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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100대名山 山行記

마니산 [摩尼山]

by 범여(梵如) 2014. 1. 5.

 

☞ 산행일자:  2014년 01월 05일

☞ 산행날씨:  맑고 포근함

산행거리: 도상거리 8km / 4시간 20분 소요

☞ 참석인원: 친구 2명과 함께

☞ 산행코스: 함허동천 주차장-매표소-함허정-265m봉-갈림길(삼거리)-114계단-469m봉-칠선녀교

                   참성단 중수비-마니계단-헬기장-마니산-참성단-마니산-469m봉-갈림길-암릉구간

                   360m봉-314m봉-정수사 갈림길-정수사-정수사입구-308번 지방도-함허동천 주차장

소 재 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새해 첫 기맥 산행계획으로 영산기맥 2구간을 가야 하는데 부산에 사는 고종사촌 동생 딸래미

결혼식에 참석하게 위하여 부산을 형님들과 가야 하는데 늘 막내인 내가 형님들을 모셔가야하기에

영산기맥길을 포기하고 토욜 저녁늦게(밤 10시) 서울에 도착하니 상당히 피곤하다.

그렇다고 산꾼이 집에 있기는 뭐하고하여 친구 2명과 함께 가까운 마니산을 가기로 한다.

아침 08시 30분에 우리 사무실에서  만나 차량으로 강화 마니산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부산 광안대교서울에서 07시에 형제들과 만나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가다 문경 I.C에 들려서 아침을 먹고

커피까지 한잔 마신 다음에 경부고속도로로 들렸다가 다시 대구~김해간 고속도로로 가다 대동J.C를 거쳐서

양산으로 돌아 해운대를 거쳐 예식장이 있는 광안리를 향하는 길에 김해 상동I.C를 지나간다... 이곳에 사는

어리버리000는 잘 있는지 궁금하다.예전에 만나 은하사와 범어사를 같이 같던 기억이 아직도 아련하건만...

추억으로 남긴다부산 해운대를 지나는데 이곳은 서울 강남 못지않는 분위기이다.

지난해 6월 라이온스클럽 세계대회에 참석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잠시후에 예식장이 있는 광안리 해수욕장에 도착을 하는데 난 평생 처음으로 이곳을 와본다.

 

오후 2시에 예식이라 너무 일찍 도착하여(12시) 형제들과 횟집에서 간단하게 회 한접시에 소주 한잔을 한 다음
예식장에 들렸다가 오후 5시경에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하니 밤 10시 가까이에 되었다...
혼자 왕복으로 운전을 했더니만 상당히 피곤하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아침 07시 30분이다

함헌동천 주차장(10:00)

개포동에서 출발하여 김포를 지나 초지대교를 건너서 마니산 아래 함허동천 야영장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여 차량을 주차하고(주차비 무료) 마니산으로 향한다.

오늘이 小寒임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참으로 따뜻하다.

 

참으로 오랫만에 친구들과 산행을 해본다. 정확하게 5년이 넘은 것 같다

5년을 넘게 대간, 정맥, 기맥,지맥 등 목적산행만 하는 나를 널 맛이 간 넘으로

취급하다가 이렇게 산행을 하니 너무 좋아한다... 조금만 기다려 8월이면 끝나니까

함허동천 매표소

이곳은 국립공원도 받지않는 입장료를 받는다. 

국립공원도 안받는 입장료를 받느냐고 물으니까

직원 왈 국립공원이 아니기 때문에 받는다고 황당한 답변이 돌아온다.

마니산 유래 표지판

우측으로 접어드니... 함허동천 야영장이 나온다.

함허동천 야영장

함허정(亭:10:05)

함허정에서 바라본 동검도

동검도(東檢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속하며 면적이 2.3㎡의 작은 섬이다.

동검도라는 지명은 옛날 중국에서 황해를 건너 우리나라로 들어올 때

한강 하류의 강화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 두갈래의 뱃길이 있었고, 1872년 지방지도

「강도(江都)」편에는 ‘소검도(小檢島)’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872년지방지도』

「통진부」편에는 동검도라고 표기가 되어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동검도 안에

동검도산(東檢島山)이 있으며 ‘탁이나루’라는 나루터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옛날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선박들이 한강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염하 입구에 위치해 있다. 동검도는 이곳을 지나가는 모든 선박들을 검문하는 역할을

했던 섬이라고 하는데 강화도 삼산면에 위치한 서검도와 대비되는 섬이란다.

함허정에서 바라본 길상산과 동검도의 모습

함허정 바로위에 있는 이정표

암릉 능선과 469m봉 가는 삼거리가 보이고...

265m봉(10:20)

이정표 역할을 하는 마니산 등로에 설치된 소화기

바람친구와 민박사

멋진 조망을 가진 전망대 바위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바람과 범여

5년만에 같이한 산행 친구들이 너무 좋아한다... 괜스레 미안한 생각이 든다.

계단을 치고 오른다

거시기 바위를 만나고...

114계단 (정수사 갈림길:10:50)

전망대를 만난다... 이곳에 서니 지난해 걸었던 진강산과 그너머 혈구산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석모도와 저멀리 별립산이 보인다

조금전 함허동천 주차장에서 올라온 등로궤적의 모습

초피산(椒皮山:242m)은 숙피산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산초나무 ‘초(椒) 자를  숙(菽)으로

잘못 읽어 숙피산으로 부르기도 하며 다른 이름으로 문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망대에서의 인증샷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화의 山河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였다. ‘갑비’는 고유어 ‘갑’을, 고차는 ‘곶, 곶이’를 표기한 것이다.
이러한 명칭은 현재 강화읍 소속의 갑곶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면 갑곶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갑은 돌 위에 돌을 올려놓은 것을 ‘갑석(甲石)’, 두 배를 ‘갑절’, 겹창을 ‘갑창(甲窓)‘이라는 것처럼 둘(2)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강 하류의 조강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이 강화의 동북단에서 둘로 갈라져
강화의 북단과 강화·김포 사이의 염하로 나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이해된다.

 ’고차‘는 ’고즈, 고지‘로 변하여 곶이 된다. 곶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해온 한자음으로 강,바다로 돌출한 지역이나,

내륙에서 벌판을 향해 길게 뻗어나간 지형에서 온 지명형태소이다. 즉 갑비고차란 현대어로는 ’갑곶, 갑곶이‘가 되며,
두 갈래로 갈라진 물(바다, 강)가에 있는 곶으로 된 고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후대에 불려지는 혈구, 해구,
강화라는지명은 둘로 갈라진다는 뜻이 사라지고 물과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지난 가을에 걸었던 마니산에서 분오리 돈대까지의 등로 궤적

마니산 가는 등로에서 바라본 강화 펄 갯벌의 모습

강화도는 갯벌의 천지처럼 보인다... 세계 5대 갯벌의 하나라고 한다.

썰물때면 폭 1km 내외의 엄청난 갯벌이 섬 전체를 둘러싸고 남쪽은

2.3km까지 달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펄 갯벌은 펄의 비중이 90%이상인 갯벌로 해안의경사가 완만하고 지형이

굴곡진 곳에 만들어지며 썰물때 넓게 드러나는 펄 갯벌은 대부분이 강(江)의

하류와 바다가 육지쪽으로 파고드는 만(灣)이 만나는 곳에서 나타나며

입자가 매우 곱고 지반이 물러서 발이 푹푹 빠지며 갑각류나 조개, 갯지렁이가 많이 산다.

 

우리나라의 펄 갯벌은 강화도와 전남 순천과 벌교 등에 분포되어 있다.

등로 아래에는 화도면 흥왕리와 바다 가운데 떠있는 신도와. 시도 그리고 그 너머에 용유도가 보인다. 

명품 소나무

마니산까지 계속해서 암릉구간을 타고간다

469m봉(11:05)

삼각점 안내판만 보이고 그 어디에도 삼각점은 보이지 않는다.

가야할 마니산과 참성단이 보이기 시작하고...

진강산도 보이고...

칠선녀교(11:20)

지나온 469m봉의 모습

참성단중수비(인천시 사적 제136호:)

새로이 보수한 후 그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가파른 바위 윗면을 손질하여 그 위에 비문을 새겼다.
마니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참성단은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조선 숙종 때 강화유수를

지내던 최석항이 관내를 순찰하며 마니산에 올랐다가 이곳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시 전등사 총섭이었던 승려 신묵에게 명하여 새로이 고쳐 짓도록 하였다.

비는 조선 숙종 43년(1717) 5월에 마련해 놓은 것으로, 비문에는 ‘참성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연, 참성단에 대한 선조들의 뜻 등에 관한 기록들이 함께 적혀 있다.
이 비는 강화군 마니산(摩尼山)에 위치한 사적(史蹟) 제136호 참성단(塹星壇)을 중수한 사실을 기록한 비이다.

가파른 암벽면에 가로 50㎝, 세로 105㎝ 크기의 비 윤곽을 만들고 그 안에 8행 238자를 새겨 넣었다.

주요 내용은 당시 강화유수(江華留守) 최석항(崔錫恒)이 관내를 순찰하다가 마니산에 올라 참성단이

무너진 것을 보고 선두포별장(禪頭浦別將) 김덕하(金德夏)와 전등사 총섭(傳燈寺 總攝)

신묵(愼默)에게 명하여 보수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위에 새겨진 중수비 원문을 판독할 수가 없다.

 

참성단 중수비 비문의 원문

중수비를 지나 마니산 오르는 마니계단으로 들어선다.

이곳 마니산이 우리나라에서 氣가 가장 센 곳이라고 한다

잠시후에 마니산 정상 헬기장에 도착한다

마니산(472.1m:11:25)

마리산(摩利山)은 범어(梵語) 태양빛(日光)을 음역한 마리지천(摩利之天)이

거주한 산으로 중생의 고통을 소멸시킨다는 뜻이다.

이 산은 마리산, 머리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마리란 고어(故語)로 머리를 뜻하니

강화사람들이 마리산으로 부르는 이 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땅의 머리를 뜻한다.

게다가 산 정상에는 하늘의 제(祭)를 지내는 단(壇)이 있으니 강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 민족 전 국토의 머리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고려사 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마리산(摩利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뒤에 마니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가 한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비구니를 뜻하는 니(尼)자를 붙혀

마니산(摩尼山)으로 이름이 변형되어 버렸다.

 

그 후 1995년 마리산으로 공식 지명이 원래대로 복원되었으나 아직도

인터넷을 비롯한 대다수의 자료에서 일제의 잔재인 마니산의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는 실정이다.

친구들과 함께 마니산 정상에서

마니산 정상에서 바라본 석모도의 모습

참성단 소사나무

•지정 번호; 천연기념물 502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 산55 마니산 참성단 내

•지정일; 2009년 9월 16일

•분류; 노거수

•내용; 강화 참성단 소사나무는 전형적인 관목 모습에 나무갓이 단정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참성단 돌단 위에
단독으로 서 있기 때문에 한층 돋보이는데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우리나라 소사나무를 대표한다.
소사나무는 잎이 작고 줄기가 고목의 모습을 가져 예부터 분재 소재로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인 전통 나무이다

마니산 참성단(11:35)

마니산 참성단은 사적 제136호로 강화도 마니산에 위치한다.

 크기는 면적 5,593㎡, 상단방형 1변 길이 1.98m, 하단원형 지름 4.5m이다. 

마니산(해발 468m)은 본래 고가도라는 섬이었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외적을 막기 위해

 군병을 두둔시켰으며 삼랑성(三郞城)이 쌓여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한다.

 

한때(1437년)는 역관(曆官)을 파견하여 측우기를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마니산 바로 앞바다 강화만(江華灣)은 세계에서 간만(干滿)의 차가 가장 심한 곳으로

온 바다 조수(潮水)의 기점이라고 하는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다.

그 후 가릉포와 선두포에 둑을 쌓은 뒤 육지로 되어 버렸다.

멀리서 보면 당당한 독립산을 이루고 있는 마니산은 '마니 단풍이라고 할 만큼

산세가 아름답고 가을 단풍의 풍치가 빼어나 강화 팔경의 하나로 꼽는다.

마니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정상까지 918개의 계단으로 이어진다.

 

참성단은 대한민국 내의 유일한 단군유적이다.

그 사실의 실제 여부를 떠나 적어도 1,000년 가까이 마니산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으로 우리 의식 속에 들어와 있다.

참성단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원종 5년 (1264년)에 "왕이 친히 이곳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라는

기록과  또, 고려사에는 참성단을 두고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단으로 전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로 미루어  원종 이전에 이미 참성단이 설치되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광복 이후에 소개된

사서에 따르면 "단군 기원 51년에 단군왕검께 춘추로 제사를 올리기 위해 참성단을 쌓았다고 한다.

이는 기원전 2282년에 해당하며 고려이후 참성단은 조전 인조 17년(1640년) 강화 유수 최석항에

의해 개축되어 현재 참성단 중수비에 잘 기록이 되어 있다.

"강화는 나라의 방패, 그런 강화 중에도 마니산은 천신에게 제사드리는 명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단을 만들었으니 이름하여 참성단이다.

세상이 전하기로는 단군이 돌을 쌓아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던 곳.

돌이켜 보건대 수천 년을 지났으니 풍우에 씻기고 깎이어서 서북 두면이 반쯤 무너졌고 동편계단이 기울어졌다.

그래서 이 고을 어른들이 만나면 서로 개탄하고 있다. 부족한 유수로서 이 산에 올라 보니

분연히 이곳을 중수할 뜻이 생겨...아! 무너진 것을 고쳐 옛모습을 되살리는 것은 수령의 마땅한 책무가 아닌가.

하물며 이곳은 이 겨레의 시조 단군이 당 요와 같은 시대에 나시어 손수 단을 쌓아

정결히 제사 지내던 곳임에 있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제단과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광장으로 조성된 참성단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천. 지. 인 삼재가 한자리에 구현된 조형 양식이다.

이는 '홍익인간' 의 이념을 잘 표현한 자리라고 하겠다.

 

 몽고의 침입으로 수군(水軍)에 약한 몽고군과 대처하기 위하여 섬이자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고려 왕조는 이곳 강화도에서 39년간

 몽고에 저항하였고 단군을 중심으로 한민족이 국력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단단히 하였다고 생각된다.

 참성단을 조성한 연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보수 또는 수축한 기록이 곳곳에 있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조선 인조 17년(1639년), 숙종 43년(1717년)에 단을 보수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이곳 참성단에서 제천의식이 행하여 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전국 체육대회 때마다 대회장에 타오르는 성화는 이 참성단에서

7선녀에 의해 채화되어 대회장으로 점화 봉송되고 있다.

특히 88세계장애자 올림픽대회의 성화도 이곳에서 채화되어 대회기간을 밝힌바 있으며

해마다 개천절에는 단군에게 지내는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참성단 정상에서 바람친구와 함께

참성단에서 만난 솜낭자

참성단 정상에는 새해에 氣를 받으러 온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은데 아직 음력 정월도 되지 않았는데 아마 시산제를 지낸 모양이다.

祭를 지내고 음식을 음복하고 있는데 마침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나서 주위를

서성거리는데 누군가가 ‘범여님’ 하고 나를 부르는데 자세히 보니 내가 지금

백두대간을 하고 있는 산악회에 솜다리님이다... 정초부터 이런 횡재가 ㅋㅋㅋ

덕분에 친구들까지 막걸리와, 떡, 과일에 산적까지 느긋하게 많이 얻어 먹은

다음에 다시 마니산으로 되돌아 온다.

참성단에서 바라본 다시 돌아가야 할 능선의 모습

다시 되돌아 온 마니산(11:50)
원래의 이름은 두악(頭嶽)으로 마리산·머리산이라고도 불렀다

 특히 마리란 머리를 뜻하는 고어로, 강화도뿐 아니라 전 민족의

머리로 상징되어 민족의 영산으로 숭앙되어왔다.

 

본래는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으로 강화도 본 섬과는 떨어진 곳이었으나 가릉포(嘉陵浦)와

 선두포(船頭浦)에 둑을 쌓은 후부터 육지화되었다. 일대의 산지들은 오랫동안 침식을 받아

 형성된 낮은 구릉성 산지이다. 북쪽 사면을 제외한 전 사면이 거의 급경사를 이루며, 기반암은 화강암·결정편암이다.

 북쪽 기슭에는 화강암반이 비교적 넓게 분포하며, 풍화된 사질토와 암괴가 양파 껍질처럼

 분해되는 박리현상(剝離現象)이 나타나고 거대한 널빤지 모양의 암편이 나타난다.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 산정 부근은 경사가 심하며, 서해안에 산재한 섬과 김포평야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마니산을 내려와서 참성단 중수비 아래 양지바른 곳에서 친구 2명과 함께 가져온 매실주와

산도라지주를 나눠 마시고 과일과 커피로 디저트까지 먹고 40분 이상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베낭을 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칠선녀교(12:50)

469m봉을 지나 함허동천 갈림길인 전망대 직전에서 편안 계단을 버리고

스릴 넘치는 암릉 계단을 타고 정수사로 향한다

내가 잠시후 걸어가야 할 암릉길의 모습

같이 온 민박사와 바람친구

2달에 한번씩만 자기들과 같이 산행을 하자고 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자신이 없다.

아직도 가야할 산이 너무 많기에... 올 8월에 2대간 9정맥 9기맥을 끝낸 다음에

생각해 봐야 하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욱박을 지르니...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여!

멋진 암릉구간을 곡예하듯이 걸어간다

여기서부터는 바람친구는 좌측 계단으로 내려가고 민박사와 나만 능선으로 걷는다.

민박 포즈가 쥑인다.

높이 나는새가 멀리 본다고 했던가?

위험한 암릉구간 정상에 오르니 강화의 山河가 구석구석 다 보인다

암릉구간을 곡예하듯 걷는 이 맛... 위험하긴 하지만 스릴은 끝내준다

내가 가지말라고 안 간적이 있더냐?

이곳도 가뿐하게 지난 다음에 등로에 내려서니  지난해 9월에 걸었던 강화지맥길을 만난다.

360m봉(13:30)

314m봉(13:35)

314m봉 이정표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자연 암벽에 “涵虛洞天”이라고 암각된 곳으로 내려가

주차장이 나오고 우측으로 내려가면 정수사가 나오는데 오늘은 절에 들리려고 우측으로 내려선다

 함허동천은 태고적부터 흐르는 물에 갈리고 닦이어진 바위가 마치 대자연의

 예술 작품인양 매끄럽고 반들거려 내가 찾았을 때도 물이 흐르는 흔적과 이끼들이 끼어

거대한 바위덩어리에 涵虛洞天이란 글이 파여 역사의 무계를 더하며 지키고 있는 곳이다.

 

 이곳 반질거리는 자연 암벽에는 고려 말 함허대사가 험허동천에서 좌선하며 도를 닦던

 자리에 번뇌에서 해탈하기 위하여 바위에 涵虛洞天이라는 네 글자를 암각 하여 뒀다는

 글씨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었다. 

 涵虛洞天은 산과 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으로 함허대사가 이곳을

찾아 사바세계의 때가 묻지 않아 수도자가 가히 삼매경에 들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한다.

 

함허대사는 고려 우왕 2년(1376년)에 지금의 충주에서 유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방씨라 한다.

함허대사의 휘는 기화(己和)이고 본래의 이름은 수이(守伊)이며 법명은 득통(得通)이며

어려서 공부를 잘하여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21세 되던 해에 학당의 벗이 죽자

세상의 무상함을 알고 불가에 출가하여 회암사에무학대사의 제자가 되었으며,

세종15년(1433년) 4월 1일 영남 봉암사에 입적하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함허대사의 흔적을 남긴 곳이 많은데 심지어 세종대왕께서 선사의 높은 뜻을 영원히

가리고자 영명으로 현등사와 봉암사, 연봉사, 그리고 이곳 마니산 자락에 淨水寺에

사리를 봉안 할 부도를 세우게 했다고 전해온다.

함허대사는 여러 저서도 남겼다는데 ‘원각경소‘와 금강반야오가해설의(金剛般若五家解說誼),

현정론, 반야참문, 함허어록 등이 전해오고 있다.

정수사 주차장(13:40)

정수사 (13:42)

주차장에서 내려와 좌측에 있는 정수사 경내로 들어서서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가람 안으로 들어서니 날씨가 포근한 탓인지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정수사(淨水寺)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회정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마니산을 참배한 회정대사는 동쪽의 지형이 가히 불제자가 삼매정수(三昧精修)에 들수 있는 곳이라

 여겨 절을 창건하고 정수사(精修寺)라 이름했다 한다고 여러 책들에서 말하고 있지만,

이같은 기록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보다 앞선 기록인

 '정수산영각중건기(淨水山靈閣重建記)'(1903년의 기록임)에는 <창건 년대를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신라 시대 창건설은 전설이 아니었던가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강도지 (江都誌)'에도 정수사(淨水寺)의 창건을 어느 때 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신라시대 창건설로 보고 있는 것이 현재로선 유력한 듯 하다.


이를 조선 세종 8년(1426)에 함허대사가 중수했는데, 법당 서쪽의 맑은 샘물이 솟아나

사명을 정수사(淨水寺) 라 고쳐 부르게 된다. 헌종 14년(1848)부터는 한때 법진, 만홍 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이 살면서 중수, 중창을 거듭했고, 탱화를 봉안하는 등 절을 가꿨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가 있고, 근년에 건립한 탑 1기가 법당 앞에 안치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대웅보전 안의 본존불 왼쪽에 모셔진 지장보살상과, 1848년 무렵에 조성된

아미타불 후불. 지장. 칠성 탱화각 있고, 삼성각에 1878년에 조성한 칠성. 독성. 산신탱화가 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안평대군이 썼다는 법화경. 은중경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행적을 알 수 없다

정수사 대웅보전(보물 제161호)

언제 지은 것인지 잘 알려지지 않지만 조선조 숙종 15년(1689년)에 수리하면서

적은 기록에 따르면 세종5년(1423년)에 중수한 것이라고 한다.

정면 3칸의 맞배지붕, 측면 3칸의 건물이었던 것을 후대에 정면 1칸정도 툇마루를 달아내고

있는데 특이한 구조로  다른 불전 건물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로  공포는 고려시대에

주로 많이 사용했던  주심포양식을 쓰고 있다.

대웅보전 마당에 보물 제161호라고 표기된 표시석

멋진 대웅보전 문살을 겨울이라 그런지 비닐로 막아놨다

 

꽃을 꽃는 병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현병(賢甁)이라고 부른다  

현(賢)은 선(善)의 의미를 가지므로 선병(善甁)이라고도 부르는데 현병의 다른 뜻으로는 

보병(寶甁),만병(滿甁), 감로병(甘露甁), 덕병(德甁), 길상병(吉祥甁), 여의병(如意甁) , 등으로도 부른다 

보병은 보배가 가득한 병이라는 말이고 만병 은 바라는바 모든 것이 충만되어 있다는 병이며

감로병은  불노불사의 묘약이 가득한 병이란 뜻이다

덕병은 제석천에 있는 보배 병으로 어떤 것이든 원하기만 하면 솟아 나온다는 병이며

길상병은 상서로운 기운이 담긴 병이라는 뜻이고 여의병 뜻하는 바 돼로 모든것이 이루어 진다는 병이다  

 오랜시간을 투자하여 꽃살문을 만드는 이유는 법당내에 계시는 부처님께 꽃 공양을 올리는 의미도 있고 부처님 계시는

법당을 불국세계로 장엄한다는 의미도있다또한 깨달음의 꽃을 피우겠다는 신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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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사 대웅전 문이 특이한 문양인데, 좌우 칸이 평범한 우물살문인데 반해

가운데 칸은 4분합문으로 안쪽의 두 짝은 연꽃, 바깥쪽의 두 짝은 모란이 각각 심어져 있는 꽃항아리와 함께

판목에 투각으로 새겨진 꽃나무살문으로 매우 화려하다. 문살의 꽃항아리 무늬는 국내유일의 사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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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대사 부도 절에서 한 5∼6분 올라가면 함허대사(1376∼1433)의 부도가 있다.
팔각원당형의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기단부의 연꽃 장식을 제외하곤 다른 조식이 없는 소박한 부도이다.

 

대사의 속성은 유(劉). 이름 수이(守伊)이다. 법명은 기화(己和) 법호는 득통(得通)이며 당호는 함허(涵虛)이다.

'금강경오가해설의' '현정론(顯正論)'등을 저술하시고 중생교화에 힘쓰셨다.

1420년 세종대왕의 초청을 받아 어찰에 머물다가 4년 뒤 사퇴한 후 이곳 정수사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문경 봉암사에서 입적하셨는데 후학들이, 이곳 외에 '가평 현등사' '문경 봉암사'에도 
부도를 세워 대사의 덕화를 기리고 있다.
  (사진인용: 강화로)
정수사 대웅보전 내의 삼존불과 협시불

대웅보전에 들려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나와 산신각과  가람 이곳 저곳을 둘러본

다음에  산신각 아래의 약수물 한 바가지를 마시니 그리 시원할 수가 없다.

지장시왕도

대웅보전 내의 탱화(현왕도)

산신각
정수사 약수

서울 근교에서 차 끊이는 물중에서 정수사 물이 최상이라고 한다

산마루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맑고 가벼우며,돌샘은 맑으면서도 부드럽고,

모래 샘은 맑고 차갑다고 한다.

 

 함허(涵虛)대사가 남긴 茶詩

 한 주발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한 조각 마음이 한 주발의 차에 있나니
마땅히 한 주발의 차를 맛보소서.
한번 맛보면 응당 한량없는 즐거움이 생기리.

오백나한전

사찰 밖에서 친구들이 기다리는 바람에 가람 내부를 주마간산격으로 둘러보고 정수사를 나온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독립군(나홀로) 다녀야만 편한데... 좀 그렇다.

포장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 좌측에 해병상륙 공작대 표시석이 있다. 

정수사 입구(14:10)

308번 지방도를 따라서 함허동천 주차장으로 향한다

도로가에는 노루 한마리가 生을 마감한 채 누워있다.

함허동천 주차장(14:20)

이곳에서 차량을 회수하여 서울로 향하는 중에 콩요리집에 들려서

콩비지 한그릇에 막걸리 한사발 걸쭉하게 마신 다음에 서울로 향한다.

오늘 차를 태워주고 맛있는 밥까지 사 준 민박사님 복받을 겨 

집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고 적막강산이다

냉장고에 맥주 한병을 꺼내 마신 다음에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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