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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梵如의 山行記

2013년 정월 초하루에... 예봉산, 적갑산, 운길산을 한바퀴

by 범여(梵如) 2013. 1. 1.

☞산행일자:  2013년 01월 01일

☞산행날씨:  흐린날씨에 눈이 살짝 내림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3km / 6시간 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팔당역-남양주 역사박물관-팔당2리 마을회관-전망대-예봉산-억새밭

                 철문봉-활공장-철쭉 군락지-도곡리 갈림길-적갑산-NO25 송전탑-미덕고개

                 459.3m봉 삼각점-새우젓고개-490m봉-503m봉-운길산-헬기장               

                 수종사-수종사 일주문-시멘트 도로-세계유기농대회정-운길산역

소 재 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조안면

 

새해에는 새로운 각오를 다져보려고 해마다 강남구청에서 진행하는 대모산 해돋이에 참석하려고 했는데

올해는 너무 춥고 눈이 온다고 하여 구청에서 행사를 취소해 버리는 바람에 이틀전에 왕방지맥 1구간을

다 마치지 못하여 마음 한구석에 찝찜함에 있어서 2구간을 진행하려고 차를 가지고 갖다오려고 새벽 5시에

아파트 현관을 나오니 새벽에 꽤많은 눈이 내렸고 계속 내리고 있다.

하는 수 없이 산행을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데 잠은 오질 않는다.

다시 베낭을 메고 9시경에 집을 나서서 지하철을 타고 옥수역에 가서 중앙선을

갈아탄 다음에 팔당역에 도착하여 예봉산, 적갑산, 운길산 코스의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도곡역(09:25)

길이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지하철 계단을 내려오니  승무원들이

새해 복많이 받으라고 인사를 하면서 따뜻한 커피를 타서 손님들에게

권한다. 빈속이라 커피 대신에 우롱차 한잔을 얻어 마시고 지하철에 오른다.

옥수역(09:35)

옥수역에서 팔당가는 중앙선 열차를 갈아탄다.

팔당역(10:30)

약 40분만에 팔당역에 도착하니 이곳은 강가라서 그런지 엄청나게 춥다.

강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옷깃을 다시 다듬고 역사를 나서는데 길이 엄청나게 미끄럽다.

아침에 오는 눈은 그쳤지만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눈이 다시 쏟아질 것만 같다.

남양주 역사 박물관

팔당역 바로옆에 있는 남양주 역사박물관을 지나서 예봉산으로 향한다.

역사 박물관을 지나 굴다리를 통과하여 해장국집에 들려서

아침겸 점심으로 콩나물 해장국을 한그릇을 먹는다.

팔당2리 마을회관

팔당(八堂) 의 유래 

본래 한강가의 넓은 나루이므로 '바다나루', '바다이', '바대이', '바당이' 또는 '팔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팔당 바 댕이'라는 마을의 이름은 강의 양쪽 산세가 험준하고 수려하여 팔선녀가 내려와

 놀던 자리가 여덟 곳이 나 있고 이후 그 자리에 여덟 개의 당을 지어 놓았다고 해서 '팔당'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팔선녀를 낳았기 때문에, 또는 강이 내와 비슷하게 있었는데 양쪽으로 난 나무가 팔자(八字)처럼

 쓰 러져서 '팔당'이라 부른다고도 하는데. 용이 되어 올라가려는 것을 여자가 봐서 부정을 타, 강으로 떨어져

 이무기가 되었다는 전설도 전하고,  '바댕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일제시대 전에는 '바댕이'라 고 불렀고, 그 후 '팔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11:10)

예봉산을 약 7년만에 와본다. 서울에서 가깝긴 하지만 강남에선 접근성이

떨어지다가 보니 생각보다는 그렇게 자주 오지 못하는 산이기도 하다.

이 코스는 예전에는 그렇게 등산객이 많지 않았는데 전철이 용문까지

개통되면서 부쩍 등산객이 많아진 곳으로 예전에 비해서 등로관리는 잘되어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으면 자연이 파괴되는 건 불가분의 관계인지 예전에는

없었던 음식점들이 골짜기마다 많이 생겨있다.

등산 안내판(11:20)

곳곳에 이정표도 잘 설치되어 있고 덤으로 시까지 쓴 나무판도 걸려있다.

사람들이 얼마나 다녔는지 등로는 반질반질하다

안부 능선에 올라서 계속해서 고도를 높이다가 보니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땀이 흐르고 안개에 성에가 끼여 불편하다

예전에 없던 데크목 계단도 보이고...

멋진 낙랑장송 한그루 넘어 한강과 검단산도 보이고...

쌍둥이 소나무를 지나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예봉산 8부능선에 설치되어 있는 전망대에 오르니  한강 건너 하남시로

연결하는 팔당대교와 검단산이 짙은 박무로 인하여 잘 보이질 않는다.

우측에서 올라오는 삼거리를 지나는데 갑자기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갑자기 눈보라가 거세지고 바람이 세차게 부니까.

흘렸던 땀으로 인해 젖은옷이 굳어지는 느낌이다

눈이 많이와서 예봉산 정상아래 매점에서 따뜻한 국물에 감로주 한잔

마시려니 눈을 피하기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북적대는 바람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그냥 정상으로 올라선다.

그래도 예봉산 정상에는 새해 첫날 모 산악회에서 단체로 온 등산객들로 붐빈다.

예봉산(禮峰山:693m:12:18)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와 팔당리 그리고 조안면 시우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산을 위해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예봉산으로 불리워졌다.

원래는 이름이 없었던 산인데 예빈산(禮賓山)의 예(禮)와  봉안(峰安0마을의 봉(峰)자를

따서 예봉산(禮峰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 경기 동부, 강원 중북부 선비들이 한양으로 갈 때 임금이 사는 도성을 향해

신하로서 예를 표해 예봉(禮峰)이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옛부터 마을 사람들이 사랑산으로 부르고 있으며 천마산과 구분하여 큰사랑산이라 하고

수락산 천봉이 불암산을 연결하여 다시 천마산이 되고 다사 갑산이 되어 운길산을  분기봉으로

하여 또다시 예봉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원래 덕소시장의 주산이요 울창한 산림으로 인하여 동막골 부조 연료는 물론

수백년간 한양의 땔감을 동대문을 거쳐 도성안으로 공급하던 중요한 산이였다고 한다 

갑자기 내린 눈으로 인하여 멋진 상고대가 연출되고...

정상에서 인증샷 하나 남기고 서둘러 적갑산으로 향한다.

적갑산으로 향하는 길

예봉산 내리막길은 상당히 미끄럽고 눈이 많이 쌓여있다.

단체로 온 등산객들이 비닐로 돔형 집을 만들어 식사를 하고있다.

Good idea... 정말 멋지다.

예전에 억새밭이 있는 곳에도 비닐하우스 노점상이 생겼다.

국립공원에는 노점상이 다 철거되었는데 이런곳은 그대로 있다.(12:25)

억새밭에서 바라본 눈보라에 휩싸인 예봉산의 모습

철문봉(喆文峰:630m:12:30)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이곳은 정약용, 정약전, 정약전 형제가  本家인 여유당( 조안면 능내리 마재)

에서 집 뒤의 능선을 따라서 이곳까지 학문(文)의 도를 밝혔다(喆)하여

철문봉이란 명산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예봉산~운길산 능선은 다산능선이라고도 한다.  200년 다산 정약용 선생의 진한 재취가 풍겨지는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 형제들과 인연이 많다. 특히 철문봉 정상에는 ‘정약용, 약전, 약종 형제가 집 뒤

능선을 따라 이곳까지 와 학문을 밝힌 곳’이라고 적혀 있다.

다산은 40세 때인 1801년 강진으로 유배생활을 떠나기 전에 약전·약종 형들과

현 팔당호 인근 생가를 나서 능선길을 산책하며 학문에 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약용·약전(귀양지서 사망)의 귀양과 약종의 순교로 삼형제는 이후 함께하지 못하게 된다

 

다산은 생가 앞 두물머리 풍경에 대해 18년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군 다산초당이나 백련사에서

 바라본 강진만의 풍경과 유사해 고향을 생각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두물머리에 팔당호가 생겼지만,

강진만 일부도 간척돼 풍경이 변했다. 생가는 예봉산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에 있다.

다산 정약용 영정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석학이었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초계문신에 발탁되었고, 

성리학의 태두인 성호이익의 제자로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주장을 묶어 “다산학”이라는 독특한 학문을 창조하기도

하였다. 

 수원화성 축조에서 서양식 축성법인 거중기를 제안하는 등 관료로서의 큰 업적을 많이 남겼다.

다산은 관료로서의 업적도 매우 뛰어났지만  그는 정조 사후에 집권세력의 공격을 받아 전남 강진에서 18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를 대표하는 많은 저술을 남기고 후학을 후학을 양성하면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였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보낸 강진은 그의 외가인 윤선도와 윤서두 일가가 터를 잡고있는 지역으로 외가 친척의

도움을 받아다산초당에서 머물며 많은사람들과 교유하고 학문을 익힐수가 있었다.

그는 강진에서 대표적인 저술인  형사사건 지침서라 할 수 있는“흠흠심서”양전제도 개혁을 비롯하여  지방관

역할에 대하여 저술한 “목민심서”, 중앙제도 행정개혁을 주장한 “경세유표”를 저술하였다.

또한 다산초당에서 머물면서 근처에 있는 백련사를 중심으로 초의선사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과도 교류하였고

지역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정약용의 저술은 당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구한말 서양문물 도입과

함께 시대의 변화에 대응한 학문적인 측면에서 재조명되어 그의 저서는 고종을 비롯하여 많은 지식인들에게

널리 익혀졌으며, 20세기초 애국계몽운동과정에서 그의 저서가 많이 소개되었고 오늘날까지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많은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출처: 중앙 박물관) 

철문봉을 떠나면서 착잡한 심정을 금할수가 없다.

다산선생은 유배지 강진에서 ‘하늘을 우러러 백성을 보듬다’라고 하면서

민초를 위한 목민관의 강령을 강조했는데 요즘에는 그런자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공무원들은 자리보존에만 연연하는 느낌이고, 국회의원이라는 자는 오직 자기 이익과

지역구의 예산 챙기기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ㅉㅉㅉ.

다산선생이 아무래도 회초리를 들어야겠다.

내리막길을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서니 활공장이 나타난다.

활공장(12:40)

활공장에서 바라본 와부읍 덕소리(德沼里) 

덕소리에 전체를 일컫는 이름으로 '덕소·떡수'가 있다.

오늘날에 와서 '덕소'라고 불 리며 공식적인 리 이름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보통 '떡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구한말 한강에 큰 못이 있어 서 '덕소'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덕소리에는 '득수리고개' 혹은 '득실 이고개'라고 하는 고개가 있었다고 한다.

율석리와 석실 사이에 있는데, 옛날에 양반이 많이 살던 곳이었고 한양 으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이 곳으로 수레를 끌고 지나갈 때 그 소리가 시끄러워서 양반들이 수레를 들고 지나가게 했다고

해서 '득수리고개'로 불린다고 전한다. ' 득실이고개'라고도 부른다.
한편 덕소리에 있는 마을 가운데 '신촌'이 있는데, 이곳은 을축년 대홍수로 원덕마을이 침수되자,

마을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신촌'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활공장 정상에는 행글라이더들이 사용하는 움막이 있고 풍향계가 있다.

활공장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철쭉 군락지가 나온다.

이곳은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인지 안부능선에는 허리까지

찰만큼 눈이 많이 쌓여있다. 활공장에서 운길산가는 길은 눈이 엄청나다.

돌무더기가 있는 이정표도 지나고...

멋진 소나무가 있는 능선을 지나는데 머리위로는 구조용 헬기가

뱅뱅 돌아 다닌다. 아마도 산에서 응급환자가 생긴 모양이다.

눈 쌓인 암릉을 지나니 적갑산이 나타난다.

이곳은 눈이 많아서 무릎까지 푹푹 빠진다.

적갑산(赤甲山:560m:(13:00)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팔당리와 조안면 진중리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절터가 있어서 적골(절골의 변음)이라고 하였으며 절골산, 적골산이라

불리웠는데 일제시대에 지명을 한문으로 정리하면서 적갑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예전에는 갑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조선시대에 강무(講武)터나 사냥터로 이용되기도 했단다.

평소에 갑옷을 입은 군사들이 훈련하던 곳이라고 해서 갑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가야할 운길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은 등산객이 별로 보이지 않아 호젓하게 산행을 한다.

NO: 25 송전탑(13:20)

세정사 갈림길(13:24)

미덕고개(13:28)

459.4m봉 삼각점(13:30)

새우젖고개 이정표

새우젖고개(13:35 )

우측으로 내려가면 세정사가는 길이고 좌측으로는 천마지맥이 연결되는 능선이다.

이곳은 다산길이라고 하는 둘레길도 만들어져 있다. 직진으로 운길산으로 향한다.

490m봉에서 바라본 운길산의 모습

운길산이 아직도 1.7km나 남았는데 오르락 내리락은 계속된다.

위험한 암를구간이 나오는데 이곳 암릉구간은 산허리를 끼고 돈다.

안부에 오르니 이정표가 나오고 휴계용 의자 2개가 있다. 

암릉사이로 예전에 없었던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다시 위험한 암릉구간을 곡예하듯이 올라간다.

멋진 소나무를 만나고 다시 조금 올라서니...

운길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운길산 정상 이정표

 

운길산 정상에 있는 안내판

인증샷

운길산(雲吉山:610m:14:50)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산으로 순하지도 거칠지도 않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 산에서 구름이 흘러가다 쉬어가는 곳이라 해서

운길산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북한지역의 강원도 금강군 옥밭봉에서 발원하여

화천, 춘천을 거쳐 약 317km를 흘러 내려온  북한강물과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영월,

충주를 거쳐 흘러 내려온 남한강물이서로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산수(山水)가 수려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조곡산(朝谷山)으로 기록되어 있어나 일제때 예봉산의 옛이름인

운길산을 가져와서 그것이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운길산 정상에서 예봉산을 바라보니 안개에 휩싸여 신령스럽기만 하다.

오늘 내가 지나온 능선의 모습

운길산 정상에서 빵하나와 커피한잔을 마시고 10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에 수종사로 향한다. 내리막길은 엄청나게 미끄럽다.

조금을 내려오니 헬기장이 나타나고...

헬기장 옆에는 시그널이 주렁주렁... 마치 티베트에 온 것처럼 느껴진다.

헬기장의 모습(15:05)

헬기장에서 치고 오르다가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생활에 유익한 산림상식 안내판이 나온다.

다시 급경사로 내려온다. 예전에 없던 스텐난간을 따라 내려와 좌측의 수종사로 향한다.

수종사에 들어서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도량 안으로 들어선다.(15:20)

도량으로 접어드니 좌측 오른쪽으로 약사전과 산신각이 있다.

바로 그 옆에는 응진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수종사 종무소 역할을 하는 선불장(選佛場)의 모습

대웅보전 좌측에는 부도와 5층 석탑(水鐘寺五層石塔)이 자리를 잡고 있다.

 

수종사오층석탑(水鐘寺五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

수종사에 서 있는 8각 5층 석탑이다. 탑은 여러 단을 쌓아 기단(基壇)을 삼고 그 위에 5층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으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특이하게도 불상의 대좌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기단부는 엎어놓은 연꽃무늬와 솟은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화려한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은 위로 올라가면서 규모가 점차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며, 처마는 느린 곡선미를 보이고 있다.

 꼭대기에는 삼각형무늬가 새겨진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과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절의 중창시기인 조선 전기의 석탑으로 추측된다. 1957년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탑신에서

불상, 보살상 등 18점의 유물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남양주수종사부도(南楊州水鍾寺浮屠:시도유형문화재 157호)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부도는 운길산에 자리한 수종사에 있는데,

수종사는 조선 세조 4년(1458)에 왕명에 의해 중창된 사찰이다. 전체적으로 8각을 기본으로 하여, 2단을 이루는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부는 일반적으로 상·중·하의 3단으로 구성되는데

 이 부도는 간략하게 2개의 돌로만 마련한 것이 특이하다. 탑신의 몸돌은 둥근 형태가 변하여 거의 사각형에 가깝고,

 용의 모습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겼다. 지붕돌은 두꺼운 편이고, 처마는 느린 U자형을 이룬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로 보주(寶珠:구슬모양 장식), 보륜(寶輪:수레바퀴모양 장식) 등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지붕돌 윗면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조선 세종 21년(1439) 왕실에서 뜻을 모아 이 부도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부도 안에서 고려시대 청자로 만든 항아리와 은으로 만들어 금을 입힌 6각의 단지(보물 제259호)를 발견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수종사 오층석탑 안내판 

수종사 대웅보전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459년(세조 5) 세조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세조가 금강산을 구경하고 수로(水路)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던 도중

양수리(兩水里)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와 기이하게 여겨 다음날 조사해보니

운길산에 고찰(古刹)의 유지(遺址)가 있다고 하여 가보았다.

 

그 바위굴 속에서 16나한을 발견했으며

굴 속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린 것임을 알게 되어,

이곳에 돌계단을 쌓고 절을 지어 수종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절에는 현재 1439년(세종 21)에 세워진

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창건은 그 이전이며

세조연간에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뒤 조선 말기에 고종이 풍계(楓溪 : 楓漢)에게 비용을 하사하여

중창하게 했고, 1939년에는 태욱(泰旭)이 중수했으며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4년에 주지 장혜광(張慧光)이

대웅보전 등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나한전·약사전·경학원·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수종사부도내유물(보물 제259호)이 있고,

 

조선시대 금동불감(金銅佛龕)과 금동불·보살상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수종사다보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이 있다.

수종사 대웅보전 삼존불

대웅보전에 들려서 계사년 새해의 소원을 비는 예를 올리고 해탈문 쪽으로 향한다.

수종사 경학원의 모습

초의, 다산, 추사의 걸음은 운길산 수종사에 멈추었다.

세조의 불심을 재촉케 하고 사가정으로 하여금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부르게 한

경기 조안의 땅 수종사는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에서 비롯한 북한강과 치악산 속리산

태백산에서 비롯한 남한강을 합수케 하여 물안개가득 수종사의 다수를 법무와 함께 길어 올린다.

수종사는 천녀의 향기를 품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온 누리에 울리며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온 셈이다.

수종사는 신라때 지은 고사(古寺)인데절에는 샘이 잇어 돌 틈으로 흘러나와 땅에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낸다.

가파른 돌비탈길 넝쿨로 덮어

절 집 찾아가는 길 못 찾겠구나

산그늘에  묵은 잔설 아직도 남아있고

맑은 강물 아침 안개에 흩어지누나

샘물은 돌구멍에서 솟아 나오고

종소린 깊은 숲서 울려 퍼진다.

내 유람길 예서부터 비롯되었으니

숨은 기약 어이해 다시 어기랴

 

다산 정약용의 유수종사기(游水鐘寺記)에서

수종사의 해탈문이 나온다. 이쪽은 등산객들이 그리많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

해탈문을 지나니 우측에는 스님들의 요사채인듯한 건물이 나오고

수종사사적기를 기록한 비석이 나온다. 비석 옆에는 커나란 은행나무가 있고...

수종사 은행나무대웅전을 지나서 해탈문을 나서니 북한강이 한 눈에 들어오고

수종사 사적비와 함께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조선 세조가 수종사 창건 기념으로 심었다는 거대한 은행나무. 수령이 550년을 넘겼고 나무 둘레만 7m가 넘는다.

은행나무에서  바라본 북한강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북한강은 꽁꽁 얼어있고 강건너 화야산과 중미산은 눈으로 덮혀있다.

양수리(兩水里)라 불리는 두물머리도 온통 은빛세상이다.

은행나무 옆 능선에는 오성(이항복)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 선생 표지판이 있다.

운길산 수종사와 한음 이덕형 선생

한음 이덕형(1561∼1613) 선생은 산수가 빼어난 운길산을 사랑하시어 바쁜 중앙 정치의

와중에도 여가를 내어 사제촌의 한음 선생을 인사차 찾아온 덕인스님에게 준 시에서 선생과

스님과 사제촌을 둘러싼 겨울 풍광이 그대로 드러난다.

 

운길산 스님이 사립문을 두드리네(僧從西庵 拍柴關)

앞 개울 얼어 붙고 온 산은 백설인데(凍合前溪 雪滿山)

만첩청산에 쌍련대매었네(萬疊靑螺 雙練帶)

늘그막의 한가로움 누려봄 즉 하련만(不妨分占 蒼年閑)

 

선생은 7년여의 임진왜란을 수습하는데 큰 공훈을 세웠지만 극심한 정쟁에서 오는 국정의 혼미에 상심하셨다.

봄날이가는 어느 초여름 선생은 이곳 수종사를 찾아 주지스님에게 자신의 우국충정에서 오는

자신의 괴로움 심경을 드러내는 시를 주었셨다.

 

산들바람 일고 옅은 구름비는 개었건만(風輕雲淡 雨晴時)

사립문 향하는 걸음걸이 다시금 더디네(起向柴門 步更遲)

구십일의 봄날은 시름 속에 보내며(九十日春 愁裏過)

운길산 꽃구경은 시기를 또 놓쳤구나(又孤西庵 賞花期)

 

오른편 사제촌(송촌리) 한음마을에는 500년 조선역사상 최연소로 31세에 대제학에 오르고

42세에 영의정에 오르신 선생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후 삶을 마감하신 별서터 및 하마석 등의

유적이 그대로 있어 아련한 선생의 발자취를 가늠해 볼수 있다.

수종사 삼정헌(三鼎軒)이곳 수종사에 가장 유명세를 치르는 곳이다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가 낙향한  다산 정약용 선생을 찾을 때면 언제나

수종사에서 차를 함께 마셨다는 기록이 전해지듯이 운길산  수종사는 차향의 산실로 이름이 높다.

2000 3월부터 무료로 개방된 수종사 삼정헌을 찾은 시민들이 주변 풍광과 어우러진

두물머리를 지척에 두고 차향에 젖어 들어 있다.

 

오랫만에 들려서 차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포기한다.

수종사 마당에서 바라본 두물머리

수종사 마당 담벼락은 낮고 아담하다. 그 덕분에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수종사 경내를 두루두루 여유롭게 구경을 하고 운길산역으로 향한다

삼정헌에 차 한잔 마시지 못한 아쉬움을 삼정헌 아래에 있는 약수

한바가지로 대신하고 수종사를 나온다.

수종사 도량을 나와서 운길산역으로 향한다.

수종사 불이문

수종사 도량을 참배하고 다시 운길산역으로 가기 위해서

도량을 나와 도로로 내려오는데 예전에 없었던 불이문(不二門)을 만난다.

 

불이문(不二門)은  중생과 부처, 미망과 깨달음,  생사와 열반 등 온갖 상대적인

개념들을 초월하여 모든것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경지에 계신다는  사실을

공간적으로 상징해 놓은것이 불이문이 아닌가?

 

절로 들어가는세개의문중에마지막문으로 상대적이고차별적인상태를초월하여

절대적이고 평등한 진리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을 상징하는 문이다.

하산길 도로에서 바라본 수종사의 모습

불이문을 지나 일주문 내려오기전에 인자하신 미륵부처님을 만난다.

풍수지리가들이 우리나라에서 氣가 세기로 유명한 이곳에서 기를 받아

올해는 지난해 힘든 모든것을 잊어버리고 싶다.

미륵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내려오니 일주문이 나온다.

 

수종사의 가람 문의 배치도는 좀 특이하다.

대체적으로 가람입구에 일주문이 있고 그 다음에 천왕문이 있고

불이문이 있는데, 이곳은 가운데 있어야 할 천왕문이 없다.

수종사 일주문(15:40)

1458년(세조4년)에 세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금강산 구경을 다녀오다가

이수두(二水頭 -  兩水里)에서 하룻밤을 묵게되어 깊은 잠에 빠졌다.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에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자 뜻밖에도

바위굴이 있고 그 굴속에는 18나한(羅漢)이 있었는데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 나왔으므로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水鐘寺)

라고 불렀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세계 유기농 대회정(16:00)

급경사의 포장도로를 내려오다가 우측 능선으로 접어드니 예전에 없었던

2층으로 된 2011 세계 유기농 대회정이란 팔각정이  나온다.

운길산역으로 향하는 길

운길산역(16:10)

운길산역에서 22분을 기다려 전철을 타고 구리역에서 내려서 강변역가는

버스를 타고와서 2호선 지하철을 갈아타고 집으로 오는길은 정말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