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09년 10월 17일~18일(무박산행)
산행구간: 댓재-몸통령-두타산-청옥산-연칠령성-고적대-갈미봉-이기령-상월산-원방재-백복령
거리/시간: 도상거리:27.5km/G.P.S 약32km / 약12시간 소요
소 재 지: 삼척시 신기면,하장면,미로면/동해시 옥계면/정선군 임계면
댓재에서 백복령까지 3D 지도
댓재 성황당에서
백두대간중 가장 코스가 긴 산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산신에게 기원하고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소재)
새벽 2시 댓재에 도착했을 때 날씨가 매우 차다. 동해바다가 가까워서 그런지 성황당 오름길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바닷바람이 세차다. 준비를 단단히 한다. 오늘은 댓재-두타산-청옥산-이기령-원방재-백봉령으로 이어지는 길로서
결코 짧은 길이 아니다. 정확하게 마루금만 32km이니 마루금만 놓고보면 대간 코스중에서 가장 긴 구간이다.
거기다가 강원도다. 통골재에 오르니 바람은 더 세차다. 어둠 속에서 긴장 상태로 걷다보니 어느 덧
두타산 정상이다. 하늘의 별이 얼굴 위로 쏟아진다. 아예 드러누워 밤하늘의 별을 감상한다.
별 하나 나하나, 별 둘 나 둘…… 내가 별들의 바다에 빠지는 건지,
별들이 내 품에 안기는 건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아직도 총총한 별을 감상할 수 있는 대간길이 고맙고 반갑다.
댓재는 원래 고도가 900m 가 넘는 고개였으나 삼척군 하장면과 미로면을 잇는 고개로 여암 선생의
“山經表”에는 ‘죽현(竹峴)’으로 표기되어 있다. 댓재라고 불리게 연유는 대나무재를 줄여서
부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강원도에 내린 강풍 경보로 인해 이 곳이 동해안 바닷가 쪽이라 산행을 하는데 중심잡기가 힘들만큼...
자꾸만 옷깃을 부여 잡는다. 체온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써보지만 그것이 맘대로 대질 않고
그러나 동해에서 불어오는 海風이 그렇게 춥지는 않는다. 강풍주의보가 내린만큼 걷기는 자꾸만
초반부터 힘에 부친다. 어둠속에 명주목재이를 지나간다
.명주목이(고개)의 원래 이름은 "데바지령"이며, 그 뜻은 삼척지방을 넘나들던 고개로 협소한 계곡의
지류를 따라 오르기가 힘들었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거센 바람에다 추위까지 몰려와 겨울 장갑으로 갈아 끼웠는데도 손끝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
범여는 뭣이 아쉬워 잠 못자 가면서 이 고생 사서 하는가 하긴 이런 추억이 있어야 산하고
연애한 추억이 남겠지 ㅋㅋㅋ 934봉을 내려선 후 잠시 그리 가파르지 않은 오름길을 9부능선을 타고
천천히 올라 1031봉 안부에 올라선 후 이어지는 작은 두세개의 오르내림들을 거치니
지루한 행진을 마감하고 목통령(통골재)에 다다른다. 마주하는 두타산의 우람한 자태를 어둠 속에서도
어슴푸레 올려다 보며 1시간여의 된오름을 오늘의 첫 고행으로 담담히 맞이한다.
두타산(1355,2m)
두타(頭陀:dhota)란 佛家에선 번뇌의 때를 벗고 의.식.주에 탐욕을 갖지않고 심신을 단련하는 수행을 말하며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에 투타행의 제1인 가섭존자를 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산 정상에 오르니
아직까지 어둠이 짖게 깔려있다. 그리고 추위가 몸을 오그리게 하고 갈길이 멀어 길을 나선다.
조선시대의 강릉부사를 지낸 봉래 양 사헌이 쓴 武陵桃園 中台泉石 頭陀洞天이란 글이 가슴에 와 닿을
정도로 명산이라는데 어둠속에 아무것도 느낄수가 없다.
頭陀(dhuta)라..모든 번뇌와 티끌을 털고 이 곳에서 내려갈 때는 가벼운 걸음 만이 남기를..
잠시 인간들로 부터 멀리 떠나 이 곳 阿蘭若處 頭陀洞川(무릉계곡)에 머물며,험한 옷 입고 험한 음식으로
수행하던 許穆(1595-1661)의 영혼이 쉰음산 두타산성 능선을 타고 올라온다. 짧은 인생 好衣好食하며 살기도 모자랄...
오늘날에, 내가 두고 가야할 모든 것과 내가 간직해야 할 그 무엇을 위해 오늘 나는 이 먼 길을 작은
수행으로 삼아 걸어 가는 것일까... 온갖 생각을 떨쳐 버리고 어둠속에 급한 내림길에 스틱에 온 몸을
의지한 채 어둠의 길을 걷는다.
대동여지도와 산경표에서 두타와 청옥의 이름이 지금의 두 위치와 바뀌어 나타나니, 분명 가장 큰 봉우리는
두타임에 틀림 없으련만,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뒤바뀐 두 봉우리가 20리 남북으로 큰 능선을
이어가고 있다.
문바위재
이제 날이 밝힘을 위한 여명이 서서히 시작된다. 저 멀리 동해바다에서 부터 여명이 밝아오고...
두타산을 떠난지 40여분... 청옥산 오름김은 그렇게 힘들지는 않는다. 추워서 아침 해장으로
마신 이스리 한잔이 속을 짜릿하게 한다. 선두는 벌써 도망가고 후미는 아직 보이질 않고
어쩡쩡한 중간 그룹에 그것도 나혼자서 달랑... 참으로 호젓한 길을 걷는다.
박달령(朴達嶺)
“밝달“에서 온 말로 ”밝”은 광명을 비추는 높고 큰 산을 의미하고 “달”은 산과 들을 뜻하는 말로서
청옥산과 두타산을 합하여 광명을 주는 맑고 큰 산이라 하여 두 산을 연결하는 안부를 박달령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이름 그대로 박달령에서 동해의 아침 일출을 맞이한다.
日出
청옥산 가는 8부능선에서 동해의 일출을 맞이하고 또 다시 어둠 속을 걷다가 청옥산 정상에 선다.
갑자기 주위가 밝아진다. 밝음이 앞에서 오거나 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머리 위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연의 섭리가 경이롭기만 하다. 덕분에 청옥산에서 부터는 주변의 경치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청옥산 (靑玉山1403.7m)
대동여지도와 신경준 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두타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지금의 두타산보다 50m 높다.
아미타경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보석 중 하나인 청옥에서 온 지명이라 하기도 하고 임진왜란 때 유생들이 의병들의
정신이 죽지 안했다는 뜻으로 “청옥산”이라 했다고 하기도 하고 동해시 쪽에서 바라보는 산세가 “푸르다”:고
하여 청옥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청옥산 주봉에 있던 소나무는 임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 하기위한 대들보용 목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산 아래 샘이 있고 정상부는 넓은 공터가 있어 고적대와 함께 야생화의 천국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청옥산 에서 바라본 동해
두타산보다 높은 산이지만 두타보단 찡한 감정은 없다. 오늘은 날씨가 좋은 편이라 주위의
산그리메가 한 눈에 들어온다.
두타 청옥을 걷다보면 ‘李承休’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약 700여 년전인 고려 충렬왕 때 直言과 罷職(파직)을
거듭하면서 帝王韻紀(제왕운기)를 집필한 인물이다. 상, 하권으로 구성된 제왕운기는 상편은 帝를,
하편은 王을 언급하고 있다. 帝는 중국의 황제, 王은 고려의 왕을 의미하는 것이니 상편은 곧 세계사이며
하편은 국사인 셈이다. 우리나라가 중국과는 구분되는 독립국가임을 천명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승휴는 하편에서 우리 민족은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고, 당시까지 신화로 전승된
단군신화를 한국사의 체계 속에 편입시켰다.
특히 발해를 최초로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여 만주 일대도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증함으로써 영토회복의 뜻을 암시하고 있다. 중국이 최근에 이르러 동북공정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발해뿐만
아니라 고구려마저도 자기들 역사라고 우기지만 이미 700여 년 전에 발해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킨
이승휴의 안목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대간 관점에서도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백두와 지리를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하나 이승휴는 親家가 경상도 경산임에도
外家에 머물면서 제왕운기를 집필했다는 점이다. 이승휴의 외가가 강원도 삼척이며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이
여기 두타-청옥 아래 흐르는 무릉계곡이다. 두타-청옥이 대간의 중요 부분임을 감안하면 이승휴가 여기서
제왕운기를 집필한 것이 예사롭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저 멀리 죄측에 보이는 뾰족한 봉우리가 유명한 고적대
청옥산에서 고적대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고적대에서 갈미봉을 향하는 내리막길,
온 산이 茶毘式으로 분주하다. 막 동해에서 떠오른 아침 해살이 때 맞추어 불쏘시개를 쑤셔대니
자칫 내가 타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발길을 재촉하는 수 밖에 없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으니 부처가 된다해도 입적하고 싶지는 않다.
갈미봉을 지나니 또 다른 모습이다. 붉은색뿐만 아니라 노랑, 초롱, 파랑(하늘) 등 각양각색이 조화를 부린다.
아! 이런 것이 바로 가을색이로구나!! ………
두타 청옥은 이렇게 반긴다.
연칠성령 정상(1244m)
삼척군 하장면과 삼화동을 넘나들던 고개로 험준한 산세여서 난출령(難出領)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정상부는“망경대“라 하고 인조원년 명재상 택당 ”이식”이 중봉산 단교암으로
은퇴하였을 때 이곳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사모한 곳이라 한다.
또 다른 일설은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 이어지는 고개로 보기도 하고, 사원터에서 하장면 방향으로
늘어선 일곱개의 봉우리에서 따온 일설로 보기도 한다.
연칠성령의 유래 안내판
눈 앞에 성큼 다가온 고적대의 모습
벌써부터 체력이 딸리기 시작하는데 눈앞에 고적대는 범여에게 심한 압박감을 주기 시작하고...
산행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 수 없다. 어떤 목적이 있으면 자연파괴와 연결되기 쉽다.
예를 들어 도토리를 줍기 위해 산행에 나서면 다람쥐들이 배가 고프며,
산나물을 캐거나 잡목을 패기라도 한다면 생태계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산행에 굳이 목적이 있다면 그냥 걷기 그 자체이다. 걷는데
목적을 두는 것은 곧 ‘자연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망군대 멋진 바위를 돌아 오르면서 고적대 정상을 향한 세번째 급경사 암릉 오름길에서 남쪽 시야가
저 아래 무릉계곡의 조망과 갈미봉이 손에 잡힐듯한 느낌이다. 간간이 설치된 로프에 의지하질 않아도
될만큼 암릉 표면들이 거칠어 디딤발 맛은 좋은 편이다. 고적대(高積臺) 정상에서 서니 거리를 좁히기
위해 걸음을 서둘러 사방이 손에 잡힐듯이 조망이 좋다. 오늘은 참 복된 날인거 같다.
삼화동 계곡 조망이 동해바다까지 푸르게 이어진다.
고적대 정상(高積臺1353.9m)
동해시, 삼척시, 정선군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으로 기암절벽을 이루는 산으로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이곳에 대(臺)를 짓고 수행했다고 한다. 동으로 뻗어진 두타, 청옥산과 더불어
해동삼봉 일컬어지며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이 맛- 산하고 연애하는 기분 어떠냐고요. 그걸 어케 말해요
고적대의 유래 안내판
기암절벽이 대(臺)를 이루어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수행을 하며 신선들과 놀았다고 한다.
저 멀리 가리왕산도 보이고
지리산 종주보다 힘들다는 덕유산 종주, 덕유 종주도 미치지 못한다는 두타·청옥-백봉령 구간은 자신을 돌아보고
자연을 생각하게 하는 고마운 길이다. 특히 오늘 구간처럼 내가 발걸음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발걸음이 나를
이끌 때 자연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신체의 살가움과 고마움도 함께 깨달을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자연과 소통방법을 배우는 데에는 백두대간 만한 대상이 없다'
망군대의 멋진 모습
백두대간길의 7부 능선을 넘은 지점에 이렇게 좋은날이 과연 몇번이나 있었을까?
고적대 삼거리에서 혼자 물한모금에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가을 산을 매력에
푹 빠진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렇게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좋은 날씨이다.
내가 지나온 두타산이 아른하게 보이고... 저 아래 무릉계곡의 삼화사의
사시예불 목탁소리가 울릴 시간이건만 아무소리도 들리질 않는다.
무릉도원(武陵桃源)
도연명의 《도화원기》에나오는 말로, 중국 진(晉)나라 때 호남(湖南) 무릉의 한 어부가 배를
갈미봉(1260m)
전국의 산에 흔해빠진 이름중에 하나가 갈미봉이 아닐까.
모든 산들의 갈미봉...모두 같은 어원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갈”은 나누다(分)와
“嵋”는 山을 뜻하니 두 개의 봉우리를 말한다.
갈미봉은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 높은 봉우리에 이름 붙이는가 보다
갈미봉(1260m) 정상에서 한숨을 돌리고
꽤 긴 급경사를 내려와 갈미봉 까지 1시간여의 오르 내림길에서 만나는 오른쪽 무릉 협곡 사이로
기암 절벽과 어우러지는 멋진 岩松들을 즐기며 카메라에 기록을 남기자니 걸음은 바쁜데 시간은 지체되고..
아직도 선두는 보이질 않는다. 험한 암봉들을 왼쪽으로 9부로 돌아 넘어 올라서면서 몇번의 안부
를 갈미봉으로 기다려 확인하나 아직도 멀었나 보다..점점 지쳐가고 있는 모양이다.
잦은 사진촬영으로 계획보다 20여분 늦게서야 갈미봉(1260) 정상에 올라서니
선두조는 조금전에 이미 하산길로 내려갔다고 한다. 휴식을 취하는 후미조를 남겨둔 채 긴 내림길의
이기령을 향해 쉬지 않고 발길을 옮긴다. 잦은 휴식은 오히려 더 힘들 것 같은 생각이다.
울님만큼이나 곱디 고운 낙엽도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하고
세월은 어쩔수가 없나보다
갈미봉에서 오른쪽으로 편한 내림길을 밟아 내리면서 긴 잡목 숲들이 시야를 가린지만, 햇볕을
가려주니 오히려 고맙게 여기며 이제 오늘의 후반전을 위해 새로운 시작이라는 기분으로 천천히
지난 봄에 대야산에서 다친 다리를 흔들어 보니 아직은 괜찮은 느낌이다.
꽤 울창했을 잡목들을 가지치기하여 등로를 잘 다듬어 놓은 느낌으로 비교적 경사진 내림길을
무사히 밟으며 1142 안부를 내려서니 샘터에 다다른다.
이미 물통 2개를 다 비운 탓에 다시 가득 채우고 이기령에서의 후반전을 미리 준비한다.
시원한 그늘에서 푹 쉬고 싶은 심정이나, 후반전에 많이 뒤처질 것을염려하여 선두조를 따라잡기로 하고
서둘러 이기령으로 향한다. 시간상으로 잘 하면 오후3시까지 12시간에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기령(耳基領)
“동기(銅基)“의 순수 우리말로 구리터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구리터”의 중간 자음인 ㄹ이 탈락되어 “구이터”가 되고 “구이”가 “귀”로 축약되어 “귀이(耳)로 표기 되었다.
구리터의 “구리”는 “동”이니 자연스럽게 동(銅)이고 터는 기(基)이니 銅基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재”를 뜻하는 “嶺‘을 넘어 가니 그 이름도 찬란한 이기령이 되었다고 한다.
가짜 상월산에서
이젠 서서히 다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후미조를 기다리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산꾼들을 앞서 시간을 벌기 위해 먼저 출발하여
상월산 들머리 철탑을 향해 발걸음을 올려 놓는다.
급경사에서 대야산에서 겹질린 발목부분에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에어파스로 집중적으로 뿌린다.벌써 9시간을 혹사한 걸음치고는 아직은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대간행 초기 남덕유의 12시간 산행에서 겪었던 악몽이 되살아나며 1년 동안에
참 많이도 발전한 내 걸음이 스스로도 대견스럽다.
계획대로라면 4시간 정도 남었지만 아무래도 후반의 걸음은 많이 지친 탓이라
무리하질 말고 쉬어가면서 여유있게 진행하기로 한다.
이기령에서 출발한지 20여분만에 상월산(970)이라 표기된 헬기장에 도착한다.
조그맣게 가짜 상월산이라며 20분 정도 더 가야 진짜 상월산(980)이 있다고 적혀 있다.
뭔가 다툼은 있는 것 같지만 공식적인 안내표지판 설치에는 좀 더 고증과 확실한 연구를 통하여
혼돈이 없어야 할 것이다. 무성한 풀섶을 지나 잠시 내림길을 밟은
후 동쪽 斷崖를 이루는 멋진 암릉들을 조망하며 20여분 더 급경사를 올라서니 기묘한 노송 한그루 머리에
이고 진짜 상월산 표지판을 명찰 두른 좁은 정상에 올라선다. 고사목이 쓰러진채로 오름길을 가리고 정리되지
않은 정상에는 앉아 쉴 자리도 없다.확트인 북쪽 조망에 1020봉에서 시작되는 크고 작은
오르내림이 멀리 백복령 절개지까지 까마득하다.
빡세게 치고 오르니 부산 낙동 산악회에서 이크릴 표식판에‘상월산’ 표식판이 있고
산님! 힘내셔요라는 표시가 산꾼 범여를 반겨준다. 참으로 고맙기만 하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산그리메는 너무나도 멋있다. 그러나 아직도 가야길이 3시간은
더 걸릴듯 싶다. 멋진 조망을 즐기면서 걷고 또 걷는다.
“떠오르며 달을 맞이하는 산 ”이라는 뜻인가? 이런 저런 생각에 다시 급경사의 내림길을 걷는다.
원방재 임도
왜 그리 힘들고 지루한지..
이제 남은 3시간여를 버티기 위해 오늘의 마지막 된 오름길인 1022봉을 향한 무거운 걸음을 언덕진
비탈에 올려 놓는다. 그리 덥지않은 가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벌써 세병째 물병을 비운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라 허기도 밀려오지만 많이 지친 상태에서의 배부른 식사는 마지막 오름에 방해가 된다.
봉 정상에 다다라 약간의 간식거리로 때우기로 하고 862 안부까지 달팽이산(1018)을 왼쪽에 끼고
북으로 돌아 오른다.1시간 남짓만에 깔딱오름을 지쳐 1022봉이 바라다 보이는 능선 노송아래에 다다라
기진맥진하며 주저 앉아 신발을 벗고 먹을 물로 발을 식힌다.10여분 휴식하며 간식을 나눈다.
원방재
원방재란 "원방"은"먼 지방". 또는 "먼 곳"을 뜻 하는 것으로 보아 먼 거리의 고개를 힘들게 넘나들던
사람들의 애환이 만들어 낸 지명이 구전으로 전해져온 순수 우리말이다.
원방재에서 다시 빡세게 마루금을 치고 오른다. 가도가도 보이는 건 산능선 뿐...
끝이 안보인다. 그래도 시간이 가면 날머리는 나오겠지... 걷고 또 걷고
이것도 수행을 위한 일종의 방편이라고 생각하자. 987.2봉을 지나고 또다시
921.0 삼각점을 지나니 송전탑이 보이기 시작한다. 좌측으로 기수를 돌리니
백복령이 가까워 오는 모양이다.
서서히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겨우사리 준비를 하는 쑥부쟁이
철탑에 내려오니 곱디 고운 단풍이 지친 산꾼을 반겨준다.
산죽지대를 벗어나 987봉 작은 오름길 직전의 조망 바위에 올라서니 시원한 가을이
서쪽 임계천에서 올라온다. 앉은 채로 지나온 1022봉을 뒤돌아 보며 비교적 맑은 하늘에 또 한번 감사한다.
시간을 무사히 버틸 수 있는 것은 오직 날씨의 도움으로 여겨진다.
드디어 오늘의 종착점 도착. 지난 6월에 대야산에서 다친 발목에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오늘 산행이 무리했나보다
11시간 목표는 넘어설 것 같고 12시간으로 넉넉히 늘려 잡은 채 옅은 안개에 채색된 주변을 조망하며 딱 짚어
아픈데도 찾을 수 없는 지친 다리를 조심스레 내려 밟는다. 아, 이젠 급경사 내림도 이것이 마지막이려니...
잠시후 간단하게 씻고 산악회에서 준비한 점심과 술 한잔에 취해 버스에
올라 잠에 떨어졌건만 구비구비 돌아가는 아리리 고개의 흔들림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산죽지대를 벗어나 987봉 작은 오름길 직전의 조망 바위에 올라서니 시원한 가을이 서쪽 임계천에서 올라온다.
앉은 채로 지나온 1022봉을 뒤돌아 보며 비교적 맑은 하늘에 또 한번 감사한다. 시간을 무사히 버틸 수
있는 것은 오직 날씨의 도움으로 여겨진다.
백복령
동해 푸른 물결 손 흔드는 소금 고개 우리댁의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찌거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헐께눈에 노가지나무 뻐덕지개 부끔덕
세쪼각을 세뿔에 바싹 매달고 엽전 석양웃짐 지고 강능 삼척으로 소금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구비 부디 잘다녀 오세요 「정선군 홈페이지 아라리 중에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개,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의 소금 길은 충북의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 라와 기껏 영월쯤에
닿아 멈추었고, 정선 땅은 올곧게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을 의지하여 살았다.
백복령은 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하여는 누구에게 물어도 선뜻 일러주는 이가 없다. 이즈음은 그저 어디든
한결같이 백복령(白伏嶺)이라 쓰는데 아무래도 어딘가 께름직한 느낌이다.
문헌을 들추어보니 『택리지』에 는 백봉령(白鳳嶺)이라 했고,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편에는
백복령(百福 嶺)과 백복령(百複嶺)을 혼용하면서 일명 희복현(希福峴)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만 희복현이란 이름만 보인다.
이제 범여의 백두대간 산행도 서서히 마무리 돼가는 느낌이다.
행사땜에 빠진 땜방구간 몇번 빼곤 얼마 남지 않았고 오늘이 백두대간 코스중에 가장 긴 코스이다.
이 코스는 독한 맘 먹지 않고는 좀처럼 무박 산행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거리도 길고 힘든 코스이기에... 평소보다 1시간 먼저 서울을 출발 새벽 2시반에 댓재에 도착.
버스에서 하차하니 강원도에 내린 강풍 경보로 인해 몸을 중심을 잡지 못할정도 바람이 세다
헤드렌턴과 스틱 등 장비를 점검하고 서둘러 산행을 시작했다.
평상시 처럼 서로들 말없이 걷기 시작 들리는 건 강한 바람소리와 산꾼들의 숨소리뿐.
산행 후 4km 정도 걸었는데도 예전 같으면 땀으로 범벅되어 있어야 할 시간인데
오히려 추워 옷을 한겹 더입어야 하니... 높이 올라 갈수록 바람은 더 세어지고
산행 3시간 후에 두타산 정상에 도착. 기념촬영 후 서둘러 청옥산으로 향했다.
바람 때문에 1분만 서 있어도 산꾼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저체온증이 올것 같은 두려움에...
고적대 아래 움푹하게 패인 곳에서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손이 시려 보온밥통을 열지
못할정도로 손은 굳어있고. 식사하면서 집에 따끈하게 데워온 정종 대포 한잔을 하고 나니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 서둘러 산행을 시작, 가야할 길이 너무나 멀기에. 고적대에 올라서니
온 세상이 내것같은 느낌 이 맛에 산에 오는 것 아닌가.
이기령에서 상월산 급경사를 치고 오르는데 지난 6월 대야산 코스에서 다친 오른쪽
발목에 이상증세가 나타난다. 아직까지 남은 코스가 15km이상이나 남았는데...
압박 붕대로 발목을 고정 시키고 다시 산행을 시작. 오늘 코스 댓재-목통령-두타산-
청옥산-연칠령성-고적대-갈미봉-이기령-상월산-원방재-헬기장-백봉령 삼척에서
출발 동해를 거쳐 정선을 32km를 12시간만에 도착하니 다리에 통증은 더 심해지고
그래도 해냈다는 그 성취감 백복령의 강풍도 범여의 고집은 꺽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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