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0년 10월 02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
☞ 산행거리: 8.5km+들머리 1.2km+날머리1.7km / 4시간 2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59번 국도-수로갈림길-처사경주이공 묘-고개-95.2m봉-사갑고개-무명봉-안부
유인전주이씨 묘-임도-무명봉-198.1m봉-안부-공터-풍산류공 묘-무명봉
109.9m봉-무명봉-안부-166m봉-125m봉-우무실고개-수암선생 유허비-95m봉
안부-양처사굴-무명봉-위천/낙동강 합수점-두암처사양공유허비-수암종택
☞ 소 재 지: 경북 의성군 다인면 / 상주시 중동면
코로난가 지랄인가하는 역병 때문에 모든 일상이 다 바뀌어 버렸다
추석명절 연휴이지만 친.인척 찿아 뵙는것도 어렵고, 조상님 제사 풍경마져도 바꿔고
참으로 답답하다...올 추석에는 절에서 부모님 위패만 모셔놓고 제사는 참석도 못했다
가고싶은 맘이 굴뚝같지만...아버지는 위험하니 올해만 참아달라는 아들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 포기한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고
했는데 내가 요즘 그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어디 갈데도 없고하여 지난주 일요일 위천(보현)지맥을 하면서 남은 거리가 무박으로
하면 한번에 끝낼 수 있지만 당일 산행으로는 현재 내 체력으로는 무리였던 곳이다
무박으로 가면 한번에 충분히 끝낼수 있는 곳이지만, 그곳(다인)에 가서 교통과 잠자리와
그리고, 식사가 문제이다...경북 의성에 있는 다인(多仁)이란 곳은 오지라 모든게 불편하다
다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난구간에 하룻만 묵었던 안계로 가면 모든게 해결되지만
무박 자체가 싫어서 가는데까지 가보고 남은구간은 내려와서 땜방하기로 했던 곳이다
지난 일요일(9월 27일) 산행을 하고 남은 10여km정도를 오늘 마무리하기로 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동서울 터미널로 가서 07시 20분 다인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다인행 버스표
06시 30분에 버스표를 구입한 다음에 터미널 안에있는 빵집에서 점심에 먹을 토스트
하나를 구입하고 밖으로 나와 포장마차에서 잔치국수 한그릇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07시 20분에 출발하는 다인행 버스에 오르니 40인승 버스에 오늘은 손님이 5명이다
이 버스는 중부내륙고속도를 타고 가다가 충주에서 빠져나와 건국대 충주캠프스를
경유하여 3번 국도를 따라서 문경, 함창을 들린 다음에 28번 국도를 따라서 예천군
풍양을 거쳐 의성군 다인을 거쳐 안계면까지 가는 버스이다
그런데 오늘 버스는 건대에서 내리는 손님이 없는지 그냥 중부고속도를 내달려 괴산군
연풍I.C를 빠져나와 문경에서 2명이 내리고 함창과 풍양에도 내릴 손님이 없는지 그냥
통과한 다음에 다인에서 나혼자 내리고 나머지 2명을 태우고 종착지인 안계로 향한다
다인에서 나를 내려주고 안계로 향하는 버스
예전에는 동서울에서 이곳으로 오는 버스가 여러대가 있었는데 코로나의 영향인지
승객 감소로 인한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하루 2대밖에 안 다닌다
동서울에서 다인으로 오는 버스는 07:20, 14:20이고 다인에서 동서울로 가는 버스는 09:50,
18:40 2대뿐이라 상당히 불편하다
다인버스 정류장(10:00)
충주건대캠프스를 안들린 탓인지 며칠전에 비해 15분정도 일찍 도착하였다
자판기에서 커피한잔을 빼서 마시고는 산행 준비를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10:10)
다인정류장에서 그리 멀지않은 들머리를 가기위해 도로를 따라서 걸어간다
서릉삼거리가 나오고 낙단보 방향으로 향한다
마루금 가는 길에서 만난 의성군 다인면 서릉리(西陵里)의 모습
신라 시대에는 상주군 다인현이었다가 고려 시대에는 밀성군 다인현에 속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예천군 다인현에 속하였으며, 1906년에는 비안군 현남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서리동·원동·도구동·금릉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서릉동이라 하여
의성군 다인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군 조례 제1225호에 의거하여 서릉리로 개칭되었으며
다인면소재지가 있는 곳이다
서리동·원동·도구동·금릉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서리와 금릉의 이름을 따서 서릉동이라 하였다.
또한 서쪽에 언덕이 있다는 뜻에서 서릉리라고 하였다고도 하며, 깊으내는 짚으내, 심천(深川)이라고도
하는데, 약 450년 전에 이 마을을 개척하였을 때 마을이 비교적 지대가 낮고 마을 아래쪽에 우거진
갈대숲이 있었으며 항상 깊은 내가 흘러서 붙여진 이름이다.
녕마미(寗馬尾)는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말의 뒷부분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저 앞에 보이는 전봇대가 있는 곳이 산행을 시작할 마루금 들머리이다
마루금에 복귀하여 좌측의 비포장 농로 방향으로 향한다(10:21)
농로에서 바라본 의성군 다인면 덕지리 살구제 마을의 모습
살구제는 마을 뒷산 고개에 살구나무가 많아서 생긴 지명이다
좌측으로는 다인면 소재지가 있는 서릉리이다
농로 좌측으로는 남원양씨가족묘원 표시석이 보인다
농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수로 갈림길(10:25)
수로 아래를 지난 다음에...
시멘트 도로 끄트머리에서 좌측의 논길로 향한다
갑자기 맥길이 막혀 버린다
잡목을 헤치고 나가니...
후손들이 깔끔하게 벌초를 해논 묘지들이 보인다
묘지 좌측으로 넘어서니 과수원이 나온다
과수원 끄트머리에서 수로가 지나가는데 경고판이 보인다
좌측 북쪽으로는 독점산과 비봉산이 보인다
묘지 너머로는 문암산 능선에서 독점산이 아련하게 보인다
밭을 지나고...
논두렁 가운데를 지나간다
갑자기 등로가 막혀 버린다
내 키보다 더 큰 목초지를 지나간다
갑자기 길을 잊어 버린다
잃어버린 등로를 이리저리 헤맨다
처사경주이공 묘(10:35)
묘지 아래로 내려서니 가시넝쿨이 산꾼 범여를 포위해 버린다
바닥은 습지인지 물구덩이에 등산화가 빠져버려 한참을 버벅거린다
겨우 빠져 나오니 논이 보인다
논두렁으로 걸어가며 가야할 95.2m봉 바라보면서 걷는다
논두렁을 지나 시멘트 농로로 올라선다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고...
민가를 지나니 포장도로가 나오고 우측으로 향한다
고개(10:50)
앞에 보이는 농가주택의 도로명 주소가 ‘산내길 44’이다
이곳에서 의성군 다인면 산내리에서 상주시 중동면 금당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에서 맥길은 좌측으로 올라간다
등로 우측에는 물이 말라버린 水路가 보인다
가축 사료로 쓸려고 심어 놓은 수수밭을 지나고...
좌측으로 올라서니 묵밭에 단감이 보이고 임자가 없는듯하여 간식으로 먹을
단감 5개를 실례(?)한다
능선에 올라 우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95.2m봉(10:55)
준.희선생의 산패에는 95.3m봉으로 적혀있다
95.2m봉 정상 삼각점(△안계412)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직진한다
등로 좌측 아래는 최근 조성한듯한 묘지가 보이고...
등로는 나무가 뽑히고 길은 많이 망가져 있다
넓은 임도를 걷는데 우측 아래는 잘 조성된 묘지가 보인다
묘지 위에서 바라본 의성군 다인면 산내리(山內里)의 모습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동과 신촌동 일부를 병합하여 산내동이라 하였다.
내동(內洞)은 조선시대 1609년 황의중(黃義中)이라는 선비가 개척하였는데, 양지바르고
아늑한 산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동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음달(陰達)은 불당 남동쪽에 있는 산밑 음지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햇빛이 오후가 되어야만
들므로 음달이라 부르게 되었고 새터는 밀양 박씨와 안동 김씨가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새터라 부르게 되었으며 사갑(巳甲)은 마을 뒷산 기슭이 뱀이 누워있는 형태라 하여 사갑이라 부르게 되었다.
용승골은 마을 중턱의 큰 골짜기가 용이 승천하는 형상과 같아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뱀골은 용승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냇가 옆이라 뱀이 많이 있었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망가진 함석집도 보이고...
등로는 고속도로 수준이다
가을은 벌써 우리곁에 다가와버렸다
사갑고개(巳甲峙:11:10)
의성군 다인면 산내리 사갑마을에서 용산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수로가 지나가고
좌측 용산마을쪽은 축산농가들이 많이 보이고, 수로 우측으로는 사갑지(巳甲池)가 있다
사갑마을 위쪽에 있는 고개라 붙혀진 이름으로, 사갑(巳甲)마을은 마을 뒷산 기슭이
뱀이 누워있는 형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개를 가로질러 직진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수로가 나오고 모터가 설치되어 있는 곳에서 우측의 농로로 맥길을 이어간다
좌측의 논을 바라보면서 밭으로 올라간다
묵밭을 지나...
능선을 올라선 다음에 우측으로 향한다
반가운 선답자의 흔적을 만난다
무명봉(11:15)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안부(11:17)
농로 삼거리가 나오고 직진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농로삼거리에서 바라본 의성군 다인면 용무리(龍武里) 용신골의 모습
용무리는 용산의 용(龍)자와 무릉의 무(武)자를 합하여 용무리가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용산(龍山)과 무릉(武陵)이 있는데 용산은 약 550년 전 이정시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할 때, 마을 뒷산이 용같이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무릉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난을 진압하기 위해 두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특히 봄철에 복숭아 꽃이 산야에 만발해 무릉도원을 연상시킨다 하여 무릉이란 이름을 지었다.
용무리에는 먼 옛날 서울로 과거 길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던 여인이 10년을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기다림 지쳐 그녀의 한을 높고 높은 벼랑에서 깊은 위천에 투신하여 잊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농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농로 삼거리에서 시멘트로 포장된 직진길로 올라간다
농로삼거리 좌측에는 잘 관리된 묘지들이 보인다
갈림길에서 오토바이가 있는 쪽으로 향한다
들깨밭이 나오고 앞에 보이는 봉우리로 가야한다
맥길은 고추밭 그물망이 길을 막는다
물 한모금 마시려고 베낭을 내려다가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점심시간(11:23~35)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고추밭 그물망을 통과하여 잡풀지대로 올라간다
들깨밭이 나오고 멋진 소나무 한그루를 만난다
묘지가 나오고...
구절초가 외로운 산꾼을 응원하는 듯...
유인전주이씨 묘(11:41)
묘지 상석이 특이하다.
대체적으로 남자분이 앞쪽에 있는데 이 상석은 여자분이 앞에있다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에 올라서니 우측에서 올라오는 넓은 임도가 나오고 임도 가운데는
가선대부를 지내신 경주이공 묘지가 있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향한다
직진을 하니 또다른 묘지가 나오고...
드넓은 묵밭이 나온다
직진을 하니 넓은 습지(濕地)가 나온다
습지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양의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수생식물이 자라며
비가 많이 오면 습지가 물을 천천히 흐르도록 하여 물이 급격하게 불어나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에
홍수가 나지 않게 하며, 반대로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 때에는 습지에 있는 물을 동물과 식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해 주며, 오염된 물을 걸러 내어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도 한다
습지에 있는 물풀이나 미생물, 흙 등에 의하여 오염 물질이 걸러지고, 특히 부들, 갈대 등은
물을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좋다고 한다.
습지에서 둔덕으로 올라서니...
또 다른 습지가 나온다
다시 둔덕을 따라서 올라선다
3번째 습지로 올라간 다음에 둔덕에 올라서니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11:50)
임도로 올라서니 키가 엄청나게 큰 아카시아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능선에 올라서니 뚜렸한 등로가 나오고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습지를 통과한 범여의 몰골 좀 보소
넓은 공터가 나오고 좌측으로 올라간다
송백의 황대장님 흔적인가?
무명봉(11:58)
안부를 지나 살짝 우측으로 꺽어진다
완만한 능선으로 오른 다음에...
우측으로 향한다
198.1m봉(12:05)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198.1m봉 삼각점(△안계303)
198.1m봉에서 맥길을 이어가기가 난해하다...등로가 전혀없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서남쪽으로 내려간다
급경사로 내려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암릉구간으로 내려간다
등로를 잘 보이지 않고...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안부(12:13)
이곳부터 등로가 아주 지저분하다
잠시 등로는 뚜렸하다
아카시아숲 터널을 지나는데 몸뚱아리가 엄청나게 수난을 당한다
힘들게 아카시아숲을 빠져 나간다
좌측으로 빠져 나오니 임도가 나오는데 이곳 역시 자리공을 비롯한 잡목의 저항이 만만찮다
힘들게 임도를 빠져 나오니...
좌측으로 넓은 공터가 보인다
묵은 그리움이 나를 흔든다
망망하게 허둥대던
세월이 다가선다
적막에 길들으니
안 보이던 내가 보이고
마음까지도 가릴 수 있는
무상이 나부낀다
김초혜님의 詩 “가을의 시”
공터(12:21)
이곳부터는 오랫동안 위천(보현)지맥을 같이해 온 의성군과 작별하고 상주시로 접어든다
공터를 지나니 잡풀이 가득한 임도가 나온다
임도에서 우측으로 올라간다
처사풍산류공동식지묘(12:22)
묘지 뒷쪽으로 올라서니...
망개덩쿨이 산꾼을 괴롭힌다
무명봉(12:24)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안부를 지나고...
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109.9m봉(12:36)
우측으로 향한다
무명봉(12:38)
살짝 좌측으로 꺽어진다
이곳 역시 잡목의 저항이 만만찮다
이노무 쉬키들
안부(12:42)
오르막에서 또 다시 잡목의 강한 태클에 직면한다
등로 좌측으로는 벌목지가 보인다
벌목지 너머로 위천(渭川)이 보이기 시작한다
위천은 경상북도 군위군 동쪽에서 발원하여 군위군 중심부를 북류하여 의성군을 지나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팔공기맥 726m봉 아래인 군위군 고로면(古老面) 낙전리·학암리 일대의 동부 산지에서
발원한 지방2급하천은 의흥면(義興面)· 효령면(孝令面)· 군위읍을 거쳐 북서류한다.
효령면 병수동(竝水洞)에서 남천(南川)과 합류한 후 군위읍 중앙을 북류하며, 소보면(召保面)에서
곡정천(谷亭川)과 합쳐지고, 의성군 비안면(比安面) 쌍계천(雙溪川)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지방1급하천이
되고 상주시 중동면(中東面)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잡목을 헤치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등로는 상당히 지저분하다
166m봉(12:52)
166m봉에서 직진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등로가 아예없는 좌측으로 90도 꺽어져야
하는데 독도에 상당히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급경사의 등로가 없는 곳으로 내려가니 선답자들의 흔적이 보인다
묵묘가 나오고...
등로가 아주 난해하다...다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바위지대를 내려서니...
가느다란 소나무숲 사이로 맥길을 이어간다
뫳돼지 사우나도 만나고...
등로가 아주 희미하다
참! 곱다
안부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이곳 능선에는 이런 굴들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뭣에쓰는 용도인고?
고인돌처럼 보이는 곳을 올라선다
125m봉(13:08)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지고...
다시 우측으로 내려가니...
시멘트 도로가 보이고,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다가...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향한다
굵은 밤알이 많이 떨어져 있다...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는거 봤어...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열심히 밤을 줍는다...오늘 산행하면서 2됫박은 줏은듯 하다
묘지 뒷쪽에서 묘지로 내려간다
강사유시완선생 추모비 아래로 내려선다
우무실 고개(13:25)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우무실 마을 위에 있는 고개에 있는 삼거리로 우측으로는
조선조 선조때 명재상 류성룡의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선생의 종택이 있다.
우무실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남원양씨가 들어와서 처음으로 정착을 하였고 그 후에
풍산류씨가 들어왔으며 처음의 마을이름을 우천(宇川)이라 하여 작은마, 큰마로 나뉘어졌고
안에는 안골이 있고, 서북쪽에는 마곡, 작은마, 북쪽에는 범갈미가 있으며 물뎅이에는 작은
나루가 있어 물량과 내왕하고 샘디와 재궁에도 나루가 있어 강 건너와 통하고 있다
우무실 마을에는 조선시대 말기 고종때 대원군에 발탁되어 좌의정까지 지냈던
낙파(落波)류우조(柳厚祚)가 낙향하여 살았던 마을이다
셀카놀이
좌측으로는 우무실마을과 의성군 다인면으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가 지나간다
우무실 고개의 모습
수암종택과 내고향 우물1리 마을 표시석 뒷쪽으로 올라간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선답자들의 흔적들이 보인다
능선에서 내려서니 수암선생 유허비가 나온다
수암선생유허비(修巖先生遺墟碑:13:28)
수암 유진(柳袗: 1582년[선조 15] ~ 1635년[인조 13]) 선생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으로, 영의정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 해서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 무고를 당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616년에 유일(遺逸: 조선시대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 洗馬: 정9품)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이 되었다.
수령으로 있으면서 전묘(田畝)와 부세(賦稅)를 바로 잡았다. 이듬해 형조정랑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원옥(寃獄)을 해결하여 판서 이서(李曙)의 경탄을 샀다.
1627년에 청도군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수포장인(收布匠人)에 대한 보고에 허위가 있다 하여
파직당하였다가 1634년 재 등용되어 지평으로 있었다.
고관대작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세신(世臣)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생애를 보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안동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수암집』과 임진록, 임사록이 전한다.
임진록은 임진왜란 때인 선생의 나이 11세 때, 4월부터 11월까지 서울을 떠나 경기도 동부와
강원도 영동지역으로 피난길 때의 체험을 기록한 국문으로 쓰여진 수필문학이고,
임자록은 1612년 김직재옥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을 때 쓴 기록이다.
귀부이수(龜趺螭首)를 갖춘 수암선생 유허비의 모습
유허비 아래로는 멋진 소나무숲이 보이고...
그 아래 수암종택이 보이는데 합수점에 갔다가 들려볼 계획이다
소나무숲 좌측으로 향한다
묵밭을 지나고...
수암종택에서 올라오는 농로를 만나 합수점으로 향한다
농로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황금들녘 너머로 위천이 보이기 시작하고 팔공기맥 끄트머리(합수점)가 보인다
등로에서 바라본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의 모습
우물리(于勿里)는 위천변에 자리한 마을이므로 우물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우무실, 가사리, 말골,
벙갈미, 유정마을 등이 있다. 우무실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우물리의 그것과 같다.
가사리마을은 낙동강 가가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말골마을은 조선시대에 말을 길렀던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며, 벙갈미마을은 범이 숨어있던 곳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유정마을은 버드나무
샘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농로를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뭘 하려는지는 몰라도 멀쩡한 밤나무를 베어서 마구 늘어놓아 걷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95m봉(12:37)
마구 버려진 간벌목으로 인해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체된다
벌목지를 지나 능선 아래로 내려간다
좌측의 나뭇가지 사이로 위천이 보이기 시작한다
'위천((渭川)'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상류 유역을 '남천'으로, 중상류를 '병천'으로 기록하고
통용하였으며, 병천의 하류 부근에 한해 '위천'으로 불렀다. 이후 '위천'이라는 하류의 유역명이
상류로 확대되어 통칭되어 왔다. 우선 '병천'이라는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군위)에
"병천(幷川)은 현 남쪽 11리에 있다. 의흥현의 남천 및 부계현의 남천이 합쳐서 하나의 개울이
된 것이므로 붙은 이름이다. 현 서쪽을 지나 북쪽으로 가서 비안현의 남천이 된다."라는 기록으로
'병천'이 처음 등장한다. 유사한 기록이 『여지도서』(군위)에 나타나며, 같은 문헌의 교량조에는
'병천교(幷川橋)'라는 다리 이름도 확인된다. 이후 표기자의 변화 없이 『해동지도』(군위)와
『대동여지도』에 '병천(幷川)'이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의 상주목 단밀현 부근에 '위수(渭水)'가 표기되어 있어 병천의 하류 부근 명칭으로
'위수'와 '위천'이 등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72년지방지도』(군위)의 군위 읍내 남쪽 부근의
하천에 '병천교(屛川橋)'가 표기되어 있어 다리 명칭과 함께 '병(幷)'이 '병(屛)'으로 표기자가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조선지지자료』(군위)에도 병천(屛川)이 중리면 관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문헌의 의흥군 하리면 천계명(溪川名)에 금(錦)과 한글로 '금기'가 병기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병천의
이칭인 '금계'와 그 고유지명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지지자료』(의성)의 기록을 통해 의성군을 흐르는 병천 하류의 유역명으로 '위수'와 '위천',
'위수강', '위수천' 등 다양한 이칭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위천의 중류 유역에는
『한국지명총람』에 "병수동(水洞) : 위천(渭川)과 남천(南川)이 마을 앞에 흐르므로 병수동이라 하며"라는
기록이 있어 '병천'에서 파생된 촌락 지명으로서의 '병수동'을 확인할 수 있다.
능선 아래로 내려와...
우측의 낙동강변을 바라보니 파란 기와지붕인 첨모각(瞻慕閣)이 보인다
안부(13:44)
첨모각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합류되어 합수점으로 향한다
아카시아 나무 군락지가 나오고 뾰족한 봉우리를 우회하며 오른다
양처사굴?(梁處士窟:13:46)
지도상에는 양처사굴이라 표기가 되어있어 가보니 굴은 보이지 않는다
작고하신 조은산님의 산행기를 보니...
지형도에 표기가 ‘양처사굴’로 되어 있는데, 첨모각(瞻慕閣) 앞에 있는 글을 자세히 읽어보니,
양처사굴은 비봉산 모처에 있는 굴이라 했다.
飛鳳山에서 수십리 남쪽으로 달리니 二水三山이 조화한다. 비봉산 봉황산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나각산과 마주보며 천길 기암절벽은 굽이쳐 흐르는 洛渭合江에 떠 있으니 그 천작절경은 오남국에서
보기드문 명승지라. 비봉산 가파른 천장절벽 속에 비조가 아니고는 찾지 못할 석굴이 있으니
이 굴을 세인은 梁處士窟이라 부른다. 그 옛날 임진왜란 때 오조처사 부군께서 병화로 집도 잃고
가족과도 흩어져서 홀홀단신 도성을 빠져나와 유유적적 하신 끝에 이 굴에서 병화난팔년을 피하신
유적지이다....
출처: https://hansemm.tistory.com/496?category=451914 [조은산]
이곳도 벌목을 해놨으나 다행히 등로는 터져있어 조금 편하게 걷는다
무명봉(13:49)
위천(보현)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무명봉을 내려서니 우측으로 낙동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합수점으로 향한다
위천이 낙동강에 입수하는 합수점 너머로는 당진~영덕간을 잇는 상주 낙동강교가
보이고 우측에 솟아있는 산은 소라의 뿔처럼 생겼다는 나각산(螺角山:240.2m)이다
상주시 낙동면 구잠리에 있는 나각산(螺角山:240.2m)은 낙동강의 본 고장이다
강원도 태백시 황지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수천 산자락을 굽돌고 수만가닥의 하천과
내를 아우러며 낙양(落陽)의 동쪽 즉, 상주에 와서 비로소 강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하여
낙동강(落東江)이라고 한다
낙양(落陽)은 상주의 옛 지명이며 낙동강은 그 동쪽에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며
낙동(落東)이란 지명은 낙동강 1,300리에서 유일하게 낙동이란 지명을 가지고 있다
국토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나각산은 소라형국의 풍요와 富를 상징하는 산으로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백두대간의 속리산과 일월산, 팔공산의 정기가 모이고, 낙동강과
낙동강과 위강(천)의 강 기운이 어우러진 삼산이수(三山二水)로써 예로부터 큰 도시가
들어설 명당터라고 한다
특히 이 산에 3번을 오르면 뜻을 이루고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산의 정기와 강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마귀할멈굴에서 소원을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영험하고 아름다운 상주의
상주의 명산이라고 한다
내리막 능선으로 내려와 위천이 낙동강에 입수하는 합수점에 도달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위천(좌)과 낙동강(우)이 만나는 강 건너에는 2012년 8월 9일에 걸었던 팔공기맥 마지막 능선이 보인다
위천쪽의 북쪽 능선이 팔공기맥 합수점이다
위천/낙동강 합수점(13:55)
백두대간의 매봉산(태백)에서 시작한 낙동정맥은 주왕산,통점재를 지나 가사령에 내려서기 전
1.1km 지점에서 서쪽으로 큰 산줄기 하나를 가지치고 가사령에서 석심산까지 39.4km를 같이 오다가
석심산에서 갈라진 두 산줄기는 위천을 남과 북으로 애워싸고 서로 마주보고 달리다가 다시 위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위천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며 만나게 되는데 위천의
북쪽 울타리가 위천(보현)지맥(普賢枝脈) 이고, 거리는 127.4km이고 위천의 남쪽 울타리가
금호(팔공)기맥(八公岐脈)인데 거리는 120.7km인데 오늘 2군데를 마무리 지으면서 스틱을 접는다
낚시꾼들의 보트
인증샷
위천(보현)지맥을 마무리하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
2018년 4월 15일 노귀재에서 시작한 첫 구간을 걷다가 갑자기 몸에 이상신호가 와서
병원에서 검사를 받던중에 폐암초기라는 靑天霹靂같은 소리에 놀라 수술대에 올랐고
한동안 心的인 방황도 했다...그리고 좌측의 폐를 완전히 절개하여 다시는 산길을 걷지
못하는가 했는데 산행 속도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늘 감사할 따름이다
아쉬운 마음에 또한번 합수점을 뒤돌아 보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합수점에서 올라가는 길 우측에는 묘지가 있고 그 아래있는 밤나무에는
밤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잠시동안 밤을 줏느라 정신이 없다
이곳에서도 씨알이 굵은밤만 두됫박정도는 줏은듯 하다
되돌아 가는길의 낙동강변의 시원한 바람은 한없이 고맙기만 하다
낙동강 너머로 보이는 상주시 낙동면 물량리(物良里)의 모습
물량리(物良里)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농촌마을로
낙동강이 흐르며 낙동강 안쪽이 되므로 물안골이라 하다가 변하여 물량리가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물안골, 주막걸, 대밭골, 장구바웃골, 아름마마을 등이 있는데 물안골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물량리의 그것과 같다. 주막걸마을은 전에 주먹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대밭골마을은 대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장구바웃골마을은 장구모양의 바위가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아름마마을은 물안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우무실 고개로 되돌아가는 길에서 바라본 토진(兎津)나루의 모습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신암리 토진에서 낙동면 물량리 주막걸로 넘어가는 옛나루터로
후포진의 상류에 있으며 예천, 안동으로 가는 통로였으며 이전에는 이곳의 하류에서
소금을 싣고 올라와 농산물과 교환하는 오일장이 열렸지만 1990년 이후 폐쇄되었다.
부산에서 올라 온 소금배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왜관 돌밭(석전)나루를 거쳐 중동면 우물리
토진나루를 거쳐 예천 삼강나루까지 올라간다.
토진나루는 조선시대 3대 나루의 하나인 낙동나루와 붙어 있다.
낙동나루가 있던 상주군 중동면과 의성군 단밀면 사이에는 지금 낙단교가 놓여있다
상주가 삼백(삼백)의 고장, 즉 희 누에고치 흰쌀, 희 곳감으로 유명했던 점을 감안하면
소금을 싣고 온 배는 내륙 물산의 집결지인 낙동나루와 토진나루에서 소금을 부려놓고
쌀과 비단을 실어 다시 남녘땅으로 내려갔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이란 명칭도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벌목지를 지나고...
양처사굴 표지가 있는 봉우리를 지난다
우측의 지맥길이 아닌 좌측의 뚜렸한 길로 내려간다
잣나무 조림지를 지나고...
들깨밭을 가로질러 나오니 파란지붕의 첨모각이 보인다
두암처사양공유허비(杜庵處士梁公遺墟碑:14:30)
아마도 조금전에 지나온 양처사굴과 관련이 있는 듯 싶다
첨모각(瞻慕閣) 현판
수암종택으로 향한다
상주보 가는 길
수암종택(修巖宗宅:14:35)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 있는 풍산유씨 우천파(遇川派)의 종택으로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풍산유씨 후손 유영하가 소유, 관리한다.
1700년대 중기에 건축하였는데 이강정사(二江精舍) 또는 우천세가(遇川世家)라고도 한다.
전체적으로 ‘ㅁ’자형 몸채와 ‘ㄴ’자형 녹사청(祿使廳), ‘一’자형 사당채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몸채)은 정면 6칸, 측면 6칸의 합각지붕 건물인데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ㅁ’자형의 정면 6칸 규모로 안마당으로 드나드는 중간칸과 사랑방 부엌은 통칸으로 되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에 이르는데 정면 4칸 중 왼쪽 2칸은 툇마루와 그 뒤쪽에 안방이 차지했고
오른쪽 2칸은 안대청이 자리잡았다.
안방 왼쪽의 부엌은 마당 쪽으로 길게 3칸으로 만들었고 그 앞에 마루를 깔아 놓은고방과 흙바닥
고방을 한 칸씩 만들어 앞채인 중간칸에 닿게 했다. 고방 지하에는 광을 만들어 계단을 통해
부엌으로 드나들게 했다. 안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대청 오른쪽에는 마루방과 상방을 각 1칸씩
배치하였는데 마루방은 바닥을 45㎝ 가량 들어올려 누마루같이 만들었다.
녹사청은 7칸이며 ‘ㄴ’자 모양 정면 4칸, 측면 4칸의 우진각지붕 집이다.
‘ㄴ’자로 꺾어지는 부분에 설치된 부엌 1칸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방 1칸, 마루방 2칸을 배치했고,
동쪽에는 온돌방 2칸과 마루방 1칸을 꾸몄으며 ‘ㄴ’자의 안쪽으로 쪽마루를 돌려서 다른 방들과 연결되게 했다.
이 녹사청은 주인의 비서가 기거하며 녹봉을 지고오는 지방 관리들을 영접하고 쉬어가게 하던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 건물이다
수암종택 배치도
수암종택 현관
수암(修巖)은 조선조 선조때 온건과 타협의 명재상이었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셋째 아들인 류진(柳珍)의 호(號))로 수암은 37세가 되던 1617년에 고향인 안동 하회를 떠나 이곳
상주에 정착했는데 처음 정착한 곳은 현 위치가 아닌 가사리(佳士里)였고, 수암의 고손자인
류성노(柳聖魯) 때 현 위치에 정착했다고 하며, 그 당시에는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그런 수암종택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것은 수암의 7대손인 류후조에 이르러서다
우측의 조그만 건물이 있는데 뒷간인 모양이다
수암종택의 현재 모습으로 보이게 한 수암의 7대손인 낙파(洛波) 류후조(柳厚祚:1798~1876)로
별칭으로는 낙동대감으로 불리웠으며 조선조말 고종때 대원군에 의해 좌의정에 발탁된 인물이다
류씨 집안은 남인이었는데 당시 서인에게 밀린 남인은 18세기이후 재상 반열에 오른 인물이
드물었으며 그런 남인에서 좌의정이 나왔으니 당시에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배경으로 현재의 모습인 종택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터를 잡을 때 풍수를 적극적으로 고려한 듯 하다
수암종택터는 삼산이수(三山二水)가 만나는 매화락지(梅花落地)의 명당터이다.
삼산은 태백산, 속리산, 팔공산으로 종택은 세 산의 끝자락과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는 끝자락에 위치하며 그 중에서 안채 뒷쪽의 바위는 지기(地氣)가 솟는
곳이라 하는데 바위가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어 흥미롭다.
마당에 들어서자 좌측으로 녹사청(祿使廳)이 보이는데 건물의 형태가 ㄴ자형으로 꺽이는
모서리에 부엌을 두고 그 양쪽으로 온돌방과 마루를 배열하고 쪽마루를 돌려서 모든 방이
연결되게 해두었다.
녹사청이란 집주인의 비서격인 녹사(祿使)가 기거하며 봉조하(奉朝賀)의 녹봉을 지고오는
지방관리들을 영접하고 유숙케 했던 건물로, 다른 종택에서는 볼 수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녹사청 맞은편에는 “遇川世家”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건물이 있는데 안채와 사랑채가
붙어있는 “ㅁ”형의 건물로 전형적인 영남 북부지역의 폐쇄적 가옥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겨울 바람을 막기위한 추위에 강한 가옥 구조로 뚜꺼운 벽, 작은 창문, 낮은 천정이
특징이며 경북 북부 산간 지방으로 갈수록 까치지붕집 등 더욱 폐쇄적인 구조를 보이기도 하며
상징적으로는 안사람(여자)을 가두어 두기 위한 주택구조로 표현되기도 한다.
수암종택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는데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부부가 종택을 둘러보고 있다.
이 분에게 혹시 상주로 나가는 버스시간을 좀 알 수 없느냐고 하니까. 버스 시간은 잘 모르겠고
자기들이 상주에서 왔는데 조금 있다가 갈 거라고 한다.
제가 서울로 가야 하는데 좀 태워줄 없냐고 하니까 상주터미널까지 모셔주겠단다
이게 왠 떡이여...수암종택의 안채 구경은 포기하고 재빨리 주차장으로 나왔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수암종택의 모습
수암종택을 보면서 수암의 부친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의학자, 저술가로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후에 1590년 통신사로 갔던
조목(趙穆), 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서인이 아닌 이산해와 같은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일어난
동인과 서인간의 정쟁)를 계기로 강경파인 아계,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순신으로 하여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에 4도 도제찰사, 영의정으로 어려운 조선 조정을 총 지휘하였다.
노량해전과 같은 날인,정인홍, 이이첨 등의 북인의 상소로 인해 영의정에서 관직삭탈하게 된다.
안동으로 내려가 선조의 부름에도 올라가지 않고 임진왜란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懲毖錄:국보제132호)》을 저술하였다.
징비록(懲毖錄)은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자료이다.
‘징비’는 중국 고전 『시경』에 나오는 ‘스스로를 미리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는 의미의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이라는 문장에서 따왔다. 방비를 하지 못하여 전국토가
불에 타버린 참혹했던 임진왜란의 경험을 교훈 삼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경계하자는
뜻에서 책의 제목으로 사용되었다.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던 청백리이면서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의 5대 명재상은 1, 황희, 2, 류성룡, 3, 이원익, 4, 김육, 5, 채재공이다
수암종택에서 貴人의 도움으로 상주터미널에 편안하게 도착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대합실로 들어가 서울가는 표를 예매하려하니 우리집과 가까운 경부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16시 30분이고 동서울로 가는 버스는 15시 30분인데 표를 예매하고나니 출발 30초 전이다
표를 끊자마자 승차장으로 뛰어가는데 버스는 터미널을 빠져 나가려고 후진중이다.
0알에 요령소리가 나도록 뛰어가서 차를 세운 다음에 버스에 오른다.
이 버스는 3번국도를 따라서 점촌터미널에 도착하여 손님을 싣고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올라서 서울로 향하는데 코로나의 영향인지 추석 이튿날인데도 손님이 10명내외이다
씻지도 못하고 배도 무쟈게 고프다...점촌터미널에 잠깐 세운 사이에 터미널 내 가계에서
쥬스하나와 빵을 사서 허기를 면하고 맨 뒷좌석에 앉아 수통에 남은 물로 타올에 적셔
간단하게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깊은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여주휴게소 부근이다
이곳부터 서울까지는 차량이 엄청나게 밀리는 바람에 동서울에 도착하니 4시간 가까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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