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慶州金氏-桑村公派 ♣23 상촌공에 대하여 맺는 말 이상에서 상촌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해 보았다. 그는 안향(安珦)·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등과 같이 고려말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 가문이었다. 그의 조선(祖先)으로서 3품직 이상을 역임한 인물이 없었다는 것은 이를 말해 준다. 그러나 그의 가문(家門)은 대대로 문한(文翰)을 업(業)으로 계승해 온 학자(學者)의 가문이었다. 그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의 가문에서 2남 4녀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공민왕 19년(1370)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어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이색·정몽주·박상충·이숭인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였다. 공민왕 23년(1374)에 이무방(李茂芳)과 염흥방(廉興邦)의 문하에서 과거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고, 덕녕부 주부(德寧府 主簿).. 2012. 8. 17. 상촌공의 사상 상촌선생은 고려말 성리학(性理學)의 우뚝한 학자였다. 그는 성리학의 이해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몸소 실천한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당시 그와 교유한 선·후배의 석학들도 그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였고, 또한 앞으로 유도(儒道)를 일으킬 거목(巨木)으로 평가하였다. 이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그는 조정에 나아가서는 직언(直言)으로 왕을 보필하였고, 또 편모(偏母)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상제(喪制)를 치루었다.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은 평생토록 지켜온 그의 생활철학이었다. 그가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끝까지 조선에는 사환(仕宦)하지 않았고, 태종의 부름을 거부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도 바로 이러한 학문적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의 학문은 공민왕 23년(.. 2012. 8. 16. 상촌공의 학문적 배경 상촌선생의 학문적 배경은 학문의 수학기(修學期)와 정연기(精硏期)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학문수학기는 공민왕(恭愍王) 19년(1370)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던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크게 가정 교육기와 성균관 교육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유년기에는 가정에서 부모님에게 많은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가문(家門)은 그가 출생할 때는 비록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조부(祖父) 영백(英伯)은 봉상대부(奉常大夫) 삼사부사(三司副使)였고, 부(父) 오(?)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고 있었다. 삼사(三司)의 직은 국가재정을 관할하는 관부(官府)였고, 통례문(通禮門)은 조정(朝廷)의 의례(儀禮)를 담당하던 관부(官府)였다. 또 지제고.. 2012. 8. 15. 상촌공의 생애 상촌선생(1351, 忠定王 3∼1413, 太宗 13)은 고려말의 신진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귀족가문의 출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1784년에 발간된 『경주김씨세보(慶州金氏世譜)』에서 그의 조선(祖先)은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예종(睿宗) 10년(1115)에 낭중(郎中)으로서 요(遼)에 사은사로 다녀온 김인관(金仁琯)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同) 세보(世譜)에서는 그가 조산대부(朝散大夫)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역임하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를 지냈음을 밝히고 있다. 위 세보(世譜)의 내용대로 본다면 김인관(金仁琯)이 예종 10년에 낭중(郎中)으로서 요(遼)에 사은사로 갔다면 그가 과거에 합격한 시기는 늦어도 예종 10년 이전일 것이고, 또 그가 활동한 시기도 예종을 전후한 시기가 되어야 할 것.. 2012. 8. 14. 경주 김씨와 김자수 죽음으로 지켜낸 ‘가문의 절개’ 형조판서 벼슬 받으러 가던 중 태재서 자결 … “비석 세우지 말라” 대대손손 강직 이어받아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여 뉘어놓은 신도비. 원래는 땅에 묻어두었는데 근자에 땅 위로 올리고, 새로 비석을 만들어 세워.. 2012. 8. 11.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