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慶州金氏-桑村公派 ♣23 永同金自粹遺蹟(영동 김자수 유적) 永同金自粹遺蹟(영동 김자수 유적) 충청북도 기념물 제41호 소재지 :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永同金自粹遺蹟(영동 김자수 유적)] 이곳은 고려 말에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자수와 조선 문종(1450~1452) 재위 때 강릉판관을 지낸 그의 손자 김영년이 살던 곳으로, 김영년은 사임 후 이곳에서 후학 양성을 하였다한다. 김자수는 자를 純中(순종), 호는 桑村(상촌)이며, 본관은 경주로서 경주 김씨의 중시조이다. 유적으로는 선생과 그의 후손이 대대로 살았던 先志堂(선지당)과 후손의 효자 정려각이 있다. [先志堂(선지당)] 이 집은 중종(1506~1544) 재위 때 지어 많은 인재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인데, 순조(1800~1835) 재위 때 김노경이 선지당의 당호를 친필로 현판하였고, 秋史(추사) 김정희가 '.. 2012. 8. 28. 상촌의 뿌리를 찾아서... 상촌의 뿌리를 찾아서... 상촌공파 동영상 제작팀이 처음 촬영에 들어간 곳은 경기도 고랑포에 위치한 경순왕릉(敬順王陵)이었다. 경기도 파주 적성면 두지리에 도도히 흐르는 임진강의 긴 흐름과 새소리의 효과음을 담고, 녹음이 우거진 경순왕릉비가 총알에 흠집이 난 것을 보면서 남.. 2012. 8. 25. 경주김씨 상촌공파 (桑村公派)의 역사 경주(慶州) 김씨(金氏)의 대보공(大輔公)은 김알지(金閼智)에서 시작된다. 김알지는 65년 신라 탈해왕 9년 금성(金城) 서쪽 계림(鷄林)의 나무 끝에 걸려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이를 기뻐하며 성을 “김”(金)으로 하사 했는데 이것이 경주 김씨의 시작이다. 경주 김씨는 대보공.. 2012. 8. 24. 慶州金氏 家承譜 慶州金氏 家承譜 (경주김씨 태사공파 28세 예시) 始祖 1世 金閼智. 능 계림산 子.세한 2世 勢漢 子.아도 3世 阿道 자.수유 4세 首留 자.욱보 5세 郁甫 자.구도 6세 仇道 자. 미추왕 대서지. 말구 7세 末仇 자. 내물왕 8세 柰勿王 자, 눌지왕 복호 말사흠 신라 제 17대 왕 (재위356-402) 고대국가 체제.. 2012. 8. 23. 경주김씨 상촌공파 파조 김자수 선생 묘역 및 역사 상촌공 김자수 묘소 전경 상촌공 金자수의묘(경기도 기념물 제98호,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 金자수는 대사헌을 지낸 金영유의 조부이시다. <경주김씨 상촌공파 파조 상촌 김자수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 98호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 120-1번지)-사진 2012년 6월8일 오후 .. 2012. 8. 22. 효자비와 추원재(追遠齋) 있는 곳 : 경북 안동시 안기동 산101-1 이 비는 고려말 충신인 상촌 김자수의 효행비로 정려각 안에 있다. 원래 이 효자비는 고려 공양왕 때에 이미 건립된 것으로 안동부 성 남문 밖에 세워져 있었다. 비 전면은 '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孝子高麗都觀察使金自粹之里)' 라고 썼으며, 뒷면에는 그의 행적과 효행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비각 안에는 순조 18년 김노경(金魯敬)이 글을 짓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편액이 있으며 추녀 아래는 비각 이건기가 게판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 손씨 부인이 돌아가자 그는 삼년상을 지성으로 모셔서 세상에서는 그가 여묘살이 하던 곳을 '시묘(侍墓)골'이라 불러 효행을 칭송했다 한다. 이 비와 비각은 안동댐 수몰로 안동군 월곡면 노산리에서 1973년 12월 현위치로 .. 2012. 8. 21. 상촌 김자수(1351-1413) 선생의 효자비가 있는 안동 추원재 추원재 경주김씨(상촌 김자수) 명 칭 : 경주김씨 추원재(慶州金氏 追遠齋)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안기동 산101-1 (원소재지 : 안동군 월곡면 노산리) 건 축 주 : 김자수(金自粹, 1351~1413) 이건시기 : 1973년 소 유 자 : 김봉재(관리자 : 김봉재) 문 화 재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호,1973년 8월 31일 지정,1동 건축 배경 이 건물은 고려 말 충신이며 효자인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1351~1413)의 어머니인 일직 손씨의 묘소 아래에 있던 재사다. 묘소가 있던 곳을 시묘골이라 하니, 상촌 김자수가 어머니 손씨 부인의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한 데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원래 추원재는 월곡면 노산리 마을 어귀의 오로봉 기슭에 있었다. 상촌의 정효비각이 거리를 두.. 2012. 8. 21. 고려의 멸망에 비관, 형조판서도 거절한 충신 김자수 "두 임금을 섬기느니 죽음을 택하리라" 고려의 멸망에 비관, 형조판서도 거절 강인호 기자 kai76@kocus.com [광주] "내 평생에 충효에 뜻을 두고 스스로 격려하였거늘 지금 태종에게 굴복하면 이것은 의리가 아니라 지하에 가서 선왕과 부모를 어찌 대하랴. 내가 죽을 때가 왔으니 아들은 수의와 장례기구를 마련해 배종케 하라"이후 수일만에 광주에 도착해 말에서 내린 김자수 선생은 "포은의 묘소가 있는 곳이니 내가 죽을 땅은 이 곳이다. 여자도 불경이부 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두 성의 왕을 어찌 섬길 수 있으랴, 나는 이 곳에서 죽겠다""이곳에 매장하고 행적을 금석(金石)에 새기지 말며 나무뿌리 썩듯이 내버려 두어서 널리 알리지 않도록 하라. 널리 알리게 되면 무인 투성이인 신조정에서 자손들에까지 .. 2012. 8. 20. 고려충신 상촌 김자수 선생은 성리학자 고려충신 상촌 김자수 선생은 충효를 실천한 성리학자로서 고려말 형조판서로 재직시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고려의 망함을 한탄하다가 광주 추령에서 자결한 충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촌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등과 함께 고려말의 뛰어난 학문으로서 예의 진호집설이라는 역서를 냄으로써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조선조의 성리학을 도입한 학자로 알고 있습니다. 이분은 장원급제를 하였고, 경상도 안동에서 태어나 그 어머니가 죽었을때 벼슬을 버리고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산에서 움막을 치고 지냄으로써 왕은 문익점을 시켜 시묘살이의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고, 삼강행실록에 상촌 김자수의 효행을 오르게 함으로써 안동지역의 성리학의 대학자로 이름나게 됩니다. 상촌은 정언 벼슬에 있을 때, 왕의 부.. 2012. 8. 18.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