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3년 10월 10일
☞ 산행날씨: 맑음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2km / 3시간 5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양재동 화물터미널-개나라골 갈림길-바람골 갈림길-옥녀봉-원터골 갈림길-매봉삼거리
옛골 갈림길-돌문바위-청계산 충혼비-매바위-매봉-혈읍재-망경대-금정수-석기봉
헬기장1-헬기장2-절골능선 갈림길-헬기장3-이수봉-군부대-깔딱고개-목배등 삼거리
천수 약수터-어둔골-청계산 당산-정토사-옛골
☞ 소 재 지: 서울 서초구 / 경기도 과천시, 의왕시, 성남시 수정구
이상하게 가슴이 참으로 답답하다.
지난 3월에 작업한 현장에서 꽤나 많은 자금이회수되지 않아 힘이들고,
그 바람에 복잡적인 요인으로 인해 머리가 너무 복잡하여 점심 식사후에
머리도 식힐겸 베낭에 물한통과 자켓, 매트 하나만 넣어 가까운 청계산으로 향한다.
우리집 주위로는 대모산과 구룡산, 인능산과 청계산이 있어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수 있어 좋다
오늘 산행구간 지도
집에서 도곡역까지 버스를 타고가서 도곡역에서 양재동 화물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탄다.
오랫만에 옥녀봉 능선을 타고 매봉, 이수봉 코스를 타 보려고...
양재동 양곡도매시장(14:30)
오랫만에 이곳을 와보니 예전과 달리 桑田碧海가 된 느낌이다.
예전에 없었던 서울추모공원(화장터)과 염곡동 사거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헌릉로를
연결되는 우회도로가 시원스럽게 뚫리는 바람에 등로 입구가 애매하게 되어 버렸다.
조금 올라서니 예전의 등로였던 밤나무 밭이 나오고...
등로에서 만난 자리공
밤나무단지를 지나면서 만난 클쿠버섯
옥녀봉 가는 길(14:50)
예전에 등로옆에 있던 묘지는 移葬을 하였는지 봉분은 없고 묘지터만 있다.
우측으론 과천시 주암동 장군마을 내려가는 길이 보이고...
개나리골 갈림길(14:55)
입맞춤길(15:00)
예전에 없던 이정표에 입맞춤길이라 표시를 해놓고 우측에 돌탑을 3개를 쌓아놨다
화물터미널에서 옥녀봉 가기 직전에 특이한 지명을 마주하게 되는데,
여름에 나무잎이 무성하면 안이 보이지 않을 으슥한 곳에 입맞춤을 위한 장소일까... 궁금하기만 하다
바람골 갈림길(15:02)
원지동은 현재 서초구의 남쪽 끝 청계산 옥녀봉 아래 계곡마을인 데, 탄천의 지류인 여의천이 흐르고 있다.
이 개천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세원(신원동)에서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는 청계산 입구 에 조그만 마을
바람굴이 있는데 이곳은 산이 높고 바람이 세게 분다고 하여 이 이름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옥녀봉(375m:15:20)
옥녀봉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漢詩 무이구곡가 중 옥녀봉의 영향을 받아서 지명한 것이라고 한다.
옥녀봉 정상에 서니 관악산과 과천시내가 보이지만 박무로 인해 모든게 흐리기만 하다.
조선의 최고 명필이었던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린 뒤 옥녀봉 아래에서 만년을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옛 문서에는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인 판서 김노경(金魯敬)의 묘터가 있던 곳이 이곳 옥녀봉이란다.
옥녀봉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이 있고 휴게용 의자와 막걸리 장사가 있고 우측으로 관악산이 보인다
가야할 매봉이 보이고...
멋진 소나무도 예전 그대로이다.
원터골 갈림길(15:25)
‘원(院)’이란 조선시대에 여행자 숙소를 위해 원이 있는데서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말을타고 원할하게 이동하기 위한 ‘역(驛)’과 사람의 이동에 도움을 주기위한
‘원(院)’이 있었는데 한양(서울)의 대표적인 역으로는 청파역과 노원역,원으로는 이태원,
홍제원, 보제원, 전관원 등이 있었다.
이 아래에 있는 서초구 원지동 원터마을도 그러한 院이 있었던 자리로 1970년대까지도
원의 형태를 나타내는 석축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우리나라 아웃도어 시장의 바로미터가 될 정도로 커다란 등산용품샵이 많다.
등로에는 식별이 불가한 삼각점을 만난다.
오지 산행을 할때는 삼각점이 등대역할을 하는 소중한 것인데
이곳을 다니는 산객들은 관심조차 주지 않는 모양이다.
서서히 이곳도 가을로 접어든다.
同病相憐
저 나무는 어찌 내 맘과 같을까. 찢어지는 아픔을...
매봉사거리(15:30)
난 이곳에서 매봉 오르는 1,500여개나 되는 계단이 싫어서 이곳을 다니지 않는다.
원터골 갈림길에서 우회하여 과천 서울대공원 능선으로 오르는 길을 가려는데
나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그곳은 원형 철조망으로 이,삼중으로 설치해놔 그곳으로
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기맥이나 지맥길 같으면 어떡하던 가겠지만 목적 산행도 아닌데 하고 계단으로 오른다.
사실 저 나무 계단을 산꾼들의 도가니를 망가트리는 주범이라 정말 싫다.
지나온 옥녀봉의 모습
청계산의 유래 표지판
매봉 삼거리 올라가기 직전 능선에도 식별할 수 없는 삼각점을 만나고...
매봉 삼거리에 있는 감시카메라
매봉 삼거리(15:45)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원터골과 천개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정상에는 산불감시 카메라에 산객들을 위한 벤치가 있다.
전망대(493m:15:48)
예전에 헬기장이던 곳을 이제는 전망대 데크목으로 만들어 산객을 쉴 수 있는
광장으로 만들어 놨고 헬기장 가운데 삼각점이 있다.
엉터리 삼각점 표시판
스텐레스 표지판에는 삼각점 (△수원404) 표시되어 있는데 삼각점(△407 매설, 1968 건설부)
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똑같은 삼각점인데 표시가 다른데 우리나라 공무원 수준을 보는것 같아 씁쓰레하다.
돌문바위(15:52)
기(氣)란 무엇인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인 기운을 말한다.
기(氣)는 생활 활동의 힘이요, 원기요, 정기, 생기, 기력을 말한다.
범여의 아지트
예전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힘이들면 찾아와 쉬는 바위를 오랫만에 와서 매트를 펴고
누워서 20분정도 휴식을 취한다... 그렀다고 답답함을 풀 수야 없겠지만.
20분을 누워 있으니 옷이 땀에 젖어서 그런지 추이가 엄습해와 매트를 접어
베낭에 넣고 매봉으로 향한다.
청계산 충혼비(16:15)
그대들의 흘린 뜨거운 피와 忠魂의 얼로
祖國은 살아 크게 숨쉬나니
그대들의 靈魂은 祖國의 山河에서
永遠히 살아 꽃피리라.
그대들은 祖國을 사랑하고
또한 祖國은 그대들을 사랑하노니
거룩한 英靈들이여
祖國의 품속에 고이 잠드소서.
1985년 6월 1일 오후 2시 49분
이곳은 우리의 영공(領空) 수호를 위해서 산화한 장소로 여기서 순직한 용사는 공군 대령을 위시해서
공군이 4명, 육군 대위를 포함해서 49명이 육군인데 일등병만도 44명이 순직하였다고 한다
1982년 비행기 추락으로 숨진 충혼비를 처음으로 참배하고 매봉으로 향한다.
매봉으로 향하는 등로에는 평일에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산객들은 별로 없다.
올라가는 사람은 나혼자 뿐이고, 내려오는 사람만 간간히 보인다.
매바위(578m:16:15)
매바위에서 바라본 우리집(개포동)쪽의 모습
매봉가는 길에서 만난 창수氏
매바위에서 매봉으로 향하는데 매봉아래서 막걸리파는 창수氏를 만난다.
평일이라 일찍 퇴근을 하는 모양이다... 막걸리 한잔 먹으려는데 벌써
가느냐고 하니까 “행님은 지금 시간이 몇신데”하면서 내려간다.
오랫만에 만났는데 얼굴은 좋아 보인다
청계산 매봉(鷹峰:582.5m:16:18)
서울 서초구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과천시에 걸쳐 있는 봉우리로 청계산에서 높이는
망경대보다 낮지만 망경대는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청계산 주봉으로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매처럼 보인다고 해서 매봉(鷹峰)이라고 한다.
청계산의 유래를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산천조에 청계산(淸溪山)이라 되어 있고,
관천현 산천조에는 청계산이라 쓰고 일명 청룡산(靑龍山)이라 한다고 써있다.
과천읍지에도 이러한 내용이 있다.
좌청룡 우백호의 개념으로 오른편에 있는 관악산을 백호산이라 부르고,
왼편에 있는 청계산을 청룡산이라 불렀을 것이다.
17세기에 세워진 청계사 사적비 등 여러 곳에 청룡산이라 되어 있고,
택리지 산경표 대동여지도 등에는 청계산(靑谿山)이라 되어 있다 한다.
맑을 청(淸)자가 아니라 푸를 청(靑)자를 썼고, 시내라는 뜻이 같기는
하지만 골 곡(谷)자가 붙은 계(谿)자를 쓴 것이다. 옛날 청룡이
이 산의 허리를 뚫고 나와 하늘로 올라가서 청룡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 과천에 있는 막계동은 맑은 개울이 있다 해서 '맑은 개울', '맑은 계곡'이 '막개'가 되고
한자로 '청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 또는 시내가 있는 산' 이라는 뜻의
청계산의 이름이 예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계산은 또 청제산(靑帝山), 청청산(靑靑山), 청한산(靑漢山)으로 쓰인 기록도 있다 한다.
맑고 깨끗한 곳을 선비들은 즐겨 찾는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분인 목은 이색이 이 산에서 숨어 살았고,
조선조 연산군 때 일두 정여창도 이 산자락에 숨어 살며 무오사화의 고비 때만은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린 뒤 옥녀봉 아래에서 만년을 지냈다고 한다.
매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지나온 옥녀봉의 모습
오늘은 짙은 박무로 인하여 서울시내가 흐릿하게만 보인다.
지금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든게 답답하기만 하다.
셀카로 인증샷을 남기고...
옛골까지 일몰전에 가려면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서둘러 길을 나선다.
매봉에서 바라본 망경대의 모습
매봉 정상의 소나무들도 예전 그대로인데 나만 자꾸 변하는 것 같다.
창수氏 막걸리집
혈읍재 가는길에는 이런 말뚝을 계속 만난다.
서울 근교 산이라 길은 반질반질하고 인간들의 등쌀에 나무뿌리들이 드러나 안쓰럽기만 하다.
혈읍재(血泣峙:16:30)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과 과천 서울 대공원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역사적 질곡이 많은 고개이다.
그리고 얼마전에 돌아가신 작가 최인호 선생이 즐겨 다니던 고개라고 한다.
혈읍재의 유래
정여창이 무오사화를 피하여 이 산에 숨어들던 중 스승인 김종직이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고 피(血)눈물을 흘리면서 울면서(泣) 넘었다는 고개이다.
조선 전기 정몽주, 김굉필과 함께 성리학의 대가였던 일두(一蠹) 정여창 선생은
성리학적 이상 국가 실현이 좌절되자 망경대 아래 하늘샘(금정수터)에 은거했다.
그가 은거지인 금정수에 가기 위해 이 고개를 넘다 통분해 울었는데 그 피울음 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 하여 후학인 정구(鄭逑)가 혈읍재라 명명했다.
정여창 선생은 1498년 무오사화로 함경북도 종성에 유배되어, 1504년(연산 10년)에 사사되었다.
그 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시신이 찢기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망경대 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매봉의 모습
망경대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군부대
망경대(望京臺:618m:16:35)
성남시 수정구와 과천시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청계산에서 가장 높으며
정상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 주봉 역할을 못하고 있다.
청계산의 주봉 망경대(望京臺)의 옛 이름은 하늘 아래 만 가지의 경승을 감상할 만한 터라고 해서 만경대(萬景臺)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고려 유신들이 맥수지탄(麥秀之嘆)하면서 고려의 도읍지 개성을 바라보던 곳이라 하여 망경대(望京臺)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수봉 건너편에 있는 국사봉(國思峰, 538m)도 연관된다.
나라가 망하자 목은 이색 같은 우국지사 고려 유신들이 청계산에 은거하여 살 때
이 봉에 올라가서 옛 나라('國)를, 생각(思)'하였다 해서 국사봉(國思峰)이라 했다는 것이다.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목은 이색이 지은 이 시조에서의 상징 의미는 다음과 같다.
'白雪': 고려 유신들/ 구름: 조선에 충성하던 신흥 세력/ 매화: 고려 충신들/ 석양: 고려 멸망
이곳의 원래 이름은 망경봉이였는데 망경대로 이름이 바뀐 것은
고려말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분개한 정공산, 이색, 조윤, 변계량 등고려 유신들이
이 바위봉우리에서 망한 고려의 서울(개성)을 바라보며 그리워한 터라 해서 정여창이 고쳐 불렀다 한다.
망경대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대공원
현재 청계산 아래엔 동물원이 생겨 온갖 동물이 있지만, 청계산은 예로부터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짐승이 많아 ‘왕의 사냥터’로 유명했다. 단종은 청계산에서 두 번 사냥했고, 세조‧성종은
청계산에 와서 주로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고 한다. ‘세조실록’에 보면 ‘짐승 잡은 것이 많았다’
‘새를 잡은 것이 많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이들이 잡은 동물의 종류로는 사슴 노루 멧돼지 토끼 등이 있다.
연산군은 청계산에서 활 쏘고 사냥하는 것을 즐긴 대표적인 왕이었다.
1506년(중종 1년) 경기 관찰사 윤금손이 “청계산 기슭에 나무가 빽빽해 도적의 소굴이 되었으니,
나무를 베어 소통시키소서”라고 아뢰니 왕이 그리하라고 명한 기록이 있다.
1594년(선조 27년)에는 30세의 송유진이란 자가 속리산에서 나와 도적의 무리를 모아 청계산에서 주로 머물렀다.
당시 그를 따르는 무리는 무려 2000여 명에 달했다. 서울의 서얼 출신이었던 송유진은 자칭 의병대장이라 칭하며
“나라에서 소인들만 등용한다” “어진 수령은 쫓겨나고 무능력한 사람이 등용된다”며 역모를 꾀했으나
송유진을 포함해 주도자 8명(오원종, 김천수, 유춘복, 김언상, 송만복, 이추, 김영)은 모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반면 청계산은 고려 충신 조윤이나 정여창 선생의 일화에서 보듯 충신과 대학자가 머물던 ‘은둔과 지조의 땅’이기도 했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명인 목은 이색이 이 산에서 숨어 살았고,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린 뒤 옥녀봉 아래에서 말년을 지냈다.
망경대에 내려서서 군부대의 철조망을 돌아서 위로 오르지 않고 예전에 혼자서
청계산을 탈 때 일반 산객들이 잘 다니지 않는 마왕굴과 금정수(하늘샘)쪽으로 향한다.
능선 위로는 좌측의 망경대 부대와 우측의 석기봉이 보인다.
마왕굴(16:45)
망경대에서 내려와 군부대 철조망을 끼고 오르지 않고 우측 아래로 내려서면 커다란 암릉 아래에
2개의 굴이 있는데 좌측의 굴이 마왕굴이고 우측에 물이 있는곳 금정수(金井水)이다.
이곳에는 ‘과천문화를 사랑하는모임(과사모)’ 에서 “정여창”에 대한 설명을 붙혀놨다.
오막난이굴샘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고려가 망하기 직전에 맥(貘: 짐승이름, 표범의 딴 이름, 북방민족)이라는
이상하게 생긴 짐승이 떼를 지어 이 굴로 들어갔다고 해 오막난이굴로 불린 것에 유래한다.
마왕굴은 마왕과 관련된 것으로 전해지나 내력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금정수(金井水)
이곳은 행정구역은 과천시 막계동으로 청계산의 서쪽으로
금정수는 하늘 아래 있다 하여 하늘샘이라고도 한다.
바로 옆에있는 금정수에는 최근에 비가 많이 온 탓인지 깨끗한 물이 많이 고여있다.
우리 선조들의 옛 역사를 생각하며 수통에 물을 가득채워 마신다.
금정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고려말,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분개한 정공산, 이색, 조윤, 변계량 등의 우국절사들이 청계사와
망경대, 금정수(金井水)에 숨어들어 고려의 국권회복을 꾀했다(-참길 향토사 연구회 전고).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여창이 스승인 김 종직이 부관참시 당하였다는 소식에 피(血)눈물을 흘리며(泣)
넘었다는 혈읍재(血泣峙)를 지나 망경대 바로 밑에 샘이 있는데 연산군 시대에 정여창이 은거했다는 곳이다.
이 약수는 정여창이 사사(賜死)되자 핏빛으로 변했다가 이내 금빛으로 변하였다 한다.
또 이곳은 1390년 대 고려말 충신 송산(松山) 조견 선생이 흘러나오는 샘물로 갈증을 풀고 쉬어가던 곳이다.
고려가 망하자 두류산(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자를 종견(從犬)이라 하였다.
이는 나라가 망했어도 죽지 않음이 개(犬)가 주인을 따른다(從)는 뜻을 취해서다.
이태조가 공의 절개를 찬양하여 호조판서를 면하였으나 사양하였고, 그의 형 조준과 함께 청계사로
찾아와서 도와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절의를 지키고 수락산 송산마을로 옮겨 은거하다 생애를 마쳤다.
(마왕굴 안내 표지 '송산 조견 선생과 마왕굴')
시원한 샘물 한모금을 마시고 다시 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 암릉을 올라 석기봉으로 향한다.
석기봉(石基峰:608m:16:48)
청계산 봉우리중에 2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망경대와 마주보고 있다.
석기봉의 유래는 망경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에 의해 영문낙서가 심해지자
향토사학자들이 석기봉(石基峰)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좀 명분이 어색하다.
석기봉 아래 헬기장(16:52)
석기봉 헬기장에서 바라본 망경대와 석기봉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헤드렌턴을 가져오지 않아서 맘이 급해진다.
옛골까지 거리가 5.5km 정도 남았고 내리막이니... 이리저리 시간 계산에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부지런히 걷는수 밖에...
두번째 헬기장(16:58)
절골(寺峴) 삼거리(17:02)
부지런히 나무계단을 따라 절골 삼거리에 오르니 아직도 막걸리 장사가 있다.
목이 마른터라 어찌나 반갑던지 걸쭉하게 서너잔을 걸치니 배도 부르고 너무 좋다.
마지막 손님이라 그런지 막걸리값을 싸게 해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이수봉으로 향한다.
맛있게 마신 막걸리
이곳에서 망경대를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조견선생의 표지판이 있다.
고려가 멸망하고 이씨왕조가 들어서자 거지같은 차림에 초라한 선비가 망경대에 오른후에
만경(萬京)이 망경(望京)으로 바뀌었으니 그가 바로 고려말엽의 충신 조견(趙遣:본명:趙胤)이었다.
조견은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趙浚)의 아우로 이색, 길재, 원천석 등과 함께 고려를 빛내
명유(名儒)이자 충신이었다. 그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황급히
두류산(頭流山: 지금의 지리산)으로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호조전서 교지와 개국공신
2등으로 평안군을 봉한다는 교서를 내렸으나 이를 거절하고 “송산에서 고사리 캐먹는 것이 소원이요
성인(임금)의 신하되는 걸 원치 않는다” 하면서 이름을 조윤에서 조견으로 자를 종견(從犬)으로 고쳤다.
나라가 망했는데 구차하게 목숨만 살아있으니 개와 같다하여 견으로 고치고 개도 주인을 연모하고
의리를 쫒는다고 해서 자를 종견(從犬)으로 고친 것이다.
그후 그는 두류산에서 청계산으로 거쳐를 옮겼고 이곳은 증조부인 조인규가 중창한 청계사가 있고
영정을 모셔둔 영당이기도 하다.
이 청계산 산정에 올라 송경(松京)을 보고 통곡하므로 그후부터 사람들은 만경대(萬京臺)를
망경대(望京臺)라 불렀다고 한다.
조견이 청계산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 이성계는 친히 청계산을 찾아 그에게 조선왕조에
들어와 같이 일하기를 권했으나 멀리 종경(終境: 땅의 경계가 끝나는 먼지 점)만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하지않자, 조견의 마음이 금석(金石)같음을 간파한 이성계는 그가 울던 자리에
초막을 지어주었으나 이를 마다한 조견은 곧 청계산을 떠났다고 하며 바로 초막이 있었던
자리가 지금의 망경대라고 한다.
헬기장(17:08)
웬 의왕대간 ?
이수봉에서 청계사까지의 구간은 엄연한 절골능선이란 번듯한 이름이 있는데
의왕시에서 설치한 표지판에 의왕대간이라 기록되어 있다.
의왕시 공무원 나리들! 번듯한 이름을 두고 뭔 돈짓거리야?
의왕시 재정자립도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쓸데없는 돈쓰지마소.
꼭 하고 싶으면 지리나 역사공부 제대로 좀하고 하소.
大幹이란 단어는 아무데나 붙이는 거 아니요
이수봉(貳壽峰:545m:17:15)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과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상적동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조선 조연산군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 선생이 스승 감종직과 벗 김굉필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 때 이 산에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
무오사화는 어떤 사화(士禍)이며 정여창 선생에 대해 알아보면...
조선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찬위(簒位)할 때 이를 도와 막강한 세력을 잡은 파에
정인지, 신숙주, 최항, 권람, 강희맹 등 훈구파(勳舊派)가 있었다.
이에 맞서던 파로 전원에 묻혀 유학을 공부하면서 도학적인 유교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던
사림파(士林派)가 있었는데 고려의 유신 길재의 제자로 영남 유학의 사종
김종직과 김굉필, 정여창, 조위, 김일손, 유호인 등이다.
이 두 파들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사림파는 훈구파를 욕심 많은 소인배(小人輩)라 하였고,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이라 하며 앙앙불락하였다.
조선 연산군 4년에 훈구파 유자광이 성종실록에 실린 김종직이 쓴 사초의 <弔義帝文>이라는 글을 트집 잡아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이 글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은근히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은 평시에 선왕인 성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사림파를 좋지 않게 보던 참이라, 이는 김종직( 金宗直)이 선동한 것이라는 훈구파의 말에 격분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이에 연루되어 그의 문하 정여창,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유배 후 사사하였다.
이것이 4대 사화의 최초인 무오사화(戊午士禍)라 한다.
이수봉에서 늦었지만 셀카로 인증샷을 남기고...
이수봉
이수봉을 조금 지나니 에전엔 없었던 kt 이동통신 중계기지도 보이고...
군부대 철책선에서 좌.우 어디로가나 원형으로 돌아서 만나지만 난 북쪽으로 간다.
북쪽으로 가서 완전히 돌지 않고 좌측 능선으로 내려서서 산객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목배등 코스로 향한다.
평소에 자주 다니던 철쭉능선을 포기하고 목배등을 지나 어둔골로 하여 정토사로 내려서는 코스라
정말 이곳은 오랫만에 걸어본다.
이 능선은 목배등의 깔닥고개라 부르는 곳인데 어둔골에서 목배등으로 오르는 곳이 급경사라서
내려갈 때는 비교적 수월하나, 예전에 없던 나무 계단을 많이 만들어놔서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깔닥고개 구조목 표시판
이곳도 구조목과 이정목의 거리가 들쭉날쭉 엿장수 맘대로다.
너희들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얘기인 모양이다
깔닥고개에서 목배등 삼거리 내려가는 길엔 예전에 없던 계단이 많다.
목배등 삼거리(17:30)
목배등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시원한 계곡이 범여를 반긴다.
천수 약수터(17:40)
다리가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한다. 시간이 늦어 속보로 걸었더니만 무리를 한 모양이다.
요즘에 피로한 때문인지 아님 산행에 무리한 탓인지 요즘 계속해서 밤에 쥐가난다.
지난번 여친이 하는 얘기... 산행을 무리해서 그렀단다. 휴식이 필요한 모양이다.
어둔골(17:50)
청계산(淸溪山)은 이름 그대로 계곡을 따라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청계산은 산의 크기에 비해 원터골, 약초샘골, 어둔골, 청계골 등 계곡이 많다.
맑은물이 흐르는 어둔골 계곡 옆에는 멋진 직벽이 있다.
두번째 정자를 지나 옛골로 내려간다.
상적동(옛골) 주민들이 음력 정월에 청계산 산신제를 지내는 곳도 만나고...
청계산 숲길 안내센터를 지나니 음식점들이 나타나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들이 전혀없다
정토사(18:05)
내가 다니는 사찰이다. 답답함을 털어내는데는 절만큼 좋은곳은 없다.
극락전에 들려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나오니 사찰 소임을 맡고있는
거사님이 늦은 시간이 왠일이냐면서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러면서 내가 은사스님을 만나러 온 줄 알고 주지스님 학교에서
안오셨다고 하신다.
내가 오늘 스님뵈러 오지않고 산에 갔다가 들렸다고 하니 조심해서 가라고 한다.
옛골
이 지역은 호걸들이 피리를 불며 유람하던 곳이라 하여 적촌(笛村), 저푸리, 적취리라 하였다. 저푸리를 중심으로 노상
동(路上洞)[옛골, 禮谷]과 노하동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상동의 ‘상(上)’자와 적취리(笛吹里)에서
‘적(笛)’자를 취하여 상적동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일설에는 인근에 살던 덕수이씨네의 잦은 과거급제[등과(登科)]로
피리소리가 끊이지 않아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한다.
옛골토성(18:20)
옛골토성 권회장님과는 개포동에서 30여년을 같이 모임을 하는 사이다
오늘은 단체손님이 많은 탓이지 다들 정신이 없다.
이 식당 매니저인 박과장이 ‘오라버니 오늘 쉬는날도 아닌데 왠일이냐’ 하면서 반갑게 대한다.
해장국에 막걸리 한병을 시켜서 먹고는 식대를 게산하러 카운터에 가니
카운터보는 아줌마가 그냥가라고 한다... 허허 이 사람들 내가 요즘 어려운줄 아나보다.
공짜로 밥과 막걸리 마시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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