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100대名山 山行記

운악산(雲岳山)

by 범여(梵如) 2013. 10. 5.

100대 명산중 33위

☞ 산행일자:  2013년 9월 20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0km / 5시간 1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하판리마을회관-매표소-현등사일주문-백년폭포-눈썹바위-625m봉-병풍바위

                   725m봉 -미륵바위-철난간-철계단-망경대-운악산 동봉-운악산 서봉-운악산 동봉

                   대원사 갈림길-남근바위-절고개-코끼리바위-절고개폭포-현등사-민영환 암각서

                   무우폭포-삼충단-주차장

소 재 지:  경기도 가평군 하면, 포천시 화현면

 

추석을 보내고 특별히 할일도 없고 그냥 푹 쉬고 싶은 생각에 휴대폰까지 꺼버리고 휴식을 취한다.

집에는 달랑 나혼자다. 애들은 친구 만나러 나가 버리고 마눌님은 처제집에 가고...

모래 감악지맥을 타러 가기에 워밍업이라도 해야겠다싶어 이른아침에 물한통에 캔맥주 하나

그리고 산에서 끓여먹을 라면 하나 챙긴 다음에 무작정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이 운악산이다.

산은 15여년전에 한번 와 본 기억밖에 없고 운악산 아래에 있는 썬힐 골프장은

몇년전 골프에 한참 미쳐 있을때 당시 그린피 싼맛에 한달에 한번씩 온 탓에 길은 낯설지 않다. 

하판리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운악산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두부전골로 식사를 마치고

등산로 입구로 향하는데 이곳은 순두부가 유명한 모양이다.

모든 식당들의 주 메뉴가 순두부이다. 예전에 보이지 않는 펜션도 많이 보인다

오늘 산행구간 지도

 

운악산(雲岳山:935m)은  화악산, 감악산, 송악산, 관악산과 함께  경기 5악으로 불리며
오악(五岳)중에서도 가장 수려한 산으로 현등산이라고도 불린다.
조계폭포, 무지개폭포, 무운폭포,백년폭포, 건폭 등 폭포를 품은 계곡이 있어 여름철 산행지로도
좋지만 가을단풍이 특히 장관이고 봄이면 산목련과 진달래가 꽃바다를 이루기도 한다.
운악산의 진달래는 정상의 서쪽, 동쪽, 남쪽 사면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현등사에서 능선을 타고
운악산 정상에 이르는 철사다리 코스에도 능선 좌,우에 진달래가 많다.

 산 중턱에는 신라시대 법흥왕때 창건한 현등사가 있고 동쪽 능선에는 입석대,미륵바위, 눈썹바위,

대슬랩의 암봉과 병풍바위를 비롯 능선들이 장관을 이룬다.
암벽코스와 평탄한 코스를 함께 지녀 초보자부터 전문가까지 함께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산이다.
산 전체가 바위산이라 길이 아닌 곳에는 다른 산에 비해서 위험하다.

 

100대 명산 인기순위에서 33위(한국의 산하 2011~12  2년간 접속통계에 의한 순위)

험하지 않은 아기자기한 암릉코스가 있어 3~4월 봄, 10~11월 산행시즌에 많이 찾지만

여름에도 인기가 있다.(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선정 사유)

 

만경대를둘러싼 경관이 경기의 소금강이라 불리울만큼 뛰어난 점을 고려하여 선정

천년고찰인 현등사를 비롯 현등사및 백년폭포,오랑캐소, 눈썹바위, 코끼리바위, 망경대

무우폭포, 큰골내치기암벽, 노채애기소 등 운악팔경이 유명하다.

음식점과 펜션단지를 지나 매표소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운악산에 접어든다.
운악산 입구에 서 있는 운악산 예찬비

   운악산 만경대는

   금강산을 노래하고

 

   현등사 범종소리

   솔바람에 날리는데

 

   백년소 무우폭포에

   푸른 안개 오르네

현등사 일주문
일주문(一柱門)이란 기둥이 한줄로 되어 있는데서 유래된 말이다.
보통 네 기둥(四柱)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위에
지붕을 얹은 형태를 말한다 일주문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며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한북제일의 지장극락도량으로 일컬어지는 현등사(懸燈寺)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지 13년 후인 540년(법흥왕 27)에  

한북제일의 지장극락도량으로 일컬어지는 현등사(懸燈寺)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13년 후인 540년(법흥왕 27)에 창건되었다.

『봉선사본말사지』에 수록된「운악산현등사사적」에 의하면, 당시 인도승 마라가미가(摩羅訶彌)가 신라 땅에 들어와 불법의

전파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이를 가상히 여긴 법흥왕이 그를 위해 운악산에 절을 짓고 포교에 힘쓰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절의 시작이다.  

 

창건 이후 898년(효공왕 2)에 도선국사, 1210년(고려 희종 6)에 보조국사 지눌, 1411년(태종 11)에 함허대사,

1811년(순조 11)에 취윤(就允), 원빈(圓彬) 두 대사 등에 의해 수차례의 중창이 있었다.

한국전쟁 와중에 거의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가람은 1961년 성암 도인스님이 국가의 보조금을 받아 절을 중건하였다

이쁜넘들
자비 참 좋은 말씀이죠
청룡능선 제1등산로 입구
현등사가는 길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면 청룡능선 제1 등산로이다 
나무 계단을 힘들게 오른다. 아무래도 추석 연휴에 많이 탓인 모양이다.
슬픈 전설을 간직한  며느리밥풀꽃도 만나고...
청룡능선  제2 등산로와 만나는 이정목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사과 하나를 먹는다.
눈썹바위표시석
눈썹바위의 유래
운악산 현등사 입구에 있는 선녀탕(仙女湯)은 이름만 들어도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이 잠겨져 있는
곳인데  그 이름만큼이 애절한 사연이 깃들여 있다
 

어느 옛날 하늘의 선녀들이 이곳에 내려와 한가로이 목욕을 하며 노닐고 있었는데,

마침 운악산에 올라와 산심세를 하던 떠꺼머리 총각이 산 중턱에서 이 광경을 목격하고,

바위 옆에 숨어 선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선녀들은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속살대며 한가로이 목욕을 즐기다가, 모두 바위 위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총각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살금살금 산을 내려와, 선녀들이 벗어 놓은 옷가지 중,

치마 한 개를 훔쳐 가지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 숨어서 선녀들의 동태를 지켜보았다.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난 선녀들이 각자 옷을 찾아 입게 되었는데

한 선녀의 치마 한 개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선녀들은 서로 모여 어쩔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 하다가 하늘로 올라갈 시간이 되었는지

치마 없는 선녀 하나만 남겨둔 채 모두 하늘로 날아서 올라가 버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총각은 시치미를 떼고 산에서 내려와, 어디서 오신 여인인데 날이 저물도록

이곳에 있느냐고 하며, 함께 집으로 내려가기를 권하니, 이 선녀는 치마가 없어 함께 갈 수가 없다고 이르자,

총각은 순진하게도 자신이 감추고 있던 치마를 품속에서 꺼내주고 입을 것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선녀는 치마를 입자마자 총각에게 이르기를 "내가 다음날 다시 이곳으로 올 터이니,

그때 다시 만나 함께 댁으로 가시지요.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는 훌쩍 날아서 하늘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총각은 그 선녀를 다시 만나리라는 기쁨과 설렘으로 선녀탕이

내려다보이는 바위로 올라가 선녀들이 또다시 내려와 목욕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선녀는 하늘에 올라가 심한 꾸지람을 듣고, 다시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계율에 매여 버리고 말았다.

 

 총각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하루 이틀, 몇 달이 지나도록 그 바위에 앉아 하염없이

선녀를 기다리다가 이내 바위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그 총각이 굳어버린 바위를 지금은 눈썹바위라고 하는데, 지금도 어느 안개 자욱한 날이면 총각이

애타게 기다리는 징표인양, 눈썹바위가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모습이 자주 나타남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고 전해 온다.

가평 문화원 지명과 유래에서 인용
눈썹바위를 바라보며 좌측으로 우회한다
계곡 오름길에는 조그만 돌무덤을 만나고...
이곳부터 운악산의 멋진 암릉들을 만난다
멋진 기암들

 

등로에서 만난 고사목

 

평산신씨와 죽산안씨의 부부 합장도 만나고...
725m봉 이정표
725m봉에 있는 암릉
운악산의 품속에 폭 쌓여있는 현등사
운악산 백호능선의 모습
725m봉 정상
정상에서 내리막 길을 내려오는데 잠시후에 병풍바위 전망대를 만난다. 
병풍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병풍바위를 배경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현등산 詩

현등산은 바로 옛 난산인데 / 懸燈古蘭山

절벽이 검은 흙을 이고 있고 / 絶壁戴焦土

양쪽 절벽이 서로 맞닿을 듯하여 / 兩厓欲相撞

좁은 골짝이 사시장철 어두워라 / 束峽昏萬古

[후략]

병풍바위의 모습
입석대
미륵바위 능선 구조안내 표시목
이정표
미륵바위
입석대

청룡능선 오름길에 725m봉에서 부터는 과연 소금강이라 불릴만큼 빼어난 암릉들이 즐비하다.

병풍바위, 입석대, 미륵바위 망경대 등 서울 근교에 이런 산이 있다는 건 정말 복받은 걸까?

미륵바위와 725m봉의 모습
병풍바위
미륵바위 표시석
조선 후기의 여성들에게 미륵신앙은 하나의 구원처(救援處)였다.

원래 미륵신앙은 조선 후기 변혁운동의 확산과 맞물려 있었는데,
우리나라판 '메시아'를 간구하는 민중적 염원에서 민중들의 열망을
'미륵의 재림', '미륵의 시대'로 만들어 간 것이다.

미륵(彌勒)이 후세가 아닌 당장, 이 시대에 내려와 민초(民草)들의 척박한 삶을 구해준다는(解決) 믿음,
즉, 당래하생(當來下生)하여 중생을 구제해주기를 갈구하였던 만중들이 희망(염원)을 담아
산이나 들녁, 마을 어귀 등 자연의 바위마다 '미륵바위'란 별칭을 부여하니,
그것이 남아선호사상과 결합(結合), '남자의 물건(陰莖, penis)과 비슷한' 바위마다
역시 '미륵바위'란 이름을 붙이게 되고, 그래서 나타난 결과가
따로 이름 붙여진 운악산의 '미륵(彌勒)바위와 남근석(男根石)'이다
미륵바위

미륵바위(男根石)에 부과된 1차 과제는 아기를 낳게 해주는 역할이겠죠.

아내를 내 쫒는 이유에 해당되는 칠거지악(七去之惡)에 시달리던 여인들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이르러
남근석(男根石, 좇바위)과 미륵(彌勒)바위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부분 그렇지만, 남근석이나 여근석은 인공으로 그렇게 만들라고 해서 쉽게 만들기 어려울 정도죠.
자연스러운 모양이라,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행동을 하게 됩니다.

"계집과 아궁이불은 쑤석거리면 탈난다."는 속담은
여성의 음부에 작대기로 쑤시는 행위인데, 그 자체가 남녀 상관(相關, 合)을 뜻하니,
사람들이 여근(陰門)석에 물을 붓거나(도봉산 여인봉) 작대기질을 합니다.

여자의 갈라진 그 곳과 같다고 하여 농바위, 두덩바위, 보지바위라 부르지만,
마을에서 이 농바위가 바라보이면 동네 처녀가 바람이 난다고 하여
음풍(陰風)을 막기 위하여 대부분 대칭되는 곳, 동구에 남근(男根)이 자리잡습니다.

이렇듯 삼천리 방방곡곡에는 남근과 여근(陰門)들이 흔하게 자리잡고 있는 거죠.

유교사회에서는 성 표현에 억압이 있으니,
미륵바위와 남근석을 통해 성에대한 희망, 삶에 대한 희망을 매우 솔직하게 증거물로 남겼던 것 같습니다.

경주 안압지에서 나온 출토품에도 남근(男根)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용도는 분명치 않으나 귀두龜頭, 거북 귀字를 씀)가 분명하게 다듬어진 목재(木材) 남근인 것을 볼 때
신라시대의 궁녀들이 야심한 밤에 잠 못 이루다가 쓰던 물건을 연못에 버렸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민속품 중에 궁중의 궁녀들이 '오나니'용으로 쓰던 목각물이
다수 전해지고 있어, 궁내(宮內)에서 쉽게 처리되지 않는 성욕의 해결방식을 상상해 봅니다 (펌글) 

미륵바위에서 조금 더 올라서니 이정표가 나오고 본격적인 대슬랩이 나온다.

본격적인 암릉산행... 재미가 솔솔하다

지나온 725m봉과 미륵바위

그 아래로는 예전에 많이 다녔던 썬힐 골프장이 보인다 

저멀리 화학산과 연인산 쪽에서 비가 올려나 먹구름이 몰려온다.

스릴을 느끼며 운악산을 오른다

낙락장송

철사다리를 지나 만경대로 오른다

100대 명산이라 그런지 지방 산악회의 시그널도 보인다

백운산과 국망봉, 도마치봉도 아련히 보이고...

곡예하듯 아슬아슬하게 암릉을 오르니 망경대가 나온다.

만경대

만경대 낙락장송

몇해전 한북정맥길에는 없던 새로운 표시석이 보이는데 "雲嶽山 毘蘆峰" 정상비

비석에 운악산의 예전에 썻던 악(岳)자에서 악(嶽)자로 바뀐게 흥미롭다.

모두 '큰산 악'자이기에별 지장이 없을듯 하기는한데 그래도 뒤에 '비로봉'까지 붙인 이름이 조금은 어색해 보였다

운악산 비로봉 표시석 뒷면의 모습

운악산(雲岳山:937.5m)

경기도 가평군 하면과 포천시 화현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기암과 봉으로

이루어진 산세가 아름다워 소금강이라고도 불리워져 왔다.

 

주봉인 만경대를 중심으로 우람한 바위들이 봉우리마다 구름을 뚫고 솟아있고 골짜기마다

하늘을 가리는 활엽수림은 가을이면 단
풍으로 물들어 만산홍엽을 이룬다.

4월 중순의 자목련, 5월경 진달래와, 산 목련이 계곡과 바위마다 수놓은 꽃길은 정말로 장관이
다, 또한 관악, 치악, 화악, 송악과 더불어 중부지방의 5대 악산 중의 하나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
을 받는 산이다.

봉래 양사언의 시에 이르기를 "꽃같은 봉우리는 높이 솟아 은하수에 닿았고" 에서 화현면과 궁예
왕성의 지명이 되는 단서가 보인다. 운악산은 이름그대로 뾰족한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구름을 뚫
고 솟아서 그 모습이 마치 서기를 품은 한 떨기 향기로운 꽃과 같다해서 지명이 운악산이다.

유적지로는 궁예성터, 궁궐터, 만경대, 신선대, 병풍바위, 미륵바위, 코끼리바위, 눈썹바위 등이
있 만경대를 중심으로 산세가 험하여 기암절벽으로 산을 이루고 있어 그 경치가 절경이며, 구름
이 산을 감돌아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화학산, 감악산, 관악산, 송악산과 함께 경기 5악
중 하나로 "경기소금강"으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운악산에 관하여는 고려시대의 여지도서, 세종실록, 택리지 등에서 언급되고 있다. 조선 중종 25
년(1530년)에 간행된 '신중동국여지승람' 제 11권 가평현 불령조에는 용천사, 영통사, 현등사, 영
취함, 영제암, 혜수암 등이 화악산에 있고 미라암, 지장암 등이 운악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현등사가 있는 산을 운악산이라 부르고 있는 것과는 달리 화악산이라고 한 것이 주목된다.

운악산 동봉에 있는 1등 삼각점

목이말라 정상 막걸리 파는데서 막걸리 한잔에 3000원, 아이스케키가 2000원이다

아룸리 그래도 그렀지 너무 폭리를 취하는 느낌이다 .울며 겨자먹기로 막걸리 한잔을 마신다

동봉에서 350m 떨어진 서봉으로 향한다.

운악산 서봉(935.5m)

운악산은 경기도의 동북 산간 지역에 위치한다.

북쪽에는 한북정맥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있고 남쪽에는 북한강이 동서로 흐르고 있다.

북쪽의 한북 정맥에는 경기도 최고봉인 화악산(1,468m)을 비롯해 응봉(1,436m), 촛대봉(1,125m),

가덕산(858m), 북배산(967m), 계관산(655m) 등이 강원도와 경계를 이룬다.

한북 정맥은 포천군과도 경계를 이루는데 운악산을 중심으로 하여 국망봉(1,168m), 강씨봉(830m),

청계산(849m), 원통산(567m), 주금산(813m) 등이 솟아있다. 한편 한북 정맥의 본 줄기에는 속하지

않지만 운악산과는 조종촌을 경계로 하여 명지산(1,267m), 매봉(927m),수덕산(749m) 등이

별도의 산줄기를 이루며 뻗어있다.

운악산 서봉 정상에서

운악산 서봉의 모습

서봉 정상에서 노채고개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 아무도 다니지 않는 넓은 공터에서

매트를 깔아놓고 션한 캔맥주 한잔을 마시고 1시간정도 누워서 휴식을 취한다.

1시간정도 누워 있으니 추위가 엄습해와서 다시 서봉으로 올라와 동봉으로 향한다.

서봉 정상에서 바라본 포천시 서파사거리의 모습

산부추

다시 동봉에서

동봉 정상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 뭔 뜻인지 몰러.

동봉 정상에서 바라본 서봉 망경대의 모습

운악산에는 동봉과 서봉 정상에 각,각 망경대가 있다.

서봉과 동봉을 두루 구경하고 한북정맥길때 걸었던 절골방향으로 걸어간다.

대원사 갈림길

남근바위

남근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평군 하면 하판리 전경

절골길 가는 길에서 만난 기암

절고개 갈림길

절고개 갈림길에서 현등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내리막길은 급경사라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정말 코끼리 코처럼 생겨 신비하기만 하다

코끼리 바위의 모습

인간에게 시달림을 참으로 많이 받는구나.

폐가가 나타나고 이곳에서 우측 개울가에서 라면하나를 끓여먹고 현등사로 향한다.

현등사로 향한다.

현등사 가는 초입에서 만난 2기의 부도

함허당 부도 옆쪽에 있는 부도로 좌측의 부도는 주인을 알 수 없으며 우측의 부도는

1984년 보광당과 극락전을 개축한 보봉당 충현스님의 부도이다 

현등사 함허당 득통탑및 석등(懸燈寺涵虛堂得通塔및 石燈:경기도유형문화재 제199호)

탑과 석등은 조선초인 1411년에 현등사를 중창했던 함허대사의 사리탑으로 경내에서 약간 떨어진

서남쪽에 있는 팔각원당형부도(八角圓堂型浮屠)로 높이는 약 266cm 이다.
둥근 탑신에 함허무준(涵虛無準)이 가로로 음각된 것이 아니라 세로로 함허당득통이라고 전서(篆書)로 음각되어 있다.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2단의 8각형 기단을 두어 전체적으로 3단의 기단위에 둥근 탑신을 올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옥개석은 8모지붕으로 물매가 급하며 처마끝까지 반전없이 그대로 내려간다.

상륜부에는 하단의 돌로 노반과 복발을 만들었으며 보륜과 보주도 역시 하나의 돌이다.

함허대사가 입적할 때가 1433년이고, 이로부터 멀지않은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이므로 이 부도는 조선초기

부동의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부도의 앞에는 높이 120cm의 규모가 매우 작은 석등이 있다.

이와같이 부도 앞에 석등이 배치되는 예는 고려말~조선초의 부도에서 찾을 수 있다.
전체형태가 평면적인 방형으로 되어있어 마치 조선시대에 유행한 장명등(長明燈)과 비슷하다.

석등몸체에는 涵虛라는 글이 새겨져있다고 하나 마멸이 심해 확인할 수는 없다.

함허대사 부도를 지나 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데“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현등사 관음전
관음전과 동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요사 겸 종무소가 있고, 요사채 남쪽에는 약수가 솟아나고 있어 등산객들의 목을 축여준다
우측에 있는 독특한 구조의 전각은 1987년에 신축한 건물로 현재 현등사의 관음전 및 주지스님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ㄷ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전각 앞뒤로 관음전ㆍ보광전ㆍ보합화루(保合和樓)ㆍ
운악산 현등사ㆍ대자대비전 등 편액 6기가 걸려 있다. 내부에 유형문화재 제198호 현등사수월관음도(懸燈寺水月觀音圖)와
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지만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관음전을 뒤로 하고 현등사의 주법당인 극락전으로 향한다

현등사삼층석탑 (懸燈寺三層石塔:경기 유형문화재 제63호)

현등사 내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현등사는 신라 법흥왕 때 인도의 스님 마라하미가불교의

교리를 전하러 신라로 건너오자, 왕이 그를 위하여 이곳 운악산에 큰절을 짓도록 하여 세워진 사찰이다.

그 후 황폐해 있던 것을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가 재발견하여 다시 건물을 짓고 ‘현등사’라 이름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조선 순조 30년(1830) 때 암구대사에 의해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이 탑은 보조국사의 3층석탑이라고 전하여지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또한 ‘3층석탑’이지만 원래는 5층석탑이었고,현재는 2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없어진 상태라고도 하여

층수구분이 애매하다. 탑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 역시 2층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위층에 해당하는

부분의 덮개돌이 지붕돌모양을 하고 있어서 이 부분은 기단보다는탑신부(塔身部)의 1층에 더 적격일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 의견이 더욱 타당할 듯 하다.

당시 고려시대의 자유로운 조각기법을 보여주듯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기단은 마치 사리탑에서 보던

모습과거의 비슷하여 상·중·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뎃돌에는 면마다 둥근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고

이를 사이에 둔 위아랫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겨넣었다. 탑신부의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힘차게 들려 있고, 

밑면의 받침은 1·2층은 4단, 3층은 3단을 두어 변화를 주었다. 꼭대기에는 꽃과 구슬이 새겨진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안정감이 드는 작품으로, 특이한 모습의 기단부, 지붕돌의 부드러운 처마곡선 등 각 부분의 양식들이

고려시대 후기세 세운 것임을 잘 보여준다.

 

현등사에 대해 읊은 시 가운데 백사 이항복선생과 월사 이정구선생의 시

 

운악산은 골이 깊기도 한데 / 雲岳山深洞

현등사를 처음으로 창건하였네 / 懸燈寺始營

노는 사람은 성을 말하지 않는데 / 遊人不道姓

괴상한 새는 절로 이름을 부르누나 / 怪鳥自呼名

뿜어내는 샘물은 하늘의 띠가 장대하고 / 沸白天紳壯

모여든 산봉우리는 지축이 기울도다 / ?靑地軸傾

다정하게 호계에서 작별을 하니 / 殷勤虎溪別

석양빛에 저문 산이 밝구려 / 西日晩山明

[이항복/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분분한 세상사를 떨쳐 벗어날 수 없으니 / 世累紛紛撥不開

서글피 옛날 노닐던 곳 고개 돌려 바라볼 뿐 / 舊遊??頭空回

그윽한 회포는 쓸쓸히 승려의 시권에 부치노니 / 幽懷??付僧卷

맑은 꿈속에 때때로 석대를 찾아서 가노라 / 淸夢時時尋石臺

개울가 집엔 구름 자욱하고 송라 덮인 오솔길 / 磵戶雲深蘿逕細

바위 곁 사립 고요한 밤에 바람에 우는 물소리 / 巖扉夜靜風泉哀

길 잃고 신선 만난 곳을 늘 그리워하리니 / 仙?迷路結遐想

그 언제나 유랑이 다시 천태산을 찾아갈거나 / 何日劉郞重訪台

[이정구/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현등사 극락전

현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신라 법흥왕 때 인도승 마라가미(摩羅訶彌)가 포교차 신라에 왔으므로 왕이 그를 위해 절을 창건하고

산이름을 운악산이라 하였으나, 창건 당시의 사찰명은 전하지 않는다. 그 뒤 수백 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

898년(효공왕 2)에 고려가 개경(開京: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할 것을 미리 안 도선(道詵)이

송악산(松嶽山) 아래 약사도량(藥師道場)으로 세 사찰을 창건하였으나 완공 뒤 지세를 살펴보니

동쪽이 허(虛)하였다. 이를 보진할 땅을 찾아 동쪽으로 여행하다가 운악산의 옛 절터에 이를 중창하였다.

 

1210년(희종 6)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주춧돌만 남은 절터의 석등에서 불이 꺼지지 않고있음을 보고

중창하여 현등사라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보조국사가 도봉산 원통암에 있을 때 동방에서 3주야간이나

빛을 발하고 있었으므로 이곳까지 찾아왔더니 잡초 우거진 곳에 관음당(觀音堂)이 있었고, 그 곁의 석등에서

빛이 발하고 있었다고 한다.그 뒤 1411년(태종 11)에 함허화상(涵虛和尙)이 삼각산에서 오신산(五神山)으로

가다가 이 부근에서 길을 잃었는데, 홀연 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므로 따라가 보았더니 흰 사슴은

온데간데없고 그곳에 옛 전각지(殿閣址)가 있었으므로 크게 중건하였다. 그 때 3대군(大君)의 원당(願堂)을 삼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

 

불가에서의 ()이란,

어둠을 밝히는 것과 함께 부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으로 전지전등(全智傳燈)’이라 하여 만물에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지혜를 서로 주고받는다.’는 뜻이 된다.

현등사 극락전(極樂殿)

현등사의 주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984년 기와 개체 때 상량문이 나와 절대연도를 알 수 있는 건물로 1746(영조 22)년 지어져다.

건물은 가구식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두고 그 위로 자연목을 그대로 사용한 싸리나무 기둥을 얹었다.

기둥 중 일부는 위쪽과 아래쪽의 굵기가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아마 싸리나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건물 내부는 중앙 불단 위로 아미타여래좌상이 있고, 아미타후불탱, 신중탱 등이 내부를 장엄하고 있다

극락전 본존불 - 현등사목조아미타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현등사의 본당인 극락전

불단에는 한 구의 불상만 모시고 있다.

전체 높이가 138㎝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불상 가운데 중형에 속한다.

불상은 상체를 약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선 후기 불상의 전형화가 이루어진 18세기 이전인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며,

현등사목조아미타좌상이란 이름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 뒤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5호 현등사아미타회상도(懸燈寺阿彌陀會上圖)가 걸려 있다.

비단 바탕에 진채색(眞彩色)으로 그려졌으며, 가로 298㎝ 세로 265㎝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다.

화면 구성은 아미타불이 중앙의 높은 대좌 위에 결과부자하고, 그 좌우에는 보살, 사천왕, 십대제자, 성중들을 배치하였다.

화기(畵記)를 통하여 1759년 이 회상도를 아미타불의 개금과 더불어 조성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현등사 극락전 봉선사 종

극락전에 있는 1619년(광해군 11)명 범종으로 본사인 봉선사에서 만든 것이다.  
이 종은 보물 제 397호로 지정된 봉선사 대종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안정감과 양감,
장식성을 고루 갖추고 주물 상태도 양호하다. 

종의 구조는 종의 중앙에 3줄의 띠 장식대를 둘러 상ㆍ하로 나누고 상단의 어깨부분에는 연꽃을,
그 아래에 상대(上帶)와 4개의 유곽(乳廓)을, 아랫부분에는 가는 당초문양대와 넓은 보상당초 문양대를 배치하였다.  
특히 이 종은 한국 종의 특징인 음통이 없고, 종신에 띠 장식대가 둘러 있어 전형적인 조선범종의 세부표현과 차이를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조선 초기의 범종형식을 계승해 조선 중기에 조성된 종으로,
조선후기에 유행한 중국계 범종의 계보를 이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되어 극락전에 봉안되고 있다.
문화재의 향기 시나브로님 사진 인용

현등사 지장전

지장전은 원래 위실각(位室閣)으로 함허가 현등사를 중창할 때 세워진 건물이다.

위실각은 세종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과 부인 홍씨.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대군과

두 부인의 위패를 모셨던 건물로 숙종과 고종은 이 절에 사신을 보내 원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니 19세기까지 원당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한 듯하다.

현재도 지장전 동쪽 벽면에는 [大君位室]이 설치되어 있고, 제안대군과 평원대군의위패를 모신다.

지장전은 1984년 문현스님이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중수했는데, 내부에는

본존인 지장보살좌상과 지장탱, 그리고 법고 등이 있다. 

현재 본존인 지장보살좌상은 동암에서 이안한 것으로 원래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1984년 지장전을 건립하면서 옮겨온 것이다.

현등사청동지장보살좌상(懸燈寺靑銅地藏菩薩坐像)은 전체 높이가 64.5㎝로

조선 후기 제작된 보살상 가운데 소형에 속한다. 동그란 얼굴에 눈 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 반쯤 뜬 눈, 화형의 귀고리를 단 늘어진 귀, 삼각형의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을 표현하였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4호다.

 

지장보살상 뒤에 걸려 있는 가평현등사지장시왕도(加平懸燈寺地藏十王圖)는 가로 192㎝, 세로 160㎝의

장방형 두루마리 그림으로 중앙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크게 묘사하고,

그 주위로 10대왕, 판관, 사자, 장군 등의 권속들이 4단으로 구성된 특이한 구도이다.

원근감을 나타낸 점이 눈에 띄며, 19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4호다.

 

지장전을 참배하고 나와 삼성각으로 향한다.

현등사 삼성각

옛 산신각 자리에 신축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산신ㆍ독성ㆍ칠성을 각각 탱화로 봉안하였는데, 특히 칠성탱은 치성광여래도라 불리며,

현재 경기도문화재자료 제 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칠성탱은 바로 이 시대 칠성신앙의 번성을 의미하는데,

현등사 칠성탱은 18세기 이후 작품이지만 그 작품성이 뛰어나다.  

현등사는 지장기도 도량이지만 그 산세가 뛰어나 기도도량으로서 많은 영험을 가지는데,

이 곳 삼성각 기도 역시 영험하다고 그 소문이 나 있다.

삼성각 치성광여래(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5호)

현등사 치성광여래

현등사 치성광여래도는 독성도와 함께 화계사에서 1861년에 조성되어 현등사에 봉안된 것으로
비단바탕에 진채색으로 그린 정사각형의 두루마리 그림이다.  
중앙의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상단은 동자, 이십팔숙 등을, 하단에는 칠원성군을 배치하여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인물들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감을 주는 안정된 구도를 가지고 있다.  
금어는 하운당 유기, 원하당 세원, 중봉당 명호 등이며, 편수로는 창엽으로 19세기 말경기도 일대를 주름잡던
불화승이 그린 것이다.  
전체적으로 징서정연하게 배치된 획일된 구도로서 생동감은 느낄수 없지만,
불화의 채색과 구도에서 19세기 중반 경기도 불화의 특징을 느낄 수 있다.  
현재 경기도문화재자료 제 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성각 독성도(獨聖圖: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6호)

현등사 독성도는 세로 117.5㎝, 세로 139.5㎝인 정사각형에 가까운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으로

 1875년 삼각산 화계사에서 1875년에 상궁 장씨에 의해 순종과 왕비내외, 그리고 을해생 정씨를 위해 조성된 것이다.  

천태산을 배경으로 녹색의 원형두광을 진 늙은 비구가 소나무 아래 기암괴석 위에 앉아 있고, 그 주위를 꽃과 바위를 배치하였다

향 왼쪽에 작은 바위 위에는 붓이 꽂혀 있는 필통과 향로가 놓여 있고, 향우에는 만개된 연꽃이 피어오르고 있다.  

이 독성도는 19세기 후반 불화에 많이 쓰이는 녹색과 청색이 주류를 이루고, 분홍색과 황토색을 부수적으로 사용하고 있어

전형적인 조선 말기의 구도와 채색을 보여준다.  

세부 필치와 색채사용이 매우 잘된 작품으로 19세기 후반 독성도 연구의 기준작으로 볼 수 있으며,

현재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성각 산신탱

극락전을 참배하고 나오는데 맞은편 대자대비전의 주련이 이채롭다.

흔히 한문으로 된 주련이 아닌 한글로 적혀있다.

만월보전

만월보전 석불

영산보전(나한전) 

현등사 영산보전 불단

영산보전(나한전) 내부의 모습

현등사 적멸보궁 불단

우리나라 최초의 적멸보궁이며 경기도내의 3대기도처(현등사,강화도 보문사,관악산 연주암)중의 하나이다

법당이 크지 않고 단아하게 예불 올릴수 있게 방석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현등사 적멸보궁으로 가는 돌계단

적멸보궁에서 내려다 본 현등사

한창 불사중인 만월보전과 영산보전

경내를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108계단으로 향한다

108계단으로 향하는 길에 누워있는 노거수 한 그루를 만난다.

 

지진탑(地鎭塔: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호)
정식 명칭이 ‘가평하판리지진탑(加平下板里地鎭塔)’인 이 탑은 전설을 지니고 있다.

고려 희종 때 승려 보조국사가 이 주위를 지나다가 석등에서 불빛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수백년 동안 폐허로 있었던 이 절터에 새로 절을 짓게 되었다.

이 때 터의 기를 진정시키고자 이 탑을 세워 두었다 한다.

 

이로 인해 ‘지진탑(地鎭塔)’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승려의 이름을 따서 ‘보조국사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기단(基壇)의 일부와 탑신(塔身)의 1층 몸돌이 없어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2층과 3층 몸돌 사방에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미 상당히 마모가 진행되어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지진비 안내판

현등사 참배를 마치고 나오니 우측에 누워있는 노거수 지진탑을 지나니 좌측에 해우소와 운악산방이라는 찻집이 산꾼을 반긴다
여유롭게 차한잔 마시고 싶지만 조금전 현등사 오기전 코끼리 바위 아래에서 마신 커피땜에 그냥 지나쳐 

번뇌를 벗어나기 위해 108계단으로 내려온다

백팔계단

현등사 백팔계단은 2005년 일주문과 함께 조성 되었으며 108계단은 108번뇌를 뜻하는 것으로
6根(眼, 耳, 鼻, 舌, 身, 意)으로 6塵(色, 聲, 香, 味, 燭, 法)을 대하니 제각각 好(좋다), 惡(나쁘다),
平等(좋지도 나쁘지도 않다)의 세가지가 부딪히며 18번뇌를 일으키고, 苦(괴롭다), 樂(즐겁다),
捨(버리다)의 삼수가 18번뇌를 일으켜 36번뇌가 되고, 이는 다시 前生(과거), 今生(현재),
來生(미래)에 배하여 108번뇌가 된다.

현등사 불이문 108계단

"불이문(不二門)" 누각 아래에 108계단을 조성해 놓았다.

절집에는 일주문,해탈문,불이문 이 있다. 일주문은 절집의 입구를 말한다.해탈문은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어간다는 문을 말한다.그리고 불이문은 둘이 아니고 하나란 뜻이다.

즉 나 없이 남이 없고 남 없이 내가없다. 이 세상에서 나 아닌 것이 사라진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가없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 되어있다 

현등사 불이문을 빠져나아 조그만 다리를 지나니 좌측에 민영환 암각서
표지판이 있고 물이 흐르는 암릉에 민영환 암각서가 있다는데 길가에서는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민영환 암각서(閔泳煥 岩刻書)
현등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자리한 거대한 바위위로 흐르는 폭포가 있는데

최근에 가물어서 그런지 물이 거의 흐르지 않는 폭포가 있는데

약 35도 정도 기울어진 바위로 아래에는 작은 소를 이루고 있다.

바위 상부에는 구한말 시종무관 민영환이 기울어 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하늘을 보고

 탄식하였다는 곳으로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민영환바위로 부르고 있다.  

을사조약으로 자결하여 충신으로 알려지며 1962년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분으로,

그러나 그 이전, 명성황후 민씨의 집권으로 조정이 민씨일파에 의해 좌지우지 될 때의

세력으로 매관매직, 삼정의 문란을 일으킨 척족세력이기도 하다

그러던 1895년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면서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한 인물이기도 하다.

무우폭포 표지판

무우폭포

노란 물봉선(?)
흔히 물봉선은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자라며 예쁜 핑크색인데 이곳은 모양은

영락없는 물봉선인데 노랑색이다... 노란색도 있나? 

백년폭포를 지나 일주문에서 산행을 마치는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아침에
산행을 시작하면서 들리지 못했던 일주문 아래에 있는 삼충단에 들린다.

삼충단(三忠壇) 안내판

삼충단(三忠壇)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체결로 자결을 택한 충신 3인(조병세, 최익현, 민영환)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이다.

 

산재 조병세(山齋 趙秉世, 1827~1905)선생

당시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경기도 가평에 머물다가 을사조약의 모효와 조약에 서명한

오적을 처단하고 국권을 회복해야는 상소를 올렸으나 왜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決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선생

을미의병운동의 선봉장으로 조약체결에 다시 의병을 봉기하여 왜구와 싸웠으며, '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의 상소를 올렸으나 체포되어 대마도로 이송 되자,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끝내 순국하게 하였다.

 

계정 민영환(桂庭 閔泳煥, 1861~1905)선생

당시 시종무관(侍從武官)으로 조약을 듣고 대한문 앞에서 조병세선생과 함께

석고대죄하며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각국의 공사에 자신의 유서를 보내고 자결을 하였다. 

 

여유롭게 운악산과 현등사를 두루 구경하고 내려와 내일 산행때 마실

가평 잣막걸리 2통을 사서  베낭에 넣고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한다.

 

 

'♣ 일반산행 ♣ > 100대名山 山行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봉산  (0) 2015.03.14
태백산(太白山)  (0) 2015.02.08
대암산(大巖山)  (0) 2014.09.01
마니산 [摩尼山]  (0) 2014.01.05
2014년 새해 첫날 - 지리산 일출  (0) 2014.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