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4년 10월 18일
☞ 산행날씨: 맑고 청명함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0km / 6시간 25분 소요
☞ 참석인원: 온누리님과 둘이서
☞ 산행코스: 도갑사-도갑재-375.8m봉-386m봉-329m봉-주지봉갈림길-전망바위-352m봉
뫼봉갈림길-묵동재-월각산갈림길-월각산-383m봉-월하마을 갈림길-307m봉
282m봉-함양박씨 묘지-밤재-송전탑-성산봉갈림길-별뫼산(흑석지맥 갈림길)
212m봉-13번국도-제안고개-성전면 사무소
☞ 소 재 지: 전남 영암군 군서면, 학산면 / 강진군 성전면 / 해남군 계곡면
지난 한 주동안 많은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마치 정신이 나간 것처럼...
3구간을 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카메라를 떨어트려서 그런지 저장장치인 SD 카드에 이상이
생겨서 사진이 깨지고 에러가 나고 일부는 없어지는 바람에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는데
온누리님께서 회사에서 컴퓨터 전문가인 직원이 복구를 해주는 바람에 많이 복원시켰으나
일부는 아예 없어져버려 부득히 그 구간을 다시 가려고 하니 힘이든다
더군더나 이번 주에는 금.토.일 3일동안 결혼식이 무려 다섯군데나 있는 바람에
산행을 나서자니 영 마음이 그렇지만 가슴속 뭉친 응어리를 치유하긴 위해서는
아무래도 길을 나서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뜻밖에 온누리님께서 동참하신다고 하기에
금욜 저녁에 결혼식에 참석하여, 지인들에게 토.일욜 결혼식에 봉투를 전하고
집에와서 베낭을 챙긴 다음에 일찍 잠자리에 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도곡역(05:35)
이른 새벽에 도둑 고양이처럼 집을 나와 도곡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고속터미널에 도착한다
서울발 광주행 06시 05분발 버스표
06시05분발 버스표를 끊어서 차에 오르니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버스는 절반정도 비어있는
바람에 각자 한명씩 앉아서 가는 바람에 편하긴 하지만 버스회사에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정안 휴게소에 충무김밥에다 유부우동을 시켜서 간단하게 아침을 다시 버스에 오르건만
지난 주와는 달리 도로가 뻥 뚫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속버스 기사는 느긋하기만 하다
광주에서 영암가는 버스는 09시 30분이 직행이고, 09시 40분이 완행인데 이 버스를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기에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 간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09시 37분 총알같이 내려서 버스표를 끊어서 플렛홈으로 오니 차가 출발하려는걸
붙잡고 겨우 영암으로 가는 완행버스에 오른다
광주행 영암발 버스표(09:40)
버스에 올라 나주, 영산포, 신북을 지나 영암터미널에 도착을 한다
영암버스 터미널(11:05)
터미널에 도착하여 도갑사로 가기 위하여 택시 승강장으로 가는데 여성 등산객이 길을 묻는다
그리하여 도갑사가는 택시를 합승하는데 택시비가 12,900원인데 개인택시라 그런지 900원을
깍아주는 바람에 1인당 3,000원씩에 택시로 도갑사에 도착한다
도갑사 일주문(11:20)
도갑사 입구에서 일주문을 향하여 저두삼배의 예를 갖추고 도갑사로 향한다
도갑사 안내문
도갑사(道岬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로서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뒤 세조 2년(1456)에 신미(信眉)와 수미(守眉) 두 스님이 중건하였다.
한 때 966칸의 당우와 전각이 있었던 도갑사는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성보들이
유실되었으며, 그나마 남아있었던 유물들도 일제시대와 6.25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
1960에 중건하였으나 참배객의 부주의로 77년 대웅전마저 전소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현재에도 복원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도갑사는 월출산에서 이어진 도갑산(道岬山)의 비교적 평탄한 대지에 산을 배경을 자리 잡았다.
배치 중심축은 서쪽을 향하도록 좌향(坐向)을 잡고 평지사찰과 산지사찰의 중간적 배치를 취하고 있다.
절 입구 정면에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계류를 건너 일주문을 지나 숲 사이 길을 올라가면 왼쪽으로
새로 조성된 사적비가 있으며 여기를 지나 두 번째 산문인 해탈문(국보 제50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도갑사 중심사역에 이른다. 해탈문을 지나 완만한 경사로 좌측에는 도선국사 성보관이 있고,
경사로를 오르면 정면에 대웅전이 있고 그 앞에 중정이 펼쳐진다. 대웅전 앞 중정에는 괘불대와
오층석탑, 석조(石槽), 그리고 새로 조성된 석등이 있다. 대웅전 왼쪽으로 명부전이, 뒤쪽에 국사전과
수미왕사비각이 있으며 대웅전 뒤편 계곡을 건넌 것에 미륵전과 부도전, 도선국사비각이 있다.
산내암자로 동암(東庵)과 상견성암(上見性庵)이 월출산에 포진해 있는데 옛날에는 12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배치도 이미지 출처 : http://www.dogapsa.org/
일주문 배면의 편액
'國第一禪宗大刹'위에 '德海門'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
도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해탈문은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뜻으로, 정면 3칸·측면 2칸 크기이고,
절의 입구에 서 있으며 좌우 1칸에는 절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서 있고, 가운데 1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위쪽에는 도갑사의 정문임을 알리는 ‘월출산도갑사(月出山道岬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반대편에는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도갑사 해탈문은 우리 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산문(山門)건축으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비교되는 중요한 건물로 기단은 바른 장대석 쌓기를 하였으며, 그 위에 약한 배흘림을 한 원주를 세우고
그 위에는 주두 아래에서 빠져나온 헛첨차를 끼우고, 그 위에는 굽의 단면형이 직선으로 사절된 주두를
놓고 초제공을 결구하여 대량을 받록하였다. 헛첨차는 주심에서 단면이 장방형인 창방과 맞추어졌고,
외부로 빠져나온 헛첨차 하단은 화두식(花頭飾) 쌍S자문양이 살아있는 첨차형 모습을 보이며,
그 위에 놓인 초제공 살미는 외부에서 초가지(草花枝) 각으로 되어 대량머리를 받치고 내부에서는
양봉(樑捧) 되었으며 우미량의 안 쪽을 받고 중도리를 지탱하는 포동자주의 형식이 다포집 계열의
교두형 첨차로 짜올린 절충식을 따르고 있다.
해탈문 소맷돌
태극문양으로 만든 소맷돌은 만다라(佛法의 모든 덕을 두루 갖춘 경지에 이르는 말)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
해탈문 안으로 들어서니 이곳은 다른 사찰처럼 사천왕상이 있는게 아니라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이 모셔져 있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밀적금강
손에 금강저를 들고 있는 서 있는 역사를 밀적금강이라고 부르는데
‘밀적’이란 자취를 드러내지 않음을 말한다
나라연 금강
나라연은 힘의 세기가 코끼리를 백만배나 된다고 한다
문수보살 동자상
보현보살 동자상
사른 사찰과 달리 문수동자상과 보현 동자상이 모셔져 있는데 목조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물 제1134호이며 실물은 도갑사 성보박물관에 있고 이곳에 있는 건 가품이라 한다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있는 두 동자상은 높이가 약 1.8m 가량이고 앉은 높이가 1.1m 안밖으로
크기도 비슷하고 조각기법도 동일하다
다리를 안쪽으로 나란히 모아서 사자. 코끼리 등에 걸터앉은 두 동자상은
동물상과 따로 만들어 결합하였으며 두 손도 따로 만들어 끼웠다.
현재의 손도 후대에 다시 만들어 끼운 것으로 생각된다
두 동자상의 머리를 묶은 모양새는 매우 화려하며, 이목구비가
원만하여 동자의 천진스런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점에서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과 실천의 상징인
보현보살로 추정되며 사자와 코끼리를 탄 동자상이라는 드문 예 가운데
목조상이라는 유일한 작품이다
1960년 해탈문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기록이 해탈문이 1473년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이곳에 모신 동자상도 문이 건립될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발췌)
해탈문과 대웅보전 사이에 새로 지어진 종무소가 있는 광제루(廣濟樓)가 나온다
광제(廣濟)는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도갑사 석조(道岬寺 石槽: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
도갑사 안에 놓여 있는 것으로, 물을 담아두거나 곡물을 씻는데 쓰였던 일종의 돌그릇이다.
길쭉하고 네모난 돌의 안을 파내고, 각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었는데, 아랫부분을 둥글게
반원모양으로 깎아 놓아 옆에서 보면 작은 통나무배를 보고 있는 듯하다.
안쪽 밑바닥에는 물을 뺄 때 쓰이는 작은 배수구멍이 뚫려 있다.
표면에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 숙종 8년(1682)에 만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도갑사 오층석탑(道岬寺 五層石塔:보물 제1433호)
고려시대 석탑으로 도갑사 대웅전 앞에 있다. 2층 기단의 5층으로 탑신을 올렸다.
이 탑은 처음에는 하층 기단이 없는 1층 기단의 5층탑이었으나 세진당(요사채) 북서쪽에서
하층 기단부가 발견되어 2002년 2월 2층 기단의 5층탑으로 새로 복원하였다.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탑이 이전되는 과정에서 원래의 위치와 모습을 잃어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면에는 네모서리에 기둥이 모각되어 있으며 지붕돌(옥개석)에는 지붕돌 받침이 1~3층은 5단,
4층은 4단, 3층은 3단씩 조각되어 있다. 부분적으로 급격한 체감률을 보이기는 하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이 잘 계승되어 있어 고려 초기의 탑인 것으로 보인다.
도갑사 대웅전
통일신라시대 말 도선국사(道詵國師, 826∼898년)가 헌강왕 6년(880년)에 지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도선이 자라 중국을 다녀온 뒤
이 문수사터에 도갑사를 지었다고 한다. 또한 도선국사가 태어난 마을 영암은 풍수지리의 메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도선국사가 태어난 영암군 군서면의 구림(鳩林)마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듯 하다.
'비둘기 숲'이란 뜻의 구림(鳩林)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창건이후 고려시대의 모습을 알려주는 문헌자료나 유적이 없어 사세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이후의 모습은 "도갑사사적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도갑사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1456년(세조 2) 수미(守眉)선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부터이다.
도갑사의 중창은 수미선사가 세조로 부터 존경받았던 인물이였기에 세조의 국가적 지원으로 이뤄졌다.
중창 직후의 도갑사는 전각이 966칸에 달하였고, 부속암자만 해도 12개가 되었다고 전한다.
또 1473년(성종 4)에는 해탈문을 새로 지었는데, 이 때에도 시주자(施主者)로 수미대사가 등장하고 있어
그에 의해 1456년에 시작한 절의 중창이 17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중기 1555년(명종 10년)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자행하는 중 도갑사에까지
들어와 불을 질렀으나 저절로 불이 꺼져 화를 면하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전란후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으며 광해군(1608 ~1623년)때에는 낡은 전각을 중수하였는데,
당시 도갑사의 승려는 78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1633년(인조 11년)에는 "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月出山道岬寺王師妙覺和尙碑)"를 건립하였는데,
여기에 스님과 지방의 유력인사들도 동참하였다. 1653년(효종 4년)에는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
(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와 "조계곡석교신창비(曹溪谷石橋新創碑)"를 세웠는데,
두 비문의 건립에도 당시의 영의정, 형조판서 등 최고의 권력자들과 당대의 고승들이 참여하고 있어
당시 도갑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동란 등을 거치면서 도갑사는 사세가 많이 기울게 되었고, 1977년에는 화재로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전 건물이 소실되어 버렸다. 그러나 1981년 대웅보전의 복원을 시작으로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으며, 대대적인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도갑사 대웅전 앞에서
도갑사 대웅전 삼존불
목조로 모신 아미타·석가 · 약사여래의 삼불상을 봉안되어 있는데 석가모니불는 현재불,
약사여래불는 과거불,아미타불은 미래불을 상징하며, 이 삼세불 신앙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으며 뒤에는 삼불회도(三佛會圖)로 1폭에 삼존을 배치한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화재이후 대웅전이 다시 복원된 탓인지 단청이 아주 화려하다
도갑사 천불전
도갑사 명부전
도갑사 산신각
미륵전과 도선수미비각과 부도를 친견하기 위해 용수폭포 다리를 건넌다
석조여래좌상을 친견하기 위하여 미륵전으로 들어서는데 입구 용화문이 있다
도갑사 미륵전
도갑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의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 있는 석조불상이다.
이 불상은 몸체와 광배(光背)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어서 마치 바위에
직접 불상을 새긴 마애불과 같은 기법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를 큼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타원형이며 도드라진 눈덩이,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은 강건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넓은 어깨, 평평한 가슴, 단순한 몸의 굴곡 등은 생동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쳐 입고 있으며 몇가닥의 옷주름이 투박하게 표현되었다.
갸름한 타원형 광배의 가운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꼭지와 머리 양 옆에 각각 작은 부처가 표현되었다.
광배에 새겨진 조각은 대체적으로 생략이 강하다.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 대좌(臺座)는 밋밋한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본래는 연꽃무늬를 새긴 8각형의 대좌였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다소 경직되고 형식화된 수법을 보여주지만 얼굴표정에서 훈훈한 정감을 느끼게 하는 불상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투박하고 생략이 강한 고려적 요소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보물 제1395호)
조선시대의 비석. 통일신라시대의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고승인 수미선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조선 인조 14년(1636)부터 효종 4년(1653)까지 18년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150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원래의 도선국사비가 훼손되어 다시 세웠다고 적고 있다.
석비는 거북받침돌(귀부)과 비몸, 머릿돌(이수)을 잘 갖추고 있다. 머릿돌 양 측면의
운룡문(구름과 용 문양)의 사실적 묘사 등 조각기법이 우수하다.
도갑사의 가람 형태는 좀 특이한 곳이 많이 보인다
해탈문이 그렇고 미륵전 입구 있는 용화문이 그런데 부도 입구에도 진화문이란 전각이 특이하다
도갑사 부도
도갑사 국사전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전각으로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활동한 승려로 , 중국에 가서 풍수지리를 공부하고 돌아와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 진영과 수미왕사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수미왕사는 조선 세조의 왕사로서 15세기 중엽에 도갑사를 크게 중창한 승려인데,
세조는 그에게 묘각화상이라는 호를 내렸다.
고려의 정신적 지주 도선국사(高麗의 精神的 支柱 道詵國師)
고려 사회의 기본 사상 중 하나인 풍수지리 이론을 체계화한 영암 출신의 승려로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시조인 옥룡자(玉龍子) 도선(道詵)의 생애는 신비에 가득 싸여 있다.
전국 곳곳에 그와 관련된 신비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그의 출생 시기나
활동 지역에 대해서도 다양한 전승이 전한다.
하지만 현재 공식적으로 도선의 고향은 영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도선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고려 시대의 옥룡사 선각 국사비와
조선 시대의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대선사비는 모두 도선이 영암 출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이는 다른 주요 자료들에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도선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옥룡사 선각 국사비에서 강 씨(姜氏)라고 이야기한 것과
달리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대선사비를 비롯한 후대의
자료들에서는 대부분 최 씨(崔氏)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영암이 도선의 고향이라는 것을 반영하듯 영암에는 도선과 관련된 많은 유적지가 전하고 있다.
먼저 구림면 성기동(聖基洞)의 성천(聖泉)은 도선의 잉태와 관련된 곳으로, 어머니가 이곳에서
빨래를 하다가 계곡에서 떠내려 오는 오이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성기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구림(鳩林)과 국사암(國師巖)도 도선과 관련된 전설이 전하고 있다.
도선이 태어난 직후 어머니의 부모는 아직 혼인하지 않은 딸이 낳은 아이를 집 근처 바위틈에 버렸는데,
근처 숲에 있던 비둘기들이 날아와 아이를 보호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꿔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고 한다.
이때 아이를 버린 바위가 국사암[도선 국사를 버린 바위라는 뜻]이고, 비둘기들이 모여 살던 숲이 구림이라고 한다.
영암 지역의 사찰들 중에도 도선과 관련된 곳이 많다. 군서면 월곡리의 월암사(月岩寺)는 도선이 처음 출가하여
머리를 깎은 곳이라고 하고, 같은 군서면의 도갑사(道岬寺)는 도선이 개창한 사찰이라고 한다.
한편 이웃한 강진군 성전면의 월남사(月南寺)도 도선이 어릴 때 수학한 사찰이라고 전하고 있다.
영암 지역 중에서도 구림을 비롯한 군서면 지역에 도선과 관련된 유적지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도선의 출생지가 바로 구림 마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갑사의 개창조인 도선국사(道詵國師, 826∼898년)의 진영
수미왕사비각
도갑사 경내에 서 있는 비로, 영암 출신 수미왕사의 활동과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수미는 조선시대 승려로 13세에 출가하였고, 불교를 숭상했던 세조 임금이 그 스승(왕사)으로 모셨던 인물이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형식적으로 조각된 거북받침은 머리가 용의 머리처럼 바뀌었으나, 목이 짧다.
앞발과 뒷발의 발톱이 다섯개씩이다. 거북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이 매우 두껍게 조각되어 있다.
비몸 위에 놓인 머릿돌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구름 위로 중간과 양 모서리에 다투듯 뒤엉킨 두마리의 용을 새겨놓았다
선조 14년(1581)에 비가 넘어져 새로 세운 것으로, 인조 7년(1629)에 시작하여 인조 11년(1633)에 완성하였다.
전체적으로 조각의 솜씨와 비문의 필치가 섬세하고 우수한 작품으로, 17세기 초에 세운 석비로서는 특이하게도
고려시대 유행하였던 양식과 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온누리님과 함께 30분동안 도갑사의 경내 이곳 저곳을 두루 구경을 하고 요사채를
빠져 나오려고 하는데 마침 점심 공양시간이라 공양간은 분주하다
기왕 온 김에 오랫만에 절밥도 먹어볼 겸 공양간에 들려서 공양주에게 인사하고
맛있는 절밥으로 푸짐하게 먹은 다음에 해우소에 들려서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도갑사를 빠져 나온다
다시 일주문(12:10)
50분간 점심공양을 겸한 도갑사 관람을 끝내고 일주문을 빠져나와
좌측의 도로를 따라서 동원농장의 표시가 있는 도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도갑사 주차장 앞에 있는 팽나무(수령 450년)
도갑사에서 가까운 군서면 동구림리 구림마을은 백제의 왕인박사의 출생한
곳으로 책굴, 돌정고개, 상대포 등의 유적이 있다고 한다
도갑사 지역은 야생 차(茶)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으며 6.25전까지만 해도
제다법(製茶法: 차를 달이는 법)이 끊임없이 전수된 곳이란다
무위사를 창건했다는 원효성사나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 두 분
차를 즐겨 마셨다는 다승(茶僧)이었다고 전해진다
도갑사 지역에서 나는 차는 품질이 뛰어나서 애호가들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 왔는데 조선조 세조 때 도갑사를 중수한
수미왕사(守眉王師)는 이 곳에서 난 차를 신 숙주에게 선물을 했는데
이 차를 선물받은 신 숙주는 수미왕사에게 도갑산계 작설차(道岬山溪
雀舌茶)라는 詩를 선물했다고 한다
농원농장 이정표를 따라서 도로를 따라간다
도로를 따라서 가니 비각 2개를 만나고...
출입금지가 붙은 팻말을 무시하고 동원농장 표시가 있는 비포장 도로를 걷는다
도갑재 들머리(12:20)
월출산 국립공원 대나무 가림막으로 올라서니 잡목 때문에 도저히 갈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작전상 후퇴하여 10m 정도 더 올라간 다음에 좌측으로 들어서
개울을 따라 올라서니 산죽길이 나오고 뚜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급경사와 완경사를 골고루 만나면서 30분간을 치고 오르니 도갑재가 나온다
도갑재(道岬峙:12:50)
아무런 표식도 없고 산죽만 가득한 도갑재에 올라 본격적인 기맥길에 접어든다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물 한모금을 마신다
능선에서 바라보니 월출산 향로봉이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골산(骨山)이 보이지만
이곳은 전형적인 육산(陸山)이다... 월출산은 원래 전남도립공원이었으나 이곳 도갑사
지역과 합처져 국립공원으로 승격이 되었다... 그러나 산의 형태는 정반대다
등로에서 바라본 성전저수지(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소재)
등로 사이로 강진군 성전면의 山河가 보이는데 온 천지가 황금물결이다
산죽이 성가시게 하는 안부 능선을 걷다가 안부를 떨어진 다음에 다시한번
빡세게 치고 오르는데 월출산의 암봉과 미왕재가 아쉬운 듯 산꾼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급경사의 오르막을 오르니 봉우리가 나오는데 386m봉이다
386m봉(13:25)
386m봉을 지나서 조그만 무명봉 몇개를 오르내리면 비교적 등로가 뚜렸한 산죽길을
오랫만에 같이 동행한 온누리님과 산행을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주지봉 갈림길이 나온다
주지봉 갈림길(330m:13:50)
이곳에서 땅끝기맥길은 좌측으로 꺽어지지만 우측 주지봉 방향으로도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이 달려 있기에 지도를 꼭 보아야 할 것 같다
이곳에서 주지봉까지는 약 1.6km 정도 떨어져 있기에 입맛만 다신다
전망봉(13:55)
주지봉 갈림길에서 5분정도 지나니 조그만 암릉이 나오는데 전망이 일망무제이다
지나온 미왕재와 주지봉, 문필봉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성전면 월하리, 우측으로는
영암군 학산리 묵동마을이 보인다
암릉 전망대에서 바라본 문필봉과 주지봉
문필봉(文筆峰) 아래의 구림(鳩林)마을(영암군 군서면 소재)은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가 서려있는 마을이다
구림마을의 처녀가 성기동 통샘에서 빨래를 하는 중 참외 하나가 떠내려오자
이것을 먹었는데 잉태하여 애기를 낳았단다
처녀의 집안에서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마을 숲속의 바위에다 애를 갖다 버렸는데
며칠이 지난 후 그곳을 가보니 비둘기들이 애기를 감싸고 있어서 다시 집으로 데려와
키웠는데 그 애기가 후에 도선국사(道先國師)였다고 한다
우측 아래에는 금생저수지가 보이고 그 너머로 흑석지맥 능선이 보인다
성전저수지와 향로봉의 모습
노적봉과 향로봉
암릉봉을 지나서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이상하게
더덕 냄새가 심하게 나타나기에 주위를 살펴보니 더덕이 꽤나 보인다
어린 넘(幼生)들은 그냥두고 조금 굵은 넘들만 수확을 한다
352m봉(14:30)
준.희님의 352m봉 표지판을 지나니 폐헬기장이 나오고...
산죽과 잡목사이에서 멋진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고...
뫼봉 갈림길(330m:14:40)
뫼봉 갈림길에서 급경사로 내려서는데 태풍의 피해로 넘어진 나무들이 보인다
묵동재(墨洞峙:14:48)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죽동마을과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의 경계에 있는 재로서
고개의 지명은 우측 아래에 있는 묵동리에서 따온듯 하다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墨洞里)는 옛부터 먹을 만드는 곳이라 하여 묵동 혹은 먹뱅이라고 하였다.
혹은 마을 북쪽에 병풍처럼 산이 펼쳐져 있어 옥녀가 글을 쓰려는데 붓과 벼루는 있는데
먹이 없어서 마을 이름을 먹뱅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1940년경에 먹뱅이라는 명칭의 어감이 좋지 않아 명동(明洞)이라 개칭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마을이 모두 전소되자, 마을 이름을 바꿔서 재앙이 닥쳤다고 생각한다
주민들은 묵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월각산 갈림길(15:10)
산죽길을 지나서 빡세게 20여분을 치고 오르니 월각산 갈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곳에서 월각산은 땅끝기맥 등로에서 300m 정도 벗어나 있어서 베낭을
벗어두고 월각산으로 향한다
월각산(月角山:456m:15:15)
영암군 학산면과 강진군 성전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월출산 국립공원에
속해있는 산이긴 하지만 월출산의 그늘에 가려져 기맥산꾼만 찾는 곳이다
월각산에서 바라본 뫼봉의 모습
월각산 정상에서
카메라의 SD카드 에러 때문에 2번이나 걸었던 능선이 오늘따라 야속하게 보인다
저 멀리 주지봉과 문필봉만 내 마음을 아는 지 물끄러니 나를 바라본다... 미련한 衆生하고는...
주지봉(朱芝峰:490.7m)과 문필봉(文筆峰)은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동구림리와 학산면 용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봉우리 모양이 붓 끝처럼 뾰쪽하여 주지봉(朱芝峰)이라 했으며, 왕인 박사와
도선국사가 관련된 ‘문필봉(文筆峰)’이라는 별명이 있다.
풍수에서는 화산(火山)인 첨봉을 학자와 연결하면 붓[筆]으로 보고, 무인으로 풀면 칼[劍]로 본다.
『한국 지명 총람』에는 관봉, 필봉, 성제봉으로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진군 성전면의 모습
성전면(城田面)은 전남 강진군의 북서쪽에 위치한 면으로
동쪽에 수암산(秀巖山)이 있고, 서쪽에 월각산(月角山)이 있으며,
북쪽은 월출산국립공원에 속한다.
월출산에서 발원한 금강이 남쪽으로 흘러 성전리 일대에서 넓은 평지를 이루다가
월산천(月山川)을 합류하며 동쪽으로 흐르며 수양리(秀陽里) 일대에서 성전천을 합류한다.
『호구총수』에서 동리를 살펴볼 때 조선 시대에는 고읍면(古邑面) · 안주면(安住面)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이 두 면이 합쳐져서 성전면(城田面)이 되었다.
본래 고읍면의 성 밖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성밖'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성밭'이 되고 한자로 표기하여 성전(城田)이 되었다고 한다.
『구한국행정구역일람』과 『조선지형도』에서 처음으로 지명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11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다시 월각산 갈림길(15:30)
월각산 정상에서 이곳 저곳을 두루 살펴본 다음에 베낭을 벗어둔
월각산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동행한 온누리님과 막걸리에다가
떡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한 다음에 20분간의 휴식을 취한후에 밤재로 향한다
조금전에 올랐던 월각산의 모습
383m봉(16:00)
대월마을 갈림길(16:10)
다시한번 지나온 길을 바라보고...
307m봉(16:18)
월각산 동봉
잠시후에 가야할 별뫼산의 모습
307m봉에서 내려서서 아기자기한 봉우리를 몇개를 오르 내린다
이 능선 아래로 얼마전에 생긴 목포~여수간 고속도로 지나가는 곳이다
禁線을 넘어서 드디어 해방된 민족이 되다(16:50)
咸陽朴公 가족 묘지를 지나니 무명묘지 2기가 연달아 나오고...
다시 묘지 11기가 있는 묘지 가운데를 지나니 잠시후에 오를 별뫼산 능선이 보인다
묘지에서 바라본 별뫼산 능선의 모습
묘지에서 바라본 별뫼산의 능선은 여인이 머리를 풀고 누워있는 형상의 지세라고 한다
자세히보니 정말 그럴듯한 게 지난해 수도지맥을 걸을 때 거창의 미녀산 능선을 연상케 한다
밤재(栗峙:100m:16:55)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와 강진군 성전면 월평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목포와 부산을 잇는 2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며, 고개 정상에는 SK 주유소와
장승 2기가 고개를 지키고 있고 밤재농장이 있다
밤재와 관련된 옛 기록을 살펴보면 율치(栗峙), 율현(栗峴)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율현은 군의 서남쪽 25리에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율치로 기록되어 있고,『호남지도(湖南地圖』에는 가학치(駕鶴峙)
동쪽의 고개로서 율치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72년 지방지도』에는 율치,『해동지도(海東地圖』와
『해동 여지도(海東輿地圖)』에는 율현으로 기록되어 있다.(영암디지털 문화대전 인용)
밤재(강진군 방향)
카메라의 에러 때문에 1주일 사이에 2번이나 와보는 밤재
그것도 천리 먼 길을... 맥길이 뭐길래... 내가 생각해도 내가 약간 맛이 간 느낌이다
4차선의 넓은 도로이지만 얼마전에 생긴 고속도로 탓인지 차량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지만 차량들이 과속으로 달려서 차량의 흐름을 파악한 후 도로를 건넌다
도로를 건넌 다음에 구도로를 따라서 성화대학 간판쪽으로 오른다
성화대학 간판을 지나 전봇대 2개 사이의 잡목을 헤치고 올라선다
523번 전신주 옆으로 올라서니...
골재업체가 쳐논 헨스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하다
이곳은 좌측의 레미콘 업체와 우측의 골재업체 사이로 지나가는데 조금 올라가니
골재업체에서 철망으로 막아 놓았고 칡넝쿨과 가시나무가 엄청 괴롭힌다
좌측의 레미콘 업체 모습
골재업체에서 휀스로 막아놓아 좌측으로
콘크리트 절개지라서 밤재에서 시작하는 무박산행 팀은 이곳으로 오르면 위험하겠다
주유소 맞은편의 밤재농장으로 치고 올라 능선으로 가야할 듯 싶다
대낮에도 상당히 위험하고 칡넝쿨이 미끄럽다
가시에 얼굴이 할키면서 동백나무로 된 골제업체 울타리는 베낭을 메고는
지나갈 수 없어서 베낭을 벗어서 먼저 밀어넣고 다시 맨몸으로 개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개구멍을 통과하니 골재 무더기가 나오고...
골재 무더기를 지나서 좌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능선에 올라 뒤돌아 본 모습
NO22 송전탑(15:05)
송전탑을 지나면서 급경사의 오르막을 오르는데 등로도 희미할 뿐더러
마사토의 미끄러운 길에다가 서서히 체력이 고갈되기 시작하면서 힘이 부친다
급경사의 오르막을 올라서니 멋진 암릉구간이 나오는데 지나온 능선들이 한 눈에 보인다
암릉 전망대에서 바라본 밤재의 모습
지나온 월출산의 모습
성산봉 갈림길(17:30)
밤재에서 이곳까지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급경사에다가 공장을
빠져 나오느라 진이 빠지고 다시 마사토의 미끄러운 길이라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곳에서 기맥길은 우측으로 꺽어지지만 좌측에는 마치 북한산의 인수봉이라
착각을 할만큼 멋진 암릉이 나오는데 지명이 성산봉이란다
그럼 별뫼산은 뭐고 성산봉은 워란 말인가...
별뫼산은 순 뜻인데 참으로 헷갈린다
성산봉 뒤로 다산(茶山) 정약용의 숨결이 남아있는 수암산과 강진군 성전면이 한 눈에
들어오고 우측으로는 오늘 날머리인 제안고개와 내일 가야할 깃대봉이 보인다
이곳부터는 길이 참으로 좋지만 제안고개까지 가려면 거리가
만만찮은데 해는 벌써 서산으로 기울어지니 괜스레 맘이 급해진다
별뫼산(星山:465m:17:40)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 강진군 성전면 월평리, 해남군 계곡면 당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성산’ 또는 ‘별산’이라고 부르는데 아마 조금전에
지나온 전위봉(암봉)을 보고 지어진 이름같다
별뫼산은 정상보다는 남동쪽에 있는 암봉과 암릉의 풍광이 뛰어나다
밤하늘의 별과 같은 형상이라서 지어진 ‘별뫼’ 역시 암봉에서 시작되었다
별뫼산은 암봉을 머리부분 별뫼산 정상을 왼쪽 다리부분으로 여신이 머리를
떨어뜨리고 나체로 누워서 왼발을 오그리고 치부를 가리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직진으로 가면 흑석지맥으로 가는 길이고 기맥길은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등로는 아주 잘되어 있고 정상에서 물한모금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내리막이라 뛰다시피 내려간다
이곳부터 우측은 오두재에서 같이해 온 영암군과 작별을 하고 해남군으로 접어든다
흑석지맥(黑石枝脈)이란
땅끝기맥 별뫼산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가학산, 흑석산, 두억산을 지나 소아산 대아산을 끝으로
영산강 하구로 떨어지는 41.1km의 산줄기로 목포 앞바다에서 영산기맥의 끝점과 마주본다.
신산경표는 별뫼산에서 영산강 하구 용당리까지 흑석지맥을 표시했는데 현실적으로
영암군 삼호읍 산호리 대불대학교 앞에서 영암호 수로(연암제수문)가 산줄기를 잘랐다.
사실상 섬이 된 수로 건너편 산줄기가 15km 가량 되므로 여기서 마감할 경우는 26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조선지형도(1918)를 보면 영암호 수로가 없고, 삼학도를 마주보는 용당리까지 원래의 산줄기는 이어진다.
그러나 2번국도 위로는 대불국가산업단지, 아래로는 영암F1경기장이 들어서면서 대규모 개발이
현재도 진행형이고, 마지막의 소야산, 대야산은 군부대가 점령해 오를 수가 없단다.
반도 끝지점의 목포공항 주변구역 역시 접근이 쉽지 않을듯 해 보이므로,
두억봉 넘고 선황산까지 가게되면 사실상 산길은 끝인 셈이다.
급한 와중에서도 등로에 떨어진 밤을 호주머니에 주워담고...
별뫼산에서 15분정도 내려오니 무명봉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산속이라 그런지 갑자기 어둠이 몰려와서 헤드렌턴을 켜고 산행을 한다
216m봉(18:05)
216m봉에서 뛰다시피한 빠른 걸음으로 10분정도 지나니 등로 가운데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을 만나고 다시 조금을 내려서니 넓은 임도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임도를 따라 내려서니 묘지가 있는 넓은 공터가 나오고 13번 국도를 만난다
13번국도(18:20)
전남 완도에서 충남 금산으로 연결되는 13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해남군에서
설치한 ‘We come! 땅끝 해남’이란 아치형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차량들이
고속도로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중앙분리대 위에 또다른 철망을 쳐놔서 넘기가
애매하지만 시간을 줄이기 위해 차량의 흐름을 살핀 후에 재빨리 도로를 건넌다
도로를 건너 묘목을 심어놓은 황토밭을 가로 지르니 절개지 위로 선답자의 시그널이 보인다
절개지로 오르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잠시후에 잡목과의 전쟁을 치른
다음에 뚜렸한 등로가 나오는데 씨알이 꽤나 굵은 밤들이 많아서 조금 주워 담는다
절개지에서 잡목을 헤치고 능선으로 오르니 長澤高公의 묘지군이 나오고
묘지 상단에서 직진으로 연결되는 임도를 따르다가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니 농장 철문이 나오고 철문을 지나 임도로 내려오니 제안고개가 나타난다
장택고씨의 묘지로 내려서니 임도에 녹슨 농장 철조망을 만나고...
제안고개(18:35)
강진군 성전면 월평리 제안마을과 해남군 계곡면 선진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13번 구 국도가 지나가며 고개 좌측에는 조그만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JC에서 설치한 愛鄕탑에는 JC의 모토인 ‘祖國의 未來는 靑年의 責任’가 새겨져 있다
고개의 지명은 성전면 월하리 제안마을에서 따온듯 하며 해남군 계곡면 사람들은
선진고개라고 부른다 한다
제안고개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나니 주위는 어두컴컴하다
이곳에서 지나가는 차량들을 상대로 히치를 시도하는데
차량이 많이 다니지도 않고 어두운 탓에 아무도 태워주질 않아서
무작정 걷는데 20분정도 걸어내려오니 강진군 성전면 소재지에 도착한다
버스 정류장에 가서 강진가는 버스시간을 확인하고 식당으로 향한다
이곳 강진군 성전면은 면소재치고는 교통이 상당히 편리한 곳이다
10일전에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간 기억 때문에 조금은 낯설지 않다
이곳에는 성화대학이라는 학교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교가 되는 바람에
이 학교를 상대로 했던 상업시설들인, 원룸, P.C방, 미장원, 마트, 식당들이
엄청나게 고통을 겪고있는 곳이다
식당에서 대구탕에다 막걸리 2통을 시켜서 먹은 다음 원래는 강진으로 가서
찜질방에서 자려고 했으나 이렇게 장사가 안되는데 강진가는 차비와 다시
내일 아침에 이곳으로 나오는 차비와 시간을 계산해서 여관에 가서 여관비를
흥정하여고 식당에서 낼 아침에 먹을 밥 한공기도 챙기고 식당 뒤에 있는
모텔로 가니 불을 켜져 있는데 입구에 사람이 없고 전화번호만 적혀있다
전화를 하니 옥상에 살고있는 쥔 아줌마가 내려와서 25,000원을 달라고 하여
이곳에서 여장을 풀고 차가운 물로 도가니를 식히고 샤워를 마친 다음에
따끈따끈한 여관방에서 막걸리 한잔 더 마시고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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