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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전국의 사찰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종찰 송광사(松廣寺)

by 범여(梵如) 2019. 7. 19.

조계산(曺溪山)  송광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 일주문(一柱門)

전면 1칸의 다포(多包)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조계문이라고도 한다.

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줄로 쓰이는데 대하여 종서로 씌어 있다.

뒷쪽에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曺溪叢林)이라고 쓴 현판이 하나 더 있다.

불교에서는 불(佛), 법(法), 승(僧) 을 삼보사찰(三寶寺刹:세가지 보배)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삼보사찰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불보사찰 경남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 경판이 모셔져 있는 법보사찰 경남 합천의 해인사(海印寺)

한국불교의 승맥을 잇고 있는 승보사찰 전남 순천의 송광사(松廣寺))를 일컫는다.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승맥을 이었다는 의미는 첫째는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전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불교를 바로잡아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는데 그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바로 송광사였다.

또 하나는 지눌스님의 뒤를 이어 송광사에서 열다섯분의 국사들이 출현하여 지눌과 함께

모두 16분의 국사(十六國師)가 나와 한국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주문 돌계단 소맷돌에 사자상이 세워져 있는데 

모양도 그렇고 앉아있는 자세가 특이하다.

송광사 침계루(枕溪樓)

계곡 맨 위에 있는 건물 침계루는 사자루라고도 하며 전면 7칸, 측면 4칸의 중층 누각건물이다.

1층 전면 툇간을 계류의 바위 위에 누주를 두어 건물을 받치도록 하였다.

재(齋)가 있을 때 사용된 공간으로 현재는 선원의 보조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임경당(臨鏡堂)

계곡에 두 발을 담근 임경당은  'ㅁ'자형 요사채 건물로 1797년에 건립되었으며

건물의 정면은 'ㅗ'자형의 정자모습으로 상부에 팔작지붕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육감정(六鑑亭)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능허교(凌虛橋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9호) 

조선 숙종 33년(1707) 다리를 만들었고 그 뒤 60여년이 지난 영조 50년(1774)에 보수를 거쳤다.

19개의 네모난 돌로 무지개 모양을 만든 후 양 옆에 다듬은 돌을쌓아 올려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였다.

능허교의 아치형 중간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돌이 나와 있는데 송광사 입구 청량각의 홍교와 마찬가지로

수살막이, 즉 계곡물을 통해서 음습하는 나쁜기운을 용의 기운을 빌어서 차단하려는 목적이라고 한다.

우화각(羽化閣,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9호)

계곡을 지나는 곳에 능허교(凌虛橋)가 있고, 

이 위에 우화각이라는 일종의 문루가 4칸 길이로 서 있다.

건립연대는 1700∼1711년 사이이며, 1774년(영조 50)에 중수하였다.

천왕문·해탈문(解脫門)·대장전(大藏殿)·종고루(鐘鼓樓)·법왕문은

모두 대웅전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나란히 위치하였다.

이들 가운데 천왕문을 제외하고는 1951년 불타 버렸고, 현재 종고루만이 재건되었다.

해탈문은 화재 전에 정면 3칸으로 지붕의 중앙에 낮은 규모로 1칸을 다시 올려

건물이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고 한다. 대장전 안에는 화재를 입기 전까지만 해도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고, 사찰의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신문·잡지·도서 일체는

물론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현 박물관의 유물들은 화재 때 이곳에서 꺼내왔다고 한다.

당시 보조국사의 장삼은 유리장 속에 걸어 두었고, 가사(袈裟)는 비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많이 낡아서 함 속에 펴두었는데 불타 버렸다고 한다.

우화각은 송광사로 들어가는 다리역활을 하고 있다.

우화각에 걸려있는 송광사 편액은 예로부터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묵객들이 지은 한시가 걸려 있다.

송광사 사천왕문

우화각 끝에 사천왕문은 일주문 다음으로 통과해야 하는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고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인 사천왕이 안치된 전각이다.

송광사 사천왕상

송광사 사천왕상은 전면 4칸 측면 2칸의 천왕문에 봉안되어 있다.

천왕문과 사천왕상은 1462년 후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후 여러차례 중수와 중창을 거쳤다.

사천왕상은 1628년(인조 6)에 중조되어 1720년(숙종 46)에 1차 중수개채 된 후 6차례의 중수개채를 거쳤다.

2003년에도 남방천왕의 왼쪽팔이 절단되어 2004년에 복구작업을 실시하던 중

사천왕상의 복장에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복각(復刻)한

 귀중한 전적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12종 14책이라 한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나무로 만든 틀 위에 진흙을 덧붙여 만든 소조상이다.

조선후기 특히 인조(1624~1649)대에 조성된 거의 모든 사천왕상의 재료가 흙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후반까지는 사천왕상의 재료로 주로 흙을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송광사와 같이 소조로 제작된 사천왕상이 봉안된 사찰로는 직지사, 법주사, 화엄사, 선운사,흥국사 등이 있다.

송광사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

불교전문강원은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께서 설하신 가르침인 경전을 통해

스님으로서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 등을 배우고 익히는 곳이다.

송광사 종고루(鐘鼓樓)

종고루는 화재 이전에는 7칸 2면의 큰 건물이었고 지금처럼 아래쪽 중앙을 바로 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962년에 중건되었다.

 

 

종고루 1층 위쪽의 벽화

종고루  2층에는 범종·운판·목어·홍고(弘鼓) 등 (사물(四物:네 가지의 불교의식 도구)이 있다.

법왕문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이었으나 역시 소실되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이 문을 통과하면 법왕인 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는 뜻에서 법왕문이라고 한다.

송광사 성보각(聖寶閣)

우리나라 대표 불교박물관으로 1997년에 문을 연 '성보박물관'에는 희귀 불교문화재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보조국사가 몸에 지니고 다녔다는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을 비롯해 금동요령(보물 제176호), 경질(보물 제134호),

경패(보물 제175호), 고려고종제서 (국보 제43호), 국사전(국보 제56호), 수선사형지기(보물 제572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보물 제205호), 묘법연화경찬술(보물 제206호), 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 제207호)

고려문서 즉   노비첩, 등 국보 3점 보물 10점 등 총 6천여 불교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이 밖에도   추사 김정희의 서첩, 영조의 어필 흥선군의 난초족자 등 지방문화재

26점과 다른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대장경의 목함에 순서를 표시하기 위해 붙였던 경패는 두께 0.5cm

가량의 작은 판을 속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조각한 뛰어난 작품이다.

모두 43개가 남아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국적으로 거의 유일한 유물이다.

그리고 송광사의 3대 명물로는 불가에서 법당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때 사용하던 용기인 '능견난사'

송광사 부속암자인 천자암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된 곱향나무 두그루 '쌍향수' 사찰에서

국재를 모실 때 사찰로 몰려든 대중에게 나눠주려고 밥을 저장했던 목조용기인 '비사리 구시' 등이 있다.

성보각 벽에 원감국사 시가 있어 읊어본다.

한붕화상이라고 새겨진 감로수

송광사 대웅보전

대웅전은 송광사의 중심건물로 1951년 화재로 불탄 뒤 1961년에 주지 금당(金堂)스님이 중창하였다.

그 당시에는 내부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1구(軀) 봉안하였고, 건물은 전면과 측면 각 3칸이었다.

그 뒤 1988년의 중창 때, 평면 넓이 108평의 亞자 형의 건물을 다시 세웠다.

조계산 송광사는 1200여 년전 신라말엽 혜린선사(慧璘禪師)가 창건하여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라

이름하고 화엄종지(華嚴宗旨)를 선양하였다. 그 뒤 고려 인종 때 석조대사(釋照)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황폐해진 길상사를 고려 명종 27년(1197)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가

이곳을 정혜결사(定慧結社)의 도량으로 정하고 가람을 크게 중창, 조계산 수선사라 개칭하고

선.교를 융합,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조계종풍을 드날려 고려 불교를 중흥시켰다.

그로부터 16국사 등 수많은 고승대덕 들이 속출, 그 명맥을 계승하면서 고려말에 이르러 절 이름이

다시 송광사로 바뀌었고 불.법.승 삼보사찰 중 승보종찰로서 우리나라 불교 조계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창건 이후 지금까지 6차에 걸친 중창을 하였고 6.25사변으로 인해 대웅전 등 중심건물이 소실되어

1955년부터 주지 금당(錦堂)스님과 회주 취봉(翠峰)스님의 원력으로 5년동안  제7차 중창불사를 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1969년 조계총림을 발족하면서 방장 구산(九山)스님께서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여년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고 승보종찰로서의 위용을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뒷쪽의 벽화

송광사 삼세불과 사대보살

삼세불이란 과거, 현재, 미래불로 현세불인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좌측에 연등불을 우측에 56억 7천만년 뒤에 나타난다는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셨다.

협시보살 네분은 석가여래 좌측에 문수보살이 사자와 함께 우측에 보현보살이 코끼리와 함께

연등불 옆에 지장보살이 석장을 미륵불 옆에 관음보살이 정병을 들고 서 있다.

송광사 승보전(僧寶殿)

승보사찰 송광사의 상징적인 건물로 6.25전쟁 이후 중창된 대웅전 건물을 옮겨지은 건물이다.

건물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10대제자, 16나한 및 1천 250 비구 제자상을

봉안하여 석가모니의 영상회상을 재현하고 있다.

송광사 승보전 옆쪽의 벽화

비사리 구시

승보전 옆에 있는 비사리 구니는 1724년 전라남도 남원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조선 영조 이후 국제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통이라 한다.

약 7가마 분량의 밥을 저장할 수 잇다고 하며 송광사 3가지

명물(능견난사, 쌍향수, 비사리 구시)중 하나이다.

 

비사리 구시 안에 동전은 복지시성 '순천인애원' 돕기 기금으로 쓰여진다고 기왓장에 쓰여있다.

송광사 지장전(地藏殿)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건물로  지장보살과 유명계의 시왕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송광사 지장전 옆 모습

송광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02호)

약사전은 송광사 경내(境內)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법당으로 내부에는 중생들의 모든 질병을 고쳐주는

부처님인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건물의 형태로 보아 조선중기인 17세기 무렵 건립(建立)한 건물로 추정된다.

송광사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303호)

이 건물은 영취산에 거주하며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며

후불탱인 영산회상의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대회탱(靈山大會幀)과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八相幀)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朝鮮) 인조(仁祖) 17년(1639)에 창건되었다.

약사전과 영산전의 뒷모습

송광사 대웅전과 승보전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송광사 종고루

송광사 성보박물관

성보박물관 앞 불교문화재가 새겨진 비석

송광사 무념문(無念門)

송광사 성적문(惺寂門)

 

송광사는 조계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사찰 주변으로는

조계산의 최고봉인 연산봉을 비롯한 여러 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다.

사찰은 동쪽의 조계산 줄기를 뒤에 두고 서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송광사 관음전(觀音殿)

대웅전을 정면으로 왼쪽에 위치한 승보전 앞에 관음전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고색의 단청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이 전각에 관한 기록은 「송광사지(松廣寺誌)」에 나와 있다. 즉 고종황제의 51세 생일을 맞아 황실과

국가의 안녕.평안을 기원하기 위한 원당의 필요성을 기로소(耆老所)에서 제기하면서 건립이 추진된 것이다.

또한 건립이 추진되기까지는 대한제국 황실의 통치권 약화와 국가의 어려운 재정 사정으로 인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1904년 전패를 봉안한 다음부터 1908년까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조례의식이 거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수전은 1957년 송광사 경내의 옛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황실의 위폐를 봉안하였던

성수전에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옮겨 봉안하게 되어 관음전으로 바뀌었다.

성수전이었던 관음전 외벽과 내벽에는 벽화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외벽은 훼손이 심하여 형태의 일부만이

확인되는  화훼와 화조벽화, 괴석 파초, 소나무, 매화, 모란, 석류나무, 청둥오리, 백로 등이 그려져있고, 

내벽에는 중앙감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위폐를 향해 공손히 몸을 숙이고 있는 14명의 신하가 그려져 있다.

송광사 응향각(凝香閣)

불전이나 법당을 관리하는 소임을 지전(持殿) 혹은 노전(爐殿)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거쳐하는 곳을 응향각 혹은 향로전이라 한다.

송광사 불이문(不二門)

불이문은 큰 사찰에서 일주문과 사천왕문  다음에 있는 문으로 수미산의 정상에 오르면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도리천 위에 불이의 경지를 상징한다.

불이문은 중생이 극락에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진여문(眞如門) 설법전(說法殿)

대웅전의 뒤쪽에는 대상(臺上)의 건물들로 설법전·수선사(修禪寺) 등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 설법전이나 선방 등이 있는 예는 요즘의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가람배치이다.

대웅전 뒤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설법전에 이른다.

설법전은 본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두던 곳으로, 1899년 봄, 조정에서 인출한 해인사의

대장경 4부 가운데 1부를 봉안하였으나 1951년 화재 때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4월 30일에 재건되어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선사는 최초에 조계총림의 방장(方丈)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祖師堂)으로 이용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여름에 착공하여

1969년에 낙성된 정면 6칸·측면 4칸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커다란 둥근 거울만 있다.

이 건물은 수행하는 선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외국인 승려 여러 명이 함께

정진하고 있고, 일체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분위기가 차분한 선실이다.

송광사 불일문(佛日門)

대웅보전 위에 있는 불일문 안에는 목우현(영월루)과 국사전(國師殿, 국보 제56호)이 자리하고 있다

국사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인 주심포계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 향우편 서향으로 세워졌는데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하여 진각, 청진, 진명, 원오, 원감, 자정, 자각, 담당, 혜감,

자원, 혜각, 각진, 정혜, 흥진, 고봉, 등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한 국사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의 정신이 집결된 곳으로 현재 출입을 금하고 있다 

 

 

 

물을 담아 두는 큰 석조

 

 

 

 

 

송광사 자제원(慈濟院) 

송광사 종무소

송광사 무무문(無無門)

자제원 위쪽으로 무무문과 효봉대종사 사리탑, 효봉영각이 자리하고 있다.

 

 

효봉대종사 사리탑(曉) 

전불심인부종수교조계사조종정효봉당학눌대종사

(傳佛心印扶宗樹敎曺溪嗣祖宗正曉峰堂學訥大宗師) 사리비 

송광사 효봉영각(曉峰影閣)

효봉스님은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석리 금성동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스님은 스물여섯에 졸업한 후

서른여섯살까지 10년간 서울과 함흥 등지의 지방법원으로, 평양의 고등법원에서 법관으로 계셨다.

1923년 최초로 내린 사형선고를  고뇌하다  1925년 금강산 신계사 석두스님에게 삭발을 하였다.

1932년 4월 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설악산의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등

선원에서 정진하다가 송광사에 이르러 삼일암에서 조실로 10년을 머무시면서 수많은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효봉스님의 제자로 구산스님, 법정스님이 계신다. 

스님들의 수행공간 

 

송광사 산내암자 부도암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암자 입구에 29기의 부도와 5기의 비석으로 이루어진 부도군이 있어 부도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송광사 해우소 

 

 

감로탑비(佛日普照國師甘露塔碑)와 감로탑(甘露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자료 제256호)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제1세인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1158~1210)의  부도탑이다.

정혜결사를 일으킨 주인공으로 당시 고려후기의불교계에 새로운 정신개혁 운동을 전개한

선봉자로서 한시대의 부패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고자 했던 종교지도자였다.

보조국사는 1210년(희종6) 열반하였으며 고려 희종이 '불일 보조국사'란 시호와

'감로탑'이란 탑호를 내렸고 3년 후인 1213년(강종 2년) 음력 4월 10일에 세워졌다.

독특한 형태와 고려 고승의 부도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부도는 송광사 관음전 뒤쪽 구릉에 자리잡고 있으며 팔각원당형의 기본 구도를 따랐는데

탑의 전체 높이는 286cm이다. 부도 옆의 비의 내용에 따르면 이 탑은  고려시대인

1210년(희종 6)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높은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형성하고 복련이 장식된

하대석 위에 높은 대석을 놓고 그 위에 구형의 탑신석을 안치하였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높은 받침이 있으며 추녀는 경사가 급한 반면 낙수면은 평평하다.

상륜부는 보륜 위에  큼직한 보주를 장식하였는데 보주 하단에는 앙련을 돌려 화사하다.

송광사 삼일암(三日庵)

건물의 뒤쪽편에 삼일암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앞쪽에는 상사당(上舍堂), 하사당(下舍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상사당과 하사당(보물 제263호) 현판의 중간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세계일화 조종육엽(世界一花 祖宗六葉)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삼일암(三日庵)은 16국사 중 제9대조사인 담당(湛堂)국사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만에 오도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송광사 침계루 

송광사 임경당 

침계루와 임경당 앞으로 흐르는 계곡물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는 징검다리 

 송광사 산내 암자로는 광원암, 천자암, 감로암, 부도암, 불일암, 판와암, 오도암이 있다고 한다.

산내 암자 법정스님이 주석하셨던  불일암을 가려고 물어 보았더니 올라가는데만

40분 ~ 1시간이 소요된다고 해서 포기하고 송광사에서 나가는 길이다.

청량각 안쪽에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잠시 앉아서 계곡의 물소리를 들었다.

송광사를 돌아보려면 넉넉하게 시간을 가지고 암자까지 모두 돌아보아야

송광사의 모든 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것 같다.

수려한 조계산의 경관과 명찰을 찾아 송광사에서 선암사에 이르면

선암매(仙巖梅)라 불리는 고매(古梅)의 자태가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하며,

해마다  등산로에는 가을단풍과 겨울의 설화를 보려고  많은 등산객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

송광사 지역의 별미는 산채이며, 곡우를 전후하여 마시는 고로쇠 약수도 유명하다.

 

가져온 곳 : 

블로그 >A Bird Of Parad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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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극락조|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