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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100대名山 山行記

2014년 새해 첫날 - 지리산 일출

by 범여(梵如) 2014. 1. 2.

☞ 산행일자:  2014년 01월 01일

☞ 산행날씨:  맑음

산행거리: 도상거리 13km / 8시간 20분 소요

☞ 참석인원: 3050 알파산악회  따라서

☞ 산행코스: 중산리 탐방지원센터-로타리 대피소-법계사-개선문 바위-천왕샘(남강발원지)

                   천왕봉-통천문-제석봉-장터목 산장-소지봉-참샘-하동바위-백무동 탐방지원센터

소 재 지:  경남 산청군 시천면, 함양군 마천면

 

지난 한해에 나에겐 참으로 힘들었던 모든걸 떨쳐 버리고 甲午年 새해 지리산 천왕봉
일출을 바라보며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한해를 열기 위해 밤 11시에 산악회 버스에 오른다.
탑승장소인 사당동에 도착하니 새해 일출을 보러 각지로 떠나는 관광버스가 도로를 가득 메우는데
우리가 타야할 버스를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그 와중에도 나와 기,지맥산행을 같이한 동료 산꾼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잠시 후에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경부고속도로 기흥휴게소에 잠시 들렸다가
다시 출발하는 사이 한 해를 마감하는 날이라 피곤했던 탓인지 깊은 잠에 빠진다.얼마나 잤을까
버스가 정차한 곳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산청 휴게소에 들어서는바람에 잠에서 깨어 화장실에
들렸다가 이른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4년전 호남정맥길을 같이 했던 송 영우님이 순두부 한그릇을
사주는 바람에 정초부터 빈대(?)다하긴 남에게 복짓게 하는 것도 보시공덕이라 하지 않았던가?... 복받을깁니다

 

 

이곳은 내 고향집과는 30분 거리인 곳이지만 부모님이 계시지 않고 長兄이 지금도 고향을 지키지만
요즘은 1년에 1번정도 가니 이젠 고향을 잊어버린 느낌이다 30여분간 식사를 휴식을 겸한 다음에 버스는
단성I.C를 빠져나와 지리산 아래중산리로 향하는데 좌측에 성철 큰 스님의 생가 자리에 있는 劫外寺의 불빛은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 고향길에 들려서 큰 스님에 대한 예를 올린 기억을  더듬는사이 버스는 빠르게 중산리로 향한다.

 

30여분을 달린끝에 중산리 대형버스 주차장에 버스가 도착하니 새벽 3시 45분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중산리 가는길(경남 산청군 시천면 소재)

이곳 山淸은 ‘산처럼 맑고 청정한 곳’이란 이름처럼 큰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일반인들에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문으로 유명하신

불교계의 큰 별이셨던 퇴옹당 성철 큰스님이 탄생한 곳이요, 고려시대 중국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최초로 재배한 목화 시배지이며 고향인 삼우당 문익점의 이곳  지리산 자락

아래인 산청군 단성면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좌퇴계 우남명'으로 불리면서

평생을 정치적 라이벌이자 학문적 동지로 살아간 남명(南冥) 선생을 모신 산천재가 있는 곳이다.

 

남명 선생의 영향을 받아 서부경남 출신들은 반골기질 성향이 많은 편이다

 나 역시 그런것을 가지고 있다고봐야 할까 ㅋㅋㅋ

중산리 탐방지원센터(04:15)

대형버스 주차장에 내리니 날씨는 +1도로 따뜻한 편이며 바람또한 겨울답지않게 훈풍이다.

처음 따라온 산악회이지만 아는 산꾼들이 10명이 넘어서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

산행대장이라는 분의 닉이 ‘신난다’ 인데 카리스마가 있어 보인다.

내려서 ‘신난다’라고 한번 외치더니 무조건 자기를 따라오란다... 약간의 조폭스타일인가?

대형버스 주차장에서 내려 30여분을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중산리 탐방 지원센터가 나온다.

탐방지원센터 앞에는 천왕봉 일출을 보러 가는 등산객들이 엄청 많다.

지원센터의 여직원인 이쁜 색씨가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한다.

국공파의 안내 프랑카드는 늘 어린애 대하듯 명령조라 마음에 안든다.

法界橋라고 써있는 조금만 다리를 지나니...중산리야영장 이정표가 나온다.

장터목 야영장(04:20)

10번도 더 올랐던 지리산 정상 천왕봉 그러나 늘 중산리쪽 오름은 어둠속에 걷는다.

예전에 없었던 통천문이란 문도 만들어 놨고, 길은 반질반질 하지만 늘 기맥, 지맥길을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다니는 범여로선 이런길이 어색하기만 하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야 맛이 나는데... 인공적으로 만든길은 맘에 들지 않는다.

40여명의 산악회 회원들은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걸어간다.

첫번째 만난 이정표(04:35)

처음 출발할 때와는 달리 자꾸만 등산객들이 늘어나면서 산행속도가 지연된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이곳이 지리산 전체로 봤을 때 양지인지라 눈이 없어서

걷기가 조금 편하다는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천왕봉가는 길은 만만찮다.

칼바위(04:45)

뿌러진 비바리 다리는 완쾌가 됐는지 씩씩하게 따라온다.

지난해 북한산 산행을 하면 뛰어 내리다 다리가 뿌러졌다나

우쨌다나 낙화암에서 뛰어내린 삼천궁녀도 아니면서 ㅋㅋㅋ

엉는 나아서 대간길의 활약상 기대합니다

장터목 갈림길(04:51)

이곳부터는 등산객들이 엄청나게 많이 보이면서 산행시간이 지체되어

천왕봉의 일출이 쉽지 않음을 예고하는데 자꾸만 맘이 급해진다.

중산리에서 이곳까지는 우쨌던간에 참으로 편하게 왔는데 이곳부터는 눈이 녹아서

빙판이 되어있고 계단과 돌길이 계속되는데 시간은 지체되고, 이곳이 1,129봉이니

아직까지 고도를 800을 더 올라가야하는데 이곳부터는 중산리와는 달리 바람이 세차고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내렸던 자켓 지퍼를 올리고 모자도 바꿔쓴다.

망바위(05:33)

망바위에부터는 쌓인 눈의 양이 많아지고 미끄럽다.

조금을 더 오르니 평평한 능선이 나오고 저 멀리 법계사에는

청사초롱으로 만든 등이 환하게 켜져 있어 지리산으로 오르는 산꾼들을 반긴다.

능선에서 법계사를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다시 길을 걷는다

로타리대피소(1,330m:06:10)

1972년에 부산 로터리클럽이 세운 산장으로 법계사 바로 아래에 있으며, 수용인원 60명이란다.

어둠속에 도착한 대피소에는 이곳에서 비박을 한 사람들과 일촐을 보기위해 오르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같이온 산악회 멤버들을 찾을수가 없다.

다행히 벙글이 아우님을 만나서 잠시 쉬었다가 천왕봉으로 향한다.

법계사(法界寺:06:17)

대한민국 하늘아래 첫 절집인 법계사...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의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진흥왕 5년

(서기544년) 연기조사께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인도에서 모셔와 봉안한 유서깊은 사찰로서 1405년

정심선사(正心禪師)가 중건했고 하며 적멸보궁 불전을 본당으로 하고 한국에서 가장높은 곳에(해발 1450m)

위치하고 보물 473호 삼층석탑이 유명하다


6,25때는 빨치산의 아지트의 지휘본부가 되는 수난을 당한 사찰이기도 하다 

6·25전쟁 때 불탄 것을 최근에 중건해 절의 면모를 갖추었다.

법계사 서쪽 헬기장 옆에는 신라의 유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의 전설이 깃들은 문창대(文昌臺)가 있다. 

로타리 대피소에서 100여m 오르니 법계사가 나오는데 어둠속에 법계사 참배를 하러

가람으로 들어서는데 예전에 보이는 일주문은 보이질 않고 곧바로 종무소가 나온다.

절 마당에 들어서서 본당인 적멸보궁에 들어서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갈 길이

멀어(사실 동료산꾼들과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 다시 나오다 종무소 보살에게

예전에 있었던 일주문이 왜 없어졌냐고 물으니 태풍으로 무녀졌다고 한다.

이런 불상사가 있은 줄도 모르고...

법계사 일주문(백두대간 북진길 때의 사진:2009,5,10)

 

법계사 연혁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해발 1450m) 위치한 법계사(法界寺)는 신라 진흥왕 5년

 (서기 544년)에 인도에서 건너오신 연기조사(緣起祖師)께서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여 창건하셨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태종 5년(서기 1405년) 을유년에 벽계정심(碧溪正心)선사께서 중창하셨다.

그 후 임진왜란과 서기 1910년 한일합방때 또 다시 왜인에 의해 불타고, 1938년(무인년)에

청신녀 신덕순씨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6.25동란 때 다시 화재를 당하여, 그간 초라한 초옥

으로 3층석탑을 지켜오다 불자와 신도님들의 발원으로 현 대웅전과 산신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유물로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인 3층 석탑이 남아 있을 뿐이다.

법계사 경내에는 청사초롱 등으로 불을 밝히어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어둠속의 법계사 적멸보궁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향해 예배드리는 법당을 적멸보궁이라 일컫는다.

법계사는 신라 진흥왕 5년(서기544)에 연기조사께서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인도에서

모셔와 봉안한 유서 깊은 사찰로서 영산의 지리산. 남방의 적멸보궁 도량이다. 

때문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 적멸보궁 불전(佛殿)을 본당(本堂)으로 하여 사리탑(舍利塔)에

기도 예배토록 하고 있다.

영원한 진리의 왕이요, 온 세계의 주인 쌍림(雙林)에서 열반을 보이신지 몇 천년이 되었던가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여기에 모셨으니 널리 중생들로 하여금 쉼 없이 예배케 하라.

 불기 12544년  월  일     법계사 주지 합장 (법계사 안내판에서 인용)

법계사 적멸보궁(寂滅寶宮) 편액

법계사 삼층석탑 (法界寺 三層石塔:보물 제473호)

이 탑은 법계사 유일의 문화재요 보물로서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위치한 법계사

유일의 문화재요 거룩한 성보(聖寶)입니다.           

『이 석탑은 법계사의 산신각 앞에 있는 높이 3.6m의 거대한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이용한

이형석탑으로 기단부는 자연암반의 윗면을 삼단으로 가공하여 암반을 수평으로 고르고

그 위에 몸돌을 얹었다.  자연암반을 기단석으로 이용한 예는 신라 이래로 유행하였는데

이 탑처럼 하부 기단석을 모두 생략한 예는 많지 않다.

 

지붕돌은 두텁고 지붕주름은 각 층이 삼단으로 되어 있으며, 후대에 만들어 올린 것으로

보여지는 포탄형의 석재가 상륜부에 얹혀져 있다.  전체적인 모습과 만든 수법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석탑의 높이는 2.5m이다.

법계사는 진흥왕 5년(544년)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지금은 삼층석탑만이 남아 있다.』

 

이런 형태의 탑은 설악산 봉정암 불뇌탑과 비슷함을 봅니다. 

그리고 이 탑은 일본의 후지산과 일직선상에 있다고 합니다. 

일본이 쇠말뚝을 박고 절을 불태우면서도 사리탑을 그냥 놔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법계사 자료 인용)

 

어둠속에 10분정도 법계사를 수박 겉핱기식으로 참배를 하고 서둘러 천왕봉으로 향한다.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지리산(07:00)

어둠속에 동쪽하늘은 서서히 일출이 시작하려는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곳은 이제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걸야하는 구간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마치 남대문 시장같은 느낌이고 거기다가 좁은 길인데

자기만 먼저 오르겠다고 울산에서 온 모 산악회 회원들이 옆으로 새치기

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린다... 누군 빨리 갈 줄 몰라 안가나

인간들 하고는...ㅉㅉㅉ 거기다가 라디오를 크게켜놓고 걷는 사람들 등등

남을 배려하지 않는 등산객들이 많아 정초부터 기분을 잡친다.

개선문(07:20)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뜻으로 開天門이라고도 부르는 개선문은 서쪽 통천문과 더불어

천왕봉을 오르는 주요 관문으로 원래는 좌우에 비슷한 높이의 바위 기둥이 있었으나

오른편 기둥이 벼락을 맞아 무너졌다고 한다. 

개선문의 통과의례는 참으로 힘이든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일출 인파때문에

도저히 제대로 걸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일출 하나 보겠다는 일념 때문에

걷고 또 걷는다.   천왕봉은 아직도 800m나 남았는데 시간상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하기는 틀린것 같지만 그래도 가는데까지 가보자고 부지런히 걷는다.

이것도 어쩌면 탐욕이고 집착이겠지... 올 한해는 이걸 버리려고 다짐을 했건만

아직도 내 맘속에 집착과 탐욕이 꿈털거리니, 이게 사바세계사는 衆生의 한계인가?

구름이 약간 낀 상태에서 지리산 동쪽은 일출을 준비한다 (07:25)

천왕봉 600m 前 이정표(07:27)

천왕봉 400m 가기전에(07:37)

부지런히 치고 오른다 저 위에 천왕봉이 보이고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힘들게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넓은 전망대같은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일출을 맞으려는 사람들이 발디딜 틈이없지만 나역시 이곳 바위에서

자리를 잡고  일출을 맞을 준비를 한다.

지리산 일출(07:37)

지리산은 항상 구름에 쌓여있어 예로부터 三代가 德을 쌓아야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지며 지리산 8경 가운데 제1경이 천왕봉 일출이다.

꿩대신 닭이라고... 천왕봉 300m 전에 일출을 맞이하였으니 그게 그것 아닌가.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건강하게 두 다리로 지리산 일출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해야지

 

德이 부족한 범여... 그래도 울 조상님의 공덕때문에 새해 첫날 지리산 일출을 맞이한다.

민족의 그 많은 애환을 안고 있는 지리산. 그 많은 아픔을 간직하고서도

슬픈 내색한번 안하고 모든 산꾼을 보듬어 주고있는 어머니 포근한 품안같은 산이다.

어머니의 품안같이 포근함이 그리워 매번 지리산을 찾는데

올 때마다 느끼는 그 감동 난 언제 그 빚을 다 갚을까?

 

지난해 힘들었던 무거운 짐은 어머니의 품안같은 이 지리산에 묻어버리고

올 한해는 떠오르는 새해 첫날 지리산 일출처럼 雄飛해 보련다.

늘 부족한 나를 뒤돌아보고 집착을 버리고 다름을 인정하며 남에

배려로 살아보자고 다짐을 해본다

 

나보다 남을 위한 기도로 自利利他 실천을 다짐하면서 말이다.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며 천왕봉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잠시후에 남강의 발원지라는 천왕샘을 만난다.

천왕샘(07:42)

지리산 천왕샘은 남강의 발원지로서 여기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남덕유산 참샘을 발원지로 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커다란 암릉사이로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프라스틱 바가지가 2개있다.

바가지에 고인 물을 담아 한모금 마시는데 이빨이 시릴정도로 차갑다.

천왕샘 이정표

다시 천왕봉으로 오르는데 천왕봉으로 오르는 사람과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뒤엉켜 마치 남대문시장을 방불케하여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천왕봉을 오르내리는 인파들

많은 인파들에 떠밀리다시피 하여 천왕봉 정상에 오른다.

정상에는 엄청난 인파도 인파지만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으로

몸을 가누기가 힘이 들 정도이며 기온이 급강하하여 2주전

소백산 정상을 방불케하는데 금방 손이 굳어버리고 카메라가

작동이 잘 안될 정도이라 즉시 휴대용 손난로로 카메라 베터리에 갖다댄다.

우측으로 지리산 동쪽 능선인 중봉과 하봉 써리봉이 장대하게 다가온다.

이곳이 대한민국 대륙에 가장높은 지리산 천왕봉입니다.

천왕봉 정상에서 정상석을 배경으로 멋진 인증샷을 남기려고 하지만

일치감치 포기를 하는게 현명할 듯 싶다...

우짜면 정상석에서 인증샷을 남겨야하는데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겨우 비집고 들어가서 천왕봉 정상석 정면이 아닌 뒷면을 겨우 찍는다.

지리산 정상 천왕봉(天王峰:1915m:08:00)

천왕봉엔 타원형 자연석의 정상 표지석 한 면에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智異山 天王峰 1,915m’라 새겨져 있다.

육지에서 제일 높은 정상답게 사방이 활짝 열려 있다.

일망무제(一望無際)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채근담(菜根譚)에는 ‘높은 데 오르면 사람의 마음이 넓어진다(登高 使人心曠)’라고 했으며,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말하지 않았나 싶다.

 

정상에는 지리산 정상에서 새해 첫날을 맞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그래서 뭘하나 구경을 할 수도 없거니와 보름전 소백산의 추위 만큼이나 춥다.

서둘러 장터목 대피소로 향한다.

지리산 정상에서 조금 내려와서 인증샷 하나를 남긴다... 추워도 너무 춥다

천왕봉 정상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선경

지리산은 백두대간 줄기의 남쪽 끝자락에 솟아 있으며, 주봉인 천왕봉(天王峰)은 해발 1,915m로서

남한의 육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고, 지리산은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됐다.

산자락은 경남. 전북, 전남의 3개 도,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남원시, 구례군의 5개 시,군,

15개 읍,면에 걸쳐 있으며, 영,호남 8백여 리, 320km에 광대하게 펼쳐 있어서

그 넓이가 471.8㎢이며, 여의도 면적의 52배이다.

 

 그리고 서쪽 노고단에서 동쪽 천왕봉에 이르는 주능선 상에는 반야봉, 명선봉, 칠선봉, 촛대봉,

연하봉, 제석봉, 하여 1,500m 이상의 준봉이10여개 이상 버티고 있으면서 그 안에 크고 작은

 산줄기가 사방으로 얽혀, 수많은 계곡과 고원을 만들어 하나의 거대한 산국(山國)을 형성하고 있다.

한반도의 좁은 땅덩어리에 이처럼 넓은 산국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이다.

 이처럼 큰 덩치에다가 토심이 깊은 육산이어서 800여종의 동 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드넓은 품새로 인하여 아름다운 자연미를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산이기에 예로부터 우리나라 5대 명산의 하나라 했으며, 우리나라 8경중의 하나라 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중국에서도 봉래산(금강산),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방장산(方丈山)이라

 하여 삼신산의 하나라 했으며, 진(秦) 나라 시황제(始皇帝)는 동남동녀 500명으로 하여금

 해동의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했다는데, 바로 그 삼신산의 하나가 지리산이다.

 이러한 지리산이기에 예로부터 우리나라 5대 명산의 하나라 했으며, 우리나라 8경중의 하나라 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중국에서도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방장산(方丈山)이라

하여 삼신산의 하나라 했으며,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는 동남동녀 500명으로 하여금

 해동의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했다는데, 바로 그 삼신산의 하나가 지리산이다.

그리고 신라시대에는 5악 중의 남악(南岳)으로서 국가 수호산의 역할을 담당한 흔적이 노고단에 남아 있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사람도 이 산에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혹은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사는 산’이란 뜻의 지리산(智異山)이란 이름이 이미 신라시대부터 있어왔다.

智異山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많다는 걸까. 智利, 地利, 智異 등이

혼용되다가 불교의 영향으로 智異로 굳어졌다고 한다.

지리산의 이름은 큰스님을 뜻하는 방장(方丈)산, 백두산에서 흘러왔다는

두류(頭流), 또는 머물렀다는 두류(頭留)산, 이성계가 기도 드릴 때

지리산에서만 소지(燒紙)가 타오르지 않아 불복(不服, 不伏)산,

심지어는 빨치산 소굴이라고 적구(赤狗)산이라는 황당한 이름도 있었단다.

 

헌데 불교계에서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일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하는 곳이 지리산인데,

문수보살이 지혜(智慧)로써 많은 이적(異蹟)을 보인다하여 ‘智異山’이란 명칭이 생겼다고 하며,

또 다르게는,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유래됐는데, 발음으로는

지리(智利), 문자로는 지이(智異)로 쓴다는 것이다

 

- 여기서 이(異)는 문수(文殊)의 수(殊)와 같은 뜻임

큰 산치고 자연경관이 빼어나지 않거나, 많은 일화를 담고 있지

않은 산이 있으랴마는 지리산은 다른 산과는 차원이 다르다.

산이 크다고 산국이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듯이 지리산의 품새는

세상사를 보듬는 포용력이 뛰어나다.

오죽하면 어머니의 산이라 했겠으며, 지리산에 들어가면 굶어죽은 일이 없다 했겠는가.

이러하기에 지리산은 자연환경을 뛰어넘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이 산국의 역사적 의미 또한 큰 것이다.

매번 지리산에 와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벅찬 감동보다는 두려움이 다가오는 산이다.

흔히들 지리산을 포근한 어머니의 품안같아 여자들의 산이라고 표현하지만 난

장쾌하고 위엄을 갖춘 아버지의 넓은 가슴을 가진 남자의 산이라 부르고 싶다.

골짜기마다 슬픈 역사와 동족상쟁의 아픔을 가졌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은...

천왕봉 정상에서 당겨본 반야봉의 모습

반야봉은 지리산 8경의 하나인 반야낙조로 유명한 봉우리로

 지리산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아기엉덩이 처럼 보이기때문에

"아기궁뎅이처 럼보이는 산이  반야봉이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럽지만 이런 반야봉은 사실 남성을 상징하는 산이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의 프라냐(prajna)를 음역한것으로 불교경전의

반야경(般若經)에 의해 알려진 명칭이다.  반야의 뜻은 '절대변하지않는 완전한 지혜'를 의미하므로

지리산에서 지혜를얻는다"라는

말은 반야봉에서 유래된 것이라 추정할수있다.

 

전설에 따르면 천왕봉의 마고할매가 반야도사를 만나 혼례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야는 훗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며

서쪽으로 떠난 뒤 영영 돌아오지 않고 불도를 닦았다. 

그 후 그가 도를 닦았던 산은 반야봉이라 불리면서 남성미를 상징하는산이 되었지만,

생김새가 한없이 부드러워 여성성도 가지고 있는 산으로 알려졌다.

 

지리산에는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제석봉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불교와 관련된 지명만으로

나열하면 반야봉을 제일 꼭대기에 있는 봉우리라 해석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완봉이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반야봉을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 말한다.

 

반야봉보다 높은 제석봉, 중봉, 하봉을 제쳐두고 반야봉을 천왕봉 다음의 제2봉으로

치는 것도 반야봉에는 불교적인 관점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왕봉 정상에서 이곳저곳을 두루 살피는데 세찬 北風寒雪에 몸을 가누기도 힘이들고

날은 밝았지만 동료산꾼들도 찾을 길 없어 혼자서 서둘러  장터목 대피소로 향한다.

통천문(通天門:08:20)

하늘로 통한다는 뜻을 가진 통천문... 결국 이 문이 세상과 하늘의 경계인 셈이다,  

이 문을 지나  하늘의 임금이 살고 있다는 천왕봉 이라는 하늘나라가 있다면

이럴것이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스럽고 아름다운 곳임은 분명해 보이지만

오늘은 이곳 날씨가 추워도 너무 추워서 아무 생각없이 그냥 지나간다.

 

시인 고은님은 통천문을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는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 고 했다,

신선조차도 이 관문을 거쳐야 할 정도니 우리 인간들이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수 없다는 것이다,

통천문을 통과하여 내려가니...

이곳 능선은 바람의 영향으로 눈이 엄청나게 많이 쌓여있다.

통천문 내려서는 곳에서 바라본 제석봉의 모습

등로에는 엄청난 눈이 쌓여있고...

제석봉 가는 길에서...

제석봉 정상 아래에 있는 이정표

제석봉(帝釋峰:1,806m:08:35)

제석신이 머무는 봉우리라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봉우리 아래에 제석단과 향적대가 있다

불교에서 가져온 지명으로 제석천신은 도리천의 주석하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불교적 의미에서 볼때 제석(帝釋)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임금을 말하므로 지리산에서

가장높은 천왕봉 밑에 제석이란 이름이 붙은것을 보면 지극히 당연한 작명인 것 같다.

옛날 민간신앙으로 제석천(帝釋天)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제석단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제석봉이라 한다.

 

제석봉엔 하얀 고사목들이 처연하고 봉우리 일대가 황량하다.

이 제석봉 고사목은 늙어 죽은 고사목이 아니라 인재에 의한 고사목이라고 한다.

즉 자유당 말기에 당시 농림부장관이던 사람의 삼촌이란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 제석봉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여론이 악화되고 말썽이 날 것 같으니까 흔적을 없애려고 제석봉에 불을 질렀단다.

제석봉에서 바라본 연하봉과 촛대봉의 모습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글 이원규, 노래 안치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려면,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라
최후의 처녀림 칠선 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제석봉의 고사목

드디어 장터목  대피소로 내려선다

장터목 대피소(1,653m:08:50)

장터목은 옛날 천왕봉 북쪽 기슭의 주민과 남쪽 기슭의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장터목에서 장을 열어

서로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즉 남쪽 산청 사람들이 생선, 소금 등 해산물 따위를 지고 법천골로 해서 장터목으로 올라오고,

북쪽 남원, 함양 쪽 사람들은 곡식, 직물, 약초 등을 짊어지고 백무동으로 해서 올라와서 물물교환을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터목은 지금도 법천골 코스와 백무동 코스가 만나는 4거리가 되어 있다.

장터목의 유래 안내판

이곳 장터목 대피소에서 늦은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취사장과 매점 주위에는

발디딜 틈이없다... 하는 수 없이 베낭에서 비닐카바를 꺼내서 10명이 넘게

들어갈 수 있는 간이텐트를 치고 떡라면을 끓여서 먹는데 어찌나 바람이 세던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산악회 공지로는 연하봉, 촛대봉, 세산산장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한신계곡으로 내려가는데 이곳에서 아침을 먹고 처음보는 신난다 대장에게

배신(?)을 때리고 하양 회장님과 벙글아우 등 우리 팀들은 거의 다  장터목에서 백무동으로 향한다

백무동 출발(10:10)

민족의 아픔을 가슴속에 묻고있는 지리 능선의 모습

이곳 지리산은 6.25 전쟁 때는 빨치산들이 생매장당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해방 후 좌익이란 이름으로 남쪽에 머물러야 했던 남부군 그들의 운명은, 애초부터 

주변 강국들에 의해 잘못 줄 그어진 38선의 그것과 함께 상존할 수 없는 슬픈 것이었을까..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유와  국가와 지역과

정권에 의하여 항상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은  미신이고,

사실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정의로운 것’일까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서 발췌)..

피아의 구분없이 빨치산과 수색대간의 치열한 교전 속에서 그들이 바랬던 당위와 정의와 자유는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민초들의 영혼은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그들이 이 지리산중에서 얻어야 할 '자유는 무엇이고,평등은 또 무엇이냐'고..

지리능선을 배경으로...

이정표(10:30)

고도를 한참 낮추니 바람은 잦아들고 추위가 좀 가시는 것 같아 4홉들이

소주 한명을 게눈 감추듯이 마시고 과일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 백무동으로 향한다

이곳은 음지라 그런지 눈이 많이 쌓여있어 오히려 평소보다 걷기가 훨씬 편하다.

소지봉(燒紙峰:1,312m:11:15)

소지(燒紙)는 신령에게 비는 뜻으로 종이를 불살라 공중으로 올리는 것을 소지라고 하는데

백무동은 지리산에서 신내림을 받는 무속인들이 참샘위에 소지봉에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마고할미에게 소지를 올려 보낸것이 소지봉의 유래라고 한다.

또다른 유래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 지리산에서 祭를 지낼 때 아무리 소지를올려도 높이 올라가지

않아서 지리산을 전라도에 귀속시켰다는 설도 있다

소지봉에서 눈쌓인 급경사를 내려서니 참샘이 나온다.

참샘(11:30)

하동바위 직전에서 만난 출렁다리

하동바위(900m:11:45)

구름다리를 지나니 멋진 암릉이 나오는데 명칭이 하동바위이다.

바위가 하동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하동바위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고

예전에 하동군수가 여기서 비를 만나 길을 헤맷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란다

약간의 억지스런 면이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정면에서 바라본 하동바위

한신계곡 갈림길(12:10)

감나무에는 까치밥인지 감이 아직도 달려있다.

지리산 백무동 초소(12:15)

백무동의 유래는100명의 무당들이 숨어살았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란다

여러가지로 전해 내려오는데 하얀 안개가 수시로 낀다는 의미의 白霧라고 부르기도 했고,

예전부터 무당들이 모여 들었다고 해서 百巫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곳에 가까이 있는

하봉과 중봉을 잇는 능선이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으로 무기와 관련된 ‘武’자를

사용해 百武洞이라 불렀지만 그래도 가장 많이 통용되는게 百巫洞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원래는 백학동이었던 백무동계곡에는 모두 3개의 등산로가있다.

백무동에서 세석평전으로 오르는 한신계곡코스, 한신계곡에서 장터목으로 오르는 한신지계곡코스,

백무동입구에서 바로 장터목으로 오르는 하동바위코스가있다. 지리산에는 청학동과 백학동이 있었는데

백학동은 지금의 白武洞으로 지금의 무(武)자는 일제강점기에 무(鵡)자로 써서 백학이라 불렸으나

1914년 일제가 개명할 때 새조(鳥)자를 떼어 버렸다고 전해진다.

백무동 마고할매상

백무동 버스 주차장 우측에 지리산 천왕할매상이 있는데

이곳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 마을의 이름은 창조 신화의 여신

마고할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의 여신 마고가 반야와 결혼한 후 그의 딸 100명을 무당으로 전국에

배출하였는데 지리산에서 그 딸들이 내려왔던 통로가 이곳 백무동이였다고 한다

마고할미상의 모습

백무동 탐방안내센터(12:30)

지리산 일출을 감상하고 오랫만에 목적 산행이 아닌 동료산꾼들과 여유로운

산행을 마치고 백무동에 도착하여 남은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남원시 산내면쪽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한다

흑돈한우로 유명한 식당으로 옮겨서 뒷풀이를 하는데 오랫만에 호남정맥을 같이한

송영우님과 하양님, 레인보우, 탱크님... 그리고 한강기맥 동기 벙글아우님

그리고 지금 대간 남진을 같이하고 있는 수선화, 서리님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올 한해는 늘 건강하시고 무탈하게 산행을 하시고 새해에는 존일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첫날 리딩을 해주신 처음뵙는 신난다 대장님 고생했소이다

여유로운 만찬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총무라는 분이 오늘 산행에

만차가 되어서 돈이 남았다고 하면서 7,000원씩을 돌려주는데 새뱃돈 받은 기분이다.

암튼 고맙소... 19시 30분 양재역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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