는 몰라도, 목탁 하나로 지은 절입니다.” 약천사 불사를 주도한 허정(虛定) 스님이 ‘목탁 하나로’ 절을 지은 내력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5년 야산 기슭의 자그마한 법당에 인연이 닿아 무작정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정진했어요. 정진이란 게 다른 것도 아니었지요. 하루 3번 예불 모시고, 각종 기도 법회와 인연 따라 들어오는 불공에 정성을 들인 것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절을 비우지 않고 늘 자리를 지키며 누가 찾아와도 만날 수 있도록 한 것이 전부입니다. 뭐 특별한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절지키는 것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소위 말하는 ‘큰손’에 의지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인연불자들의 정성이 모이고 모여 이렇게 도량이 이루어졌고, 나는 여전히 할 일이 있으니 다행이지요.”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고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세상은 뒤죽박죽이다. 출가하여 절집에서 가장 처음 배우게 되는 글이 ‘초발심자경문’이다. 허정 스님은 요즘도 45년 전에 보았던 ‘초발심자경문’을 수시로 읽는다. 누가 경전을 권해 달라고 해도 ‘초발심자경문’을 먼저 읽으라고 권한다. 거기 첫출발의 마음에서 오늘의 의미를 길어 올리자는 뜻이다. 근본정신이 흩어지면 만사가 헛일 아닌가. 허정 스님은 “절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법을 베푸는 본분사에 매진했기에 여법한 도량이 일구어 진 것이다. “지식평등화 시대에 교리로 포교를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들 지식의 측면에서 아는 것이 많고 공부도 열심히 하잖습니까? 신문 방송 등의 미디어나 출판물도 생활화 되어 있고요. 그렇다면 지식이 아닌 신행과 신앙의 측면에서 승속이 소통하고 절과 가정이라는 공간이 소통하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스님이 절이라는 공간에서 대중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포교가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절 비우지 않고 늘 깨어 있는 스님이 있을 때 도량도 깨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굳이 말하자면 스님이 주인 노릇을 잘해야 부처님 가르침도 제대로 전해지는데 현실적으로 안쪽의 주인보다는 바깥의 물상에 이끌려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망하게 생각과 마음이 바빠서 그런 겁니다.” 절의 주인 노릇에 철저한 것, 그것이 허정 스님의 포교 노하우라고 이해됐다. 절은 공간의 의미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공을 초월한 절대진리를 배우는 곳이기 때문이다. 삶의 피로를 달래려고 나선 산책길에서 만난 장엄한 약사여래 앞에서 마음의 병고를 치유 받고 새로운 희망의 시간을 가슴가득 담아 오듯 절은 시공을 초월한 의미로 존재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부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유구한 세월동안 많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어요.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는 것도 조금만 공부하면 알 수 있어요. 누가 뭘 깨달았다고 한다면,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더 큰 것을 깨달았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통해 펼쳐 놓으신 길, 그 길을 잘 가는 것입니다. 여법(如法)하게, 가르침대로 말입니다. 선사는 선사의 길을 율사는 율사의 길을 강사는 강사의 길을 가야하고 재가자는 재가자의 길이 있거든요. 깨닫겠다고 거기 목숨 거는 것이 대안이 아니고 깨달음의 행동을 하는 순간순간의 삶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절대수행자가 되거나 절대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절대라는 것은 극단이 아니라 튼튼한 근본에서 이루어지는 단단한 경지를 말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스님이 영어를 잘 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사람들이 좀 알아준다고 합시다. 세상에 영어 잘 하는 사람이 한 둘도 아닌데 왜 알아줍니까? 스님이 영어를 잘하기 때문이에요. 스님이라는 틀 위에서 영어를 잘하는 것이지 영어를 잘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근본에서 절대성을 갖추지 않으면 아무리 떠들어도 허구에 불과합니다. 뿌리가 두터워야 가지가 무성하거든요(根厚枝盛).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북돋우는 역할을 할 때 깨달음의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법신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고 북돋우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니 더 이상은 다른 곳에서 헤매지 말아야 합니다.” 허정 스님은 현대사회에서 불교는 ‘아우름’을 유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별과 시비를 유발하는 것은 종교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분별과 시비까지도 아울러 보듬는 넓은 도량이 될 때 지혜와 자비의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세상은 언제나 캄캄절벽일 뿐. 인아산붕처(人我山崩處) 무위도자고(無爲道自高) 범유하심자(凡有下心者) 만복자귀의(萬福自歸依) 나를 버리면 스스로 도가 높아지고 내가 없는 가운데 하심하면 만복이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 내 것이라고 하는데 대한 집착이 먼저 무너져야 합니다. 제대로 하심과 겸손하기 위해서는 자기에 대한 집착을 먼저 버려야 하는 겁니다. 내가 없어야 진짜 하심이고 겸손이니, 그 자리에 만복이 깃든다고 한 것입니다.” 아우름의 지혜가 부족할 때 세상은 혼란스러워진다. 세상을 다스리는 제도가 미비하면 문물이 혼탁해지는 것처럼 개인의 지혜가 부족하면 아울러 보듬을 수 있는 여지도 없다. 그런 측면에서 종교는 세상을 향해 모범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발달과 개방지향적인 사회구조에 따라 종교집단도 세상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고 더러 편승하기도 한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불교계는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철저하게 연기의 도리 속에서 세상을 파악하고 행위를 결정지어야 하는 겁니다. 입으로는 숱하게 연기적 질서를 얘기하면서 하는 행위는 그에서 벗어나 사바세상의 불길을 일으키고 있으니 스스로 타들어가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떼거리로 밀어붙이는 세상이라 하지만 그렇게 해서 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세상이 기형화 될수록 나는 바르게 가야한다는 이념이 확고해야 하는 겁니다. 수단과 방법이라는 것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실이 있을 수 없고 궁극이 있을 수 없는데, 더러 목적의식은 간 곳 없고 방법에 낙착되어 본질을 잃는 것을 봅니다. 일의일발(一衣一鉢)의 정신은 꼭 한 벌의 옷과 바리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의일발도 소유일 수 있고 만의만발도 무소유일수 있습니다. 사적(私的)인 입장에서는 10원도 소유이고 공적(公的)인 개념에서 일억 원도 무소유일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데는 정월에 필요한 것이 있고 유월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 어디에 박혀 있느냐하는 것이니 진정한 무소유정신이 늘 성성적적 해야 합니다. 대만의 성운 스님이 한 번의 법회를 위해 대단히 화려하게 장엄하는 법석을 두고 누가 잘못됐다고 하지 않는 것은 그 장엄의 근본 의미가 숭고하기 때문 아닙니까?” 세상은 계산에 의해 돌아간다. 계산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셈으로 따져서는 안 될 부분에서는 철저하게 셈을 버려야 한다. 허정 스님은 셈을 하면 안 되는 관계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부부’를 꼽는다. “부부는 셈을 떠난 한 덩어리입니다. 따지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듬어야 하는 관계 입니다. 물질에 대한 셈이 서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거기서 갈등이 생기면 가정이 곤란 해 지는 겁니다. 부부간에 셈이 없어야 가정이 화목하고 사회가 건강해지고 국가 발전 인류평화라는 거창한 소망들도 이루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근간(根幹)을 살찌우면 지말(枝末)은 풍성해 집니다. 가정이라는 근간, 부부라는 근간이 튼튼해야 합니다. 셈이 없기 위해서는 자기의 고집을 버려야 하니 그게 생활 속에서의 수행입니다. <신심명>의 첫 대목 ‘지도무난(至道無難) 유염간택(唯嫌揀擇)’의 도리를 잘 알잖아요? 결국, 나(我)를 없애는 공부가 근본이 되어야 하고 연기의 질서에 거스르지 않는 삶이 중요한 겁니다. 거기서 모든 공부가 시작되고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인과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고 했다. 뿌리가 부실한데 화려한 꽃과 잘 익은 과일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 하고 작은 노력으로 큰 결과를 기대한다. 중생심에는 연기의 질서를 순종하기보다는 욕망의 성취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집착을 벗어던지는 길은 무엇일까? 허정 스님은 “참회(懺悔)하면 진리를 향해 가는 연기의 길이 보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3독의 풀이 무성하게 자라 바른길은 보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명검은 수없이 달구고 두드리는 가운데 벼리어 지는 것이다. 한 두 번의 담금질로 잘 드는 칼이 만들어질 수 없다. “하루하루의 삶이 자신을 달구고 식히고 두드리는 정진이 될 때 명품인생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심학산의 5월은 황홀지경이다. 도량의 안과 밖을 구별할 것도 없이 꽃들이 가득 피어 있고 잎들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며 울렁울렁 초록의 파도를 치고 있다. 그 초록을 배경으로 앉아계시는 약사여래께서는 가까이로 신도시 공사현장을 살피시고 멀리로는 오두산 전망대 넘어 개성 송악산 자락을 바라보고 계신다. 기도도량의 너른 마당에 꽃그늘이 황홀하다. 허정 스님은... 1965년 동화사로 출가, 의현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76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2년 뒤 법주사 승가대학을 졸업했다. 조계종 총무원 사회국장, 동화사 교무국장, 대구 용연사 주지, 조계사 주지, 서울 북아현동 금련사 주지(창건), 조계종포교원 연수부장, 경찰청 경승 등을 지냈다. 1995년부터 파주 심학산 약천사에서 도량 불사를 하며 포교에 주력하고 있다. (현대불교 신문에서 인용) |
심학산 산행은 땀도 나지 않은채 끝나고 큰스님도 뵙지 못하고 서울로 오려다가
이 근처에 우리 고향의 명물인 의령소바 체인점이 있어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추석 연휴라 그런지 가게 문을 열지 않은 바람에 헛탕을 치고 자유로를 타고 서울로 오는길에
행주산성에 들려서 빠가사리 매운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은 다음에 서울로 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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