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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소양(도솔)지맥(終)

소양(도솔)지맥 제6구간 - 배후령에서 소양2교까지

by 범여(梵如) 2013. 4. 8.

 

☞산행일자:  2013년4 월 7일

☞산행날씨: 흐린날씨에 싸락눈, 오후에 맑음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22.1 km / 8시간 05분 소요

☞참석인원: 범여, 낡은모자, 수객, 한울타리 오붓하게 4명

☞산행코스: 배후령-오봉산 휴게소-668봉(전망바위)-661봉-653봉-741봉-764.3봉

                 용화산 갈림길-692봉-652봉-638봉-529봉-수리봉-양통고개-새밀고개-546봉(H)-13번 국도

                 군부대-참사랑 노인병원-403번 지방도-123봉-춘천농고 실습장-164.2봉-여우고개-우두산(충열탑)

                 우두사거리-농업통계사무소-소양초교-강원명진학교-소양2교

소 재 지: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 춘천시 신북읍,  사북면,  신동, 사농동, 우두동

 

지난주는 오랫만에 바쁜 나날이었다. 그러다보니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

거기다가  시골에서 연락이 왔는데 조부와 부친 묘지를 멧돼지가 많이 훼손했다는

소식을 접하니 가슴이 아프다. 고심끝에 형님들과 주말에 시골을 가야하는데

마산에 있는 사촌동생과 조카들이 자기들이 산소를 원상복구 하겠단다.

정말 고맙기 그지없다. 이번달에 급한 업무를 마무리하고 산소를 한번 갔다와야겠다.

바쁜 와중에서 금요일 학교 골프 라운딩을 마치고 토욜에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다.

피곤한 몸으로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일욜 아침 06시에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베낭을 챙긴 다음에

소양(도솔)지맥 마지막 구간을 마치기 위해 춘천을 가기위해 상봉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금요일 학교에서 진행하는 골프 모임에 참석하여 라운딩을 하였다.

2개월만에 잡아보는 골프채가 영 어설프다. 전반에 48타...

완전 초보수준.이 사람 저사람이 호구로 보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이것도 욕심이고 집착인가? 후반에 마음을 비우고 初心으로 샷을 하니

예전의 실력으로 겨우 보기 플레이를 했다.

산에 미친 이후에 골프가 영 재미가 없다... 이 참에 골프채를 팔아버려 ㅋㅋㅋ

집에서 아침을 먹고 베낭을 메고 춘천을 가기위해 상봉역에 도착한다.

어제 비가 온 탓인지 날씨가 봄날씨 치고는 꽤나 차갑다. 

상봉역(07:10)

춘천역에서 낡은모자 성님을 비롯해 울탈, 수헌 아우님을 만나기로 약속한

탓에 07시 19분 경춘선 열차에 올라 사능역을 지나가는데 낡은모자님의

문자가 온다... 자기는 이제 상봉역에서 출발을 한단다.

춘천역(08:35)

먼저 춘천역에 도착한 탓에 조금 여유가 있어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니

동료산꾼 3명이 역 광장으로 나온다 낡은모자님은 1주일전 관매도에서

만난 탓에 무척이나 반갑기만 하다. 배후령가는 버스를 알아보니

배후령 위를 운행하는 18-1번 버스는 도로에 낙석이 많이 떨어지는 관계로

운행을 하지 않는단다... 그 바람에 택시만 신이났다.

4명이서 거금 20,000원을 주고 배후령으로 택시를 타고간다.

배후령까지 우리를 태워준 택시와 기사

배후령(背後嶺:600m:09:35)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에서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넘어가는 고개로

춘천에서 46번 국도를 타고 양구쪽  30분 거리에 있으면 이 지역 사람들은

오음리 고개라고 부른다. 배후령 아래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배후령

터널(5,173m)이 지나가고 있다.

 

대중교통으로 접근할 경우 춘천 직행버스 터미널에서 양구가는 버스를 타고

배후령에서 내리면 되고, 춘천 시내버스를 이용할 경우 18-1번 오항리행 버스를

타고 배후령에서 내리면 되는데 천전리에서 배후령으로 올라오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도로는 해빙기에 흘러 내리는 落石으로 인하여 버스는 운행을 하지 않아 택시를 탔다. 

배후령 정상에서 화천쪽으로 100m 정도 내려서니 38선 표시석이 있다.

이곳 화천군 간동면 지역은 6.25사변 이전에는 북한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요즘 저 북녁땅에는 주민들의 배고픔은 아랑곳없이 핵이란 걸 가지고

민족을 겁박하고 있는 귀떼기 새파란 지도자는 참으로 철부지같은 느낌이다.

전세계에 유래가 없는 분단국가의 이 강산에 봄날은 언제 오려나...

동료산꾼 낡은모자님과 인증샷을 남기고...뒤돌아본 배후령

배후령으로 오봉산수 휴게소롤 내려서면서 오늘 산행의 들머리를 만난다.

이 고개에서 좌측으로 가면 춘천이고 우측으로 가면 화천이다.

직진을 하면 다음 구간인 수리봉(656m)이고 직진해서 북쪽 능선으로

올라가면 화천의 진산인 용화산(878m)으로 간다.

 

이곳은 고대부족국가 시절 맥국(貊國)의 도읍지가 아닐까?

이곳에서 가까운 천전리(泉田里)와 발산리, 용화산 일대가 맥국의

도읍지라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맥국에게 강촌의 삼악산이 남한산성이요

용화산이 북한산성이었다고 한다.

 

예맥(濊貊)은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호랑이와 곰을 숭배하는 종족’이란

의미로 중국인들이 경멸적으로 털이 많이달린 야만적인 짐승이란 개념으로

‘예’나 ‘맥’을 지칭한다. 그만큼 중국인은 동북부 종족인 구이족(九夷族)이 

두렵고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배달겨레인 단군민족을...

호랑이와 곰을 숭앙하는 예맥족은 단군조선, 즉 고조선을 구성하는 핵심종족으로

사학자들에 의하면 고조선과 고구려를 형성했던 주류가 예맥족이라 했다.

지금도 바이칼호 부근의 사람들은 한자 ‘맥(貊)’을 ‘고리’로 읽는다

바로 ‘구려족’을 말함이다.

 

맥국이 어느나라에 패해 멸망해 사라져 버렸는지는 모르지만 패망 당시 마지막

전쟁은 지금의 강촌에 있는 삼악산성 전투라는 설이 있다.

38선 표지석 앞에있는 휴업중인 오봉산수 휴게소에서 좌측 들머리로 들어선다.

어제 서울에는 하루종일 비가왔는데 이곳은 함박눈이 온 산을 뒤덮고 있어서

4월 설경이 정말 환상 그 자체이다... 맞은편의 오봉산은 짙은 운무로 인해

그야말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그래도 기분은 무지좋다.

4월 눈덮인 산길을 멋있게 걸어간다. 울탈님과 수헌님은 설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보이지 않고...

휴게소에서 300여m를 올라오니 T자 도로가 나오고 춘천경찰서장 경고문이

있는 안내판을 끼고 우측으로 올라서면서 도솔지맥 마지간구간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는데 눈덮인 등로에서 조금전에 모 산악회에서

오늘 도솔지맥을 지나간 모양이다... 길이 뚜렸이 보인다.

잠시후에 군용 삼각점을 만난다.

군삼각점을 지나니 군 교통호가 이어지고...

멋있는 4월의 상고대... 정말 환상 그 자체이다.

마사토의 미끄러운 능선에 올라서니 멋진 조망바위가 나타난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의 모습

삼한시대에 맥국의 수도였던 발산리가 보인다.

 

매월당 김시습이 남긴 시

 

               맥국의 옛 터전에 첫눈 흩날리고

                   옛 춘성에는 나무마다 옷을 벗엇네

                   깊은 가을 촌 마을엔

                   술이 익어가고 있을 터인데

                   나그네 길 강고기 안주 그리워라

                   갈 길은 멀고 하늘은 산과 들에 걸리었네

                   강은 아스라이 흘러가고 흐르는 산마다 허공에서 만나고

                   외로운 기러기는 지는 해 따라 아득 해 지네

                   나그네 마음 아는 듯 나귀도 머뭇거린다.

오늘의 들머리인 배후령의 모습

668봉(09:50)
배후령에서 15분만에 헬기장과 조망바위가 있는 668봉에 오른다.

정상에서 우측으로 보니 맞은편 오봉산은 짙은 안개와 눈에 휩싸여 있고

그 아래 오음리와 간척리는 1960년대 파월장병들의 훈련장소였던

아련한 추억을 안고 짙은 운무에 싸여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헬기장에서 우측 능선으로 내려선다.

어제 내린 눈으로 등로에 눈은 쌓였지만 생각보다 미끄럽지는 않다.

나뭇가지 사이로 배후령에서 간척리가는 가는 46번 국도 구도로가 보인다.

4월의 하얀 눈 덕분에 강아지마냥 童心으로 돌아간다.

조금전 지나간 산꾼들 덕분에 등로는 뚜렸하고...

오르락 내리락하다가 다시 고도를 높이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 오기에

등로에서 살짝 비켜나 느긋하게 비우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653봉(10:12)

멋진 소나무가 도솔지맥 마지막 구간을 진행하는 범여를 축하라도 하듯이...

멋진 소나무에서 약간 좌측으로 꺽어져 오늘 산행중 가장 급경사의 오름길을 만난다.

춘천시에서 설치한 로프에다가 멋진 암릉구간이라 눈 때문에 미끄럽다.

멋진 상고대의 매혹적인 요염함에 올려 힘든 줄 모르고 치고 오르는데

암릉구간이 너무도 멋있다... 아쉽다면 짙은 운무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世上事 한가지를 얻으면 한가지를 잃는 법, 이 멋진 상고대에 조망권까지

바란다면 지나친 탐욕이겠지... 자연은 늘 인간에겐 위대한 스승이다.

뚜꺼비처럼(범여의 생각) 생긴 바위를 휘돌아 오르니...

마치 병사들의 의장대 사열을 받으면서 지나는듯한 암릉구간을 치고 오른다.

환상적이지는 않드라도 오늘구간에 가장 급경사로 치고 오른다.

745봉(10:20)

멋진 암릉구간 정상인 745봉에서 다시 내리막길로 바뀐다.

내리막길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산꾼 4명이서 참으로 오붓하게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까지 나누면서 마치 안내 산악회에 온 것처럼

여유로운 산행을 하는데 참으로 오랫만에 인간적인(?) 산행을 한다.

단체로 목적산행을 하다보면 맥길을 타는지 산악마라톤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될정도로 기록에 집착하는데 난 그런것이 너무 싫어 혼자 많이

다니는데 오늘 이 산행이 딱 내스타일이다

로프를 잡고 내려와서 곧바로 오르막 길로 바뀐다.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나타나고 이곳에서 살짝 좌측으로 꺽어진다.

여유로운 맥산행이다... 이곳에서 베낭을 맨 채 물한금을 마신다.

눈은 쌓여있지만 포근한 날씨로 인하여 길은 그리 미끄럽지 않다.

희한하게 생긴 소나무... 상상은 자유

강원도의 산치고는 오늘 맥길은 그야말로 유순한 길이다.

고도차가 그리크지 않은 마사토가 약간 섞힌 육산에 눈덮인 능선을 걷는다.

다시 고도를 높혀 오르막을 오르는데 오르막 가기직전에

이정표(←수리봉 5km,↗용화산 4.6km, ↓배후령 2.7km)라고 써있는 이정표가 나온다.

다시 암릉가운데 안부능선을 지나니...

다시 눈덮인 등로를 조금 지나 764.6m의 준.희님이 붙인 표지판이 나온다.

764.6봉(10:55)

이곳이 오늘 산행구간의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정상에는 3등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밑둥치가 잘려진 나무들이 있다.

764.6봉 삼각점(△양구 313. 2007 재설)

용화산 갈림길(11:05)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사이령과 고탄령을 거쳐서 화천8경인 용화산으로

가는 길이다. 지네와 용이 치열하게 싸움을 했다는 용화산을 가고 싶지만

거리가 워낙 멀어서 다음에 개인적으로 가보기로 하고 수리봉으로 향한다.

이정표를 따라 좌측으로 향한다.

용화산 휴양림을 향하는 이정표를 만나면서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낙타처럼 생긴 소나무를 지나니...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선다

다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또다른 이정표를 만나고...

지나온 764.6봉과 이별이란 진한 아쉬움 때문인지 자꾸만 뒤돌아본다.

그래 너무 서러워마소...세상사가 다 그런걸 어찌하오리오.

버섯바위(???)

지도상에는 버섯바위라고 점잖게 표시가 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버섯바위보다는 男根石이라고 표기하는게 더 정확할 듯 싶을정도로 거시기 닮았다.

산사면의 숲에는 눈이 꽤나 많이 쌓여있고 바람의 영향탓인지 안부

능선에는 스틱으로 가늠해보니 20cm가 넘게 쌓인곳도 있다.

능선 안부에는 산꾼들의 편의를 위한 시설인지 나무로 만든 긴의자가 있고...

651.봉(11:50)

봉우리 정상에는 관리가 전혀 안된 무명묘지 1기가 있고 삼각점이 있다.

652.1봉 삼각점(△내평 401. 2005 재설)

652.1봉을 지나 편한 능선을 타고 가는데 아침을 일찍 먹은탓인지

배는 고파오는데 오늘따라 낡은모자님이 컨디션이 무척이나 좋은듯

선두로 거침없이 치고 나가는데 막내인 수객 아우님은 최악의 컨디션인지

자꾸만 뒤쳐진다... 그래도 명색이 내노라는 정통산꾼인데 따라 오겠지.

선두로 치고 나가던 낡은모자님이 바람을 피해서 식사장소를 잡았다.

이곳에서 닭갈비살에 진도홍주, 소주, 막걸리로 오랫만에 1시간이상의

여유로운 점심만찬을 즐긴다... 맥길을 타면서 정말 여유로운 산행을 한다.

진도홍주에 닭가슴살로 부어라 마셔라... 정통산꾼이 안내산행을 하듯 여유롭게 ㅋㅋㅋ

땀이 식은 탓인지 추위가 몰려오고 손끝이 빠지도록 시리다.

자켓으로 체온을 유지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다.

군부대 경계 표시석을 지나면서 호젓한 길이 계속된다.

낭만적인 길을 지나면서 좌측으로 확터진 시야가 나오면서

건너편의 경운산과 마적산이 보이고 박무가 사라지면서 시야가 확보된다.

경운산(慶雲山:785m)은 조선 성종12년(1481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지금의 오봉산이 경운산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배후령에서 능선으로 올라 우측의 마적산 쪽으로 있는 산으로

배후령에서 좌측 능선을 따라 이어진 나한봉·관음봉·문수봉·보현봉·비로봉의 ‘5봉’이

있다하여 오봉산이라고 하나 원래는 이 전체가 경운산이다

수직 절벽 위 암릉길 곳곳에 어렵사리 버티고 서 있는 노송들은 마치 신선이

한 폭의 동양화 속을 노니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조망이 가장 좋은 곳은 제4봉인 보현봉에 오르면 사명산을 비롯해

가리산·병풍산·대룡산·금병산 등 주변 명산의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적산(馬跡山:784.7m)은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과 북산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또다른 이름으로 마작산으로 부르기도 하며  조선시대 병자호란때

청나라 군사들의 겁탈에 저항하다 죽은 ‘무작개’라는 회동마을의

한 여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청나라 병사들은 완강하게 저항하는 이 여인을 죽이곤 시신에 참혹한

보복을 가한 후  고개에다 묻었다고 하는데 그후부터는 청나라 군사들이나

청국상인들이 이곳을 지나가기만 하면 고개가 들썩거려 모두 도망갔다고 한다.

그 고개가 마작산 줄기에 있는 뜨내리재(부심치)다.

무작개의 이름을 따 무작산이었는데 변음되어 마작산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낭만적인 길을 지나면서 좌측으로 확터진 시야가 나오면서

건너편의 경운산과 마적산이 보이고 박무가 사라지면서 시야가 확보된다.

춘천경찰서장의 경고판과 철조망을 간단하게 무시하고 지맥길을 이어간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고...

529봉(13:15)

등로에서 혹부리 영감처럼 생긴 나무도 만나고...

화천8경 중에 하나인 용화산이 멋진 자태를 뽐내면서 시야에 들어온다.

 

각 지역마다 경치좋은 8경을 이야기하는데 8경을 칭하는 유래를 보니...

전국 각 지방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자연경관을 가려내 팔경(八景)을 삼는다.

한성팔경 개성팔경 울산팔경 춘천팔경 평양팔경 하는 식이다.

도나 시단위 팔경도 있고 군 단위 읍면단위 심지어 리(里)단위 팔경도 있어

전국적으로 98군데나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경 5경 7경 10경 등을 합치면 125군데 925경이나 되고.

왜 하필 팔경인가. 학자들은 팔경의 연원(淵源)을 중국 송대(宋代)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에서 찾는다.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합치는 곳의 아름다운 경관 8곳을 그린

소상팔경도와 그 화제(畵題)에서 수많은 팔경들이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국여지승람이나 택리지 등에 기록된 우리나라 팔경들의 내용을 보면

소상팔경도의 화제를 본뜬 게 많다.

춘천팔경에 나오는 '고산 저녁노을(孤山落照)'이나 화악산 맑은 산기운(華岳淸嵐)'은

소상팔경의 '어촌낙조(漁村落照)' '산시청람(山市晴嵐)'과 일치하고, 강릉 경포팔경중 '죽도명월(竹島明月)' '

홍장야우(紅粧夜雨)' '한사모종(寒寺暮鐘)'등은 소상팔경의 '동정추월(洞庭秋月)'

'소상야우(瀟湘夜雨)' '연사모종(煙寺暮鐘)'과 같은 발상이다.

서서히 수리봉가는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이곳은 멋진 암릉구간이긴

하지만 위험하여 거의가 우회로를 이용해 편한길을 가지만 편한 대신에

멋진 조망을 놓친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힘든 암릉구간을 택한다.

암릉구간 능선에서 바라본 경운산과 마적산 능선의 모습

암릉 능선을 곡예를 하듯이 걸어가는데 임도파인 낡은모자님과

컨디션이 최악인 수객님은 우회길로 가고 울탈님과 능선을 걷는다.

뒤돌아보니 화천8경인 용암산과 고성리가 보이고...

화천8경은 북쪽에는 파로호, 서쪽에는 춘천호를, 남쪽에는 소양호의 중심에 위치해

 호수의 풍광과 함께 산행을 즐길 수 있는 호반산행과 기암과 바위가 연이어지는

바위산행으로 일품이다. 또한 이 산의 안개와 구름은 예로부터 성불사의 저녁 종소리,

기괴한 돌, 원천리계곡의 맑은 물, 부용산의 밝은 달, 죽엽산의 단풍,

구운소의 물고기 등과 함께 화천팔경이라 불렸다.

아슬아슬한 암릉구간을 곡예사가 줄타기하듯 걷는다.

눈덮인 경운산은 가히 환상적이다.

올핸 유난히도 일기가 불순하기 그지없다.

지난주 진도를 갔을때는 남도지방은 여름 날씨 방불케 하더니만

여기는 아직도 봄이 오지 않았는지 꽃은 필 생각도 않안다.

마치 요즘 한반도 정세처럼... 春來不似春이다.

죽어서도 도도함을 잃지않은 朱木도 멋있고 눈싸인 경운산 능선 또한번 바라본다.

암릉구간에서 아슬아슬한 능선을 타고 곡예하듯 내려온다.

조금전에 내가 지나온 능선의 모습

암릉위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소나무

좌측으로는 가야할 능선들이 나타나고...

참으로 금슬이 좋아 보이는 소나무도 만나고...

암릉구간 아래 사면의 모습

드디어 수리봉 정상에 도착한다.

수리봉 정상에서 춘천쪽은 시야가 확트여 있어 조망권이 참으로 좋고

그 아래로는 유포리 저수지가 보이고 좌측으로 발산리가는 이정표가 있다.

 

발산리(鉢山里)의 유래는
발리(鉢)처럼 생긴 작은 산이 있어 바라미 또는 발산이라 했으며, 1

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장본리(章本里)와 산본리를 합쳐 발산리라 했다

발산리는 원시부족사회때 맥국의 도읍지의 중심지였으며,

맥국시대 쌓았다는 맥뚝이 현재는 논뚝으로 변해있다

수리봉 정상에 서니 춘천시내가 시원스럽지 못하지만 한 눈에 들어온다.

바로 눈앞에 조연(朝淵:아침못)이라 불리는 유포리 저수지가 시원스럽게

보이는데 마치 태백의 황지의 전설과 흡사한 욕심쟁이 鄭 부자영감의 전설을

담고 있는 아침못 저수지가 한때는 우두벌판의 젖줄이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수리봉(水利峰:656m:13:50)

춘천시 신북읍에 위치한 봉우리로 우리나라 산 이름 중 가장 흔한 것이 수리봉이다.

이곳 춘천에도 금병산과 대룡산 중간쯤에도 수리봉이 있다.

발산리 뒷산 수리봉은 물이 이롭게 쓰인다는 수리(水利)란 한자 표기를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수리봉은 그 산의 형세가 매나 수리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 많다.

서너 개의 연봉을 거느린 수리봉 산록완사면에는 발산리 산천리 유포리 지내리 등의

취락이 발달되어 있고 샘밭, 새청벌, 새밑, 아침못, 소슬뫼 등 새벽 혹은 새로움이란 뜻을

품음직한 지명이 많음으로써 이곳이 바로 옛 맥국의 도읍지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곳은 ‘물 수(水)’를 써서 水利峰이라 부르는데 아마 호반의 도시인

춘천이란 곳에 그렇게 부르는지?(범여의 생각中에서)

낡은모자님과 인증샷을 남기고...

 

수리봉 정상에서 새미고개까지 3.4km. 정상 근처에서 발산리 쪽으로 빠지는

양통고개로 내려가는 길과 춘천댐 쪽으로 직진하는 갈림길이 있다.

새미고개 방향으로 고도를 확 낮추면서 내려서니 양통고개가 나타난다.

양통고개(14:10)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에서 사북면 고성리 양통마을 넘어가는 고개로 民草들의

애환이 많이 담긴 고개처럼 보이는데 지금은 사람의 흔적이 드문가보다.

발산(鉢山里)에서 발(鉢)은 발우 발자로 절에서 스님들이 사용하던 밥그릇이다.

즉 발산리란 발우 모양의 산마을이란 뜻이란다. 발(鉢)은 그 모양이 속은 움푹 들어가고

주위는 둥글게 막혀 있어 소쿠리 형태의 성의 모습과 유사하다.

 

또 고성리(古城里)도 같은 뜻인 것 같다.

고성리의 성(城)은 잣 성 자인데 잣은 흙이나 돌 나무로 은폐시설을

만들어 전쟁 때 자기네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공간을 의미한다.

발산리에는 맥국의 도읍지였던 맥국터가 있고, 고성리에는

오봉산이 있는데 오봉산에 맥국의 성이었던 오봉산성이 있다.

양통고개 이정표

수리봉에서 양통고개로 뚝 떨어졌다가 다시 고도를 높이는데

좌측으로는 춘천분지가 시야에 들어오고 이내 안부능선의 편한 길이 시작된다.

안부 능선에 올라서면서 춘천시 신북읍과 사북면의 경계 능선을 걷는데

강원도의 산답지 않게 새색시처럼 부드럽고 유순한 육산이 계속된다.

이곳은 어제 내린 눈이 양지에다가 고도가 낮아서 그런지 눈이 하나도 없다.

우려했던 아이젠 착용을 하지않아 좋다. 그래도 날씨가 추운탓인지

진달래 봉오리는 아직도 필 생각도 없이 한겨울이고 생강나무만 기지개를 켠다.

지맥길 곳곳에는 군부대의 표시를 하는 콘크리트 말뚝만 있고...

이곳의 진달래는 아직도 한겨울이다. 

지나온 수리봉의 모습

527.3봉(14:30)

밋밋한 봉우리에 무명묘지의 흔적이 있고 3등 삼각점이 있다.

527.3봉 삼각점(△춘천 308. 2005 재설)

새밀고개(14:35)

세밀고개는 고룬고개, 새미고개, 새밑고개로도 불리는데

춘천시 신북읍 지내리와 사북면 고탄리 사이의 고개인데 희미한

임도로 신경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고개이다.

그래도 생강나무는 이제 갓 꽃봉오리를 튀우기 시작한다.

관리가 안된 군 벙커 아래로는 고성리가 보이고...

546봉(14:45)

정상으 헬기장에 서니 주위가 시원스럽게 조망된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용화산이, 남쪽으로는 우두벌판과 봉의산을 중심으로

한 춘천분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측으로 가면 수청령가는 길인데 이곳에는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 있고 이곳에서 5분정도의 휴식을 취하면서 물한모금 마신다.

잠시후에 좌측으로 90도 꺽어 급경사 능선으로 떨어진다.

546봉에서 바라본 용화산의 모습

용화산(853m)은 춘천과 화천의 경계를 가른다. 남쪽 춘천방면을 바라보면

발 아래로 수십m의 아찔한 바위가 절벽을 이뤄 천혜의 요새를 이룬다.

 

산 이름은 지네와 뱀이 서로 싸우다 이긴쪽이 용이되어 하늘로 올라가서 용화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산은 산삼이 많이 나 심마니들이 처서가 되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 든다.

또한 소나무 군락지에서 자생하는 송이버섯은 향과 품질이 뛰어나 전량 일본에 수출되고

통일 신라화엄 성지요 미래불 미륵이 용화수아래에서 성불한다는 불교교리에서 이름이 비롯된 산이다.

효자 심마니가 백발의 노인을 꿈에 보고  큰 산삼을 캤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심바위와 곰바위

등의 기암괴석과 절경 을 이룬다. 8.3km의 등산로와 함꼐 신이 공들여 만든 듯 깍아지른 암벽은

수도권 일일등반 코스로 손꼽힌다

 

삼국시대와 상고시대 이전, 강원도의 전신으로 알려진 맥국 임금이 소양강댐 하류 춘천지역을

도읍으로 정하고, 이곳을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성을 쌓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성터 주변에는 주춧돌과 석불 등의 흔적이 남아 있어 한때 융성했던 성불사,

용화암자의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한다.

지나온 능선의 모습

546봉 아래에 있는 무인산불감시 카메라의 모습

546봉에서 바라본 춘천(春川)

춘천은 순수한 우리말로 ‘봄내’로 봄의 개울을 말한다.

강원도 내륙의 아주 춥기로 소문난 이곳의 이름이 춘천이라니... 

 

춘천의 원래 지명은 ‘소머리’이다. 소머리는 ‘쇠머리’ ‘솟을머리’라고부르기도 하고

소머리가 우두산(牛頭山), 우곳성(牛谷城)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이후에 삭주라고도 불리다가

춘주(春州)라고 고쳐 부른것을 춘천이라는 지명으로 고려 태조23년(904년)때 ‘봄이 빨리오는

고을’이라는 뜻에서 조선 태종13년(1413년)때에 ‘봄이 빨리오는 내’라는 의미로 불리웠는데

‘봄내’를 한문으로 표기하니 春川이라는 지명이 나왔다

안양도호부(安陽都護府)의 지명은 고려 후기에 고쳐 부른 춘천의 지명이다.

현재의 지명인 춘천은 조선왕조 태종13년(1413년)에 생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춘천이 삼한시대의 나라인 맥국의 수도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10대 도시’ 중 우위를 차지한 춘천은 26만여 명의 인구에

복지, 교육, 환경, 안전, 그리고 문화적 배경이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재난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전국에서 산불, 가뭄, 수해, 사건 등이 끊이지 않지만 춘천만은 지난 40년간 이런 자연재해가

거의 없었고 대형범죄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마다 수해나 가뭄에 시달리거나 납치 등으로

인심이 흉흉한 곳들과 비교하면 축복받은 곳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살펴보면 춘천의 이런 상서로운 기운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수계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대동강 수계의 평양이고

둘째로 춘천의 소양강 수계를 들고 있으니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맥국 때 터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택리지> 복거(卜居) 총론에는 낙토(樂土)의

조건으로 네 가지를 들고 있는데 첫째는 지리(地理)이고 둘째 생리(生利),

셋째 인심(人心), 넷째 산수(山水)로 되어 있다. 이중환이 춘천을 중심한 북한강 수계를

우리나라 수계 중에서 대동강 수계인 평양 다음이라 한 평가의 기준이 바로 이 낙토 선정의 기준이다.

사학자와 지리학자들은 춘천 중심의 북한강 수계가 이 기준에 상당 부분 합치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또 시인들은 물줄을 젖줄로 비유한다. 춘천의 물줄은 생명의 이로움을 위한 젖줄일 뿐만 아니라

 문화를 전이시키는 동맥이기도 하다. 댐을 만들어 호수가 된 춘천호, 의암호, 소양호는

춘천의 자랑이자 가장 큰 볼거리다. 춘천호에서 의암호를 따라 이어지는 ‘환상의 도로’는

작가 홍성유가 1980년대에 명명했다. 정서가 메마른 이들도 이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가

이어지는 춘천댐 계곡과 삿갓봉, 집다리골 휴양림의 아름다움, 아기자기한 카페촌을

본 후엔 감탄사를 연발한다. 춘천을 호반의 도시로 만든 의암호는 신현강 협곡을 막아

의암댐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데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야 도착하는

소양호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소양강댐과 선착장이 있어 유람선 관광도 즐길 수 있다.

546봉에서 바라본 용화산의 雪景은 마치 희말라야의 메리설산처럼

보일 정도로 황홀경 그 자체이다...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546봉에서 좌측으로 90도 꺽어져 내려가니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게으름뱅이 생강꽃

그에 못지않은 또다른 게으름뱅이 진달래 

등로에서 바라본 춘천분지

 춘천의 옛지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유안

 

 

겨울에는 불광동이, 여름에는 냉천동이 생각나듯 

무릉도원은 도화동에 있을 것 같고 

문경에 가면 괜히 기쁜 소식이 기다릴 듯하지 

추풍령은 항시 서릿발과 낙엽의 늦가을일 것만 같아 

 

춘천(春川)도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녹다 만 눈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억새 깨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피고 있는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을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봄 한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가본 적은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지 

 

여름날 산마루의 소낙비는 이슬비로 몸 바꾸고 

단풍든 산허리에 아지랑거리는  봄의 실루엣 

쌓이는 낙엽 밑에는 봄나물 꽃다지 노랑웃음도 쌓이지 

단풍도 꽃이 되지 귀도 눈이 되지 

춘천(春川)이니까.

급경사를 내려오니 군사도시답게 군부대 시설물이 많다.

능선 안부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조그만 오르막을 오른다.

위장막이 처져있는 군벙커를 지나니...

무명묘지를 지나고 급경사가 나온다.

절개지에 잡목들이 태클을 건다.

잠시후에 잣나무 단지가 나온 다음 군부대가 나타난다.

군부대 시설물을 지나니  7882-301부대 후문 철조망이 나오고...

군부대 철조망을 우회하여 조경수가 심어진 임도로

내려오니 13번 국도가 지나가는 고탄고개가 나온다.

고탄고개(古呑峙:15:20)

춘천시 신북읍에서 사북면으로 넘어가는 13번 국도가 지나간다.

우측 고개가 수청령 고개라는데 길이 고불고불하고 이곳은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고탄리는 본래 춘천시 북내 이작면(北內 二作面) 지역으로서 이 부근의 고성리와

인람리까지를 통틀어서 고룬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페합에 따라

고습, 구마니, 양지울, 응달말, 적두니를 병합하여 고탄리아라 하여 사북면에 편입됐다.

고탄이란 지명은 옛 지명인 고난산현(古蘭山縣)의 “고난”이 음유법칙에 의해 “고란”으로

되고 다시“고룬”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부터 “고탄(古呑)”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좌측에 있는 7882-301부대를 지나 한동안 도로로 계속 진행한다.

도로를 따라 지맥길을 이어가니 또다른 부대가 나오고 우측 영점 사격장

능선 뒤로 올라가서 다시 13번 국도를 만나기 직전에 무명묘지에서

커피 한잔에 빵 한개를 먹고 휴식을 취한 다음 도로로 내려선다.

양지노인마을 입구(15:50)

13번 국도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양지노인마을 입구가 나오고 이곳에서

조금 들어와 좌측 택지개발지구를 돌아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택지개발지구 절개지로 올라선다.

조금전 지나온 능선의 모습

능선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니 묘지가 나오는데 이곳으로 1시방향으로 꺽어진다.

이곳은 오늘 여태껏 걸어온 길과는 달리 길이 잘보이지 않고

등로도 뚜렸하지 않아 약간은 혼란스럽지만 여태껏 걸어온

지맥길에서 처럼 感으로 걸어가는데 혼자가 아닌 프로 산꾼들과

걷는다는 생각에 사전 공부를 하지 않은것이 약간 후회스럽다.

좌측으로는 전원주택 공사가 한창이다.

경운산과 마적산이 시원스레 보이고...

전원단지와 논밭을 잇는 시멘트 농로를 지나 다시 등로로 접어든다.

시멘트 농로를 건너 길이 좋은 우측 넓은 임도로 가야 123봉이 나오는

도솔지맥길인데 등로도 보이질 않고하여 직진으로 올라선 것이 禍根이다.

거기다가 조금을 더가니 기맥, 지맥길에서 만난 시그널이 있어 무심코

따라가다가 깔끔하게 알바를 하였다.

이곳 묘지에서 우측으로 가야 123봉이 나온다.

야생동물 광견병 미끼백신 살포지역을 지나고...

123봉(16:20)

다시 장의자 3개가 설치되어 있는 봉우리를 만나고...

좌측으로 자작나무 조림지 너머로 마적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편안길을 걷는다. 춘천시내가 점점 가까워진다.

Y자형 뚜렷한 등로에서 지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등로에 관리가 안된 무명묘지 한기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 형태로 꺽어진다.

드디어 403번 지방도가 나타나고 배수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403번 지방도로(16:45)

춘천시 신동에서 신북읍 율문리 넘어가는 2차선 도로인데

차량운행이 전혀 보이지 않는 한적한 시골길이다.

403 지방도로에서 능선을 올라서서 조금을 진행하니 길이 뚜렷한

Y자형 갈림길이 나오고 묘지가 나오는데 지맥길은 우측으로 꺽어진다.

이 운풍 선생의 묘지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편한길을 걸어간다.

희미한 도로로 내려섰다가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니 호화 납골묘가 나온다. 

좌측으로 호화납골묘지가 나오고...

다시 깔끔하게 단장된 묘지 2기를 지나니...

정선김공과 나주나씨 부부 합장묘가 나온다.

정선김공 묘지에서 우측으로 가야만 원 도솔지맥길이나 춘천농고 실습장이

지맥길을 철조망으로 가로막아 철조망 따라 한참을 좌측으로 우회를 한다.

도솔지맥길을 가로막고 있는 춘천농고 실습장

철조망을 따라 좌측으로 호젓한 길을 걷는다.

잠시후에 잘 가꾸어진 영암박씨 가족묘가 나오고...

첫번째 Y자의 길에서 우측으로...

2번째 Y자형 길에서 또다시 우측으로 내려서니...

자식들이 세운 추모비가 서있는 경주이공과 밀양박씨 부부묘가 나오고...

죽산박공의 묘지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선다.

묘지로 내려서니 춘천농고 실습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온다. 

우측 도로를 따라 계속 걸어간다.

춘천농고 실습장 정문(17:10)

엄청나게 큰 실습장은 폐쇄가 됐는지 아무런 인기척도 없고

가축축사에 아무런 짐승도 없는데 축사 분뇨 냄새가 코를 찌른다.

실습장 정문에서 조금 올라가다가 다시 좌측 철문을 비켜서 도로로 간다.

반대편에 있는 실습장 도로를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뒤돌아 본 춘천농고 실습장의 모습  

우회해서 걸어온 길

실습장을 빠져나와 등로를 올라선 다음 실습장 철조망을 따라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다시 로프를 잡고 급경사로 내려서니 조그만 안부에는 서낭당의 흔적같은 돌무덤이

나오고 또다시 오르막을 올라서니 선두로 가던 낡은모자 성님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잠깐 같이 쉬는 사이에 울탈님이 오고 다시 조금을 더가니 6.25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164봉이 나타난다.

164.2봉(17:35)

 

164고지 전적지 안내판의 내용

164고지는 옥산포 및 천전리를 감제 관측 할 수 있는 중요 고지로서

7연대 1대대 관측소가 위치했던 장소이다.

7연대 1대대(춘천역 부근에 주둔)는 1950년 6월 25일 적이 기습 남침해 오자

즉시 출동하여 164고지 일대에 구축된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진지점령을 완료한지 30분이 경과한 11:00시경, 적 1개소대가

금광터 서쪽 능선에서 남쪽으로 접근해 오자 1중대가 기관포 및 박격포 사격으로 격멸하였고,

16:00시경 또다시 출현한 적 1개소대 규모와 약2시간 정도 교전한 끝에 격퇴하였다.

그리고 옥산포 일대로 공격해 오던 적이 16포병대대와 직접 교전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고

역골 일대로 철수할 때 전방의 208고지에 고립된 3대대 본부중대 및 12중대 일부를 구출하였다.

6월 26일 아침, 적이 재공격을 위해 옥산포를 향해 집결하는 것을 목격한 7연대 1대대는

164고지 일대를 발판으로 옥산포를 향해 파쇄공격을 강행하여 적을 격멸하고

오후에 다시 164고지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양구에서 남하하는 적에게 후방을 차단당할 위험이 있어 6월26일 일몰과 동시

우두동 남단의 여울을 도섭하여 철수한 후 봉의산 동측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이와같이 춘천 방어에 유리한 주방어선 중앙지역인 164고지 일대를 2일간이나 확보함으로서

적은 역골과 샘밭일대로 양분되어 통합딘 공격을 실시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군에게 각개격파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164고지를 확보하고 적의 공격을 저지 시킬 수 있었던 것은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 하순부터 5월 하순까지 춘천시민과 학생(춘천농고, 춘천고,

춘천여고, 춘천사범학교 등)들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자주방어 진지공사를 완료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진지공사에 참여했던 춘천시민과 학생들이야말로

춘천지구전투 승리의 밑바탕이 된 작은 영웅들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2군단 춘천대첩 애국선양회 춘천시

164.2봉 삼각점(△ 춘천 307 2006 재설

164봉에서 내려와 폐벙커를 지나니 좌측에 지난 3구간에 들렸던 송어횟집이 보인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또다른 벙커가 나오고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우측으로는 사우1동 새마을협의회의 밤나무 농장이 나타나고...

잠시후에 군 삼각점을 만난다.

국가 유공자였던 박시준공과 부인 인동장씨 묘지 뒤를 가는데

묘지 뒤 능선에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이 있다.

국가 유공자의 묘지 뒤를 지난다 

묘지를 내려가니 배수로가 나오고 우측으로는 공동묘지가 나오는데

배수로를 따라 46번 국도가 지나가는 여우고개로 내려간다

공동묘지 옆 계단을 내려가니 철계단이 나오고...

철계단을 내려오니 개구멍(?)이 나오고 도로로 내려선다.

차의 흐름을 확인하고 간단하게 도로를 무단횡단하여 건넌다.

여우고개(17:50)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율문리에 위치한 고개로 신북읍에서 우두동으로 가는

춘천~샘밭 국도 사이의 고개를 가리키며 46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옛날에는 고개였으나 도로 개설로 평지가 되었다. 지금부터 70여 년 전 도로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참나무 등 숲이 울창해 우두벌과 샘밭 사이를 오가는 샛길만이 나있을 뿐이었다.

 

『춘천의 지명유래』에는 "윗샘밭에 살던 총각이 우두벌에 세워진 서당에

글공부를 가는 길에 어떤 소녀가 그를 유혹했다.

그 소녀는 입에서 구슬 한 개를 총각의 입속에 넣어주고 헤어질 때가 되면 구슬을 되돌려 받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서당 훈장은 총각에게 구슬을 돌려주지 말고 삼키고, 서당으로 올 때

소녀를 보지 말고 하늘만 쳐다보고 오라고 당부했다.

총각은 구슬을 삼켰지만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소녀가 여우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훈장은 총각이 하늘을 보고 걸었다면 큰 벼슬을 할 운이었지만 만사가

수포로 돌아갔다고 호통을 쳤다. 그때부터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인도를 걸어가다가 지하차도 위를 건너서 건너편 인도로 간다.

도로를 건너서 밭언덕으로 올라선다.

밭 가장자리에서 바라본 율문리의 모습

율문리(栗文里)는 율대리(栗垈里),문정리(文廷里),천구리(泉邱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율대리의 「율(栗)」자와 문정리의 「문(文)」자를 따서 「율문리」가 된 것이다.

율대리는 밤나무가 많아 「밤나무 터」란 이름이 붙은 것이며 6.25후까지도

오래된 밤나무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밭 가장자리를 지나서 능선으로 접어든다.

우두저수지는 평지에 만들어진 정방형의 인공저수지로 북한강 상류와

소양강 하류 사이의 충적지에 위치한 우두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소양강에서 공급되는 농업용수가 중층이하의 차가운 물이기 때문에 벼의 생육에

적합하지 않아서 넓고 얕게 만들어진 저수지에 물을 가두어 온도를 높인 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일명 온수지(溫水池)라고도 불리고 있다.

좌측으로 소양강이 보이고...

정자에서 좌측으로 가다가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좌측으로 소양강과 한림대 실습림이 보이고

텃밭을 지나 조그만 능선을 지나니 충열탑이 보이기 시작한다.

도솔지맥 마지막 봉우리인 우두산이 눈앞에 나타난다.

우두산 정상에는 충열탑이 자리를 잡고있다.

이 충혼탑은 6.25동란당시 겨레의 생존권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순국하신

도내 호국영령의 충의와 위훈을 영구히 추모하고자 1955년 7월에 세웠다.

이 탑이 자리한 이곳 牛頭山은 우리 고장의 상징인 鳳儀山과 마주하면서 앞쪽으로는 나래를 펴듯

우두벌이 자리잡고 그 자락으로는 昭陽江이 흐르는 유서깊은 명사으로 선산김씨 문중의 땅이다

이곳에는 4계절 끊이지 않고 참배객이 찾아와 호국의지를 되새기고 있으며

매년 6월6일 현충일에는 호국영령들의 명보을 비는 거도적인 추모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1994년 6월 1일    춘천시장

우두산(牛頭山:133m:18:10)

우수산(牛首山)이라고도 부른다. 원래는 소머리산, 쇠머리산, 솟을뫼, 솟을묘라고도 부른다.

머리산(頭嶽)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만주 송화강 유역의 속말(涑沫), 소밀(蘇密)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북쪽에서 용화산 줄기가 흘러와서 우두평야 끝에서 멈춘다.

동북쪽에서 소양강이 흘러내리고, 서북쪽에서 모진강이 흘러 내린다.

 

두 강의 물줄기가 퇴적토를 쌓아 넓은 평야지대를 만든다.

이 우두평야를 남북으로 가로 지르면서 멈추었다가 솟은 산이 우두산이다.

산 정상에 1956년에 세운 충렬탑이 서 있다. 예전에는 우두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1938년 봉의산록에서 옮긴 조양루(朝陽樓)가 있다.

 

우두산과 원래 이어졌던 북쪽능선은 도로 개설로 맥이 끊어졌다.

동북쪽은 샘밭(泉田),맥국의 도읍으로 전해지는 평야가 펼쳐져 있다.

우두산을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우(天牛)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천하의 명당이라고 전해졌고, 춘천의 상징동물인 천우(하늘소)가 되었다.

 

우두산의 고총은 대부분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을 찾아 암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두산은 또 만주대륙에서 살던 우리민족의 남쪽 머리산이라고 말한다.

우두산은 단군역사의 머리산(으뜸산)과 맥국의 옛 땅과 연계되어 신화의 산, 역사의 산, 나라의 산이 되었다.

춘천시 우두동에 있는 우두산은 높이 133m로 야트막한 언덕을 이루고 있다.

용화산에서 남으로 뻗은 산자락이 청평산에서 멈추었다가 마작산이 되고, 소양강에서 끊긴다.

용화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추청산(秋晴山)이 우두평야로 흘러들어 우두산을 만들고 소양강에

미치지 못한 채 멈춘다. 우두산-우수산(牛首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두산은  세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옛 무덤이 있는데 소가 밟아도 다시

솟아난다는 전설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의 아이들이 밟아 놓아도 역시 다시 솟아난다는 전설이다.

또 다른 하나의 전설은 돌부처가 나타나 절을 짓게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스님 한분이 길을 나섰다가

우두까지 당도하게 되었다. 들판에 우뚝 솟은 우두산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 보았다.

 

동쪽 우두산 기슭으로 흐르는 소양강 물 한가운데 바위가 솟아 있고 그 바위 위에 노승이 앉아서

참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길 가던 스님이 우두산을 내려가서 그 바위 위의 노승을 만나려 했다.

소양강가에 당도해 보니 바위 위의 노승은 온데간데 없었다. 소양강가에 앉아서 길 가던 스님은

사흘밤 사흘낮을 기다렸으나 끝내 노승은 나타나지 않았다. 길 가던 승려는 노승을 만나려고

염불을 해도 효험이 없자 범어(梵語)로 노승을 불렀더니 돌부처가 그 바위 위에 앉자있는 것이 보였다.

승려는 그 돌부처를 향해서 절을 짓겠다고 했더니 그 돌부처는 이웃마을에 가서 시주하면 되리라 일러주는 것이었다.

우두산 충열탑 계단에서 동료산꾼들과 셀카로 도솔지맥 마지막 인증샷을 남긴다.

 

우두산 전투 전적지

 

충렬탑이 자리한 이곳 우두산지역은 6.25 개전 초기(1950.6.25-6.28) 국군 제2군단의 창설

모체부대였던 제6사단 장병들이 애국적인 춘천시민과 한덩어리가 되어 인해전술의 파상공격을

자행해 온 북괴군 제2군단 예하 제2, 제7사단의 주력을 섬멸하므로써 한국 전쟁 초기 전선에서

유일하게 승전보를 올렸던 유서깊은 곳이다.

 

당시 북괴가 춘천 및 우두산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속전속결의 남침계획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고,

적 제2군단장이 전격 해임되는 등 6.25전사상 가장 빛나는 전승의 기록을 남겼던 전적지이다.

특히, 이 당시 전투에서 춘천시민, 학도호국단학생 그리고 제사공장 여성근로자들이

국군장병과 더불어 탄약을 운반하고 전투에 참가하는 등 시산혈하의 격전을 벌여

빛나는 승리를 가져옴으로써, 민,관 총력전의 귀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곳 주민들의 뜨거운 반공 애국정신과 자유 수호의지를 만천하에 드높였던 성스러운 곳이다.                                                            1994. 6. 1.

불란서 대대 전적비 표지판도 보이고...

사라진 조양루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자주 등장하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호인

조양루가 뭔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철거가 되어있다.

 

조양루(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호)

소재지 :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

 

이 건물은 1646년(인조 24) 당시 춘천부사이던 엄황(嚴滉)이 문소각을 청건할 때 문소각의 문루로

위봉문과 함께 건립하였던 것을 1908년(순종 2) 이 곳 우두산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현판의 글씨는 민형식(閔衡植)이 썼다고 전하며,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1969년 크게 수리하였다.

정면 3칸, 측면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지붕은 팔작지붕 겹처마이다.

앞 뒤 기둥과 양 측면의 중앙 기둥은 원형 기둥으로 사각형 주춧돌 위에 세워졌으며,

중앙부의 두 기둥은 사각형 기둥으로 사각형 주춧돌 위에 세우져 2층 바닥의 보를 받치게 하였다.

후면 좌측에 계단을 놓아 누(樓) 위로 오르게 하였으며, 양 측면은 마룻보에서 초석 상면까지

2단의 띠방을 두었고 판장벽으로 막았다.

초익공 양식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소박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준짱님 블로그 인용)

우두산과 솟을묘에 대한 전설

우두(牛頭)를 순우리말로 ‘쇠머리’가 된다

 ‘소머리’와 비슷한 음차로 ‘솟을 묘’에 대한 전설이 있다

우두산에는 고총이 있는데 그 곳에 소를 매면 소 발자국에 무덤이

푹푹 들어가 엉망이 되었다가 하루밤만 자고나면 도로 솟아나서

소를 맨 흔적이 전혀 없다고 하여 이 우두산의 무덤을 ‘솟을 묘’ 또는

‘솟을 뫼’라고 하였단다.

 

그런데 근년에는 이웃사람들이 이를 시험해보고자 소를 매보니

소가 봉분을 뿔로 파헤쳐 놓았다.

다음날 무덤에 가보니 파헤져진 흔적이 없어져 신비로운 ‘솟을 묘’라고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무덤은 아들이 없는 없는 여인이 이 무덤에 와서 몰래 정성껏

벌초를 하면 득남을 한다고 알려져 아들이 없는 부인들이 밤새 

벌초를 했다는 유래도 전해져 내려온다.

조양루에 대한 아쉬움을 안고 우두산 아래로 내려온다.

우두산은 선산김씨의 종산인 모양이다

우두산을 내려와서 大路를 향해서 걸어간다

좁은 도로를 나와서 넓은 도로의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소양2교로 향한다.

70번 국도를 따라서 도솔지맥의 맥을 다하는 소양2교롤 향하는데 봉의산이 보인다. 

우두사거리(18:25)

소양초교를 지나고...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강원지원

육군제2236부대

춘천기상대

강원명진학교

소양1교앞 사거리를 건너서 동부아파트를 끼고 우측으로 걸어간다.

드디어 도솔지맥의 마지막 지점인 소양2교가 보인다.

이곳 춘천의 벚꽃은 필려고 꿈도 않꾼다.

봉의산(鳳儀山)

상서로운 봉황(鳳凰)이 나래를 펴고 위의(威儀)를 갖춘 모습이라 해서 이름붙은

봉의산(鳳儀山) 정상에 오르면 도시 전체와 의암호(衣岩湖)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두평야(牛頭平野)가 가슴을 탁 트이게 하고, 주변에 있는 큰 산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도시이면서도 농촌인 듯한 양면을 함께 지녀서 전원(田園)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의암(衣岩)댐,

춘천(春川)댐, 소양(昭陽)댐에 의해 생긴 넓은 인공 호수를 보면 바다 가운데 섬인 듯한 착각까지 들게 한다.

시 중앙의 봉의산은 겨레의 아픔도 함께 나눈 역사의 산이기도 하다.

몽고족이 쳐들어왔을 때 항몽(抗蒙) 과정에서 주민 모두가 전사를 했다는 봉의산성(鳳儀山城)이 남아 있고,

풍류의 현장 소양정(昭陽亭)이 산 뒤쪽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다. 가까이는 6 25 전란 초기 남침하는

적을 저지하여 아군의 철수를 도왔던 격전의 산이기도 해서 이 곳 사람들의 자부심을 불러 일으켜 주고도 있다

소양2교 (18:50)

드디어 도솔지맥 마지막 구간의 맥을 다하는 소양2교에 손을 씻는 의식으로 마무리한다.아직

군부대의 통제로 1구간을 마치지 못했지만 아쉬운 마음으로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수하는 이곳 소양2교 아래에서 도솔지맥의 맥을 마무리한다.

멋진 낡은모자님의 모습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합수점(두물머리)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울탈님, 수헌님 졸업축하해요 

도솔지맥의 맥이 다하는 소양2교 아래서 손을 담그는 의식으로 맥길을 마무리하고... 

강가에서 도로로 올라와서 택시를 타고 춘천역으로 향한다. 

춘천역앞 닭갈비집(19:30)

이곳에서 울탈님과 수헌님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연다.

일단 식당에 들어서서 베낭을 정리하고 화장실에서 머리감고 씻은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나니 정말 개운하다.

춘천 닭갈비

춘천 닭갈비의 유래는 약 1,400년전 신라시대부터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고 1950년대 지금의 강원은행 본점 자리에서 김씨라는 사람이

닭불고기집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와 1970년 초에 춘천시 요선동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닭갈비”란 말은 원래 홍천에서 먼저 사용되었고 그 홍천의 닭갈비는

냄비에 육수를 넣고 닭요리를 한 것인데, 홍천과 태백에는 아직도

이 요리가 남아 있다고 한다. 춘천에서는 숯불위에 석쇠를 얹어

닭갈비를 요리했던 숯불 닭갈비가 있었는데 1971년부터 닭갈비판이

등장하면서 춘천에 있는 명동 닭갈비 골목을 중심으로 4개업소가

본격적으로 닭갈비를 발전시켜 춘처 닭갈비가 태어났다고 한다.

맛있는 닭갈비에다가 소주+맥주를 섞어서 5잔을 마시고 난 다음에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다. 배가 고팠던 탓인지 닭갈비를 먹고 난 다음에

밥을 비벼먹고 후식으로 막국수까지 먹고 나니 조금은 살것만 같다.

오늘은 4명중 가장 연장자이신 낡은모자님께서 쏘신단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복받을깁니다.

춘천막국수

춘천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인 막국수는 조선시대 인조때 임란 이후 잇단 흉년으로

기근이 들자 호구지책으로 이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바가지에 구멍을 내고 반죽을 눌러 빠져나오는

국수발을 끓는 물로 받은 다음 이를 굳혀먹었다.

현대 막국수의 유래는 태백산맥 화전민이나 산천농민들이

반죽해 먹던 메밀수제비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막국수의 재료인 메밀은 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다.

또 중국에서는 '하루', 러시아에선 '가샤' 란 음식으로, 네팔과 부탄에서는 국수로,

북한에서는 냉면으로, 그리고 남한에서는 메밀묵과 메밀부침으로, 다양한 음식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영서북부에서 막국수가 사랑받는 것은 추운지방 곡식인 메밀이 북쪽 음식재료였는데다

한국전쟁 이후 북쪽 실향민들이 영서지방에 정착한 이유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1시간을 넘게 먹고 마시고나니 저녁 8시 30정도가 되어 마무리하고 춘천역으로 향한다

춘천역 광장(20:35) 

춘천역 개찰구

이곳에서 집이 군포인 울탈님과 다른 열차를 탄다. 그래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지 낡은모자

성님이 캔맥주를 사가지고 와서또 하나를 마시면서 20시 43분발 상봉행 열차에 올라타고

서울에도착하여 7호선을 갈아타고 강남구청역 내린 다음 집에 도착하니 밤11시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