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 (傳燈寺)
중창기문(重創記文)에 의하면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에 중창된 이래 3,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전등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 된것으로 볼 수있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하였으나, 1282년(고려 충렬왕)의 妃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승려 인기(印奇)를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이후 전등사(傳燈寺)라고 고쳐 불렀다. 그 후 1605년(선조 38), 1614년(광해군 6)에 일어난 두차례의 화재로 전등사는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이듬해 4월부터 지경(志敬)이 중심이 되어 중건하기 시작하여 7년만인 1621년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를 받는다. 삼랑성 위에서 내려다 본 전등사의 전경 정화궁주 貞和宮主 진종사(眞宗寺)로 창건한 이 절을 새롭게 일으킨 인물은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貞和宮主)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전등사에 관한 기록을 보면, "원나라 지원(至元) 19년에 충렬왕비 정화궁주왕씨 (貞和宮主王氏)가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하여 바다를 건너 송나라에 들어가 대장경을 인출 전등사에 보관하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말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어느 날 전등사의 대조루(對潮樓)에 올라 읊은 詩에도 전등사가 정화궁주의 원찰(願刹)이었음을 보이고 있다. 성역창망오태사 星歷蒼茫伍太史 세월 속의 역사를 오태사가 까마득한데 운연표인삼랑성 雲煙俵姻三郞城 구름과 연기는 삼랑성에 아득하다 정화원당경수식 貞和願幢更誰植 정화궁주의 원당(願幢)을 뉘라서 고쳐 세우랴 벽기진혼상객정 壁記塵昏傷客情 벽게(壁記)에 쌓인 먼지 내 마음 상하게 하네. 고려 제25대 충렬왕은 元宗의 장자로 元나라에 가서 원나라 세조의 딸과 결혼하고 살다가 원종이 죽은 뒤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왕에 오른 충렬왕은 종실 시안공총(始安公總)의 딸을 정화궁주로 삼았다. 이때부터 충렬왕을 사이에 두고 宮主와 公主는 서로 심한 질투를 하였다 그런 가운데 "정화궁주가 사랑을 잃고 巫女을 시켜 공주를 저주한다 "는 투서가 있어, 궁주는 갇히게 되었다. 곧 풀려나기는 하였지만 공주가 죽을 때까지 궁주는 왕과 통하지 못한채 항상 별궁에서 머물러야 했다. 왕의 사랑을 잃은 정화궁주는 전등사를 그의 원찰로 삼고 복을 빌었던 것이다. 전등사는 삼랑성(三郞城) 또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의 안에 있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세웠다는 전설의 城으로 마니산의 단군신화와 함께 신비로운 성이다. 삼랑성은 삼국시대에 잡석으로 축성되었다가 고려시대에 보수 그리고 조선시대에 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사진은 삼랑성의 동문(東門)으로 1886년 병인양요를 당하여 이 곳 정족산성의 수성장(守城將) 양헌수(梁憲洙)는 이 곳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물리쳐 그들이 퇴각하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이 곳에 양헌수(梁憲洙)의 승전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림의 왼쪽에... 傳燈寺의 문화유산 대웅보전이 보물 제178호, 약사전(藥師殿)이 보물 제179호 그리고 범종(梵鐘)이 보물 제3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기타 청동수조(靑銅水槽) 등 인천유형문화재가 다수 있다. 윤장대(輪藏臺) 윤장대(輪藏臺)란 책장의 일종으로 불교에서는 경전을 넣은 책장을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전륜장(轉輪藏) 또는 전륜경장(轉輪經藏)이라고도 한다.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의지하여 원형 또는 다각형의 나무장을 올린 뒤, 여기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다. 경전은 경장뿐만 아니라 율(律)과 논(論) 또는 여러 고승들의 장소(章疎)도 함께 넣어 둔다. 사찰에 처음 윤장대를 설치한 것은 중국 양(梁)나라 시절이며, 佛道를 믿으려 하나 글을 알지 못하거나, 불경을 일을 겨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생긴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천용문사의 윤장대가 유일하며, 기타의 윤장대는 그 것을 본 따 현대에 만들어 진 것이다. 용문사의 윤장대는 고려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물 684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조루(對 潮 樓) 전등사의 남동쪽으로는 멀리 강화해협이 내려다 보인다.이 바다가 바로 앞에 대하듯 보인다는 의미에서 대조루(對潮樓)라 이름지었다. 이 건물은 전등사의 不二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대조루의 초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상량문의 기록에 의하면, 1749년(영조 25)에 총섭 초윤(총섭 초윤) 등이 개수하였다 하며, 1841년에 총섭 연흥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 곳 대웅전에서 대웅전을 바라 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로 향하게 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고려하여 지어졌다. 은행나무의 전설 전등사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두 그루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하나는 대웅전 앞마당에, 또 하나는 입구 윤장대 근처에 있는데 각각의 이름이 노승나무,동승나무라고 부르며 암컷과 수컷 한쌍이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데, 전등사의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는 맺지 않는다. 여기에는 전설이 있다. 윤장대 근처의 또 다른 은행나무 강화도령 철종때의 일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열매를 20가마 바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전등사의 은행나무는 고작 10가마 정도 밖에 열매를 맺지 않았다. 난감해진 전등사의 노승은 백련사의 추송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며칠 후 추송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고 여기에는 관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추송스님은 3일 기도에 들어갔고,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 올랐다. 추송은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 라고 말하자 갑자기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엎더니 비가 무섭게 내리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두려워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추송스님을 비롯하여 전등사의 스님들은 보이지 않았고, 이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 제178호)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1614년(광해군 6)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21년(광해군 13)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나부상(裸婦像:대웅보전의 처마) 전등사의 대표적인 법당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상 즉, 나부상(裸婦像)때문이리라 .. 석가모니를 모신 신성한 법당에 왠 벌거벗은 여인인가? 어떤 사람은 벌거벗은 여인이 아니라 원숭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인도 등의 사찰에서 모셔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부상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의 모습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옷을 걸친 모습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 중 한 손으로 처마를 떠받든 모습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부처를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리고 그러한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고 있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하였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 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이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 있을 것이다. 한편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바지로운 마음을 본 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러기에 대웅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여러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나부상(裸婦像)의 전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수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 진 것은 17세기말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중건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을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 곳 酒母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 주었다. 불사를 끝내고 같이 살림을 차리기로 약속도 하였다. 하지만 공사가 막바지에 이른 어느날 도편수가 그 주막을 찾아갔으나 그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이웃집 여자가 말하기를.. "며칠 전 야반도주하였으니 찾을 생각일랑 말라는 것이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분노로 일손이 잡히지도 않고, 잠도 오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공사를 마무리하였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져 있었다. 청동수조(靑銅水槽:인천유형문화재) 이 청동수조는 지름 112cm, 높이 72cm의 크기로 고려 충렬왕의 妃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시주한 것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이 수조는 보존상태가 극히 양호하며 수조 안에는 물고기와 자라가 몰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청동수조는 불을 끄기 위한 것으로 물을 항상 담아두었다가 긴급할 때 사용하였다. 공중에 떠다니는 불귀신이 불을 일으키러 큰 건물을 골라서 다니다가 수조안에 있는 물에 비친 자신의 흉악한 몰골을 보고는 동료가 불장난하러 와 있는줄 알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는 전설도 있다. 명부전(冥府殿) 약사전(藥師殿:보물 제179호) 전등사의 대웅보전 서쪽에 있는 아담한 약사전(藥師殿)은 중생의 病을 고쳐 준다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조선 고종 13년(1876), 대웅보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보일 뿐 언제 누가 지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고, 건축 수법이 대웅보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의 건물로 짐작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이며 주위에는 화려한 연꽃 무늬와 덩굴무늬를 그려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는 수법이 특이하며 당시의 건축 수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약사전 내부의 후불탱화 및 현왕탱...인천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범종(梵鐘:보물 제393호) 이 범종은 중국 북송(北宋)의 철종 4년( 1097년. 고려 숙종 2)에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 백암산(百巖山) 숭명사(崇明寺)에서 주조(鑄造)된 철제종(鐵製鍾)이다. 일제가 제2차대전 당시 약탈하여 부평의 병기창에 놓아 두었던 것을 광복 이후에 찾아와 다시 전등사에 보관되고 있다. 그러나 中國鐘이라 울리지는 못하고, 對潮樓에 따로 범종을 조성하여 두었다. 종의 형태는 정상에 쌍룡(雙龍)을 갖추고 용두(龍頭) 주변에는 16개의 연꽃잎을 돌렸으며, 종신(鐘身)에는 위쪽에 8잎을 돌리고, 그 밑으로 여러 개의 옆띠를 위아래를 구분한 다음 종선(縱線)으로 위 아래 각 8개의 네모구획(四角區劃)을 마련하였다. 이 네모 구획과 구획 사이의 길쭉한 공간에는 명문(銘文)을 양각(陽刻)하여 두었다. 크기는 높이가 1.64m 구경은 1m에 이른다. 종구(鐘口)는 중국종에서 보이는 물결모양을 이룬 듯한 8모로 되어 있고 그것을 따라 소문(素紋)의 구연대(口緣帶)를 돌렸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철제종이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종이다. 특히 명문(銘文) 중에는 이 종을 주조할 때의 시주인(施主人), 동역인(董役人), 장인(匠人) 등의 이름이 양각되어 있고, 종구의 하단 가까이에는 대송회주...(大宋懷州...)라는 27字가 새겨져 있다. 나무에 새긴 달마대사 .. 범종각 옆 달마대사(達磨大師) 달마(達磨)는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이다. 보리달마(菩提達磨)의 줄임말이다. 달마는 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중국에 들어와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禪)에 통달하였다. 그는 520년경 중국에 들어와서 낙양(洛陽)에 이르러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이나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하고나서,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이(理)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 선법(禪法)을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수하였다. 달마는 당시의 가람불교나 강설불교(講說佛敎)와는 정반대인 좌선(坐禪)을 통하여 그 사상을 실천하는 새로운 불교를 강조하였다. 三 星 閣 정족사고 (鼎足史庫)
정족산진도(鼎足山鎭圖) 강화도 전등사 경내에 있던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곳이다. 이 史庫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시설인 정족진(鼎足鎭)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정족산성(삼랑성) 안에 장사각과 선원각, 취향당 등의 사고(史庫)영역, 대웅전과 약사전, 향로전 등의 전등사 영역 그리고 내사(內舍)와 진사(鎭舍), 포량고(砲糧庫) 등의 정족진(鼎足鎭) 영역이 자리잡고 있다. 내사와 진사는 군사들이 머물던 곳이며, 포량고는 군량을 저장하던 창고이다. 이 곳을 발굴한결과 1870년대에 작성된 위 지도에 보이는 정족진 관련 건물 유적들이 거의 그대로 확인되었다. 포량고 건물 바닥 전면에는 벽돌을 깐 것으로 드러났으며, 정족진 내부에서 전면 외부로 빗물 등을 빼내기 위한 배수구 시설이 온전한 모습으로 벌견되었다고 한다. 사고(史庫) 사고(史庫)란? ... 고려 및 조선시대에 나라의 역사 기록과 중요한서적 및 문서를 보관하는 전각을 말한다. 옛 선조들은 특히 사고 안에 따로 역대 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을 사각(史閣)이라 해서 그 보존에 힘을 썼다. 실록이 처음 사찰에 보관된 것은 고려 때인 1277년(고종 14)의 일이다. 이 때 고려왕실에서는 합천 해인사에 史庫를 마련하여 실록을 보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春秋館과 충청도 忠州, 경상도 星州, 전라도 全州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이것으로 춘추관 외에 충주,성주,전주의 사고를 3대 史庫라 해서 여기에 역대 실록을 분산,보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충주 및 성주의 史庫가 소실된 반면 全州의 史庫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어, 전주의 실록을 한때 내장산으로 옮겼다. 1606년(선조 39)에 明宗까지의 실록이 여러 벌 복원되자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전주 사고본을 옮겼다. 또한 오대산,태백산,적성산에도 사고를 마련하여 새로이 간행된 실록을 보관하였다. 정족사고(鼎足史庫) 1628년(인조 6), 조정에서는 강화도 마니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묘향산 사고에 보관했던 전주본을 옮겼다가, 1660년 강화도 정족산에 사고를 마련하여 마니산 사고에 있던 전주본을 이 곳에 비장하였다. 이처럼 실록 등 국가의 귀중한 사서는 수실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중앙과 지방에 분산하여 보관하였다. 그러나 구한말인 1908년 정족산,태백산, 오대산, 적성산 등 4대 사고릐 장서들을 규장각의 관할 하에 두었다. 본래의 정족산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없어졌다. 다만 사고애 걸려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原寶閣)"이라는 현판만이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어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다가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정족사고는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아 있었고, 위 두개의 현판은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었다. |
출처 : sonsang48 daum column
글쓴이 : 백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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