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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한국의 옛집60

[함성호의 옛집 읽기]<15>‘시간의 집’ 황룡사지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사적제6호)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삼국시대 신라의 제24대 진흥왕 당시 창건한 사찰터로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이 절은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과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의 하나로서 규모나 사격(寺格)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그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553년(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았는데, 이는 신라인이 염원하는 불국토(佛國土)가 먼 곳이 아닌 신라 땅이라는 자각과 관련된 것.. 2012. 3. 16.
[함성호의 옛집 읽기]<14>‘못생긴 땅에 지은 집’ 수졸당 수졸당(守拙堂:국가민속문화재 제78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에 있는 조선 중기의 학자 이언적(李彦迪)의 손자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의 호를 따서 지은 집으로 1616년(광해군 8)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동만가옥의 건너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一자형 사랑채, ㄱ자형 안채, 一자형 아래채가 연이어져 전체적으로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동남향한 一자형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서남쪽부터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사랑방을 두고, 사랑방 앞에는 반 칸 폭의 개방된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방 옆 동남쪽은 대문간으로서 이 대문간 옆에 작은 사랑방 한 칸을 두어 서남쪽 안마당 쪽으로 길게 면한 아래채와 연결시켰다. 작은사랑방과 아래채 사이에는 작.. 2012. 3. 16.
[함성호의 옛집 읽기]<13>‘단순속의 복잡함’ 심수정 심수정(心水亭:국가민속문화재 제81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에 있으며 여강 이씨(驪江李氏) 문중에서 1560년경에 세웠는데, 화재로 소실되어 1917년경에 본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勿자형 마을의 오른쪽 산등성이에 ㄱ자형 행랑채와 함께 자리 잡은 이 정자는 ㄱ자형 평면으로 흡사 양반집의 별당채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정자는 남북축상에 ㄱ자형 평면의 중심 대각선을 일치시키고 있어서 한쪽은 서남향을 하고 있고, 한쪽은 동남향을 하고 있다. 동북향으로 정자를 바라볼 때 왼쪽 끝에서부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사랑방이 있다. 방 앞에는 반 칸 폭의 개방된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대청 정면에는 ‘심수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청 쪽의 불발기창호 위에는 .. 2012. 3. 16.
[함성호의 옛집 읽기]<12>‘균제미 속 자유’ 관가정 관가정(觀稼亭:보물제422호) 관가정은 우재 손중돈의 살림집이자 지금은 서백당으로 옮겼지만 월성 손씨의 종가였다. 이름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이다. 집에서 보면 과연 그렇다. 물봉에서 호명산을 바라보게끔 지어진 집은 그 오른쪽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안강 들판이 그대로 보인다. 복잡한 여느 동네 반가의 형이상학적 이름과는 사뭇 다르게 간단하다. 집의 평면도 꼴로 보면 딱 맞게 좌우 대칭이다. 안채에 세 칸의 넓은 대청이 있고, 안방과 사랑채 사이에 또 마루가 있으며, 사랑채에서 안강 들판 쪽으로 넓은 마루가 또 있다. 이 마루는 현재 한 칸은 안방용 마루고, 한 칸은 광으로 사용된다. 마루가 이렇게 많은 것은 대종가로서 잦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손중돈은 차남이었지만 당시의 .. 2012. 3. 16.
[함성호의 옛집 읽기]<11>양동마을 서백당 서백당(書百堂:국가민속문화재 제23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에 있는 조선전기 경주손씨 양민공 손소 관련 주택으로 ‘서백당(書百堂)’이라고도 불리며, 입향조(入鄕祖)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가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손소가 처가에 살다가 이 집을 짓고 분가하였다고도 전한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과 그의 외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손소는 청송부(靑松府)의 속현인 안덕현(安德縣)에서 태어나, 25세인 1457년(세조 3)에 풍덕류씨(豊德柳氏)류복하(柳復河)의 사위로 양동에 정착하였다. 이 때 송첨을 지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양동으로 들어온 뒤 처음에는 처가에서 살다가 4.. 2012. 3. 16.
[함성호의 옛집 읽기]<10>‘한국건축의 메카’ 양동마을 경주 양동마을(중요민속자료 제189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민속마을로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한 이래 지금까지 대대로 살아온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가 양대문벌을 이루어 그들의 동족집단마을로 계승하여 왔다. 먼저 입향한 손씨는 이씨의 외가로서, 손·이 양씨는 지금까지도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마을의 대소사에 협동해오고 있는데, 이따금 갈등과 분쟁을 야기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은 경주시내에서 동북방으로 16㎞쯤 떨어져 있으며 넓은 평야에 임한 거꾸로 勿자형 산곡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을 서남방 역수(逆水)로 안은 지형이다. 이 역수 지형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의 원천이라 믿어지고 있다. 마을의 서편에는 실제로 부의 상징인 넓은 평야.. 2012. 3. 16.
[함성호의 옛집 읽기]<9>‘영남 정자의 전형’ 독락당 계정 독락당 계정(獨樂堂溪亭:보물 제413호) 독락당(獨樂堂)은 이언적이 한때 살았던 집으로,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안쪽 계곡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중종 27년(1532년) 불혹의 나이에 중앙 정치무대에서 쫓겨난 이언적은 둘째 부인이 사는 이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원래는 태어나고 자란 양동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맞겠으나,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보이기 싫었던 때문이었겠지요. 당시 이곳에는 둘째 부인이 지은 안채와 숨방채, 그리고 아버지가 지은 작은 정자가 있었습니다. 이언적은 사랑채인 독락당을 지으면서 이곳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증축하여 중앙 정계로 복귀할 때까지 7년간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그는 조선 종중대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였.. 2012. 3. 16.
[함성호의 옛집 읽기]<8>‘호남 정자의 원형’ 면앙정 면양정(俛仰亭: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에 있는 조선전기 문신 송순이 건립한 팔작지붕 형태의 누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신(侍臣)이었던 송순(宋純)이 만년에 벼슬을 떠나 후학들을 가르치며 한가롭게 여생을 지냈던 곳이다. 송순은 41세가 되던 1533년(중종 28)에 잠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이 정자를 짓고, 「면앙정삼언가(俛仰亭三言歌)」를 지어 정자이름과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한다. 그러나 그 정자는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으로 파괴되고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1654년(효종 5)에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동남향하고 있으며, 한가운데에 한 칸 넓이의 방이 꾸며져 있다. 기둥은 방주(方柱)를 사용하였으며 주두(柱.. 2012. 3. 16.
[함성호의 옛집 읽기]<7>‘붉은 겹의 구조’ 명옥헌 명옥헌(鳴玉軒)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에 있는 조선후기 오이정이 조성한 명옥헌은 오이정(吳以井)이 아버지가 평소 자연을 즐기던 호봉산(瓠峯山) 기슭의 계류가에 터를 잡아 명옥헌을 짓고, 아래위에 못을 파 꽃나무를 심어 가꾼 것이 오늘날 전하는 명옥헌정원의 시작이라고 한다. 정철(鄭澈)의 넷째아들 정홍명(鄭弘溟)이 지은 〈명옥헌기 鳴玉軒記〉가 전하고 있으며, 계류가 바위에는 송시열(宋時烈)이 썼다고 하는 ‘鳴玉軒癸酉(명옥헌계유)’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명옥헌 뒤 언덕에는 1825년(순조 25)에 창건되고 1868년(고종 5)에 철폐된 도장사(道藏祠)터가 있는데, 현재 명옥헌에는 명옥헌이라 새겨진 현판은 없어졌고 ‘道藏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12. 3. 16.