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3년 11월 3일
☞ 참석인원: 동료산꾼 붕어잡이, 산과스키, 벙글님과 함께
☞ 산행코스: 비솔고개-도일봉 갈림길-싸리봉-싸리재-단월산-770봉-738.2봉-폭산
문례봉삼거리-1015봉-문례재-용문봉갈림길-용문산- 백운봉 갈림길
군부대도로-사나사 계곡 갈림길-설매재 휴양림 갈림길-배너미고개
임도-어비산갈림길-대부산갈림길-유명산 갈림길-유명산-소구니산
선어치삼거리-660.4봉-농다치고개
☞ 소 재 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용문면,옥천면,서종면 / 가평군 설악면
산에 오르면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무의미한 말장난에서 벗어나
말없이 조용히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밖으로만 향했던
눈과 귀와 생각을
안으로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한다
산처럼 나무처럼 맑고 고요하게.
열린 마음으로 무심히
주변을 바라보며 쉬어야 한다
복잡한 생각을 다 내려놓고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의 숨결에 귀기을여야 한다
인간의 언어로 인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눈멀어왔으며 귀먹어왔는지
냉정하게 되돌아 봐야 한다.
- 法頂 스님 -
요즘 참으로 마음이 참으로 답답하다
어디서부터 뭐가 꼬였는지는 몰라도 사는게 참으로 힘이 든다.
사바사계에 사는 자체가 苦이기는 하지만...
2주전에 영남알프스 종주를 하면서 식수가 모잘라 계곡물을 2통정도
마신게 탈이나서 장염으로 열흘 가까이 고생을 했더니만 몸무게가
무려 6kg나 빠져 버린 탓인지 참으로 힘이든다.
지난 금요일 모임에 나갔더니만 은사스님께서 어디 아프냐고 묻는다.
산행하면서 계곡물로 인해 탈이 났다고 하면 호통을 칠 것 같아서
아무말도 못했다... 그러면서 이번 일욜이 초하루이니 절에서 봉사를
좀 했주었으면 하는 바람인데 산행약속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진다.
비가 주적 주적 내리는 토요일에는 친구 딸래미 결혼식에 참석을 하고
돌아오는데 친목회원 빙부상을 당했다는 문자 메시지가 들어온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집에오니 요즘 밥을 먹지못하고 병원에서 링겔과 죽으로
식사를 하니 몸에 힘은 다 빠지고 하여... 집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6시에 한강기맥길에 나선다.
원래는 신당고개에서 비솔고개까지 일정인데 동료산꾼 산과스키님이
셋째주 일욜 저녁에 부친 기일이라 부득히 긴 구간인 이번구간을 앞당겨
산행을 하고 다음구간에 짧은 코스로 산행일정을 변경하게 되었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비솔고개(非率峴:08:00)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항소리와 산음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328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향소리 노적봉 아래에 비솔마을이 있다. 비솔에서 산음리 무푸레골로 넘어 가는 고개가
비솔(非率)고개다. 이 곳 비솔고개(非率)' 는 풍수지리상 용의 목에 해당한다고 한다.
비솔에서 산음리 무푸레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비솔(非率)마을은 살구나무골 북서쪽 마을에서 유래를 찾는다.
산음천이 남북으로 흐르며 산세가 험준한 가운데 협곡이 있다. 화전민의 생활 모습이 남아 있으며,
용문산 북동쪽의 응달이 된다하여 산음리(山陰里)라 하였다 .
양재역에서 우리를 태운 미니버스는 팔당대교를 건너 양평, 용문을 거쳐 단월면으로 향하는데
버스기사의 착각으로 비솔고개를 지나 산음리 자연휴양림 가까이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
비솔고개에 도착하니 아침 8시가 되었다. 고개 정상에는 짙은 안개에다가 안개비가
내리는 바람에 상당히 불편하기가 그지없다. 날씨는 꽤나 쌀쌀하다.
이곳에서 벙글이 아우님이 준비해온 아침이 사골국물에다가 떡국을 끓였는데 며칠간 죽을
먹은 내가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먹지 않을수가 없어서 따뜻한 떡국을 먹고나니 훨씬 덜 춥다.
비솔고개 정상에서 맛있게 떡국을 꿇여먹고...산행을 시작하다(08:45)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는 항소리 국유임도를 따라 30여m 정도를 가다가
우측 나무 계단을 따라서 능선으로 올라서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산불방지 감시 카메라(08:48)
물방울이 참으로 싱그럽게 보인다. 등로에 쌓인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다.
비에 젖은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누구나 산에오면 시인이 된다고 했다.
갑자기 모 윤숙님의 시가 떠오른다
시몬
나무 잎새 떨어진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을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비솔고개에서 도일봉 갈림길까지는 상당히 고도를 높인다.
추워서 입은 윈드자켓을 벗고 50여분을 치고 오른 다음에야 길림길에 도착한다
오름길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도일봉(道日峰:864m)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항소리와 용문면 중원리, 망원리 경계 능선에 있는 봉으로
경기 제일의 명산이며 한강기맥이 마지막 氣를 세워 솟구쳐 올린 용문산의 동쪽
즉, 용의 어깨쪽에 자리잡은 봉우리며 풍부한 水量의 담(潭)과 소(沼)를 이루며
사시사철 아름다운 계곡을 이루고 있다.
동으로는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송이재봉을 넘어 밭배고개에서 신당고개로 멀리
오음산으로 달음질한 한강기맥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용의 몸통에 해당하는
용문산 자락이 보인다. 정상에 있는 암봉의 산정에 서면 북으로 봉미산 넘어
홍천강과 남으로 양평군 일대가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母山의 용문산 주능선에 해당되지만 주봉과는 많이 떨어져 있다.
도일봉 갈림봉(09:35)
비솔고개에서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50분동안 계속 치고 오른 다음에야
도착한 도일봉 갈림봉... 그런데 이곳을 싸리봉이라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거리 표기도 전혀 맞지않은 엉터리 이정표다.
싸리봉은 이곳에서 5분정도 지난 다음에야 만난다.
생각같아선 도일봉을 가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지만 왕복 약 2km
정도의 거리라 현재 내 컨디션으로 불가능 할 것 같아 포기를 한다.
도일봉 갈림봉에서 5분을 쉬면서 물 한모금과 단감 한조각으로 먹은 다음에 싸리봉으로 향한다.
싸리봉(811m:09:45)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산음리와 용문면 중원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옛부터 싸리나무가 많아서 싸리봉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싸리나무가
전혀 보이지 않고 이정표와 구조 안내목 그리고 건설부가 설치한 삼각점만 있다.
싸리봉 정상 이정목과 구조 안내목
건설부가 설치한 싸리봉 정상 삼각점
싸리봉에서 엄청나게 급경사로 내려서는데 비에 젖은 낙엽이
너무 미끄러워 애를 먹는다. 산 아래서 밀려오는 안개가 신비스러움을 더해준다.
싸리재(09:58)
급경사를 내려오니 넓은 안부가 나오는데 이곳이 싸리봉 아래에 있어 싸리재란다.
안부에는 예전에 헬기장인듯한 흔적이 보이고 이정표와 안내 구조목이 서 있는데
좌측 아래로 내려가면 멋있는 중원폭포가 있는 곳이란다.
중원폭포 북쪽 고개로 중원리와 신점리에서 단월면 향소리와 산음리로 넘는 고개로
용문산.백운봉.도일봉이 한데 모여 절경을 이루어 경기도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中元山(815m) 갈림길이기도 하다
싸리재 이정목
한강기맥길은 직진하여 오르막길로 올라선다.
나무사이에서 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기만 하다.
어쩌면 현재의 내 모습을 보는것 같아 同病相憐의 惻隱之心을 느낀다.
오르막을 오르니 싸리봉 C-3라는 구조목을 만난다.
능선 중간에 이정목을 만나는데 이곳에 누군가 단월봉 ←100m 라고 메직으로
표기를 해놨것만 능선에 오르니 능선에 오르니 그 어디에도 단월봉의 표기는 없다.
지도상에는 엄연히 단월봉 또는 단월산이라고 표기가 되었는데 막상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고 엉뚱한 곳에서 이정표만 서있어 생뚱맞기 그지없다... 참으로 개념이 없다.
단월산(丹月山: 778m)
'밝은 달이 비춰진 정자의 마을'이라는 뜻의 단구월사(丹丘月謝)에서 지명이 유래한다고 전한다
단월산을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하고 멋진 조망처 노송 한그루가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이곳이 단월산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내리막길로 향한다.
죽어서도 도도한 품위를 지키고 있는 고사목 한그루를 만나고...
중원폭포 갈림길(10:20)
이정목에다가 누군가가 지도상에도 없는 688봉이라고 표기를 해놨다
비솔고개에서 오름길에 보상이라도 받은듯이 편안 안부 능선을 걷는다.
지나온 싸리봉과 도일봉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은 짙은 박무가 장난을 많이 친다(?)
마치 바람에 들리는 마릴린몬로의 치마자락처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개가 10m 앞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봉우리가 보이고...
중원산 갈림봉(770m:10:35)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중원산(中元山, 800m)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와 중원리 사이에 위치한 독립된 산이다.
왼쪽에 있는 용문산과 더불어 백운봉, 도일봉의 산세가
웅장한 절경을 이뤄 '경기의 금강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산의 유래는 중원(中元)의 뜻에서 찾을 수 있다.
도가(道家)에서는 백중(百中)을 이르는 말로, 도교에서는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일 년에
세 번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데 그때를 원(元)이라고 한다.
7월 15일의 중원과 함께 삼원(三元)이라 하여서 초제(醮祭)를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이곳에서 이정표가 뚜렸하고 길이 잘나있는 중원산 길을 버리고 이정표를
끼고 120도 꺽어서 우측으로 가는 희미한 능선을 따라 용문산으로 향한다
중원산 갈림봉에서 우로 급하게 꺽여 오르니진달래 군락지가 나오고
잠시후에 급경상의 내리막길을 치고 내려가는데 등로가 상당히 미끄럽다
내리막길을 내려 갔다고 다시 치고 오르니 암릉구간이 나오고 안부 능선을 지나니
조그만 돌무덤이 나오고 이윽고 등로 가운데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가 보인다
738.2봉 삼각점
다시 암릉을 계속 맞이하면서 안부 능선을 걷는다.
도일봉 갈림길에서 중원산 갈림길까지는 이정표가 엄청 잘되어 있것만
그 이후 이곳 능선은 아무것도 없다. 같은 양평 땅의 山河이건만 이곳은
상당히 푸대접을 받는 庶子 취급을 당하는 능선같다
다시 산아래에서 밀려오는 짙은 안개로 10m 앞도 보이질 않을 정도이다.
폭산을 향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는데 2주동안 고생한 장염으로
인해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하는지 자꾸만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무거워지면서
동료산꾼들과의 거리는 벌어진다. 죽을 힘을 다해서 고도를 높인다
우측으로 폭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담바라인가?
능선 우측으로는 미역줄기 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폭산 갈림봉(12:05)
지도상에는 문례봉 갈림봉으로 나와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200여m 정도 떨어진 폭산으로 향한다.
폭산 아래에 있는 헬기장
폭산(992m:12:10)
양평군 단월면과 용문면, 가평군 설악면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폭산은
일명 문례봉으로 알려져 있는 산으로 정상석에는 천사봉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높이도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 상에는 해발 1003m이고 정상석에는 해발 1004m,
일반 지도에는 992m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어느게 맞는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폭산의 ‘폭’의 의미를 기록을 뒤져 보아도 알수 없다.
폭산의 다른 이름인 문례봉은 용문산에서 문례재(920m)를 넘어 오르는 봉우리라 하여
문례봉이라고도 하며, ‘문례’는 봉미산을 거쳐 석산리로 내려서면 ‘문례울’이라는
물길이 있어 그 어원을 짐작할 수 있겠다. 문필봉은 멀리서 보면
정상이 뾰족하여 마치 붓끝 같아 문필봉이라 불린다.
천사봉이라 표기한 표시석의 뒷면
이곳 정상에서 의자를 펴고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자꾸만 발바닥에 불이 나는것 같고 쥐가나서 하는 수 없이 베낭에서
아스피린 2알을 꺼내 물도 먹지 않으채 씹어서 삼키고 사과 한조각을
먹은 다음에 다시 용문산으로 향한다.
폭산 정상의 이정표 안내목
폭산 정상에서
지나온 싸리봉과 그 옆의 도일봉이 짙은 안개로 인하여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오히려 신비스러움을 더해주며 바로 아래 산음리 마을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가야할 용문산 정상의 모습
다시 문례봉 삼거리(12:28)
문례재(汶禮峴:12:34)
문례재에서 만난 시그널
불량감자는 어느걸 말하는지!!! ㅋㅋㅋ
다시 편안한 안부 능선을 걷는다.
그러나 미끄러운 낙엽에다가 암릉이라 속도는 나질 않는다.
한번도 뵙지 못한 문규한님 반갑습니다
길이 거의 보이지 않는 능선을 치고 오르니...
용문산을 가리키는 이정목이 나타나고...
조금전에 지나온 폭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고...
등로 옆의 넓은 공터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오늘 점심은 잣죽에다가 양송이 스프로 배를 채운다.
이럴땐 이슬이 한 잔을 해야하는데 설사가 날까봐
오늘은 아예 가져오지도 않았으니 섭섭하다.
그러나 동료산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다.
갈라진 암릉
한참을 암릉구간을 걷다가...
희미한 능선을 따라서 용문산으로 향한다
원래의 한강기맥길은 용문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공군부대와
kt 기지가 차지하고 있어 부득히 변형된 기맥길을 이어간다.
너덜길을 끼고 계속 옆사면을 걸어가니 용문사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만난다.
용문산 갈림길(14:00)
이곳부터는 등산객에 부딪혀 정상으로 오르기가 참으로 힘이든다.
15여년만에 와보는 용문산... 예전에 없던 시설이 많이 보이는데
늘 사람들이 붐비는 산행은 기맥, 지맥산행을 하는 범여에겐
별천지같은 느낌이고 이런델 오면 이방인처럼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예전에 정상 한참 밑에다 용문산 이정표 하나만 달랑 있었는데 지금은
정상에다 용문산 표시석을 만들어 놨고 정상가는 길엔 데크목 광장과
정자 등 각종 편의설(?)들이 많이 보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곳은 공군부대의 주요 시설들이 자리를 잡고있어 예전엔 꿈도꾸지 못한 곳이다
군부대 철조망에 걸린 시그널을 배경으로...
정상아래 데크목 광장에는 안내산악회에서 온 등산객들이 많은데
한결같이 식사하는 모습이 진수성찬이다... 맥 산꾼들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용문산 정상에 있는 kt 중계기지의 모습
용문산 정상 아래에 있는 데크목 광장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용문면과 가평군 설악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경기도에서 화악산(1,468.3m), 명지산(1,253m), 국망봉(1,167.2m)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용문산은 신라 때 용문사(龍門寺)가 창건된 이후
본래 이름은 미지산(彌智山)이었다.
양평(陽平)북동쪽 8km, 서울 동쪽 42km 지점에 위치한다.
산체(山體)가 웅대하여 동서 8km, 남,북 5km에 걸치고, 용문산을
주봉으로 하여 동북동 5.5km의 도일봉(道一峰:864m),
동쪽 4.5km의 중원산(中元山:800m), 남서 3.5km의 백운봉(白雲峰:940m) 등
지봉(支峰)이 용립(聳立)하여 연봉을 이루고 있다.
정상은 평정(平頂)을 이루고 능선은 대지(臺地)가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원산과의 중간에는 용계(龍溪)·조계(鳥溪)의 대협곡이 있고 그 사이에 낀
대지는 수 100m의 기암절벽 위에 있어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
북쪽은 완경사, 남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첩첩이 쌓인 암괴들이 나타나며 깊은 계곡과 폭포도
볼 수 있고 용문산 북서 일대는 고도 700∼1,100m의 약 4㎢의 고위평탄면이 나타난다.
남쪽 산록 계곡에는 용문사(龍門寺)·상원사(上院寺)·윤필사(潤筆寺)·사나사(舍那寺) 등 고찰이 있고
용문사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고 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이 260㎡나 된다.
또 이곳에는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 부도(正智國師浮屠) 및 비(碑) 2기가 있다
그런데 조선을 개국한 성계가 등극한 이후 용문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전해진다.
이 산에서는 한강기맥 북쪽 북한강과 남쪽 남한강은 물론, 멀리 인천 앞바다가 보일 정도로
사방 100km 거리가 막힘없이 조망되는 천혜의 요새로도 유명하다.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 때
몽고군 침입 당시 이곳 주민들이 숨어 살았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피아간에 군단 병력이 목숨
을 건 밀고 밀리는 격전을 치룬 전략요충지다. 한국전쟁 이후 정상에는 공군부대가 상주하고
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오다가 2007년 11월부터 정상을 개방하고 있다.
용문산 가섭봉(1,157m)의 유래
가섭봉은 예로부터 용문산 내에 ‘석가봉’ ‘아난봉’과 함께 ‘용문사내에 불교3봉’ 으로
일컬어지며 가섭은 부처님에게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를 보낸 마하가섭존자를 칭한다.
용문산 제1봉인 가섭봉(1157m)에 이어 석문(1127m), 제2봉인 장군봉(1056m),
제3봉인 백운봉(940m) 함왕봉(887m), 도일봉(864m), 중미산(801m) 등 준령들이 즐비하다.
조선 순조 31년(1831년) 초의선사께서 용문산을 여행하면서 남긴 일기에
“수월암(지금의 백운봉밑 세수골)에서 하루를 자고 가섭봉에 올라서(登迦葉峰)에
올라서 윤필암과 상원암을 거쳐 용문사에 이르렀다” 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부터 용문산 정상이 가섭봉으로 불린웠던 모양이다
원래 한강기맥길용문산 정상에서 내려오다가 좌측 팔각정 옆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가서 부대 정문 앞으로
통과해야만 한강기맥길이나 이곳은 어차피 정상 능선을 가지 못하기에 갈림길로 내려서서
우측 장군봉 방향으로 우회하여 편한길로 한강기맥길을 이어간다.
용문산 정상 가섭봉에 오르니 지나온 싸리봉과 폭산과 용문사를 품고있는
용문봉이 안개가 살짝 걷히면서 보이는게 장관을 이룬다.
아쉽다면 용문사가 보이지 않는게 아쉽다고나 할까?
용문사(龍門寺)
용문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년 대경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진덕여왕 3년(694)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고 있다.
창건당시 당우가 304칸에 300여스님이 머물렀다고 하니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정지국사 지천스님이 경천사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을 용문사로
옮겨와 대장전이라는 건물을 지으셨다. 조선시대 때는 조안대사라는 스님이
용문사를 크게 짓는 일을 했는데 이때 정지국사 지천스님이
돌아가시면서 사리가 이곳 용문사로 옮겨오게 되었다.
세종 29년에는 수양대군이 모후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어 2불상과 8보살상을
모셔 절을 크게 번창 시켰는데, 조선말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근거지라하여
일본군에 의해 모두 불태워졌다. 이후 다시 복구하긴 했으나 6.25전쟁때 다시 한 번
불태워지는 시련을 겪어 지금의 용문사는 최근에 다시 지어진 모습이다.
현재 사찰 내엔 동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고,
주변엔 정지국사 지천스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정지국사부도는
보물 51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용문사 대웅전
대웅전 삼존불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 지대석 위에 연꽃 문양이 조각된 사각형의 하대석을 놓았다.
그 위에는 원통형의 중대석이 놓여 있고 옆면에 연꽃 문양이 새겨진 팔각형의 상대석이 중대석 위에 있다.
탑신부는 팔각형으로 한 면에만 문(門)을 새겼고 팔각형의 지붕돌은 윗면의
합각선이 두툼하고 끝에는 꽃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현재 양화석 부분만 남아 있다.
비는 부도에 딸린 탑비로 태조(太祖) 7년(1398)에 건립되었으며 조성 당시의 찬조자 명단과
정지국사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碑文)은 권근(權近)이 지은 것으로,
태조 4년(1395) 천마산 적멸암에서 세상을 떠난 고려 말의 정지국사가 중국 연경에서
수학하였고, 입적 당시 많은 사리가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 추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부도와 비는 승려가 세상을 떠나면 부도와 탑비를 세우던 신라 시대 이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성 방법에서 조선 초기 부도 연구의 기준이 된다.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있는 용문사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며,가지의 길이는 동서로 29.1m, 남북으로 25.9m나 된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서 최고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외에도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
정미의병(1907)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리를 내어 알렸다고도 한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 때 당상관(정3품)의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금전에 내간 지나온 능선의 모습
다시 되돌아온 용문산 갈림길(14:20)
지금 시간이 오후 2시 20분이 지나는데 아직도 가야할 거리가 12km이상이 남았다.
여기까지 오는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는 바람에 괜스레 마음이 급해진다.
용문사 갈림길(14:30)
용문산에서 만난 벙글이 아우님의 서방님인 싱글님... 무지 반갑다.
6.25 동란 이후 지금까지 용문산 정상을 점령하고 있는 공군부대
원래 한강기맥길은 능선 정상으로 가야하나 군부대 때문에
능선 중간의 옆사면길을 걸어가는데 너덜길과 암릉이라 시간이 지체가 된다.
장군봉, 백운봉 갈림길(14:45)
장군봉(1,045m)~함왕봉(889.2m)~백운봉(941m)으로 이어진다.
백운봉에서 더 나아가는 능선은 남동으로 방향을 틀어 삿갓봉(472.5m)을 지나
약 8km를 더 나아간 후 양평읍 원덕리 남단 흑천으로 스며든다.
공군부대 정상(14:48)
군부대 아래의 우회길로 한강기맥을 이어간다.
산 아래에서 밀려오는 짙은 안개로 인해 능선은 하얀 여백으로 변하고
이곳에서 맑은 날씨에 보면 양평읍내가 한 눈에 보이는 곳인데 안타깝다.
양평군 지도 (위키백과 인용)
양평군은 경기도 동쪽 끝에 위치하여 산악과 남북한강유역하단에 연접된 농경문화권
지역으로서 총 면적 877.78㎢,군청 소재지는 양평읍 양근리이다.
북쪽은 가평군, 강원도 홍천군과 접해져 있고, 서쪽은 북한강을 사이에 둔 채 남양주시 광주시로
닿아 접해 있으며, 남쪽 역시 여주군과 인접되어 있고, 동쪽 또한 강원도 횡성군과 원주시가 연접되어 있는 고장이다.
군 중앙의 용문산 가섭봉(1,157m)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뻗어 봉미산(856m)의
험준한 산세는 여러 갈래를 형성하여 계곡을 이루고 있다.
특히, 동서로는 남한강이 남북으로 북한강이 양수두(兩水頭)에서 합류하여 서해(西海)로 유입하는 지역으로,
계곡과 남·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주거와 농경 지역이 널리 펼쳐지면서 다양한 속지명이 구전되어 오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접경 지형이면서 동·서·북쪽의 세 방향은 거의 고봉 산악에 둘러싸인 지역이어서
대부분의 고을명칭이 산천(山川)과 유래(由來)하고 있어 일부 지역은
동일(同一)하거나 유사한 유형의 속칭(俗稱)이 중복되어 있다.
아울러 동부에서 북서로 흐르는 남한강은 서부에서의 남양주시와 경계를 이루어 하천의
여러 지류가 산재되어 있어 한강유역의 평지 및 취락지의 명칭 또한 유사(類似)한 면이 많다.
양평군내의 지명은 산악지대, 하천지대, 평원지대 등 세 가지 유형의 명칭으로 분류되는 데,
고대에는 순수한 우리말에 의해서 호칭하다가 한자(漢字) 문화가 들어오면서 지명이 한자화가 되어,
지금은 다시 우리말의 지명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로 인해 속칭과 개칭의 지명의 유래가 많이 생성되었다.
군내의 연혁을 언급하자면 ‘양평’의 지명은 양근군과 지평군의
두 지역이 합쳐진 통합호칭으로 양평군(楊平郡)이라 불리게 되었다.
능선아래에서 본 공군부대의 모습
부대 정문으로 가는 도로
우회로 가는 길은 짙은 안개에 휩싸이고...
울님 입술만큼이나 빨간 열매는 갈길 바쁜 산꾼을 격려하고...
도로옆 공터에서 좌측 능선으로 내려서니...
이정표가 나오고...
지나온 구간의 궤적도 그려보고...다시 포장도로를 만나 직진으로 가서 넓은 임도로 들어선다.
임도 초입(15:00)
임도 초입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과 이정표가 있다.
앞으로 가야할 거리를 어둡기전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시간당
4km 정도를 걸어야만 도착할 것 같은데 이곳에서 대추토마토를
나눠 먹고 물한모금을 마신 다음에 본격적인 산행 속력을 낸다.
다행히 이곳은 거의 임도로 가는 수준이라 산악마라톤 하듯 걸어간다.
멋진 억새밭에서 인증샷도 생략하고...
매혹적인 자태로 산꾼을 유혹하는 열매도 뿌리치고...
사나사 계곡 갈림길(15:15)
임도를 따라서 빠르게 내려오니 넓은 공터가 나오면서 좌측에 뚜렸한
길이 나오는데 지도상으로 사나사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13년도 넘은 세월에 포교사 시험에 합격하여 사나사로 가서 주지스님에게
법문을 청한적이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울력을 하시다말고 야단법석(野壇法席)
법상을 펼치고 감로법문을 들은지가 엊그제 같은데 참으로 세월 빠르구나
사나사 일주문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며.
양평의 용문산의 주봉인 백운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사나사(舍那寺)는 양평군에 옥천면에 위치한 사찰로서 대한민국 전통사찰 제48호이다.
사나사는 신라 경명왕 7년(923)에 고승인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제자 융문과 함께 창건하고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盧舍那佛像)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 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
사나사(舍那寺)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여엄이 고려 태조와 함께 이상적인
"불국토연화장" 세계를 건설하려는 뜻으로 노사나보신불상(盧舍那報身佛像)을 봉안하고
사나사라 이름 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화주승(化主僧)이라 하는 범사(梵師)가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시려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하늘에서 천장노사나불(天藏盧舍那佛)이
출현하여 즉시 그 불상을 제작하여 절에 모셔 사명(寺名)을 "사나사"라 하였다는 설이다.
고려 공민왕 16년(1637)에 태고왕사(太古王師) 보우(普愚)가 140여 칸 규모로 중건하였으며,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사찰이 불타버린 것을 선조 41년(1608)에
단월(檀越) 한방손(韓芳孫)이 재건하였다. 영조 51년(1773)에 양평군내 유지(有志)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堂山契)를 조직하고 향답(鄕沓)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佛糧沓)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
사나사 대적광전
원증국사 태고보우의 사리탑
태고 보우국사는 조계종의 중흥조이시며 사나사는 태고 보우국사께서 사찰을 크게 중창을 하였다.양평에서 태어나셨기도 하지만 스님은 고려 우왕 8년에 용문산 소설암에서 입적하신 뒤,
다음해 1383년에 부도와 비를 사나사에 세워졌다
태고 보우국사는 고려 충렬왕 27년(서기1301년)에 지금의 경기도 가평에서 출생하였으며
성은 홍주 홍씨이고 법명은 보우,호는 태고이며 해가 품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태어나셨다.
13세에 출가하여 32세에 득도하였고,불경 공부는 수행을 위한 수단일뿐 대각에 이를 수 없다하여
죽을 각오로 참선행을 하던중 어린 동자 둘이 홀연히 나타나 감로수를 주니 마시면서 깨닫게 되었다.
보우는 공민왕의 총애를 받던 승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는 진언을 하다가 신돈의 참언으로
속리산에 금고 되기도 하였고 고려말 정치적 혼란기에 한양 천도를 최초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현재 대한 불교 조계종의 종조(宗祖)로 받들여지고있다.
함왕성지는 삼국시대 이전 마한시대 부족장인 함왕이 외부의 침략을 막기위해 축조한 성터로서
함왕의 전설을 간직한 곳입니다.함왕성지는 사나사 뒤쪽으로 나있는 등산로를 따라 한시간정도
올라가면 만나 볼 수 있다.
사나사 경내에 있는 함씨각의 유래와 함왕의 전설
고려 개국공신인 양근함씨 함규의 전각이며,양근(현재의 가평)에는 함왕성에대한 전설이 전해진다.
성밖 계곡 아래 잇다는 함공혈이라 부르는 바위굴에서 삼한시대의 주악이라는 함씨대왕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양근함씨의 시조 함혁이 삼한시대에 석성을 쌓고 스스로 함왕이라 칭했으며 이곳을 세거지로 정한
함씨들이 이 바위굴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고 웅거 하였다가 멸망하였고
그 자손들이 본관을 양근으로 삼았다 한다.
사나사 계곡 갈림길에서 조금을 올라서니 조그만 암봉이 나오고...
능선 위에는 콘크리트 말뚝이 보이고...
암릉을 끼고 능선을 내려서니 다시 임도를 만나고...
개인이 만든듯한 이정표를 만나고...
설매재휴양림 갈림길(15:25)
임도에서 다시 조그만 능선을 올라섰다가 우측 임도로 내려선다.
다시 임도를 따라 마라톤 하듯이 발걸음은 빨라지고...
배너이고개가 08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급한 내림길을 내려서니 배넘이 고개에 당도한다
배너미 고개(16:40)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서 가평군 설악면 가일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배너머고개,
배넘이고개, 주유현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예전부터 670 고지로 부른다.
고개 가까이에 668.6봉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한국전쟁 때 생긴 지명인 듯하다.
오프로드 코스로 이용되는 임도와 수시로 만나면서 유명산으로 오르는 길은 임도로 되어있다.
배너미재 도로옆에 있는 오프로드 차량 보관소의 모습
도로에서 내려와서 길을 건너서 매점 옆에 있는 임도 차단기를 넘어 임도로 향한다.
배너미 고개 정상에 있는 매점
차단기를 넘어서 임도를 따라서 유명산으로 향한다.
임도를 따라서 유명산으로 향하는데 계속해서 편한 임도를 따라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기기는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마음이 바쁘다.
임도를 걸어가는데 우측으로 어비산(漁飛山)의 모습
전설에 의하면 신선이 남한강에서 고기를 낚아 설악면 장락으로 가던 길에
서너치고개를 넘던중에 갑자기 고기가 살아나서, 즉 선어(鮮漁)가 되어 소구니산을
넘고 유명산 뒤의 산으로 날아가 내려 앉았다하며 그후 고기가 내려앉은
산을 어비산(漁飛山)이라고 했다한다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가 임도 우측 쇠파이프를 넘어서 올라가니 좌측에는
배추밭이 있는데 배추 수확을 끝내고 객토작업을 하고 있다.
억새군락지를 지나서 어비산 갈림길로 향한다.어비산 갈림길(16:00)
오프로드 길을 따라서 능선으로 올라서니...주위는 온통 억새밭이다
억새밭
억새밭을 올라가다가 뒤돌아보니... 영화 세트장이 나오는데
좌측 도로로 올라오면 만나는데 우린 기맥길에 충실하려고
우측으로 올라오다가 세트장을 놓치고 먼 발치에서 바라본다
능선에서 바라본 영화와 드라마 세트장
이곳에서는 드라마 “선덕여왕”과 “무사 박동수”, 최근에 끝난 “불의 여신 정희”와
최근에 상영된 배우 송강호가 주연한 “관상”이란 영화를 촬영한 곳이란다.
난 영화와 드라마는 잘 모르는데 동료 산꾼 붕어잡이님이 이야기 해준다
대부산(貸付山) 갈림길(16:08)
대부산은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 위치한 산으로 유명산과 이웃하고 있는 산이다
70년대초 이곳에 고랭지채소를 키우기 위해 산에 불을 질러 나무를 다 태워 버렸기
때문에 초원의 느낌을 맛볼 수 있기도 하다
마주보는 유명산과 함께 설악면과 옥천면을 가르는 산이라 하여 마을에서는 대부산(貸付山)이라고도 부른다
4인방중 홍일점인 살림꾼 벙글이 아우
이곳에서 반가운 선답자들의 시그널을 만나서 유명산으로 향한다.
폐허가 된 산불감시초소를 지나서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잣나무 숲을 지나 조금을 내려가니...
다시 유명산 활공장으로 향하는 비포장 도로를 만나고...
잠시후에 가야할 유명산 활공장의 모습
비포장 도로에서 만난 이정표
가야할 능선의 모습
뒤돌아보니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는 희미한 대부산의 모습
안간힘을 쓰고 활공장에 도착한다.
활공장(16:30)
활공장 정상의 모습
페러글라이딩을 즐기는 마니아들
활공장 정상을 지나서 유명산으로 향한다
넓은 임도를 따라서 유명산으로 향한다.
유명산 갈림길(16:40)
이곳에서 340m 떨어진 유명산을 향해서 간다.
이곳까지 와서 기맥에서 약간 떨어졌다고 안갈수는 없잖은가?
유명산(有明山:862m:16:45)경기도 가평군 설악면과 양평군 옥천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은
‘말을 방목했다’ 할 정도로 넓고 편평하다.
1973년 한 일간신문사(한국일보)의 후원으로 국토 중앙자오선(127도 30분) 등반대가
여수에서 자오선을 따라 북상을 하다가 종주 등반을 하던 엠포르산악회 회원들이 지도에
표기가 없었던 이 산을 발견하고 대원중에 홍일점이었던 진유명(晉有明)씨의 이름을 따서
붙혔는데 이후에 언론보도로 유명세를 타면서 이 산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후에 유명산 지명에 대한 논란도 이어졌는데 당시 지도상에 이름이 없었을 뿐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는 이미 “마유산(馬遊山)”이라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을 방목했다하여 예전에는 마유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고지도인 대동여지도(13첩 4면)에는 엄연히 “馬遊山”이라 표기가 되었는데
마유산이 유명산으로 바뀐데는 1차적으로 한국일보의 책임이 가장크고, 산악인의 무지,
일반 등산객들의 무관심, 지자체의 무개념으로 졸지에 바뀐 이름을 되돌려놔야 할듯 싶다.
그나마 다행인게 양평군에서 용문산에서 이곳 오는 이정표에는 마유산이라 표기했건만
정작 이곳에는 표시석에는 유명산이라 그대로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유명산 정상에서
용문산 군부대에서 이곳까지 길이 좋긴 했지만 산길을 시간당 4km 이상을
달리다시피 하여 유명산 정상에 도착을 하니 허기가 져서 도저히 걸을수가 없었다.
이곳 정상 막걸리 장사에게 막걸리 한잔을 사서 먹으니 정말 꿀맛이다.
평소에 술을 입에대지 않던 동료산꾼 붕어잡이님과 벙글아우도 마신다.
막걸리맛이 이렇게 좋은줄은 예전에 정말 몰랐었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되돌아 온 유명산 갈림길(16:50)
유명산 갈림길 이정표
유명산 갈림길에서 소구니산 가는길은 그다지 힘은 들지 않지만 낙엽이 미끄럽다.
숲속이라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구름속의 태양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다시 힘들게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힘든 산꾼을 반긴다.
소구니산(800m:17:15)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와 가평군 설악면 가일리 능선에 있는 산으로
유명산과 중미산을 잇는 능선 가운데 있는 산으로 ‘하늘이 서너치 정도 보인다’
는 뜻의 선어치(서너치)고개를 사이에 두고 유명산과 연결이 되어 있다.
산의 모습이 소쿠리 같다고 소쿠리산이었는데 소구니산으로 변음이 되었다.
실제로 소구니산에 소쿠리 만드는 싸리나무가 수없이 많다고 한다
서너치(선어치) 고개(17:25)경기도 양평군 옥천면과 가평군 설악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우측 능선으로 중미산이 이어지는 곳이다.
유래를 보면
옛날 이 고개에 호랑이가 살았다고 하는데 어느날 이 고개를 넘어온 선비에게
마을사람들이 호랑이를 보지못했느냐고 묻자, 그 선비는 ‘나무가 얼마나 울창한 지
호랑이는 보지 못하고 하늘만 서너치 보았소’ 라고 대답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하며
또다른 유래는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던 색시가 이 고개를 넘어면서 너무나 지루한
나머지 하인에게 ‘길이 얼마나 남았느냐’ 고 물었을때 마다 하인은 ‘서너치 남았소’
대답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그만큼 험했다는 얘기인 모양이다.
660.4봉(17:30)
헬기장(17:38)
헬기장을 지나 농다치고개로 내려서는 계단에는 어둠이 몰려온다.
우측에는 NO143송전탑이 지나간다.
농다치 고개(17:45)경기도 양평군 옥천면과 서종면 그리고 가평군 설악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37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고개가 상당히 높아 MTB와 오토바이 마니아들이
즐겨 다니는 곳이고 주위 골프장이 많아 예전에 많이 넘었던 고개이다.
‘농다치’라는 지명유래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중기 신복리에 사는 최씨 성을 가진 마을 향리가 가평군 방일리에 사는 박씨에게
무남독녀를 시집을 보내게 되었는데 혼수로 딸이 태어날 때 심었던 오동나무를
베어 솜씨좋은 목수에게 부탁하여 농을 제작하여 농 속에 이불과 살림살이를
챙겨서 머슴인 돌쇠와 돌쇠 아버지에게 지게를 지어 보냈었다.
아씨를 짝사랑하며 숱한밤을 가슴앓이를 해오던 어린머슴 돌쇠는 고갯마루에
도착해서는 짝사랑해 온 여인에 대한 사랑의 표시인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연인에 대한 해코지인지는 몰라도 지고가던 오동나무 농을 도로가 비좁다는
핑계를 삼아 도로옆 바위에 쿵쿵 부딪히며눈물과 콧물, 땀으러 범벅이 되어
운반을 하는데 뒤따라온던 돌쇠아버지가 보다못해 ‘애야! 농다친다, 농다친다’ 하고
주의를 준 것이 ‘농다치고개’라는 지명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돌쇠의 사랑표시는 눌언민행(訥言敏行:말은 더디게 하고 실천은 민첩하게 하라)
교훈은 당시 양평의 서생들에게 크게 유행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고개에서조차
으미를 부여한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마침내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다(17:45)초반에 비솔고개에서 용문산 정상까지 길도 험하고 힘이 들어 시간이 지체되어
오늘 산행을 마무리 될까 걱정도 되었고 몸의 컨디션이 최악이라 우려를
많이 했지만 군부대에서 농다치 고개까지 약13km를 2시간 45분만에 도착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그러나 해냈다는 성취감에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그러고나니 아픈곳이 다 없어져 버린 느낌이다.
어둡기전에 산행을 마쳤다는 안도감에 베낭을 정리하고
이 고개의 아래에 유명한 옥천냉면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간다.
3대를 이어왔다는 황해도 옥천냉면집
예전에 골프장 다니면서 들렸던 냉면집인데 오랫만에 와본다.
이 집 쥔장인 할머님은 돌아 가셨단다... 느낌이 그런지 예전의 맛이 아니다.
이곳에서 완자에다가 동동주 한병 시키고 비빔냉면으로 저녁을 먹고 집으로 향한다.
양평군 옥천면에는 냉면이 유명하여 너도 나도 원조라 하며 냉면집이 많다.
옥천 냉면의 유래
한국전쟁때에 북에서 피란온 노부부가 옥천에 주둔하는 군인들을 상대로 고향에서
먹던 냉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군인들과 그의 가족들이 면회와서 먹고
소문이 나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평양식 냉면을 메밀을 반죽해 압착식을 뽑은 면에 꿩이나 닭, 소고기 등을 우린
육수에 시원한 동치미를 섞어 말아 먹는다.
메밀의 고소한 맛과 육수에 시원한 동치미가 일품이며 함흘식 냉면은 고구마나
감자같은 전분으로 뽑아 질기고 쫄깃한 면발을 즐길 수 있는데, 육수와 어울리기
보다는 맵고 달콤한 양념장에 비볐을 때 제맛이 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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